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과 에세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생동하는 실험적 사유의 글을 찾다가 미국의 페미니스트 이론가 벨 훅스의 인상적인 글을 접했다.

“대학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하지만 대학은 유토피아를 창조할 수 있는 장소다.”(2017년 4월 17일 교수신문 수록 김종영 교수 글 참고)

내가 읽은 벨 훅스의 책은 ‘사랑은 사치일까?’ 한 권이다. 그래서 저 말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지만 ‘벨 훅스,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가 아닌가, 하고 추정할 만하다.

‘벨 훅스,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의 원서 제목인 ‘Teaching to Transgress: Education as the Practice of Freedom’에 교육을 뜻하는 단어인 education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계 넘기보다 위반하기 또는 금기 어기기 정도가 더 타당할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이란 부제가 눈에 뛴다. 이 책에서 훅스는 케케묵은 인식론을 유지하는 대학 교육을 비판했다.

훅스는 교육을 왜곡하고 있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등 각종 편견들을 보며 교사/교수들부터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훅스는 노동 계급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교육이라 생각하고 어린 시절부터 열렬한 독자(讀者)로 살아온 분이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온갖 차별과 서열주의의 시발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훅스가 만일 이런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비판과 자탄 이상의 말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기형도 시인의 ‘오래된 書籍‘을 소개한 이령 시인 덕에 다시 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들춰 보았다.

이 시집에 대학의 유토피아성 여부에 대해 사유하게 해주는 ’대학 시절’이란 시가 있다.

이 시는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로 시작된다.

그리고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는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는 구절이 있고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는 구절로 끝이 난다.

(최루탄을 쏠 때 들리는) 총성과 감옥, 군대, 기관원 등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옛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시이다.

앞서 인용한 김 교수는 벨 훅스의 말을 언급한 데 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국의 대학은 유토피아를 창조하고 있는가? 아니다...‘헬’(hell)을 창조하고 있다.”는..

벨 훅스가 말한 대학이 갖추어야 할 위상과 너무도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학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 기형도는 대학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토피아로 보았는지 모르지만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다만 유토피아에 가까운 곳은 있으리라.

물론 기형도 시인이 대학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가 대학을 유토피아로 생각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기형도 시인은 대학을 유토피아가 아닌 사회보다 덜 두려운 곳으로 보았을 것이다. 총성, 감옥, 기관원 등은 기형도 시인이 살았던 시대(1960 - 1989)의 대학이 유토피아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대학은 사회보다 덜 전쟁터 같았던 곳이자 낭만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지?

문득 그런 시절이 그립다. 물론 이는 장소를 그리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갔기에 돌아갈 수 없는 특정 시간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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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7-31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쓰는 후배는 기관원이라고˝....이 문구가 확 들어옵니다.헬을 창조하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겠지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7-31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인상적인 구절입니다...^^
 

( )한 여름 보내시나요?

물건이나 어떤 대상이 시원스럽도록 마음에 들다, 일이 진행되는 상황이나 일의 처리 따위가 시원하고 말끔하게 이루어지다 등을 뜻하는 이 말은 무엇일까요?

저는 불행하게도 (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투리도 비속어도 아닌 표준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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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쌈박‘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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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직접적으로 대상을 비추는 너무도 밝은 실외에서는 스마트폰의 사진, 글 등등 모든 것을 식별하기 어렵다.

들어갈 실내를 찾아 두리번 거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럴 때 아웃 포커싱(outfocusing)이란 단어가 생각난다. 촬영하려는 대상만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하는 사진 기법이다.

어제 구입한 독일 문학 전공의 작가 서용좌 교수의 장편 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를 읽으며 나는 흐릿한 해라는 말이 아웃 포커싱이란 개념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생각하고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건강하지 못한 개체는 대상의 전경(前景)과 배경(背景)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전경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을 말하고, 배경은 나머지 부분을 말한다.

전경과 배경을 구분하지 못하면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상태에 머물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자전적 성격이 어떤 작품보다 짙은 ‘흐릿한 하늘의 해’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 줄의 글을 쓰지 못한 채 삼백예순날이 흘러갔다.”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님이 짐작되는데 이어지는 부분에서 작가는 “슬럼프라고 하는 말은 잘 나가던 사람들을 두고 쓴다. 그러니 나로서는 그냥 침체의 늪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란 말을 한다.

