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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본 고려 - 승자의 역사를 뒤집는 조선 역사가들의 고려 열전
박종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12월
평점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언젠가 허실이 밝혀질 때가 있다. 30년 넘게 고려사 연구에 천착해온 역사학자 박종기의 책 ‘조선이 본 고려’는 그런 사례들을 모은 책이다. 조선이 본 고려라는 말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조선이 고려 역사를 편찬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저자는 고려와 조선, 현대를 오가며 인물 비평을 시도했다. 책은 태조 왕건, 광종, 인종 등을 다룬 1부 고려 전기 인물론, 의종, 이공승, 명종, 조위총 등을 다룬 2부 무신정권기 인물론, 정세운·안우·이방실, 최영, 이숭인, 권근 등을 다룬 3부 고려 후기 인물론, 이색, 정도전, 우왕, 창왕 등을 다룬 4부 폐가입진론에 연루된 인물론, 최치원, 김득배, 길재, 원천석 등을 다룬 5부 조선에서 부활한 고려 인물론 및 조선 역사가들의 ‘고려 열전’, 그 특징과 의미라는 맺음말로 구성되었다.
우선 이 책은 고려의 4 임금(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16 공신(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배현경, 홍유/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조충, 김취려/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모신 숭의전이 있는 연천에 사는 사람으로서 관련된 새 지식을 얻을 수 있어서 유용하게 읽힌 책이다. 새 지식이란 김득배가 성호 이익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 폐가입진론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있다는 점 등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폐가입진론은 우왕,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데에 근거해 가짜 왕인 그들을 폐하고 진짜 왕인 공양왕을 세운다는 논리다. 공양왕은 신종(神宗)의 7대손이다. 폐가입진론은 조선 건국의 명분이 되었다.
이 내용이 반영된 고려사, 고려사절요 이후 300년이 지나서야 이 승자의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는 성호 이익 및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 등에게서 나온 목소리를 말한다. 조선의 역사가들은 사대교린이라는 대외관계가 타당하다는 전제하에 고려사를 평가했다. 이익은 다소 복합적이다. 폐가입진론을 문제시한 이익은 거란과 단교를 한 태조 왕건에 대해서는 잘못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성종,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초래했다고 평가했고 금나라와 선린관계를 유지한 인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제현은 인재(人才)를 등용할 때 친소(親疏)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입현무방(立賢無方)을 내세운 광종의 인재등용이 현실에서 취지가 많이 상실되었고 광종이 실시한 과거제도가 겉치레의 문장을 숭상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지적했다.(이제현은 고려 말의 역사학자이다. 이제현을 포함시킨 것은 조선이 본 고려라는 제목과 맞지 않지만 참고 삼을 만하다.)
이익은 인종은 사대(事大)에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했으니 마땅히 숭의전에 모셔 제사해야 했다고 결론지었다. 이익은 고려가 475년간 유지된 원동력을 사대교린 정책에서 찾았다. 묘청의 난, 이자겸의 난이 일어난 당대의 임금인 인종은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스스로 신하라 자처하는 칭신(稱臣)의 사대관계를 맺었다. 무신정변을 초래한 의종은 자신의 덕과 총명함이 요순 임금과 같으며 유사 이래 자기 대(代) 만큼 평화로운 시대가 없었다고 자평했다. 조선 역사가들은 의종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의종은 유교가 아닌 풍수지리, 불교, 도교 등 고려의 전통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웠다. 의종은 자기 유모의 남편이자 환관인 정함을 관료로 임명하려 했다. 의종은 신료들의 서명을 요구했다. 이공승은 처음 서명했다가 후에 번복하고 임명에 반대했다. 이익은 이공승이 처음의 잘못을 뉘우쳐 입장을 번복한 사실에 주목했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을 논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나 사건을 오로지 선과 악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포폄(褒貶)론과 공과 과를 두루 고려하는 공과(功過)론이다. 이익은 공과론을 채택했다.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조선 전기 역사가들은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명종을 철류(綴旒) 같은 존재로 평했다. 철류란 깃대나 면류관에 매달린 끈을 말하는 것으로 철류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부림을 당한다는 의미다. 현대 역사가들은 무신정권 초기 명종 때 왕권이 이전에 비해 무력했지만 명종이 대외교섭, 인사권, 과거제 운영의 주체로서 어느 정도 왕권을 보장받았다고 평가한다.(84 페이지)
