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북이 글감의 단서들이 펄럭이는 광장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최근 이런 내 생각을 확인하게 하는 글을 두 편 읽었다.

하나는 며칠 전 읽은 다수 한국 교회의 블랙리스트란 글로 오래 전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저자도 있어 흥미를 가지고 읽었다.

칼 바르트는 만유구원론 자유주의자이고 위르겐 몰트만은 삼신론이란 이단론을 펼친 신학자라는 것이고,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이기도 한 C.S 루이스는 진화론자이고 존 스토트는 영혼멸절설을 믿는 지옥불신자이고 레슬리 뉴비긴은 세계교회협의회인 WCC에 속한 다원주의자이고,

톰 라이트는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거부하는 신학자 즉 반펠라기우스주의자이고 헨리 나우웬은 가톨릭 이단 및 동성애 지지자이고 유진 피터슨은 동성애 지지자라는 것이다.

이 글을 올린 목회자는 이단으로 찍힌 저 신학자들을 좋아하는 자신은 무엇인가란 물음과 함께 이제 마녀사냥은 더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을 더했다.

언급된 저 신학자들은 분야가 다르지만 나로 하여금 현상을 다르게 보게 해주는 스승들인 셈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글들(한 게시글에 달린 세 건의 댓글이기에 글들이라 표현)은 어제 읽은 신학서적 표절반대 그룹에 오른 표절에 대한 글이다.

결국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박사 논문을 쓰다가 포기한 이유 중 하나가 도저히 새 것으로 300 페이지를 채울 재주가 없어서 하루 종일 단 한, 두 줄 쓰다가 그냥 과감하게 접었다는 것,

새로운 내용을 주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올 때는 형식에 무관하게 무조건 인용을 표시하거나 출처를 밝혀야 한다는 것, 앞선 사람의 글을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연구가 성실하지 못했다는 증거라는 이야기 등이다.

나의 경우 문화해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표절 여부를 떠나 나만의 것을 추구하다 보니 꽤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가령 경복궁 외전 해설을 할 때 ‘근정전 - 천추전 - 사정전‘이나 ‘근정전 - 사정전- 천추전‘이 아닌 ‘사정전- 천추전- 근정전‘ 코스를 택한 것은 정전에 비해 작은(또는 격이 낮은) 편전에서 보조 편전을 거쳐 앞면 5칸, 측면 5칸의 압도적인 정전을 발단 -전개(반복) - 상승의 고전 음악의 소나타 형식에 견주어 설명하려 한 결과이다.

창덕궁에서는 금천교의 대칭인 두 개의 무지개 다리를 설명하며 날개가 대칭인 나비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의 이론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익숙한 것이 선호되는 곳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용도로 쓰일 여지는 언제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도강도강도강(都講盜講渡江)이란 말(김상봉, 도정일, 한홍구 등 지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27 페이지)을 들으니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도강도강도강(都講盜講度江)이란 도(都)정일 교수의 강의를 몰래 듣고<盜講> 강을 건넌다는 말이다.(‘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27 페이지)

1980년대 초반 문학사상사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마르크스, 레닌, 알튀세르를 거침 없이 언급했으니 몰래 들었다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어떻든 강을 건넌다는 말을 들으니 부처의 비유가 떠오른다. 부처의 설법 중 강을 건너는 것에 관한 비유가 있다.

붓다는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강을 건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세계로 나아갔음을 비유한다.학문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인식의 경지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내가 처음 접한 도정일 교수의 책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이다. 1994년 나온 책이니 많은 세월이 흘렀다. 당시 책을 읽으며 설렜던 기억이 23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생생하다. 예리하고 깊으면서 넓기까지 한 안목이 빛나는 책이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이다.

