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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생활난 - 김수영과 <논어> 탈경계인문학 연구총서 4
김상환 지음 / 북코리아 / 201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김상환 교수(철학)'공자의 생활난'은 김수영 시인이 모더니즘 못지 않게 동아시아 전통에 물을 대고 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4. 19 이후 저항시인으로 거듭나기 전부터 김수영의 핏줄에는 선비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공자는 천민 부랑아였던 자로(子路), 비천한 출신의 원헌(原憲), 항상 쌀 뒤주가 텅텅 비어 있을 정도로 가난했던 안회(顔回), 하급 말단 관리였던 증삼(曾參) 등을 가르치며, 그리고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층 지배 계급들이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덕치와 예를 강조했다.

 

또한 세습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전체 인민들에게까지 확대했고 인()과 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자는 인의 사상이 전제되지 않는 한 예술()과 문화()도 소용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박기봉 지음 '교양으로 읽는 논어' 참고)

 

저자는 '공자의 생활난'을 김수영론이자 공자론이라 말한다. 김수영은 첨단 문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전통을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지켜야 하는가란 물음을 던졌다. '논어'의 문장 하나 하나는 대부분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지만 문장들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논리를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14 페이지)

 

김수영은 동서문화의 아이콘들을 하나의 문맥 속에 마주 세우는 방식의 시를 많이 썼다. 김수영은 미래로 뻗어갈 원심력을 온고지신에서 찾았다.(23 페이지) 현대 시의 일반적인 특징은 메타 시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메타 시는 시 자체를 소재로 하는 시이다. 시에 대한 시, 시가 무엇이고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성찰하는 시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한다. 현대로 내려올수록 시는 시인의 내면세계로 침잠하고 급기야 시인 자신의 초상과 자신이 추구할 이념을 소재로 한다. 시론이 시가 되고 시가 시론이 되는 것이 메타 시이다.(24 페이지)

 

김수영의 사유는 끊임없이 두 축을 그린다. 하나는 당대의 역사를 주도하는 모더니즘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의 축이다.(35 페이지) 김수영에게 공자와 모더니즘은 현실을 바라보기 위해 끼어야 하는 렌즈와 같다. 하지만 공자는 오래된 렌즈이고 모더니즘은 새로운 렌즈여서 당대 한국인의 현실적 감각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삐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45 페이지)

 

모더니즘을 통해 공자를 왜곡하고 공자를 통해 모더니즘을 왜곡하는 것이 김수영식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49 페이지) 김수영의 공식 데뷔작은 공자의 생활난묘정(廟庭)의 노래이다. 이 두 작품은 동아시아 전통에 대한 시인의 관심을 보여준다.

 

묘정의 노래가 다룬 대상은 관우(關羽)이다. 이 시에 나오는 남묘(南廟)는 관제묘(關帝廟) 즉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공자의 생활난이 다룬 대상은 공자이다. 흥미로운 것은 관우가 성인(聖人)인 공자보다 서열이 더 높다는 점이다.

 

후한 말의 무장 관우는 송나라 때 무안왕(武安王)으로 추숭된 이래 명나라 때 황제가 되고 청나라 때에는 관성대제(關聖大帝)가 되었다. 송나라 때 요나라, 금나라 등 북방민족에 밀려 중원을 내주고 남송으로 물러선 중국은 중원을 되찾고자 절치부심하게 된다.

 

관우는 이런 정치적 이유 때문에 정신무장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역사상 충신의 이미지로 여겨졌다. 조선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조선 개국에 반대해 태종 이방원에게 암살당했지만 조선의 문묘와 종묘에 충신으로 배향된 정몽주가 대표적이다.

 

이는 라이벌이었던 개국 공신 정도전이 왕권에 도전한 죄로 정권의 미움을 받아 조선이 끝날 때까지 철저히 외면당한 것과 정반대의 사례이다. 유학의 시조이자 최고봉인 공자를 황제의 반열로 추숭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공자는 왕의 반열에서 멈추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말기에는 황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공자는 문()을 펼친 왕이라는 뜻의 문선왕(文宣王)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지만 그 자체로도 천자(天子)의 지위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공자에게 부여된 왕이란 이름이 황제를 뜻한다. 우리나라에 관우 사당이 지어진 것은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의 명을 받은 백사 이항복이 명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러 가자 명나라 황제가 먼저 관우 사당을 지은 후 관우에게 참배와 제를 올릴 것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친구들에게조차 낡았다는 이유로 묵살의 대상이 된 묘정의 노래를 말장난에 불과한 시, 무의미한 습작이었을 뿐이라 인정했다. 김수영은 이 시가 부정적 의미에서 유창한 능변(能辯)이어서 얼굴이 뜨끔해졌다고 말했지만 남의 나라 사람을, 그것도 무()를 상징하는 관우를 시작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김수영은 묘정의 노래를 자학(自虐)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수영은 진정한 처녀작을 쓰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공자의 생활난이 그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김수영의 본적은 종로구 묘동(廟洞)이다. 김수영이 관우를 시작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미스테리이다. 관우는 도교의 신이다.

 

김수영은 4.19 이후 저항 시인으로 거듭났다.(61 페이지) 김수영에게 사랑은 중요한 주제였다.(80 페이지) 김수영은 사랑의 변주곡에서 복사 씨와 살구 씨가/ 한 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란 말을 했다. 복사 씨와 살구 씨는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朱子)가 공자(孔子)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개념이다.

 

공자의 인()에 해당하는 것이 사랑인데 인()은 행인(杏仁)이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씨앗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자는 복사와 살구가 씨앗에서 나온 열매이듯 세상만사가 인이라는 씨앗의 산물이라 보았다.(81 페이지) ()은 궁극적으로 자연 전체와 하나가 되는 일체화의 역량을 지향한다. 불인(不仁)이 어질지 못함과 마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저자는 김수영의 을 원격감응의 유희를 내용으로 하는 시로 읽는다.(9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김수영에게 인자(仁者)에 해당하는 시인은 살아 있는 눈과 함께 호흡하며 화답하며 유희를 벌이는 사람, 자연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이다.(95 페이지)

 

이런 시로 들 수 있는 것이 이고 사랑의 변주곡의 마지막 문장인 복사 씨와 살구 씨가/ 한 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란 구절이다. 복사 씨와 살구 씨가 사랑에 미쳐 날뛰는 날은 대동사회를 의미한다.

