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심리학의 도 - 동시성과 자기(self) AKS 번역총서 9
진 시노다 볼렌 지음, 이창일.차마리 옮김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우리 속에 있는 지헤의 여신들의 저자 진 시노다 볼린의 심리학의 도()’. 부제는 동시성과 자기(self)’이다. 저자는 융 학파의 심리학자이다.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 이 책은 융이 제안한 동시성이란 개념을 상세히 설명한 책이다.

 

융은 동시성을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여주는 무인과적(無因果的) 연결 원리로 기술(記述)했다.(21 페이지) 동시성은 융의 매우 비전(秘傳)적인 이론들 가운데 하나이다.(32 페이지) 융은 그러나 이 이론을 70대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썼다.

 

동시성은 인간이라는 참여자를 필요로 한다.(34 페이지) 그것은 참여자가 우연의 일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융은 세 가지 유형의 동시성을 설명했다.(35 페이지) 정신적 내용과 외부 사건의 우연한 일치, 개인이 꾼 꿈이나 본 무엇인가가 멀리 떨어진 것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과 부합하는 경우, 일어날 사건에 대한 이미지(, 영상, 예감 등)를 가지고 있고 후에 그것이 발생하는 경우 등이다.

 

동시성 사건은 깨어 있을 때 꾸는 꿈 같은 것이다.(65 페이지) 꿈이 그렇듯 동시성은 사람마다 엄청나게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꿈 횟수, 꿈의 컬러 여부, 회상 여부, 강렬함 등에서. 저자는 겉보기에 우연한 만남들로 인해 융의 사상을 접한 경험을 회상한다.(31 페이지) 그리고 좌뇌와 우뇌의 통합 필요성을 역설하고(23 25 페이지) 원자 단위의 수준에서 시간과 공간이 연속체가 된다는 사실, 물질과 에너지는 상호변환된다는 사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상호 작용한다는 사실 등을 언급한다.(20 페이지)

 

저자는 스웨던보르크의 대화재(大火災) 환영(幻影)은 물론 융 자신의 동시성 사건 체험 등을 예시한다. 저자에 의하면 동시성은 유일무이하고 인과율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고 일반적으로 반복될 수 있는 사건들의 연속적 계기이다.(37 페이지)

 

저자는 신화에서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반인반수의 괴물)를 대적하기 위해 라비린토스(미궁)로 들어갈 때 그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아리아드네 공주의 황금실의 도움을 받은 것을 예시하며 심리적 미궁의 새로운 왜곡과 굴곡에 어떤 행위나 해석의 신탁이 필요하기에 직관이 우리를 그 속에서 탈출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8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의 남신들과 여신들은 이제 올림푸스가 아닌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 잘 살고 있다.(88 페이지) 특정 여성에 대한 강렬한 숭배의 감정도 믿는 자의 원형 안에 있다.(89 페이지)

 

전체 9장 중 6동시성과 주역의 지혜가 가장 흥미를 끈다. 해석의 대상인 주역은 중국 철학의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모두 근원을 가지고 있다. ‘주역은 도()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부여하는 우주의 모체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원리를 가르친다.(100 페이지) 주역은 하나의 은유이다.(100 페이지) 주역은 해석해야 할 신탁이다.(은유 스토리텔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동시성이나 배후에 놓인 도의 존재는 주역의 조언이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다.(102 페이지) ()라는 생각과 공감하는 철학적 견해는 물론 의미를 직관하고 은유와 상징을 음미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104 페이지) ‘주역은 신탁을 묻는 사람이 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이해할 수 있는 답을 얻지 못할 것이라 경고한다.

