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 작가의 ‘라하트 하헤렙‘은 내가 글에 몇 차례 인용한 바 있는 장편 소설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창조주인 구약의 신에 의해 먹을 수 없도록 설정된 열매인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되자 신이 아담과 이브가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그 주위에 칼 모양의 불을 설치하는데 그것을 라하트 하헤렙이라 한다.
나는 가끔 30여년 전의 군대를 무대로 한 이 소설을 보며 요즘 군대와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작가는 군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을 며칠만에 써 투고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작가는 군대에서는 여러 종류의 불을 만나며 군대 복무는 젊은 날의 통과의례라는 말을 했다.)

나도 작가 정도는 아니지만 벼락치기 글을 써야 할 상황에 처했다. 마감일까지 6일이 남았는데 48, 000자 정도를 써야 하니 하루에 무려 8,000자 정도씩 엿새를 써야 한다.

일과(officium?) 후 써야 하니 상당히 정신 없는 일정이 될 것이다. 그래도 혼비백산(魂飛魄散) 할 정도는 아니리라.

몹시 놀라거나 혼이 나서 혼백이 사방으로 흩어짐을 뜻하는 이 말을 보며 혼백의 그런 좌충우돌이 아닌 자연스런 귀근(歸根) 같은 것은 무엇이라 할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낙엽이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귀근은 결국 죽음을 뜻한다. 갑작스런 죽음이 아닌 자연사(自然死)를 말한다.

이럴 때 신혼체백(神魂體魄)이란 말을 쓴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혼은 양(陽) 즉 가벼운 것이어서 위로 향하고 백은 음(陰) 즉 무거운 것이어서 아래로 향한다고 말한다.

토마스 만의 장편 소설인 ‘마(魔)의 산(山)‘의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가 그랬듯 힘들고 고통스런 일정 가운데 묘한 매력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느낌은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과정을 돌아볼 때 가질 수 있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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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선생의 따님인 윤정(Djong Yun) 여사가 보컬로 참여했던 1970년대 독일 전위(前衛) 록 그룹 Popol Vuh의 호지안나 만트라(Hosianna Mantra)를 호지안나 만투라라 소개한 한 페북 유저의 글을 읽고 가볍게 웃었다.

그 페북 유저는 오래 전 우리나라에 프로그레시브 록을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성시완씨가 음악 방송 진행을 하며 ˝여성 보컬리스트가 특이하게 한국인입니다˝라고 소개했다는 기억을 전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는 이 여성이 윤이상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당시는 몰랐을 것”이란 말을 했다.

성시완 씨가 한 청취자로부터 이탈리아 그룹 라떼 에 미엘레(Latte e Miele)란 이름이 성경이 말하는 ‘젖과 꿀’에서 온 것이란 사실을 전해듣고 아, 그렇군요... 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 생각난다.
90년대 초 성시완 씨가 운영하는 서울 마포의 리치몬드 제과점 인근의 마이도스(Mythos)라는 음반(CD) 가게를 자주 갔었다.

지금 이 분은 경인방송 에프엠에서 ‘사이언스 라디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과학자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순서가 있는데 이정우 교수(철학자)의 순서도 있었다.(영화 매트릭스 해설인데 반드시 다시 듣기로 들어야겠다.)

서론이 길었는데 내가 실수라고도 할 수 없는 다른 표기를 보고 가볍게 웃은 것은 만투라란 단어가 나투다란 단어를 생각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투다란 말은 부처의 현현(顯現)을 의미한다. 현현이란 윤회(輪廻)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작은 단서로부터 관련 이야기들을 이끌어내고 다른 이야기들로 맥을 이어가는 것이 내게는 영감이 찾아드는 것 즉 나투는 것으로 이해된다.

생각은 현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거나 공전(空轉)할 수도 있다. 현현과 윤회 또는 공전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느냐 아니냐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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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해밀턴의 원어 이름을 Alive Hamilton이라고 치고 말았다. 자판의 c 옆에 v가 있는 탓이고 내 손이 정교하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alive는 ‘살아 있는’, ‘생기가 넘치는’ 등을 뜻하기에 나쁘지 않다.

아니 그럴 뿐 아니라 ‘이 세상의‘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무언가 영감을 주는 단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납의 유해성과 수은의 직업병 관련 사실 등을 밝혀낸 해밀턴은 한 세기(1869 – 1970)를 살다 간, 직업병 연구와 산업 독성학 분야의 선구자이다.
매카시즘과 베트남전을 반대해 90 세가 넘은 나이에 정보 당국의 감시를 받은 분으로 연구 활동만이 아니라 사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여학생이 없었던 시대의 하버드대에서 최초로 여성 교수가 된 분으로 여성 형제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친하게 지낸 것으로도 화제를 낳은 분이다.

그가 활약했던 시대는 이상한 시대였다. 문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생각난다.