 

공자는 사람이 어질지 않다면 예를 해서 무엇 하며 사람이 어질지 않다면 음악을 해서 무엇 하랴란 말을 했다.(108 페이지)

 

저자는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는 시에서 기침하는 것은 시작(詩作)이고, 시를 쓴다는 것은 마음을 자극하는 생명의 율동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고 파악한다.(109 페이지)

 

공자의 인() 개념에 담긴 핵심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환원불가능한 요소로 내재하는 어떤 원초적인 리듬에 대한 감수성이다. 김수영의 먼 곳에서부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먼 곳에서란 말은 공자의 능근취비(能近取譬)를 비튼 능원취비(能遠取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능근취비란 가까운 것을 비유하여 먼 것에 이르는 것, 내 처지로부터 남의 처지를 유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김수영은 왜 아프다는 말을 했을까?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이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말이 있지만 여기서는 적용할 말은 아닌 듯 하다. 감응하기에 아프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드라마 다모아프냐? 나도 아프다.”란 대사처럼?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一切衆生病 是故我病)”유마경(維摩經)‘의 말처럼?

 

그렇다면 이 경우 아프다는 것은 몸이 아닌 마음이 아픈 것이겠지만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픈 것이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픈 것임을 해아리면 굳이 나눌 일은 아닌 듯. 주역 계사전에 근취저신 원취저물(近取諸身 遠取諸物)이란 말이 있다. 가까이는 자신의 몸에서 진리를 찾고 멀리서는 사물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이 김수영 시를 이해하는 단서이다. 두루 취해야 한다는 의미를 새기게 하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묘정의 노래공자의 생활난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김수영은 을 마지막으로 생애를 마쳤다. 저자는 을 메타 시 계열의 정점으로 읽는다. 몇몇 평론가는 이미 김수영의 논어의 한 구절과 연관지어 해석했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

 

은 참여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도 읽혀왔다. 김수영이 자발적으로 공자의 길에 동참하려한 정황은 여기 저기서 발견된다. 등단 작품인 공자의 생활난에서 김수영은 시인이 통과해야 할 지난한 삶의 여정을 공자의 생활난으로 표현했다.(195 페이지)

 

더러운 향로에서 그런 점은 더 짙게 나타난다. 청동 향로는 유가 전통에서의 군자의 상징이다. 공자가 망해가는 주나라를 이상 국가로 삼았듯 김수영은 시대에 뒤처진 유가 사상을 이상으로 삼았다. 김수영으로서는 썩어빠진 그 전통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으려 한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길을 공자의 길로 삼은 김수영은 자신을 모리배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아아 모리배여 모리배여/ 나의 화신이여”(’모리배참고) 모리배(謀利輩)는 온갖 옳지 못한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사람, 더 나아가 도의를 무시하고 부정한 이익을 꾀하는 무리들, 사기꾼을 뜻하는 말이다.

 

이런 자학(自虐)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같은 시어(‘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도 나타난다.

 

김수영은 자신의 실질적인 첫 작품으로 병풍폭포를 꼽았다.(235 페이지) 김수영은 중용(中庸)’을 키워드로 한 시를 썼거니와 저자는 유가철학의 중심에 있는 중용은 종종 타협과 조정의 지혜로 즉 야성과 극단을 배제하는 온건의 지혜로 설명되지만 그러나 이런 것은 직()의 정신이나 곧음의 의지가 생략된 중용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쾌락원칙의 저편으로 향하는 죽음 충동이라는 과격한 요소를 배제한 중용은 김빠진 콜라가 된다고 말한다.(239 페이지) 이 부분에서 공자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한 사람(지기불가이지자, 知其不可而爲之者)으로 여겨졌다는 신정근 저자의 말을 참고할 만하다.

 

또한 중용을 철저하고 완전히 뿌리를 뽑는 것으로 해석한 이한우 저자의 말을 인용할 만하다. 이한우 저자에 의하면 공자는 공부를 목표에 못 미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 그리고 목표에 미쳤을 때는 그것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 사람이다.

 

()하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 적중한다는 말, ()하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물론 공자는 호학(好學) 없는 호직(好直)을 교살적(絞殺的)이라 했다. 앞뒤 분간하지 않고 무턱대고 정직을 추구하다 보면 목을 조르는 듯 살벌해진다는 의미이다.(236 페이지)

 

저자는 김수영이 모더니즘을 구성하는 죽음충동에 적절하게 관계하기 위해 사랑의 이념을 끌어들였다고 말한다. 사랑은 죽음과 더불어 온몸의 시학을 끌고가는 수레바퀴다.(237 페이지)

 

저자는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에 나오는 설움이란 정서를 설명하며 김수영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설움의 미학은 유가 전통에서 높이 평가되어온 수치심의 주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268 페이지)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293 페이지)

 

저자는 격문군자탄탕탕 소인장척척(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이라는 논어의 문장을 생각나게 하는 글로 본다.(315 페이지) 이는 군자는 평탄하여 여유가 있고, 소인은 늘 걱정스러워 한다는 뜻이지만 탄()은 평탄하다는 의미, (은 물을 흘려 시원하게 쓸어내린다는 의미이다. 군자는 마음이 편편하고 시원한데 소인은 그러지 못하다는 것이다.

 

에는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란 구절이 있다. 저자는 이를 보며 주역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무릇 대인은 천지와 더불어 덕을 합하고 일월과 더불어 밝음을 합하며 사시와 더불어 순서를 합하고 귀신과 더불어 길흉을 합하니 하늘에 앞서 해도 하늘이 어기지 아니하며, 하늘을 뒤따라 해도 하늘의 때를 받는다.”가 그것이다.(340 페이지)

 

논어뿐 아니라 주역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공자의 생활난’, 대단한 책이다. 그 어떤 문학평론가의 김수영론보다 나은 책이다. 여러 번 정독해야 할 책이다. 동서양 사상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김수영 시인의 시를 모더니즘, 그리고 유가사상을 비롯한 동양 사상을 원류(原流)로 하는 작품들임을 밝힌 드문 책이고 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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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8-02-19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인줄 알았어요. 아이언맨 주인공이요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18-02-1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
최재정 지음 / 홍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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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都市)의 도()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의미이고 시()는 교환이 일어나는 장소를 의미한다. 우리에게 도시는 무엇인가? 릴케는 사람들은 죽기 위해 도시로 몰려온다는 말을 했고 프랑스의 신학자 자크 엘륄은 카인이 도시를 세웠다는 말을 했다. 하나님의 에덴을 자신의 도시로 대체했다는 의미이다.