 

저자는 좌절된 마음에서도 자신들 자체나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이미 기울어져 있는 관점은 변할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가 가능하게 있다고 말한다.(117 페이지) 이 말을 듣고 나는 김인환 교수가 한 말을 찾아보았다. “비록 출구가 없는 상황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그 상황을 존재의 영원한 질서로 단정할 권한이 없다. 우리의 욕망이 그것의 너머를 투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거부인 동시에 개방이고 부정인 동시에 사랑이다...”(‘상상력과 원근법’ 253 페이지)

 

낮에 부암동에서 한 시인과 식사하고 차 마시며 평론가, 시인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김인환 교수에 대해 말했다. 김 교수가 문학평론집인 상상력과 원근법에서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1898 1983)를 이야기하며 마르크스의 자본에 나오는 수식 등을 이야기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고 서점에 들러 내가 산 책이 바로 주역이야기가 있는 심리학의 도‘(중고 서점이기에 어떤 책을 염두에 두고 가게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심리학의 도도 우연히 보게 되었다.)이다.

 

어떻든 나는 심리학의 도에 나오는 좌절된 마음에서도 자신들 자체나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이미 기울어져 있는 관점은 변할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가 가능하게 있다.”는 말을 접하고 비록 출구가 없는 상황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그 상황을 존재의 영원한 질서로 단정할 권한이 없다.”는 김인환 교수의 말을 인용하게 되었는데 해당 구절이 있는 챕터가 바로 스라파에 대한 챕터인 도식과 욕망이란 챕터이다.

 

각설하고 꿈과 동시성 사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얻는 또 다른 방식이다. 주의를 기울이든 그렇지 않든 꿈과 동시성 사건은 계속 일어난다.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해내려 시도하지 않는다면 알아채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146 페이지)

 

도 경험은 우리가 다른 모든 존재와 저 우주에 연결되어 있다는 직접적 지식,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통해서 모든 것의 배후가 되며 누군가는 신이라 부르기도 하는 참다운 사실을 알게 해준다. 동시성 사건들은 이런 근원적 하나됨에 대한 순간적인 깨달음이며 어떤 이상야릇한 우연의 일치를 통해 전달되는 의미이다.(146 페이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독교의 비전, 도에 대한 동아시아의 비전, 자기와 동시성이라는 융의 생각, 전체성을 지각하고 대립물을 포함하는 오른쪽 뇌반구의 직관적 방식, 뇌나 육체와 분리된 의식에 대한 초상심리학적 증거, 양자물리학에서 바라본 새로운 실재관, 이 모든 것들은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의미를 부여하는 동일한 어떤 것의 모든 부분들이다.(153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옛 그림 읽는 법 - 하나를 알면 열이 보이는 감상의 기술
이종수 지음 / 유유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종수 미술사학자의 '옛 그림 읽는 법''하나를 알면 열이 보이는 감상의 기술'을 부제로 한다. 저자는 화가의 의도를 헤아리는 그림 독법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다. 앞 부분에서 저자는 겸재 정선을 이야기한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분이다. 진경산수화는 산수화의 한 갈래이다.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풍속화 등이 있다. ()는 장르 전체를 의미하고 도()는 개별 작품을 의미한다. 중국 당나라의 미술사가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 의하면 종병(宗炳)이란 사람은 자신의 늙음과 병고를 슬퍼하며 산수를 즐기고 싶으나 그곳으로 갈 수 없을 때 산수화를 감상하는 것으로 느낌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누워서 산수를 감상한다는 의미의 와유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진경산수화의 상대 개념은 정통 산수화, 관념 산수화 등이다. 상상 속의 경치를 가짜라고 할 수는 없다. 관념 산수화는 특정 지명에 얽매이면 안 되었다. 누구나 좋아하게 하기 위한 포석이다.

 

진경산수화는 정선으로 인해 하나의 장르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정선 이전에도 진경을 그린 화가가 있었지만 정선에 이르러 하나의 장르로 완성된 것이다. 진짜 경치를, 그것도 한양에서 먼 금강산을 그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그렸냐는 의문은 누구를 위해 그렸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60 페이지)

 

산수화를 즐기고 주문하는 이의 대부분은 사대부 남성이었다. 17세기 조선의 시인, 묵객 사이에는 산수 유람이 유행처럼 번졌다. 첫 손 꼽히는 유람지는 금강산이었다. 산수 유람이 먼저였는지 우리 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먼저였는지 단정짓기 어렵다.