하지만 이 경우 이상하다는 말은 원어로는 wonder이니 당시는 물론 지금의 기이하고 불합리하고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시대를 나타내는 말로는 부적절하다.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앨런 그린스펀이 미국 주식시장의 거품을 우려하며 쓴 비이성적 과열(過熱: irrational exuberance)이라는 흘러간 말에서 힌트를 얻어 ‘비이성적인‘이라는 형용사를 써야 할까?

지금의 시대를 과열의 시대로만 볼 수는 없다.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냉정하거나 무관심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만 사람들은 정치에 과한 열정과 관심을 보이지만 문화 예컨대 비평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비평의 대중성을 거의 기대하기 힘든 시대이다.(2017년 8월 5일 오길영 교수 페북 글 참고)

오 교수님은 비평이 사라지면 비평의 대상인 문학도, 영화도, 예술도 사라질 것이란 점에서 비평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지금은 거대한 물결 같은 것에 휩쓸려 비평을 포함해 소중한 것들을 아깝게 흘려보내는 현실이 상실감을 주는 시대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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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독실(篤實)한 신앙인으로 알려진 한 기독교 신자 부부가 갑질의 주체로 떠오른 것은 씁쓸한 일이다. 과연 새벽 교회에서 무슨 기도를 했을까 궁금하게 하는 그 부부에 대해 내가 할 것은 규탄(糾彈)이 아니다.

언론은 독실이라는 말을 신앙 행위만 보고 쓰지 말거나 독실을 도타울 독(篤)과 방자할 실(肆; 이 글자는 방자할 사이기도 하다.)을 써서 독실(篤肆)이라고 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언론에 문제가 있다. 그런 새 갑질 인생들이 등장하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아닌 기독교 신자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런 갑질을 한 사람에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기독교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교회 열심히 출석하고 헌금 잘 내고 미소 지으며 적당히 교양 있는 척하는 사람에게는 갑질을 해도 독실한 신자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교회를 욕보이는 일이 된다.

예수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언론에서 그런 식으로 독실이란 말을 무분별하게 써왔기에 냉소를 부르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냉소의 대상이 되거나 욕을 듣는 것은 언론의 책임이기 이전에 기독교인들이 보인 행태 자체로 인해서이다.

신앙 양심과 일상에서의 양심이 일치하지 않거나 상충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기독교인들을 독실한 신앙인이라 부르는 언론은 문제 있는 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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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북이 글감의 단서들이 펄럭이는 광장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최근 이런 내 생각을 확인하게 하는 글을 두 편 읽었다.

하나는 며칠 전 읽은 다수 한국 교회의 블랙리스트란 글로 오래 전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저자도 있어 흥미를 가지고 읽었다.

칼 바르트는 만유구원론 자유주의자이고 위르겐 몰트만은 삼신론이란 이단론을 펼친 신학자라는 것이고,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이기도 한 C.S 루이스는 진화론자이고 존 스토트는 영혼멸절설을 믿는 지옥불신자이고 레슬리 뉴비긴은 세계교회협의회인 WCC에 속한 다원주의자이고,

톰 라이트는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거부하는 신학자 즉 반펠라기우스주의자이고 헨리 나우웬은 가톨릭 이단 및 동성애 지지자이고 유진 피터슨은 동성애 지지자라는 것이다.

이 글을 올린 목회자는 이단으로 찍힌 저 신학자들을 좋아하는 자신은 무엇인가란 물음과 함께 이제 마녀사냥은 더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을 더했다.

언급된 저 신학자들은 분야가 다르지만 나로 하여금 현상을 다르게 보게 해주는 스승들인 셈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글들(한 게시글에 달린 세 건의 댓글이기에 글들이라 표현)은 어제 읽은 신학서적 표절반대 그룹에 오른 표절에 대한 글이다.

결국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박사 논문을 쓰다가 포기한 이유 중 하나가 도저히 새 것으로 300 페이지를 채울 재주가 없어서 하루 종일 단 한, 두 줄 쓰다가 그냥 과감하게 접었다는 것,

새로운 내용을 주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올 때는 형식에 무관하게 무조건 인용을 표시하거나 출처를 밝혀야 한다는 것, 앞선 사람의 글을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연구가 성실하지 못했다는 증거라는 이야기 등이다.

나의 경우 문화해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표절 여부를 떠나 나만의 것을 추구하다 보니 꽤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가령 경복궁 외전 해설을 할 때 ‘근정전 - 천추전 - 사정전‘이나 ‘근정전 - 사정전- 천추전‘이 아닌 ‘사정전- 천추전- 근정전‘ 코스를 택한 것은 정전에 비해 작은(또는 격이 낮은) 편전에서 보조 편전을 거쳐 앞면 5칸, 측면 5칸의 압도적인 정전을 발단 -전개(반복) - 상승의 고전 음악의 소나타 형식에 견주어 설명하려 한 결과이다.

창덕궁에서는 금천교의 대칭인 두 개의 무지개 다리를 설명하며 날개가 대칭인 나비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의 이론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익숙한 것이 선호되는 곳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용도로 쓰일 여지는 언제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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