 

도시 역사 문화 전문가이자 지리학자인 조엘 코트킨은 도시는 인류의 예술, 종교, 문화, 통상(通商), 기술의 대부분이 태어난 것이라 말한다.(‘도시, 역시를 바꾸다’ 16 페이지)

 

최재정은 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에서 도시가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지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는 도시가 인류에게 준 혜택이 훨씬 크고 강렬하게 보인다고 말한다.(21 페이지) 도시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는 것은 미국의 건축 비평가, 문명 비평가, 역사가 루이스 멈퍼드(1895 1990)의 도시론을 접하고서부터이다.

 

멈퍼드는 고대 도시에는 종교로 사람들을 통합하는 구심점인 신전을 중심으로 군영(軍營), 창고(倉庫), 시장(市場), 사제들의 재생산 기관인 학교와 문서고, 병원과 목욕탕, 신과 인간의 교류를 매개하는 극장과 경기장 등이 있었다고 말했다.(‘역사 속의 도시’ 12, 13 페이지)

 

물론 이 이전인 지난 해 9월 소 논문격의 글을 쓰기 위해 서울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자율진화도시전을 감상한 것부터 거론해야 옳겠다. 최재정은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더 코제브가 반지를 반지이게 하는 것은 반지의 빈 공간이라는 말을 한 것을 상기시키며 도시를, 아직 구현되지 않은 영원한 여백을 품은 공간으로 정의한다.(24 페이지)

 

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3부로 이루어진 책이다. 1부 현대 도시 여행, 2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넘어서, 3부 내일의 도시, 도시의 내일 등이다.

 

저자는 첫 삽을 뜬 지 1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공사가 진행중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성당(안토니오 가우디 설계)을 예로 들며 아름다운 건축물에 의해, 그리고 정책적 비전 또는 자연환경이나 역사, 음식, 미술, 때로는 도시민의 생활문화에 의해서도 도시의 운명은 새롭게 재창조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카우퍼(J. M 카우퍼)가 한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도시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지표면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가 세계 자원의 75% 이상을 소비하며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43 페이지)

 

저자는 현 시대를 창의성이 부의 원천이 되는 시대로 진단한다.(67 페이지) 비록 부패, 무능한 정권에 의해 그 의미가 왜곡, 변질되었지만 창의성은 중요한 덕목이다. 지금은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 사고를 통해 창의성을 발휘하는 인재가 주목받는 시대이다.

 

창의 도시는 보헤미안 지수가 높다. 보헤미안 지수는 화가, 무용가, 작가, 배우 등 예술가들이 얼마나 사는지를 나타내는 지수이다.(71 페이지) 보헤미안 지수가 낮은 곳은 인재 지수도 낮게 나타난다.

 

창의성은 도시의 생존이 걸린 제1 명제가 되었다. 현대의 많은 건축가가 자연과 문화, 예술, 더 나아가 산업이 자연스럽게 융합된 창의도시 건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세계의 도시들은 창의도시 개발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74 페이지)

 

오늘날 도시를 디스토피아로 만든 것은 산업화에 따른 인구 집중이다. 주택, 교통, 인프라, , 오염, 쓰레기, 녹지 공간 감소, 슬럼 등이 주요 문제들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이다.

 

필연적으로 도시인들은 고향 없는 세대이다.(102 페이지)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처음으로 도시를 설계한 사람들은 유토피안이라는 말을 했다. 그에 의하면 유토피아는 모든 진보의 원리이고 더욱 좋은 미래를 위한 시도이다.(112 페이지)

 

물론 유토피아 추구의 바탕에는 현실 문명 비판이 있다. 로버트 오웬은 산업 도시에 대한 대안적 구상을 실험한 최초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다.(120 페이지)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122 페이지)

 

21세기 도시 경쟁력에서 가증 중요한 요소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어메니티(amenity) 개념이다.(129 페이지) 쾌적한, 기쁜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라틴어 아모에니타스에서 유래한 이 말은 단순한 미적 개념이 아니라 환경적 개념으로서 종합적인 삶의 쾌적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저자는 지속가능한 도시 만들기는 지역 특성에 바탕을 둔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주민 참여, 행정과의 협력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성이 중시되는 21세기에는 환경, 정보, 복지, 문화, 교육, 여성의 시대이자 생명 존중의 시대이다.(129 페이지)

 

루크 리트너는 도시의 르네상스란 책에서 예술은 도시 재생과 재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는 말을 했다.(131 페이지) 미래 사회에서는 국민총생산(GNP) 대신 국민총매력지수(GNC: gross national cool)가 부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한다.

 

저자는 도시의 매력을 측정하는 지수로 네 가지를 든다. 재미, 정체성(identity), 이야기(narrative), 품위(elegant) 등이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인 한편 호모 루덴스이다. 브랜드화를 통한 도시 가치 향상이 필요하다. 특히 지방 도시에서. 우리는 우주 공간이나 다른 행성에 도시를 건설하는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저자는 도시는 현대인의 요람이자 무덤, 인간의 손으로 창조한 우주라고 말한다.(210 페이지) 스페이스(space), 유니버스(universe), 코스모스(cosmos) 모두 우주로 번역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우주란 코스모스라 해야 옳다. 스페이스는 인간이 갈 수 있는공간을 말하고 유니버스는 별과 은하로 채워진 거대한 우주를 말한다. 코스모스는 유니버스+알파이다.(‘알파는 인간의 주관적 요구사항이다.: 2014121일 세계일보 기사. 박석재 교수 글 ‘space, universe, cosmos’ 참고)

 

도시는 이미 지난 시간들(과거)과 현재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완의 여백(미래)을 모두 품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가 공간을 창조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그 공간의 지배를 받는다고 덧붙인다.(214 페이지) 장소는 고정된 것이지만 공간은 창조하는 것이라는 강남순 교수의 글(‘배움에 관하여참고)이 생각난다.