 

정선 이전의 진짜 그림은 실경(實景)이라 했다. 정선의 진경이란 말에는 실경이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진경산수화에는 기록 이상의 의미 즉 감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정선은 자신이 본 산수를 어떻게 더 멋지게 재현할지에 관심을 쏟았다. 단적으로 말해 정선은 실경산수화를 의뢰받았는데 진경산수화로 답한 것이다.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려는 의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관념산수화가 그려지다가 실경산수화가 나타나고 실경산수화에 회화적인 멋을 더해 진경산수화가 되었다. 진경산수화가 등장한 이후에도 대세는 관념산수화였다. 정선도 만폭동을 그리기 전은 물론 진경산수화풍을 완성한 이후에도 수많은 관념산수화를 그렸다. 감상하는 사람이 화가에게 기대한 것은 와유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산수화이지 실제의 장소를 그대로 옮겨낸 지형도는 아닐 것이다.(79 페이지)

 

'만폭동'은 소재가 꽤 촘촘하게 배치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실제 금강산에서 그린 그림이지만 화면 구도처럼 모두를 볼 수 있는 장소는 없다.(88 페이지) 정선(1676 - 1759)은 자신이 직접 본 각각의 실경을 하나의 화면에 불러들인 것이다.(89 페이지) 다시점 그림은 옛 사람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방식이었다.

 

정선은 진경다움을 살리면서 이상적인 산수의 아름다움을 함께 얻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실경으로서의 진경(眞景)에 머물지 않고 선경(仙境)으로서의 진경(眞境)이라는 평을 듣는다.(94 페이지)

 

일반적으로 풍경화는 다시점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화가를 중심에 두고 그의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그림이 풍경화라면 자연을 중심에 두고 그 모습을 여러 시점으로 담아낸 그림이 산수화이다.(97 페이지) 동양의 산수화를 보고 원근법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장성을 중시하는 정도로 볼 때 진경산수화는 이전의 산수화에 비해 풍경화에 매우 가까운 그림이다.(98 페이지) '만폭동'은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모았다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전체 구도가 아주 자연스럽다.(99 페이지) 실경과 얼마나 닮았느냐가 진경산수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물음이 아닌 것처럼 이상적인 산수화에 가깝다고 해서 더 나은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화가가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가, 그것이 작품에 어떻게 구현되었는가가 관건이다.

 

정선은 과장과 생략에 능했다. 더 나은 화면을 위해 강조할 것은 강조하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렸다.(100 페이지) 준법(皴法)의 준은 주름 준으로 준법은 산의 주름(굴곡이나 음영)을 그리는 법을 의미한다.(103 페이지) 준법은 실제 산수의 느낌을 잘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준법은 일종의 정형화된 양식이다.

 

정선에게는 변형하든 창조하든 조선 땅에 어울리는 새로운 화법이 필요했다. 산세에 어울리는 준법을 스스로 만들기, 이것이 선배 산수화가들이 정선에게 가르쳐 준 정신이었다. 정선은 실제와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갇히지 않고 화가로서 더 나은 그림을 보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아 나갔다.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준법을 만든 것이다.

 

정선은 자신의 겸재준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준법에 충실할 때 좋은 작품을 남겼다. 준법 사용은 화파 형성의 기준이 된다. 옛 그림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형식이 축화(軸畵)이다.(161 페이지) 두루마리는 옆으로 긴 형식의 그림이고 축화는 위 아래로 긴 형태의 그림이다. 축은 궤() 또는 족()이라고도 불린다.(: 조릿대 족, : 길 궤)

 

화가의 이름과 그림 제목 등을 기록한 것을 관() 또는 관지(款識)라고 한다.(180 페이지) 여기에 인장까지 찍으면 낙관(落款)이라 한다. 삼재(三齋)와 삼원(三園)이 있다. 삼재는 세 명의 문인 화가로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이고 삼원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이다.