'압구정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란 글이 대표적인데 문학적으로 상당히 세련된 데다가 비판이론의 세례를 받은 내공이 역력한 글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압구정을 자본주의 실천 30년 끝에 이룩한 계급문화의 천국,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모순이 남김 없이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모순의 디스토피아로 정의했다.(261 페이지)

망각은 즐거운 것일 수 있지만 거기 죽음이 있고 기억은 고통스러우나 거기에 즐거움이 있기에 인간의 서사문화가 지속되어 온 것이라는 진단(174 페이지)도 인상적이다. 가장 인상적이며 중요한 메시지는 상징제의에 관한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상징제의는 현실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고 그 누구도 다치지 않으면서 수행되는 전쟁, 현실적 영향이 없으므로 마음 놓고 몰입하는 싸움, 그러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족감의 공급을 받으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전쟁을 종이 위에서 전개하는 대리전쟁이다.(284 페이지)

저자가 상징제의로 규정한 것은 보통의 독자들은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용어와 개념으로 가득찬 비평이론서들이 활기를 띠는 현실이다. 문제는, 그리고 관건은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잃지 않는 것)이다. 어렵지 않은 것이어도 현재의 우리에 어떤 유의미한 점도 주지 못한다면 상징제의(에 드는 것)이 아닐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심리지리학(psychogeography)은 신경과학과 건축, 환경 설계 등을 접목시킨 학문이다. 이 과목을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플라뇌르(flaneur) 개념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설명한 글을 읽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빠리에서 일어난 근대화 현상을 지켜보는 자들을 지칭하던 플라뇌르는 산책자 또는 만보자(漫步者)를 뜻한다.

산책자, 하면 니체가 생각난다. 하지만 대립항으로 설정해 설명할 사람이 있으니 루소와 보들레르이다.

루소는 자연을 산책하는 몽상가였고 보들레르는 유행의 물결과 도시의 거리를 산책하는 몽상가였다.(김상환 지음 ‘해체론 시대의 철학’ 359 페이지)

보들레르는 죽음을, 저녁때까지 걸어갈 용기를 주는 것으로 표현(‘악의 꽃’ 수록 ‘가난뱅이들의 죽음’에서)했다.

심리지리학의 선구자인 콜린 엘러드는 도시를 걸으며 즐기도록 하는 것은 새로움과 감각적 흥미라고 말한다.(‘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 177 페이지)

그에 의하면 어느 정도의 권태는 불가피한 것이고 우리를 창조성으로 이끄는 건강한 것이지만 감각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타고난 욕구를 무시하도록 설계된 거리 풍경과 건물은 새로움과 감각을 추구하는 진화적 충동을 거스를 뿐 아니라 미래의 인간에게도 편안함이나 행복, 최적의 기능성을 안겨주지 못할 것이다.

어제 경복궁 시연에서 나는 동선(動線) 설정은 물론 내용도 새로워서 좋았다는 평을 들었다.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미를 음미하게 하면서도 재미를 느끼게 하고 추구하는 새로움이 거품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의미하는 방배동 서초대로의 초기 불교 수행 센터 제따와나(jetavana) 선원(禪院)에 한 번 갔다. 윤종국 교수의 ‘시공간 속의 생멸과 현대물리학' 강연을 들으러 갔던 것으로 지난 2009년 여름의 일이다. 불교 사찰에서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는 이 강연은 2009년 6월 선원 개원 기념으로 개최한 강연이었다. 불교가 수학 또는 물리학과 연관이 큰 종교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겠다.

 

그 강연 이후 제따와나에 가지 못한 것은 수행보다 이론을 좋아하는 내가 걷게 된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기원정사는 부처께서 가장 오래 설법을 한 곳이고 당시 최대의 불교 사찰이었다.

그러다가 지난 금요일 서초구 방배동 효령로(孝寧路)의 한 빌딩에 가는 길에 주택가에 자리한 그 선원을 보았다. 장소를 옮긴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곳인 줄은 몰랐다.

효령로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墓)와 사당인 청권사(淸權祠)가 있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서초대로 세일빌딩에 있을 때는 공간적으로 여유가 꽤 있었는데 아쉽게도 지난 금요일 본 제따와나는 공간적 여유가 부족해 보였다. 제따와나는 제따 숲을 의미하지만 나에게는 ’제따’ and ’나(我)‘로 들린다.

 

방배동이란 이름은 우면산(牛眠山; 서울 서초구, 경기도 과천시 경계에 있는 293m 높이의 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에서 방배라고도 하고 마을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 모서리라는 뜻에서 방배라고도 한다.

 

방(方)이란 단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란 뜻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단어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종묘(宗廟), 사직(社稷) 등이 있지만 천자의 나라를 자처한 중국은 종묘와 사직 외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단인 환구(圜丘)와 땅에 제사지내는 제단인 방택(方澤)이 더 있었다.