 

만들되 대안적인 지속가능한 공간을 창조해야 덜 고생한다는 비근한 말로 이해해도 될지 모르겠다. 오독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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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부터의 고백 -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 아케이드 Arcade 1
정은경 지음 / 파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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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디아스포라는 이산인(離散人)을 뜻한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를 떠돌던 유대인들을 이르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유 등으로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미옥은 윤동주 시인을 고향을 상실한 사람이 아닌 고향이라는 좌표를 설정하지 않은 디아스포라로 보았다.(‘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참고) 이런 입장은 강남순 교수의 책에서도 접할 수 있는 바이다. “예민성을 지닌 사람은 이 세계의 한 곳에만 애정을 고정시켰고 강한 사람은 모든 장소로 애정을 확장했고 완전한 인간은 자신의 고향을 소멸시켰다.”(304 페이지)는 말이다.

 

1부 제국과 식민, 2부 노스탤지어와 기억 등으로 이루어진 정은경 문학평론가의 밖으로부터의 고백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 강상중의 마음‘, 할레이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 찰스 부카우스키의 죽음을 주머니에 놓고등의 문학 작품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디아스포라 문학을 민족국가적 기원에서 벗어난 이들이 겪은 이산의 경험을 형상화하고 이를 사유하는 문학으로 정의한다.(13 페이지) 지금의 디아스포라 현상은 다분히 정치, 경제적인 동력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디아스포라는 바깥의 일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현상이다.

 

디아스포라는 그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노스탤지어라는 하나의 공통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憧憬)이지만 이때 말해지는 조국은 현실적인 조국이 아니라 차별과 고통이 없는 상상의 조국이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적이다.(22 페이지)

 

스테판 츠바이크(1881 1942)는 독일어로 문필 활동을 한 유대인 오스트리아 작가였다. 츠바이크는 코스모폴리턴을 지향한 자유로운 문인이었다. 코스모폴리턴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세계 시민으로 보는 사람을 말한다.(강남순 지음 배움에 관하여‘ 24 페이지)

 

츠바이크는 세계적 작가였으나 고향에서 책이 화형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유럽 최대의 장서가이자 필적 수집가였으나 모두 두고 떠나야 했고 세계시민이고자 했으나 어느 곳에서도 평온할 수 없었다.(34 페이지) 츠바이크는 같은 유대인이자 역시 나치 치하에서 자살로 삶을 마친 발터 벤야민(1892 1940)과 비교된다.

 

저자는 타예브 살리흐의 소설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이 막장 드라마라는 외양 속에 흑백의 멜로 드라마를 둘러싸고 있는 제국과 식민지, 인종 차별,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를 내장하고 있음을 주목한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등을 언급한다.

 

저자는 이 소설을 읽으며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흰 가면을 강렬하게 떠올렸다고 말한다.(두 작품은 한 챕터에 편성되었다.) ’검은 피부 흰 가면은 프랑스 식민지하의 앙틸레스(서인도 제도의 섬) 사람들의 정신분석적 임상 연구서이다. 이 책을 한스 요하임 마즈의 사이코의 섬과 비교해도 좋을 것이다. ’사이코의 섬은 분단 체제하의 구동독 주민들에 대한 정신분석적 보고서이다.

 

저자는 흑백 갈등은 단순히 인종 차별 의식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제국의 침략과 식민지의 결과물이고 빈부 격차와 직결되는 문제라 말한다.(67 페이지) 저자는 메도루마 슌(1960 - )의 소설은 마술적 요소에 주된 근거를 두지만 그것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과도, 20세기 서구 모더니즘 또는 최근 소설의 유머와 치유의 코드와도 다르다고 설명한다.(69, 70 페이지) 메도루마 슌은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오키나와는 미군 기지로 점철된 전쟁의 땅이다.

 

유대인이 흠모한 알리(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라는 제목으로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 1923 2007)파이트를 다룬 챕터에서 우리는 반투철학이란 말을 듣게 된다. 이는 인간을 존재가 아닌 힘으로 보는 아프리카 부족민들의 철학을 말한다.

 

이는 사람을 단지 몸이나 욕망, 기억, 성격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살았거나 죽은 모든 것들로부터 어느 순간 자신에게 옮겨와 머무는 여러 힘의 집합체로 보는 철학이다.

 

결국 사람은 그저 자기 자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몸 속에 남은 선조 세대의 기운이기도 하며 혼을 가진 한 사람이 아닌 주변을 둘러싼 모든 근원과 사물에 동조하는 일부이다.(89 페이지)

 

노먼 메일러는 반투철학을 통해 알리의 복싱을 사유한다. 반투를 우분투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우분투는 아프리카 응구니족의 말로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 인해 비로소 한 사람임을 뜻하는 말이다.

 

메일러는 알리의 핵심 기술을 엊어 맞기, 끊임없는 공언과 독설을 통한 자신감의 연금술("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 "포먼의 주먹은 너무 느려 내 몸에 닿으려면 일 년은 걸릴 거야" ) 등으로 보았다. 저자는 노먼 메일러가 알리가 링 밖에서 펼쳐 보인 더 무시무시한 싸움에 덜 주목했다고 말한다.(94 페이지)

 

알리는 1942년 태어나 2016년 타계했다. 흑인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던 알리는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해 징병을 거부해 챔피언 자리를 박탈당하고 35개월간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절망은 어떻게 신이 되었나란 제목으로 로힌턴 미스트리 삼부작을 다룬 저자는 자신이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인도를 보아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적절한 균형’, ‘그토록 먼 여행’, ‘가족 문제등의 로힌턴 미스트리의 삼부작을 읽고 말해진 바이다. 로힌턴 미스트리는 1952년 인도 뭄바이 태생의 작가이다. 저자는 신은 희망이 아니라 완전한 절망과 슬픔이 만든 탄식이고 광기로 빚어진 절규가 아닐까, 란 말을 한다.(99 페이지)

 

로힌턴은 파르시 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썼다. 파르시(Parsi)는 인도에서 이란의 예언자 차라투스투라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페르시아인들'을 의미하는 파르시들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종교박해를 피해 인도로 건너간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들이다.

 

저자는 우리의 삶이 아무리 처참하게 파괴되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상실했다 해도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있는 한 구원과 희망은 가능하다고 말한다.(108 페이지) 이 말은 저자의 디아스포라 문학 관련 책 기획 의도를 더욱 확실히 알게 하는 말이다.