 

동양화에서 인장 만큼이나 독특한 요소가 화제(畫題)이다. 제시(題詩)나 찬() 등이 있다.(190 페이지) 동양화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림과 글이 하나의 화면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192 페이지) 그림을 그리면서 어울리는 시를 더하기도 했지만 시나 이야기를 화제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저자는 모른다면 볼 수 없겠지만 안다고 해서 모두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마지막 조각은 자신만의 감상으로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198 페이지) 감상의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선의 동시대 화가 조영석은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조선 산수화의 개벽이라 했다. 반면 추사 김정희는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조선 그림을 망쳐놓았다고 거침없이 혹평했다.(199 페이지) 그림 평가는 기준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200 페이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1-31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01-3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감사합니다..^^
 
나의 부처님 공부
김정아 / 문학아카데미 / 1995년 4월
평점 :
품절


"온 종일 백지 공책에 금강경을 베껴 쓸 수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다. 온 종일 백팔배, 천팔십배, 절을 할 수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사경(寫經)을 한다거나, 기도(祈禱)를 한다거나, 참선수행을 하기 위한 어떤 것도 아니었다. 내 앞에 닥쳐온 고통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것 밖에 다른 어떤 선택을 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그곳에는 원망이나 기원, 황홀경 같은 밖으로 향하는 기운을 내 안으로 돌이켜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덤벼들던 고통의 발톱을 따뜻하게 껴안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오로지 그냥 쓰는 일, 오로지 그냥 절하는 일, 오로지 그냥 앉아보는 일, 나의 부처님 공부는 그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 없으리라 생각한다."

 

시인 김정아 님의 '나의 부처님 공부'의 서문격인 '독자를 위하여'란 제목의 글 가운데 일부이다. 불교방송 구성 작가로 일하며 쓴 글이다.('나의 부처님 공부'가 출간된 지 23년이 지났다. 작가의 근황이 궁금하다. 2003'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을 쓴 시나다 히로코 님의 근황을 물었으나 답을 듣지 못한 이번 달 초의 일이 생각난다.)

 

제목이 인상적인 '나의 부처님 공부'는 불경의 주요 구절들을 일상의 일들로 쉽고 친절하게 풀어쓴 책이다. '독자를 위하여'의 일부이지만 꽤 긴 글을 인용한 것은 이 부분이 '나의 부처님 공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도 유의미하지만 닥쳐온 고통 앞에서 작가가 취한 실존의 몸짓을 알 수 있는 글이고 시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온 종일 백지에 금강경을 베껴 쓰고 백팔배, 천팔십배를 하고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사경도, 기도도, 참선수행도 아닌 것이었고 선택의 여지 없는 어떤 행동이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사경이고 기도이고 참선이 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의미의 사경을 세속적으로는 필사(筆寫)라 할 수 있다. 필사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놀라울 정도로 문장력이 좋아진다고 한다.(해본 적이 없는 나는 확언하지 못한다.) 그럼 사경은 어떨까? 부처님에 대한 간절함이 커지는 한편 문장력도 좋아지지 않을까? 기도나 면벽 참선도 내가 말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종교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나의 부처님 공부'를 선뜻 산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펴보기 위해. 작가는 그런 무목적적 행위의 결과 놀랍게도 그런 행위에는 원망, 기원, 황홀경 등 밖으로 향하는 기운을 자신의 안으로 돌이켜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덤벼들던 고통의 발톱을 따뜻하게 껴안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고 말한다.

 

종교적이기보다 내 마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나도 같은 유의 체험을 한 기억이 생생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냥 쓰고 절하고 앉는 일이다. 작가는 자신의 부처님 공부는 그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의 부처님 공부'의 구성은 동화 속 부처님 일화 한편, 살며 생각하며 한편, 경전 한 말씀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작가는 동화집을 낸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경전 속 한 말씀은 불경의 말씀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한편 어디서부터 읽어도 좋을 독립적인 글들이라는 특성이 있다. '별점'이란 글에서 작가가 인용한 말씀은 '전생담(前生譚)'의 한 구절이다. "행복은 별에 달린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이 인용에 덧붙여 작가는 불교가 점을 봐주거나 운명론을 믿고 따르는 종교라는 인식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맞지 않는 일이라는 설명을 한다.

