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란 부제를 가진 책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을 읽고 있다. 이미 어른이 되어 많은 날들을 보낸 내게 도움이 될 여지가 별로 없는 책임에도 구입한 것은 제목이 가진 매력 때문이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은 사회화로서의 성장이 개인에게 억압적인 과정임을 라캉의 이론 등에 의거해 쓴 책이고 여성 시인들의 시를 분석한 책이기도 하다.
저자 양효실은 예술가를 전시주의자 또는 노출증자로 정의한다. 양효실에 의하면 전시는 상처를 자랑하는 것이고 노래하는 것이며 즐기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예술가란 소통하려는 욕망과 감추려는 욕망 사이의 긴장에 의해 추동(推動)되는 사람이란 말을 했다.
위니콧처럼 볼 수도 있고 양효실처럼 볼 수도 있다. 다만 예술가가 아니지만 드러내는 듯 감추는 나는 위니콧의 말에 마음이 간다는 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약용의 순정함과 곡진함을 마음에 두지만 표현에서는 감추는 법을 잘 활용하는 글을 쓴 박지원 같은 제스추어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란 부제와 달리 저자는 자신의 글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만큼이나 약한 이들을 학대할 뿐 여전히 화해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인 나에게 지침이 될 글이 분명하다. 나는 지금 오랜만에 미학자의 유려한 사유를 만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