 

저자의 인상적인 문장을 음미하는 것도 작지 않은 기쁨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가령 로힌턴 미스트리가 소설을 통해 저자 자신의 인도 이해가 얼마나 큰 오해이며 폭력이었는지를 뺨을 후려치듯 일깨워 주었다고 말하는가 하면(97 페이지)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 같고 그 파도의 출렁임 속에 피로와 허무로 찌들어 있던 어느 날 할레이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들이 자신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는 말을 한다.(109 페이지)

 

호세이니의 이 작품은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보편적 인간의 삶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저자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으면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등의 개념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의 작가 찰스 부카우스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멋있게 들리는 것은 도박하듯 글을 쓰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166 페이지) 저자는 이에 정곡(正鵠)을 찔린 느낌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부카우스키가 찬사 받은 이유를 댄다. 이 글은 형식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글처럼 읽힌다.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세계적 작가였으나 고향에서 자신의 책은 화형당해야 했고... 가장 정신적인 삶을 살고자 했으나 유대인이라는 육체에 갇혀 정체성을 상실해야 했고 세계시민이고자 했으나 세계 어느 곳에서도 평온할 수 없없었다.”(34 페이지)란 글과 그는 하급 노동자로 반평생을 넘게 살았고.. 늘 냉소적이지만 유머를 잊지 않았고, 늘 취해서 썼다지만 글은 말짱하게 깨어 있으며.. 별 장식 없이 간결하고 거칠지만 그의 글은 그지없이 시적이고 기괴하게 슬프고 철학적이기까지 하다..”(169 페이지)란 글을 비교해 보라.

 

두 작가의 사례를 아이러니라 해야 하는가. 그러나 둘은 차이를 가졌다. 전자는 자신의 바람과 상황이 일치하지 않았고 후자가 지녔던 덕목들은 노력 여하에 따라 이룰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부카우스키는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란 책에서 시인들에 대한 진실을 폭로한다. “시인들, 난 그때 한 가지 희한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 중 누구도 이렇다 할 생계수단이 없었다. 시인들은 오로지 시만 썼다. 그들의 시는 얄팍하고 가식덩어리였지만 그런 시를 계속 써 댔을 뿐더러 옷차림도 제법 근사했고 영양상태도 좋아 보았으며 대개는 그들 뒤에 어머니가 꼭꼭 숨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심지어는 시까지도 일부 대신 써줬다. 이제 시인들 얘길 쓰는 게 지겹다. 하지만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들은 달리 살지 않고 굳이 시인으로 사느라 제 자신을 망치고 있다. 난 쉰 살까지 일반 노동자로 일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살았다.

 

시인이랍시고 내세워 본 적도 없다. 먹고살려고 일을 하는 게 대단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대체로 끔찍하다. 게다가 끔찍한 일자리 하나를 지키려고 싸우는 것은 다반사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쓸 때 허튼 수작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은 그 난장을 겪은 덕이라고 생각한다.”(171, 172 페이지)

 

이를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에 나오는 시인론과 비교해보자. 블랑쇼는 시인은 추방당한 존재이다. 그는 도시에서, 규칙적인 일에서, 그리고 제한된 의무에서 추방당한 존재이다...예술가는 종종 자신의 작품의 폐쇄된 공간 안에 소심하게 웅크리고서 그 세계 안에서 군주처럼 이야기하며 자신이 사회에서 맛본 패배에 복수를 꾀하는 나약한 존재 같은 인상을 준다.”는 말을 했다.

 

비슷한 듯 차이나는 언설이 쾌감을 준다. 부카우스키편에 이르러 우리는 확실히 디아스포라가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실존과 얽힌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카우스키는 미칠 것 같거나 자살하고 싶거나 살인을 꿈꾸지 않는다면 작가가 되지 말라는 말을 했다.(176 페이지) 이는 시인이나 작가란 대단한 존재이거나 영감에 휩싸인 천재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것이 진짜 글을 쓰게 하지 쥐어짜고 만들어야 한다면 진짜 글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는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면 쓰라고 젊은 시인에게 충고한 릴케의 말과도 비슷한 듯 다른 말이다. 부카우스키는 1920년에 태어나 1994년에 타계했다. 그는 독일계 미국 시인, 작가였다.

 

밖으로부터의 고백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은 이미륵(李彌勒: 1899 1950)편에 이르러 대단원을 맺는다. 황해도 해주 출생의 망명 작가인 그는 이의경(李儀景)이란 본명을 가졌고 독일식으로는 Mirok Li(미로크 리)로 불렸다.

 

자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그의 대표작이다. 저자는 이미륵이 작가, 나아가 진정한 세계시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낯선 땅에서 느낀 자신의 타자성, 타인의 이질성, 그리고 그 간극(間隙) 사이에서 느꼈을 고통과 소통에의 열망 때문이었다고 말한다.(204 페이지)

 

이미륵의 뮌헨대학 스승이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 나오는, 반나치 운동으로 처형된 쿠르트 후버 교수이다. 이미륵은 게슈타포에게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후버 가족을 앞장서서 돌봐 독일인들을 놀라게 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처음에 독일어로 쓰였다. ‘Der Yalu fließt’가 원제인 이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사람이 전혜린(1934 1965)이다. 살아서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은 그러나 뮌헨 대학에서 공부한 인연을 공유한다.

 

이는 윤동주 시인과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를 추모하는 모임의 대표인 야나기하라 야스코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야스코는 윤동주 사후 태어난 일본인이다.

 

릿쿄 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윤동주 시인이 릿쿄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윤동주 선배가 자신과 같은 의자에 앉아 공부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디아스포라 정신은 시공을 건너뛰어 이어지는 듯 하다. 정은경의 책은 디아스포라, 코즈모폴리턴 등의 이름으로 기억할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짧고 강렬한 정은경 평론가의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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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관하여 -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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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교수의 '배움에 관하여'는 배움, 비판적 성찰, 일상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한 책이다. 그 세 개념은 저자의 사유의 장에서 각기 해명되고 다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친근한 대상이 된다.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처럼 서로 얽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가르침과 배움의 변증법을 가르침/ 배움이라 표현하는 저자는 비판적 성찰을 위해 필요한 묘사적 단계, 분석적 단계, 비판적 단계의 세 과정을 설명하며 사유 - 판단 - 행동의 순환을 통한 진정한 배움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킬 원동력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사실은 비판적 성찰이 없는 앎은 타자는 물론 자신까지 억압과 차별적 구조 속에 방치한다는 점이다. 세 가지 키워드에 관한 책이지만 전체 구성은 다섯 장으로 되어 있다. 1장 살아감, 그 배움의 여정, 2장 살아 있는 텍스트, 타자의 얼굴들, 3장 사랑, 치열한 생명 긍정의 희망, 4장 인식의 사각지대를 넘어, 5장 감히 스스로 생각하라 등이다.