 

작가는 그렇게 점을 보거나 운명론에 빠지는 원인을 분석한다. 그것은 이 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지나간 일이 알고 싶으면 지금을 보고 앞으로 올 날이 알고 싶으면 지금을 보라는 부처님 말씀을 덧붙임으로써 깨어 있어야 할 당위를 깨닫도록 유도한다.(97 페이지)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은 지난 일의 거울이고 미래의 씨앗이다.

 

'별점'이란 글의 서두는 "지금은 그런 인식이 많이 사라졌지만..."란 글이다. 조심스러운 마음이 읽힌다. 나 역시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이란 전제를 한 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우울증 당사자들에게 호손의 주홍글자를 새긴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애욕에 물들고 분노에 떨고 어리석음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어떤 마음인가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라는 보적경(寶積經)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 '괴로움과 맞서는 용기'라는 글은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즉 생각을 일으키기 전 깨끗한 우리의 본래 마음을 의미하는 본바탕 진심('선가귀감' 참고)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은 망상일 뿐 정진이 아니라는 말씀에 대한 글이기에 그렇다. 이는 금강경의 무주상(머물지 않는 마음)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작가는 게으른 사람은 항상 뒤를 돌아보는데 이는 스스로 자신을 포기했음을 의미하고 뒤돌아 본다는 말은 과거의 어느 생각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한다고 말한다. 이 글에는 이런 부분도 있다. 괴로운 일이 생기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야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순간적으로 괴로운 마음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산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작가의 결론이 압권이다. "사실 마음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 괴로움과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기도 하고 악수도 하고 같이 뒹굴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괴로움은 실체가 없는 일이어서 정면으로 마주보기만 해도 그 힘이 약해져 결국 흔적없이 사라지고 맙니다."(115 페이지)

 

'날마다 좋은 날'이란 글도 의미심장하다. 이 글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못이 없으면 망치는 망치로서의 제일 큰 기능 하나를 잃는 것처럼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도 피아노 조율사가 있어야 빛나고 훌륭한 의사도 환자를 운반할 구급차 운전기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119 페이지)

 

작가는 아무리 자기 존재를 무가치하게 낮추려 해도 우리는 무엇인가 일을 하고 있으며 단지 그 일을 떠나 다른 어떤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가 보내는 시간은 날마다 편안한 날, 날마다 좋은 날이 될 것이라 말한다. "오로지 그냥 쓰는 일, 오로지 그냥 절하는 일, 오로지 그냥 앉아보는 일"이란 작가의 모토가 생각난다.

 

'평등'이란 글은 파격적이다. '보문문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남녀는 모두 평등하다. 하늘과 땅, 천지가 낳은 것이 무엇이 다를 것인가" 작가에 의하면 부처님은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두지 않으며 다만 불성만을 가장 존귀하게 여긴다고 가르치셨다.(213 페이지)

 

살며 생각하며의 한편인 '마음의 힘을 기른다'도 작가의 지론을 잘 드러내는 글이다. 문학작품 읽기, 공연예술 감상하기, 사색, 자연과의 교감, 경건함에 대한 외경심, 참선과 명상, 아름다움에 대한 황홀감.. 등이 우리의 마음을 기르는 진정한 교재이며 영양식이라는 글을 인용하며 작가는 아침 저녁으로 모든 생각을 놓고 단 10분만이라도 앉아볼 것을 권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공부이리라.