 

위계 서열로는 환구, 방택, 종묘, 사직 순이다. 우리의 경우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을 두었다. 물론 고려 시대에도 있었다.(환구단은 원구단圜丘壇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환구단은 일본에 의해 파괴되었다. 1996년 우리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그 이후 경복궁을 복원했지만 궁궐 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환구단은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이 임금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왕실 선조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私的)인 성격을 갖는 종묘보다 더 중요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종묘가 더 중시된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일까?(인간은 땅이 없으면 거처할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굶어죽는다.)

 

환구(圜丘..환圜은 두를 환, 둥글 원자이다.)는 서열상 가장 높지만 하늘의 후손이란 개념 규정이 애매해 환구단이 복원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방(方)은 방편이란 말을 생각하게 한다. 차제설법(次第說法), 대기설법(對機說法) 등과 맥락이 같다. 듣는 사람의 내공이나 수준에 맞게 비유를 들어 설법하는 것을 이른다.

 

비유 없이 설법(또는 설명)할 수 없기에 비유 또는 은유(隱喩)는 양(量)이 많고 적고의 문제이다.

 

얼마 전 사찰 음식 전문 식당인 마지가 방배동에서 종로구 자하문로로 옮겨왔다. 내 주요 유행처(遊行處)인 종로 입성(入城)이 반갑다. 제따와나도 그렇게 된다면 참 좋겠다. 영약(靈藥)과 신단(神丹)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maghi에서 유래한 마지(摩旨.. 갈 마, 맛있을 지)에서는 불교 강연과 행사도 열리니 금상첨화이다.

 

궁궐, 박물관, 서점, 미술관,도서관 등 종로에 자리한 나의 유행처(遊行處)가 한결 알차졌음을 감사한다.(유행遊行은 각처로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불교 용어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행遊行은 만행萬行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아, 부지런히 배워야 하는 나...열매는 먹기 좋은 것이기에 앞서 思惟하기에 좋은 것이라 말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사숙(私淑) 제자인 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2년 서른 여섯의 나이로 타계한 시인 여림. 나는 1999년 신춘문예 당선 시인인 그를 이름으로 알지 못한 대신 가끔 그의 시를 알았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최측의 농간(출판사)에서 보내준 그의 유고 시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에 수록된 한 편의 시 때문인데 그것은 ‘1999년 2월 3일 아침 0시 40분’이란 시이다.

2월 3일이면 신춘문예 당선 이후겠는데 이 시에서 시인은 “...힘이 든다/ 여지껏 시와 내가 지녀왔던 경계심, 혹은 긴장감들이/ 한꺼번에 용해되면서 나는 밤낮으로 죽지 않을 만큼만 술/을 먹었고 그 술에 아팠다/ 생각해 보라/ 35년을 아니, 거기에서 10년을 뺀 나머지의 생애를 한/ 사람이 시로 인해서 피폐해 갔다”는 말을 한다.

신춘문예 당선으로 경계심 또는 긴장감이 용해되는 것은 어떤 류(類)의 것일까? 어떻든 ‘1999년 2월 3일 아침 0시 40분’이란 시는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의 한 구절을 생각하게 한다.

“....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란 구절이 있는 윤동주 시인의 시.

시대가 다르고 고뇌의 성격이 다르지만 아픔은 아픔이라 말하는 것은 굳이 두 시에 모두 나이를 지칭하는 숫자(이십사 년 일 개월 vs 35년, 거기에서 10년을 뺀 나머지의 생애)가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말하자면 여림 시인의 법랍(法臘: 원래 뜻은 출가하여 승려가 된 해부터 세는 나이) 즉 (대부분) 무명 시인으로, 그리고 신춘문예 당선으로 맞은 짧은 환희를 맛본 시인으로서의 삶은 25년인 셈이다.

어제 나는 폭염 속에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경복궁으로, 정독도서관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걷기의 양이 갑자기 늘어 지치고 아픈 가운데 중요한 서류작업을 위해 간 정독행은 헛걸음이 되고 말았다. 일정을 확인하지 않은 탓이다.

어제의 헛걸음으로 나는 여림 시인의 절망을 잠시 내 것인 듯 여겼다. 나이도 다르고 등정(登程: 오르는 길)도 다르고 등정(登頂)도 경험하지 못한 나의 오만이 부끄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