 

자신의 책을 비판적 성찰을 일상화하여 삶의 주변을 들여다본 배움의 이야기들을 담은 책으로 소개하는 저자는 첫 순서에 134cm의 키에 두 팔이 없는 음악가 토마스 크리스토프의 사연을 언급하며 그가 늘 자신에게 진실하고 자신의 고유한 발자국을 만들어가야 하는 당위를 스스로에게 부과했다는 사실을 더한다.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의미의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비판적 성찰, 그리고 토마스 크리스토프가 말한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야말로 신독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 각자의 삶을 이루는 이야기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져버린다. 최근 윤동주 시인을 코스모폴리터니즘이라는 개념으로 소개했는데 저자의 책에서 그것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세계 시민으로 보는 입장이고 그런 낮꿈 꾸기의 주체에 의해 인류 사회의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글을 접하게 되었다.(24 페이지)

 

저자는 생명의 태어남은 그 반복성에도 불구하고 매번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시간임을 강조하며 생명은 반복성과 고유성을 지닌 새로운 태어남을 매번 선택해야 한다고 덧붙인다.(33 페이지)

 

저자는 이론화하기 위해 우리는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제임스 클리포드의 말을 인용한다.(8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진정한 고향이란 고착되거나 익숙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 익숙함과 낯섦이 무수히 교차하는 공간이며 새로운 고향성이 부단히 창출되어야 하는 곳이다.

 

이 부분에서 장소는 고정되어 있지만 공간은 언제나 새롭게 창출되고 의미 부여가 이루어지며 형성된다는 말(67 페이지)을 인용해야 하리라. 나의 실존이란 언제나 함께 실존이라는 장 뤽 낭시의 말을 인용(65 페이지)한 저자는 자기 사랑과 타자 사랑이 깊숙하게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90 페이지)

 

이 말은 우리는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말(133 페이지)과 공명한다. 책 전편을 통해 드러나는 것 가운데 저자의 가장 인상적인 덕목은 생명 사랑, 열린 감수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가령 자살을 이야기하며 저자가 철학이나 종교가 그 자체의 권력 유지가 아니라 인간의 의미 물음에 대한 갈망에 진지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런 점을 느낀다.(111 페이지)

 

저자는 슬픔과 기쁨, 비극과 희극, 어두움과 밝음, 우울함과 즐거움은 각기 반대가 아니며 서로 나선형처럼 겹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면서 얽혀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라 말한다.(123 페이지)

 

레비나스의 얼굴의 철학을 거론(113 페이지)하는 저자는 진지한 눈빛에 대한 깊은 목마름 때문에 이런 저런 글을 쓰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아오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118 페이지) 저자는 편지의 의미를 중시한다. 저자에 의하면 학술서들이 아닌 개인이 주고 받은 편지는 그 한 사람이 지닌 참으로 다양한 존재의 결을 느끼게 한다.(23 페이지)

 

또한 편지는 사람 사이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만나는 곳이며 자신과 타자가 함께 아름다운 춤을 추는 공간이다.(133 페이지) 저자는 자신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이는 와 또 다른 가 끊임없이 대화함으로써 성립된다.(137 페이지)

 

저자는 데리다의 사상에 큰 감명을 얻고 그의 사후 그와 일방적인 데이트를 시작한 분이다. 저자가 개인적으로 데리다에게 끌리기 시작한 것은 그의 유명한 학문적 책이 아닌 그가 암으로 죽기 바로 전 신문과 한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였다.(154 페이지)

 

데리다는 진정한 우정이나 사랑은 상대를 안다는 인식이 아니라 알지 못함의 차원을 끊임없이 남겨 놓고 받아들이는 것이라 강조했다. 저자는 환대, 정의, 사랑이라는 세 가치를 구체적 삶의 정황에서 실현해내려고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신의 현존을 순간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새로운 신() 이해를 언급한다.(164 페이지)

 

저자는 학생으로부터, 또는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배운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한다. 참으로 열린 자세이고 겸허한 자세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깨우침을 준 학생에 대해 선생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167 페이지)

 

저자는 변화와 정의의 이름으로 사실상 자신의 내면적인 권력 확장의 욕망을 은닉하곤 하는 이들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대체불가능한 개별적인 얼굴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178 페이지) 저자는 물음표를 붙이는 행위의 의미를 강조한다. 자명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온 것들을 비판적 성찰의 대상으로 만드는 힘이 물음표를 붙이는 행위에는 있다.

 

저자는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라고 해서 그 집단이 선과 악이 상충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201 페이지) 저자는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은 의도성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며(206, 207 페이지), 여성 혐오는 여성들에 의해서도 발생한다고 주장(213 페이지)하고 차별 방지를 위한 지속적 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한다.(208 페이지)

 

저자는 지식의 증가 자체가 인류의 진보를 가져오는 데 기여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 지식이 적절한 목적을 이루는 데 쓰일 때에만 인류에게 중요한 구속(救贖)적 의미와 힘을 부여하는 의미가 될 것이라 말한 칸트를 언급(218 페이지)하고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에 의하여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지를 밝힌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언급한다.(223 페이지)

 

저자는 성녀(마리아)와 악녀(이브)의 이분법은 남성중심적 인간관 및 세계관에서 연원한다고 본다.(222 페이지) 저자는 우리 사회가 폭력과 차별적 관행에 대한 예민성(문제시하는 정신)을 갖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저자에 의하면 성서는 억압적 전통과 해방적 전통을 동시에 담고 있다. 따라서 해방적 가치를 지닌 절대적 진리와 시대 문화적 제약 속에서 전개된 억압적 가치는 지닌 상대적 진리를 구분해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과제이다.(231 페이지)

 

저자는 성서 곳곳에 여성이 집단 성폭행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구절(창세기 19, 사사기 19)이 있음을 예시하며 성서를 따른다며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이들이 과연 이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딸, 아내, 며느리 등을 집단 성폭행의 대상으로 다른 남성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가, 묻는다.(232 페이지)

 

저자는 예수는 인간 섹슈얼리티의 다양한 양태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무조건적 환대, 연민, 사랑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나와 다른 타자를 향한 혐오를 단호히 넘어서야 할 것이다.(233 페이지)

 

진정한 변혁은 하나의 조건이 아닌 다양하고 다층적인 필요조건들이 동시에 수반되어야 하며 그때 진정한 변화와 변혁을 위한 충분조건의 터가 마련된다.(237 페이지)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작은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섹슈얼리티를 인간의 성적 행위 방식을 넘어 존재 방식으로 볼 때 성적 지향이 선택이냐 타고난 것이냐의 논쟁도 사실상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241 페이지) 한 사람이 누구인가란 문제는 그 사람의 글과 말, 그리고 타자에 대한 시선과 다층적 행위로 드러난다.