이익은 명종이 무력한 군주였지만 의종이 시해되었을 때 바로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에 대해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서경 유수 조위총(趙位寵)은 명종 재위시 무신 정권에 불만을 가진 서북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업고 봉기(蜂起)를 일으켰다. 벌 봉(蜂), 일어날 기(起)를 쓰는 봉기는 벌떼처럼 무리지어 세차게 일어난다는 말이다. 당시 조위총의 위(位)에서 사람인 변을 뺀 입(立)과 총(寵)에서 갓머리 변을 뺀 룡(龍)을 합치면 입룡(立龍)이 된다는 말이 나돌았다. 왕을 세운다는 의미다. 이에 사람과 머리가 없어진 용은 죽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흥미롭지만 실제하는 것이 아닌 글자에서 부수를 빼서 어떤 메시지를 반들어 전하는 것은 관념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정세운과 김용, 안우, 이방실, 김득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정세운과 김용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머물던 시절부터 공민왕의 측근으로서 정치적 행보를 같이했다. 그런데 김용이 정세운을 살해했다. 홍건적 침입으로 인한 위상 변화가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김용은 총병관으로 개경 방어에 실패했고, 정세운은 개경을 수복한 공신이었다. 김용이 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꾀어(조서를 꾸며) 정세운을 살해했다. 김용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제거했고 개경 수복 후 왕이 임시로 머물던 흥왕사에 침입해 왕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이익은 최영이 요동 정벌을 계획해 이성계를 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그에게 책임을 전가해 제거하려고 했다고 썼다. 이른바 촤영 음모론으로서 이는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우리 영토를 잠식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우왕과 최영이 주도하여 요동 정벌을 단행한 것이라는 학계의 연구성과와 아주 다른 견해다. 도은(陶隱) 이숭인의 행보를 놓고 간관(諫官)과 양촌 권근(權近)이 벌인 설전은 흥미롭다. 모친 상중에 이숭인이 과거 시험관을 맡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간관은 부모상으로 3년이 지나지 않으면 고시관을 맡을 수 없다고 했고 권근은 생전에 자신이 고시관이 되는 것을 보려한 늙은 아버지를 위해 고시관을 맡았다고 했다.
당시 문반의 최고위직 판문하부사로 있던 목은 이색은 이숭인과 권근이 처벌을 받자 사직하고 장단(長湍)으로 낙향했다. 반개혁파를 제거하려는 이성계 세력의 정치적 음모를 간파한 결과였다. 이색은 명나라의 힘을 빌려 창왕의 위상을 높여 이성계와 개혁파를 견제하려 했지만 명나라 황제가 거부해 도리어 개혁파의 의심과 불신을 받았다. 개혁파에 의해 왕이 된 공양왕은 개혁파를 제거하기 위해 장단에 물러가 있던 이색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이는 이색에 대한 정치적 공세가 앞당겨진 계기가 되었다. 이색은 이인임이 신씨(우왕)를 옹립할 때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단에 유배되었다. 이긍익은 이색이 창왕 즉위 시 전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 한 것은 당시까지 우왕이 신씨라는 주장이 없었고, 우왕이 신씨라는 이유로 폐위된 것이 아님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정도전은 스승인 이색의 처형을 주장했다. 신씨를 왕으로 옹립해 왕씨의 혈통을 끊은 것은 임금을 시해한 반역과 같다는 논리였다. 정도전은 주희(朱熹)가 선배인 소식(蘇軾)을 꾸짖은 사실에 빗대어 자신의 입장을 변명했다. 즉 정도전 자신은 주희에, 이색은 소식에 비유한 것이다. 우왕, 창왕 신씨설은 조선 건국에 정당성을 제공해주었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부정적 입장을 보인다.(180 페이지) 상촌 신흠은 개혁파의 주장과 다르게 이색이 창왕을 옹립한 것은 올바른 일이라 주장했다. 이익은 우왕은 신씨가 아니며 우왕이 폐위된 것은 그가 최영과 함께 단행한 요동정벌 때문이라 주장했다. 우왕과 창왕은 왕의 역사를 다루는 세가(世家)가 아닌 열전(列傳) 그것도 반역열전에 수록되었다. 두 왕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주장은 처음이 아닌 공양왕을 추대할 무렵에 나타났다. “뒤늦게 제기된 혈통문제”라 할 수 있다.
두 왕의 정통성을 인정한 최초의 역사서는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다. 안정복은 최치원이 신라의 네 임금을 섬겼으면서도 ‘신라에 반기를 든 도적 무리인 왕건’에게 몰래 글을 올린 것은 잘못이라 썼다. 김득배는 정몽주의 스승이다. 이익은 김득배가 정세운을 살해한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김득배는 권신 기철 일당을 제거한 후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정몽주는 제문을 통해 스승 김득배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정당한 절차 없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익은 사람들이 정몽주만 알고 있을뿐 그의 스승인 김득배의 존재를 모른다고 하면서 김득배를 역사의 무대로 불러냈다. 고려 왕조에서 벼슬길에 올랐지만 뚜렷한 존재감을 남기지 못한 야은 길재는 조선에서 절의의 인물로서 모습을 드러내며 조선의 학인들에게 오랜 세월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방원의 스승 운곡 원천석은 우왕 신씨설을 최초로 부정한 인물이다. 저자는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은폐된 진실을 밝혀서 기록하는 일이라 말한다.(267 페이지) ‘조선이 본 고려’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역사가의 가치와 참된 역할을 새삼 일깨우는 책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