 

작가는 스승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스승인 부처님을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속가(俗家)에 사는 저희 또한 인류의 큰 스승이신 부처님을 만나 자신을 찾는 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그 은혜로움이 한이 없고(219 페이지)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많은 인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믿고 의지한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새삼 깨우쳐 보게 된다(231 페이지)는 것이다. 시간 날 때 틈나는대로 힘들 때 찾아 읽을 책으로 '나의 부처님 공부'를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 연구
이미옥 지음 / 박문사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옥(李美玉)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 연구는 구성주의, 유동(流動) 의식을 가진 디아스포라, 현상학 등 세 단어를 키워드로 하는 책이다. 구성주의란 타자 체험과 관계된 말로 타인의 시점으로 세계를 조망하고 현재를 수렴해가는 것, 자신의 좌표를 설정해 나가고 주체를 구성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유동 의식은 고향 상실이 아닌 고향을 설정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현상학이란 주체의 의식을 흐름을 추적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그간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 시인, 저항 시인 등으로 알려져 왔고 분석되어 왔다. 저자가 이 책에서 한 작업은 윤동주 시인의 의식의 변모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윤동주는 북간도 시인이다. 북간도는 윤동주의 물리적 고향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그는 북간도 이후 평양, 경성(연희전문), 동경에 이르는 이동 궤적을 보였다. 저자는 윤동주가 저항 시인이라는 연구에 대해 실제 그가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없음을 설명하며 그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음을 언급한다.

 

흥미로운 점은 물의 심상에 주목한 연구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본격적 작품 분석에 앞서 시대적 상황을 해석에 개입시키면 온당한 해석에 도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윤동주 시인을 디아스포라란 키워드로 분석한 시론들도 식민지 문제를 강조하고 있음을 주지시키며 식민지 문제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디아스포라 의식의 측면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고 전제한다.

 

저자는 디아스포라 문제를 디아스포라 정체성보다는 디아스포라 의식의 문제로 보고 그것을 주요 이론 틀로 세워 전개해 나갔다고 밝힌다. 디아스포라 정체성은 디아스포라 개인의 상황과 환경 등에 따라 다양한 층위로 구분할 수 있는 분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디아스포라 의식은 디아스포라 개인이 경험한 사유의 모든 지점을 포괄할 수 있는 수렴적 특성을 갖는다.(17 페이지)

 

저자는 디아스포라 개인과 타자가 한 공간에서 만나 발생할 때 생성되는 의식의 변용을 디아스포라 의식으로 설명한다.(22 페이지) 저자는 디아스포라에게 있어서 타자는 일상화된 개인이 아닌 거대한 구조 체계라 말한다.(23 페이지)

 

저자는 디아스포라는 역사적 산물이지만 의식의 작용은 내재적임을 언급한다. 즉 그것은 디아스포라가 처한 세계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생성, 발전하며 그 자체의 의식 자기의식의 뿌리와 연동하여 작용하는 것이다.(2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디아스포라 의식의 확대는 공간이나 시간, 가치 조망의 확대를 가져온다. 이런 확대는 시적 언어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26 페이지) 저자는 모국이라는 상상적 질서가 결코 현실에서는 질서화될 수 없음을 식민지라는 극단적 경험을 통해 확인한 윤동주는 자기 소외를 통해 만주에서도 모국 조선에서도 충족되지 못한 자기성을 구축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27 페이지)

 

윤동주의 디아스포라 의식은 디아스포라 경험에 기초하여 발현되는데 초기에는 외부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순수의식을 보여준다면 후기로 갈수록 점차 자기 부정의 균열과 모순을 드러냈다.(28 페이지) 저자는 윤동주의 디아스포라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방법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난점이 대두됨을 언급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현상학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30 페이지)

 

윤동주의 정신적 모태인 명동촌이 북간도에 세워진 것은 1899218일의 일이다.(36 페이지) 윤동주는 만주를 거쳐갔던 다른 국내 시인들(백석, 이용악, 유치환, 이육사, 서정주 등)에 비해 오히려 만주에 대한 의식이 덜 반영되어 있다.(3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윤동주의 만주에서의 삶에는 유랑의 고통이 체험되어 있지 않다. 환경이 넉넉했고 일제 식민지의 영향을 덜 받았고 북간도가 민족 공동체적 공간이었다는 점 등 때문이다.