 

존재의 외부성은 내부성과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켜 있다.(244 페이지) 저자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를 규정하는 것의 지독한 한계와 위험성을 지시하는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데리다의 말을 예로 들며 열린 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장애를 나타내는 영어가 handicapped, disabled, differently abled로 변한 사실을 언급한다. differently abled는 장애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다른 다양한 능력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247 페이지)

 

저자의 글은 인식(認識)의 중요성에 관한 단어를 담고 있어 인상적이다. 인식의 위치성(170 페이지)과 인식의 사각지대(251 페이지), 인식의 폭력(257 페이지)이란 단어 등 때문이다. 다양한 폭력의 현실이 일상이 된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냉소주의적 무관심이다.(264 페이지)

 

저자는 스스로에게 멘토가 될 것을 주문한다. 이를 위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치열한 읽기, 비판적 사유, 복합적 판단하기 등이다.(269 페이지)

 

저자는 배우는 데만 집중하면 거기에 빠져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거세되어 버리며 평생 남의 생각을 읽고 남의 똥 치우다 가는 것이라는 최진석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배움이란 정보 축적이 아니라 이 세계 내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성찰과 인식을 통해 그 나를 타자와 세계로 확장하는 과정이란 말을 던진다.(27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각각의 인식론적 한계는 물론 자신의 정황에 한계 지워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한 부단한 배움이 없을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지게 된다.

 

저자는 배움을 가 부재한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배움과 가 개입된 성찰적 배움으로 나눈다. 또한 거시적 배움과 미시적 배움으로 나눈다.(276 페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시적 배움과 미시적 배움 사이를 복합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오가는 배움이다.

 

저자는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언급한다. 이는 책이 출판되자마자 저자는 사라짐을 의미하는 말이다. 저자의 본래적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는 제2, 3의 저자로 기능하면서 자기만큼 책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만들어간다는 의미이다.(278 페이지)

 

좋은 책은 나 타자 세계의 다양한 존재 방식을 담은 다층적 세계들과의 만남을 담고 있기에 저자가 한 권의 책에서 제시하는 세계는 그 저자만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도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인문학적 지식은 성찰의 세 가지 영역인 나 타자 세계를 복합적으로 이해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형성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다층적인 방식으로 이 세계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이다.(282 페이지) 저자는 자신만의 질문이 없을 때 사상도 유행으로 받아들이게 됨을 역설한다.(290 페이지)

 

하나의 이론, 담론에 대한 전적인 칭송도 전적인 부정도 사실상 무의미하다. 문제는 연장(도구)로서의 이론을 어떤 목적으로 쓰는가이다.(293 페이지) 저자는 고향 떠남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물리적이든 정신적, 인식론적이든 끊임없이 새로운 고향을 재구성하고 건설한다고 말한다.(304 페이지)

 

에드워드 사이드는 나는 나의 글쓰기에서 고향을 발견한다는 말을 했다.(308 페이지) 한 종교가 거룩성의 의미를 창출하는 것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묻지 않았던 근원적임 물음들, 만나지 않았던 심층 속의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과 공간을 가질 때이다.(332 페이지)

 

저자는 거룩성과 일상성의 나선형 춤이 가능한 공간 역할이 종교의 존재 의미라고 생각한다.(333 페이지) 저자는 동성애는 지지와 반대의 문제가 아닌 존재 방식이라 말한다.(336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인식적 확실성을 경계하고 오히려 비판의 불확실성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한다.(338 페이지) 대안을 꿈꾸는 이들은 확고한 성공의 보장 때문이 아니라 그 성공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 대안이 꿈꾸는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모험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368 페이지) 이 구절이 대단원의 구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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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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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평론가의 은유의 힘은 은유(隱喩)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시에 대한 책이다. 국내외 다양한 시인들의 시를 부지런히 많이 읽는 저자는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집들을 구해 죽을 만큼 많이 읽으라고 조언한다.

 

시에서 중요한 것은 모호한 그대로의 이미지이지 의미의 맥락이 아니다.(21 페이지) 저자는 몸으로 쓰는 시와 머리로 쓰는 시를 구분한다. 머리로 쓰는 시는 가공된 기억들을 가져다가 쓰는 시들, 그렇기에 외침, 주장, 선동인 시들이고 몸으로 쓰는 시는 욕망과 무의식의 시다.(23 페이지)

 

은유는 사유를 무한 확장하는 힘을 가졌다.(8 페이지) 시만 은유를 독점적으로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은유 없는 시를 상상하기는 어렵다.(30 페이지) 대상과 은유 사이에는 틈이 있다. 틈이 클수록 은유의 효과는 크다.(30 페이지) 틈은 의미가 깃드는 장소이다.(31 페이지) 은유는 맥락(脈絡)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36 페이지)

 

은유의 힘에는 방향에 관한 말들이 많다. 꽃은 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궁극의 무엇이다.(55 페이지), 은유는 실재에서 나왔으되 그것의 속박에서 벗어난다.(39 페이지), 윤동주 시인의 '구리 거울'은 얼굴 - 표면을 비추는 도구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윤리성을 점검하는 사회장으로 작동한다.(63 페이지),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어야 그리움이 생겨난다. 말은 그것에게 건너가는 다리이다.(101 페이지), 시를 쓸 때는 대상에서 가장 먼 이미지들을 데려와야 한다.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110 페이지.. 30 페이지 참고), 사람의 목에서 나온 낭랑한 소리들은 음성학적 파장 현상을 넘어서서 말이 되고자 애쓴다(203 페이지) .

