우치다 타츠루는 스승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제론’, ‘타자론’, ‘에로스론’ 등을 해설한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청각과 시각의 근원적인 지향적 차이를 날카롭게 자각’했다는 유대교적 사고에 대해 논했다.

타츠루에 의하면 신의 모습을 조형적으로 본뜨는 것은 신의 타자성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다.

반면 신에게 말을 붙이는 것은 소통의 의미를 지닌 것 즉 신의 절대성에 대한 훼손과 무관한 긍정적 현상이다.(138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고대 근동(近東)과 히브리적 사유에서 말이 가진 위상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앗시리아나 바빌론 등 고대 근동에서 신적인 말은 비길 데 없이 역동적인 힘을 가졌다.

반면 구약 성서에 표현된 야훼의 말은 자연력(自然力)이 아니라 언제나 의식적이며 윤리적이고 인격적이었다.

물론 고대 근동의 신적인 말을 상기시키는 신의 말이 소개된 구약 성서 구절들이 일부 있는 것도 사실이다.(토를라이프 보만 지음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70, 73 페이지)

보만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에게 특징적인 것은 그들의 말은 작용한다는 것이고 그리스인들에게 특징적인 것은 말이 있다는 것이다.

보만에 의하면 그리스인의 자명한 전제는 세계 안에 있는 사물들과 그 유동 과정 자체 안에서 로고스가 원초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법칙을 지배하는 바 이 법칙이 인간의 로고스 안에서 인식과 이해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한다.(82 페이지)

나는 ‘혼돈이 묘비명이 될 것(King Crimson의 ‘Confusion will be my epitaph’)이라는 가사를 ‘고백이 묘비명이 될 것(‘Confession will be my epitaph’)이란 다짐으로 고쳐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제 그런 내가 그에 합당한 분과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내 주도로 그 시간은 일상 이야기 7대 인문적 사유 3의 비율로 채색되었다.

다섯 시간의 동석(同席)을 마치고 귀가하며 나는 르네 마그리트와 반 고흐를 생각했다.

마그리트와 고흐가 트라우마에 대처한 방식은 다르다.

마그리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로 갖게 된 트라우마를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반면 고흐는 일상적인 처리로 트라우마에 대처했다.

이성과 감성의 관계가 그렇듯 일상과 이론 역시 적절하게 균형이 맞춰져야 한다.

7대 3이라면 괜찮은 것이 아닌지? 긴 동석을 가능하게 해준 분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다시 새로우면서도 연속성을 가진 고백을 위해 시를 읽고 인문서를 읽고 문화해설 공부에 몰두해야 하리라.

물론 여행까지 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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