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역사지리학자와 함께 떠나는 걷기여행 특강 1
이현군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시간을 그 자체로 느끼지 못한다. 공간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시간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의 저자 이현균은 장소에 남아 있는 시간의 흔적을 보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역사지리 답사라 말한다.

그의 말을 듣고 흔적의 의미를 생각한다. 저자는 역사는 계속 상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기에 어떤 면에서는 공허한 반면 지리 답사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저자에 의하면 답사는 두 가지로 나뉜다. 책에서 본 내용을 확인하는 것과 장소 자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접하는 것이다.

저자는 문화를 인간이 자연에 변화를 주는 것, 인간이 자연에 어떻게 그리고 왜 손을 댔는지를 찾는 문제로 설명한다.(12, 13 페이지) 문화사는 결국 왕조사, 시대사, 연대기별 역사 해석과는 다른 새로운 접근 수단이 될 것이다. 답사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가 하는 말에 귀기울이는 것이다.(15 페이지)

답사의 첫 걸음은 스스로 답사 경로를 짜는 것이다. 저자가 권장하는 답사는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을 발견하는 방식이다. 답사하는 과정에서 현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고대까지 자연스럽게 접하는 방식이다.(16 페이지)

저자는 개별 장소보다 도시나 지역 전체를 조망하는 경로를 짜볼 것을 추천한다. 전체를 조망한 후에는 지역의 범위를 나누어 소규모 지역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산을 중심으로 한 답사, 하천을 따라 걷는 답사,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적합한 장소를 찾는 답사를 추천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도성을 쌓은 기준에 대해 서술된 부분이 있다. 조선 초 한양 정도(定都) 후 어디에 성곽을 쌓을까를 고민하고 있던 터에 어느 겨울날 눈이 녹은 쪽과 녹지 않은 쪽이 선명하게 나눠진 것을 보고 그것을 하늘의 계시로 보고 그 경계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한다.

기준이 된 산은 백악(북악), 인왕, 목멱(남산), 타락(낙산) 등이다.(대학로 뒤쪽의 나지막한 산이 낙산이다.) 저자는 좌향(坐向)이란 개념을 이야기한다. 내가 앉아 있는 쪽이 좌(坐), 바라보는 쪽이 향(向)이다.(31 페이지)

진산(鎭山)은 진호(鎭護)하다는 의미 즉 마을 뒤에 진을 치고 있어 그 지역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31 페이지)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는 1장 조선의 심장부, 궁궐과 종로 답사, 2장 서울을 가르는 물길 청계천 답사, 3부 한양 읽기의 하이라이트, 도성 답사, 4부 성문 밖 이야기로 구성된 책이다.

저자는 도성(都城)은 군사적으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지녔었다고 말한다.(4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궁(宮)은 왕이 사는 곳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국왕이 즉위 전에 살던 집, 왕위를 물려준 은퇴한 왕이 살던 곳, 국왕의 생모가 살던 곳, 왕과 왕세자의 결혼식 때 신부를 맞이하던 집 등이 모두 궁으로 불렸다.(49 페이지)

종로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이어주는 중심축이다. 교보빌딩 동쪽 출입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종각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혜정교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다.(64 페이지) 이 다리는 중학천 위에 놓였던 다리로 탐관오리들을 공개처형하던 곳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주례'의 '고공기'를 참조해 도성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71 페이지)

저자는 한양의 경우 남대문과 북대문이 마주하지도 않고 경복궁에서 남대문으로 나가는 길이 일직선이 아닌 사실 등을 들어 조선이 '주례'의 '고공기'를 받아들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72 페이지)

개천(開川)이라 불렸던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조선왕조실록과 옛 지도에는 청계천이란 말이 없다. 백악, 목멱, 인왕산 계곡의 물이 모두 모여 개천이 된 것이니 지금 복원된 하천은 개천의 극히 일부이다.(82 페이지) 개천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문이 오간수문이다. 개천의 최상류는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이다.(82 페이지)

삼일교에서 동쪽을 보면 수표교가 있다.(94 페이지) 그런데 이 자리는 조선시대 수표교가 있던 곳이 아니다.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 2가에 있었는데 1959년 복개공사 때 지금의 장충단 공원 입구쪽으로 옮겨졌다.

세종이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석을 세워 수표교라 불리게 되었고 영희전을 다녀오던 숙종이 장희빈을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도성 안을 나누는 기준선은 종로와 청계천이다. 종로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한 도로이고 청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니 종로와 청계천에 의해 도성 안이 남북으로 양분된다.(105 페이지)

종종 북촌과 남촌의 구분선을 두고 종로다, 청계천이다 논쟁하는데 실제로 걸어보면 몇 분 걸리지 않는 곳이니 큰 의미가 없다. 종로와 청계천에 의해 남북으로 양분되는 도성의 북쪽 동네를 북촌, 남쪽 동네를 남촌이라 한다. 북촌, 남촌 등의 말은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다.(106 페이지)

저자는 숭유억불의 조선의 정체성을 거론하며 조계사는 어떻게 도심 한복판에 있는지를 묻는다. 답은 조계사는 일제 강점기에 세워졌다는 것이다.(113 페이지) 인사동 부근의 옛 지명은 관인방(寬仁坊)이다. 현재의 인사동(仁寺洞은 관인방의 인(仁)과 사동(寺洞)의 사(寺)를 합쳐 만든 지명이다.(113 페이지)

경복궁 동쪽에 팔판동(八判洞)이 있다. 여덟 명의 판서가 배출된 동네라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임용시험이 아니었다. 과거시험과 실직(實職; 실제 벼슬)을 얻는 것은 별개였다.(115 페이지) 조선시대에는 북촌이 높은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었고 남산에는 딸깍발이 선비들이 살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북촌은 조선시대 양반세력이 강해서 일본인들이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남촌 쪽을 노렸다. 을지로와 명동 쪽에 근거지를 확보한 것이다.(119 페이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창의문, 인왕산과 남산 사이에 서대문, 서소문, 남대문이 있다.(126 페이지)

남산과 낙산(대학로 뒤쪽의 나지막한 산) 사이에 광희문과 동대문, 낙산과 북악산 사이에 혜화문이 있다.(126 페이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이후에도 백악을 주산으로 할 것인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무학대사의 인왕산 주산론, 정도전의 백악산 주산론이 그것이다. 정도전의 견해가 받아들여졌는데 왕은 남면(南面)해야 한다는 논리가 이긴 것이다. 강북삼성병원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정동(貞洞)이 나온다. 태조(이성계)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태종(이방원)이 즉위한 후 이 능을 지금의 정릉(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정동은 덕수궁의 서쪽에 해당한다. 북한산은 진산, 북악산은 주산, 남산은 안산(案山), 관악산은 조산(朝山)이다.(159 페이지) 조선시대의 금산(禁山)은 현재의 그린벨트에 해당한다.(178 페이지)

도성 안이 유학 이념과 도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들 즉 종묘, 사직, 궁궐 등이 배치된 계획된 공간이라면 도성 밖은 실생활의 공간이다.(193 페이지) 도성 안 사람들이 지배층에 해당한다면 성 밖 사람들은 피지배층이다. 성 밖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196 페이지)

저자는 역사지리학의 궁극적 목표는 현재와 미래를 보는 것이라 말한다.(212 페이지) 저자는 조선시대 한양이 현재 서울과 다른 도시이듯 21세기의 서울은 20세기의 서울과 다른 도시가 되지 않을까? 라고 말한다.(220 페이지)

미래는 현재가 가진 현실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저자는 미래를 생각할 때 시간의 관점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 공간과 장소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보길 바란다는 말을 전한다.(22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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