 

은유의 힘'에는 은유들이 넘친다. 두 가지이다. 저자가 설명하는 시인들의 시에 나오는 것과 저자 자신의 것. 가령 세상의 모든 펄럭이는 것들을 혀라 생각하는 임승유의 '수화(手話)'란 시가 그것이다.(30 페이지)

 

반면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31 페이지)란 구절은 은유에 대한 (저자의) 은유이다. 시인은 자기 세계의 한복판에서 산다는 점에서 농부다.(85 페이지)는 구절은 시인에 대한 은유이다. 물은 죽음이고 부활이란 말(111 페이지) 역시 은유이다.

 

저자에 의하면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109 페이지) 우리는 저마다 시간이라는 우주적 규모의 도서관에 꽂힐 책을 쓰고 있다는 말(144 페이지)도 참신하게 읽히는 은유이다. 나쁜 은유, 해로운 은유는 없다. 오직 명석한 은유와 덜 명석한 은유가 있다.(39 페이지)

 

저자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속 사회는 가장 먼저 효율성이 없는 것들 즉 시와 철학을 제거한다고 말한다.(160 페이지) 일리있는 말이다. 하지만 대중이 스스로 재미 없는 것들 즉 시와 철학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은유의 힘'은 수사(修辭)가 현란(絢爛)한 책이다. 들뢰즈, 아감벤, 바슐라르, 보르헤스 등의 이론들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주의하면 크게 어렵지 않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이고 시는 욕망 그 자체이다.(166 페이지) 직유는 아무리 좋더라도 은유의 나쁜 친척이다.

 

좋은 시인들은 이것과 저것은 같다고 쓰지 않고 이것은 저것이라고 쓴다.(169 페이지) 저자의 단언, 은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나쁜 시들은 사실보다 더 큰 진실을 담으려는 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시, 옳은 소리만 해대는 시들이다.(173 페이지)

 

저자는 악서가 있듯 악시도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악시 비판자는 없다는 것이다.(17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언제부터인가 주변에 악시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176 페이지) 거짓과 과도함에 오염된 시들, 인간 본성을 왜곡하는 시, 도덕적 상투성에 빠져 화석화된 진실들을 파렴치하게 담는 시들, 이기주의와 진부한 인지들로 가득찬 시들이 나쁜 시들이다.

 

시는 삶의 찰나들, 모호한 무의식적 꿈의 신호들, 구체적 경험의 국면들, 아침이 오고 다시 저녁이 오는 일 따위에 대해 쓴다.(177 페이지) 시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와 맞물린다.(183 페이지) 시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뚫고 우리에게 온다. 좋은 시들은 예외 없이 해석할 수 없는 심연을 갖고 있다. 시는 해석의 불가능성을 품고 있을 때 지속성을 얻는다. 이는 시가 말할 수 없는 것의 말함이기 때문이다.(183, 184 페이지)

 

시는 결코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감추지 않는다.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다. 위태로운 곡예다... 그런 시를 읽는 일이란 내게 끝없는 조갈이고 더 없는 해갈 그 자체이다.(정끝별 지음 '오룩의 노래' 7 페이지) 저자의 시론을 읽고 이 구절을 떠올렸다.

 

나는 시란 무의식의 바다를 맴도는 비정형의 이미지들을 언어화하는 것이라 말한다. 물론 죽은 비유일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시란 무엇인가란 물음과 의심 속에서 시를 사십 년이나 쓴 뒤 비로소 시의 수사학적 기교들, 은유와 상징과 이미지들, 시의 리듬과 소리의 파장들, 혹은 음역(音域), 의미와 무의미의 분별과 경계들, 그리고 시의 통사적 흐름들에 대해 가까스로 몇 자 끼적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189 페이지)

 

이 창의성의 총체, 의외의 발상, 관성적 익숙함의 전복! 시가 종이에 쓰이고 종이에 인쇄되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피와 종이의 전쟁이다. 누가 시가 전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시는 때로 거울이다. 거울은 온전하거나 깨져 있거나 상관 없이 무언가를 통찰하고 살피는 장치이다.(190 페이지)

 

좋은 철학이 그렇듯 좋은 시 역시 낡은 규범들을 깨고 그 경계를 넘는 반시대적 유전자를 갖는다.(233 페이지) 좋은 시는 기억이 아니라 반() 기억 혹은 망각에 더 기댄다. 기억에 기댄 시들은 평범하다... 비범한 시인들은 가증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삶의 파편들이 뒤죽박죽 섞인 채 방치된 망각과 무의식에서 시를 길어낸다.

 

시는 의미화에의 의지가 아니라 존재에의 의지에 더 강한 탄력을 얻는다.(247 페이지) 시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태도와 시선의 영역이다.(247, 248 페이지) 시는 살아있다는 것의 기미를 언어로 포획하는 일이다.(249 페이지) 좋은 시들은 시가 말의 무덤이거나 수사(修辭)이기 이전에 리듬이고 속도라는 걸 일러준다.(271 페이지)

 

좋은 시구를 읽을 때 앎 이전에 몸이 먼저 시의 리듬에 반응한다. 리듬이란 정신의 율동이고 세상을 가로질러가는 마음의 속도다.(271 페이지) (보는 것)은 대상에의 본성적 이끌림이고 주체의 의지가 그것을 향해 막무가내로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272 페이지) 시인은 시의 창조자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즐비한 것들의 발견자다. 직관은 말로써가 아닌 빛으로 온다. 시인은 이 빛, 이미지로 온 것에 언어를 덧입힐 뿐이다.(272 페이지)

 

은유의 힘은 이전보다 조금 더 자신 있게 시를 대할 수 있으리란 예감을 갖게 한다. 정독(精讀) 아니 고투하는 수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늘 최후의 은 나의 것이다. 읽는 방식을 배웠으니 읽는 수 밖에.

 

읽기에 좌절과 혼돈이 수반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리라, 특정 시를 읽으며 그것이 왜 좋은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시는 직관적으로 읽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명하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시가 나쁜 이유를 말하는 것은 별개의 차원이리라.

 

많이도 읽고 깊이도 읽자. 읽다가 막히면 은유의 힘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시를, 닮은 듯 다르게 설명하는 다른 논자들의 글도 만나도록 하자. 삶은 살기 어려운데 시가 쉽게 쓰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문 밖에서 문 안을 비판하지 말고 참여하는 지혜, 아니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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