거의 일주일에 걸쳐 성(城)에 진입하려는 고투(苦鬪)를 계속하지만 실패하는 K의 이야기인 ‘카프카의 ‘성(城)’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그런 것 같다는...

나는 전경과 배경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맞다. 마음을 살피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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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서정과 감각’이란 평론집으로 2014년 김달진 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자가 된 김진희 평론가에 대해 대학의 과 선배 정끝별 평론가가 쓴 작가론을 읽었다.

 

이 글에는 김진희 평론가가 대학 2년때 쓴 ‘그때 우리에겐 詩가 있었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시가 소개되어 있다.

새롭다 할 수 없는 것은 ‘시에 관한 각서’라는 평론집에서 저자 김진희 평론가가 “일찍이 시인이 되고 싶었던 나는 아주 자주 시인의 마음이 되어 시를 읽는다.”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저자가 시인이 되려 했으니 어느 만큼의 시를 썼음에 틀림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특기할 것은 이 글에 이어지는 다음의 글이다.

 

“시인의 마음이 되려고 애쓰기 때문일까. 시인이 부리는 시어 하나하나에 마음이 쓰이고 비유 하나를 만들기 위한 시인의 고통이 상상되곤 한다.”

시인이 되려던 마음을 접고 그는 이제 시인의 마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으로 사는 것과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시인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의 평론에는 남다른 언어 감각이 있지 않겠는가?

 

다시 정끝별 평론가의 글을 인용하자면 김진희 평론가는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도 여전히 시 쓰는 걸 놓지 않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시 작품을 발표하거나 보여주지는 않았다.” 이 부분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평론만을 하는 사람(김진희)과 시 쓰고 평론도 하는 사람(정끝별)의 차이를 가려내는 것일까?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시급한 일도 아니리라. 혹 많은 시 읽기, 시 평론 읽기가 갖추어진 후라면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또한 의도해서 써낼 수 있는 것이기보다 저절로 마음에 차오르면 말할 수 있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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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화제의 책 ‘괴델, 에셔, 바흐’의 개역판이 나왔다. 원작이 나온 것은 1979년, 첫 번역본이 나온 것은 1999년, 개역판이 나온 것은 2017년이니 원작과 첫 번역본, 첫 번역본과 개역판 사이에는 각각 20년과 18년의 세월이 가로 놓인 것이다.

1999년 나온 첫 번역본은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비등(沸騰)했었다.

물론 이번에는 좋은 번역이라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새 번역자가 번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첫 번역자 + 공동 번역자 한 분‘의 시스템으로 번역이 이루어진 것이 특이하다.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 해도 새로운 분 홀로 전면적으로 책을 새롭게 번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두 필지(筆地)의 땅을 마련한 뒤 한 필지에만 건물을 짓고 20년이 지나면 그 건물을 지은 사람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해당 건물을 보며 비워두었던 필지에 똑같은 건물을 짓고 옛 건축물은 허무는 식년천궁(式年遷宮) 방식을 택하는 일본의 이세 신궁(神宮)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 잘못된 번역본을 읽고 감동받았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런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

사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나조차 원서를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을 만큼 우리 나라 번역서들의 수준은 문제가 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구절을 보며 내 문해(文解) 능력을 탓하기도 했고 해당 책을 쉽게 해설한 책을 찾아 읽기도 했고 내공이 쌓이고 읽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며 나를 다독거리기도 했다.

물론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 실력을 자랑하는 전문 번역가의 책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잘 된 번역서와 엉터리 번역서의 비율이 문제는 아니다. 번역이 잘못된 단 한 권의 책만으로도 문제는 충분하다.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 그 문제 많은 번역본을 술술 잘 읽었다는 경우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는 경우로.

다만 진도가 나가지 않아 힘들었다는 사람들 가운데는 잘 된 번역본으로 읽어도 이해력 자체가 떨어져 읽기에 어려움을 드러낼 부류들도 있을 것이다.

’괴델, 에셔, 바흐‘는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그림,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캐논을 관통하는 ‘이상한 고리‘를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라는 신비를 파헤치는 책이다.

이제 읽다가 그만 두었던 첫 번역본의 기억은 버리고 새 번역본을 읽어야겠다. 내 현주소를 확인할 기회이다. 괴델, 에셔, 바흐 모두 경탄할 만한 인물들이기에 기대 만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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