 

윤동주로 하여금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게 한 평양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었다. 이에 윤동주는 만주로 돌아가 광명학원에 입학하는데 이 학교는 철저한 친일 학교였다. 연전(延專: 연희전문)으로의 유학, 모국과의 만남은 윤동주 일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53 페이지)

 

연전에 오기 전까지 윤동주는 상상적 고향에 대한 추구를 보여왔다.(61 페이지) 윤동주는 자화상이후 12개월 간 절필한다. 이 시에는 우물 물 즉 거울이 나온다. 저자는 라캉의 견해를 받아들여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은 자기의 모습이지만 이 바라봄을 통해 주체는 안과 밖을 구분하고 타자와 그 타자들로 구성된 세상을 응시한다고 말한다.(70 페이지)

 

저자는 욕망의 대상이 실재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과정은 죽음과도 맞닿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말한다.(81 페이지) 라캉에 따르면 대타자를 상실한 실재계는 주체의 결여를 뜻하며 이는 자아의 죽음이란 측면에서 죽음의 충동과도 이어진다.(81 페이지) 이 상황에서 윤동주는 희생을 선택한다. 이는 윤동주가 외적 인격 즉 페르소나를 추구했음을 의미한다. 페르소나는 타인과의 관계설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격의 또 다른 모습이다.(82 페이지)

 

윤동주가 모델로 삼은 예수(‘십자가’)와 프로메테우스(‘’)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어로 개념화된 수많은 시간 가운데 윤동주는 항상 밤에 주목하고 있다. 밤은 윤동주에게 있어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시간이다.(93 페이지) 윤동주에게 있어 출구가 없는 현실은 모국에 와서도 정작 모국을 되찾을 수 없는 시대적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의미한다.(94 페이지)

 

저자는 평양 만주 경성 일본 등으로의 이동을 통한 물리적인 거리는 상대적인 그리움을 유발시킨다고 말한다. 영원한 고향이란 없으며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의 이동은 존재론적인 탐험과도 같다.(107 페이지)

 

저자는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바람이란 시어를 디아스포라적인 원류인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한다.(110 페이지) 저자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디아스포라 의식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표현한다.(121 페이지) 이 시에는 윤동주의 전체 시 가운데 가장 많은 대상들이 등장한다.(122 페이지)

 

저자는 시공간적인 움직임이 급류처럼 흘러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자신의 고정된 위치가 없이 눌 불안하고 초조한 헌대인들 또한 넓은 의미의 디아스포라라 말한다. 저자는 그런 이유로 윤동주가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고 결론짓는다.(131 페이지)

 

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 연구는 문제의식이 참신하고 논의가 성실한(설득력 있는) 책이다. 물론 윤동주가 사랑받는 이유는 디아스포라적 공통성 때문이라 단정지을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윤동주가 디아스포라적 시인임은 분명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저항, 순수 등의 키워드로 인해 지지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 빼앗긴 자들을 위한 탈환의 정치학
채효정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는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해직 강사 채효정의 책이다. 이 책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교원도 아니고 노동하지만 노동자도 아닌 대학 강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우리는 가장 손쉽게 절감할 수 있는 비용이었고 가장 효율적으로 평가 지표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15 페이지)고 말한다.

 

저자는 교육자성과 노동자성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프레임은 교사든 교수든 강사든 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깨뜨려야 한다고 말한다.(19 페이지)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학교가 선생님을 해고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강의를 요청하겠다.”는 누군가의 주권적 제안으로 20161026일부터 1214일까지 매주 수요일 강의실 밖 잔디밭에서 진행한 열린 강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대학 당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자신의 불철저함에 대한) 반성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University의 어원을 예로 들며 자급하고 자립할 수 있는 단위를 가지고 그 안에서 공동체의 자치를 이루어 가는 모든 곳을 나라라고 정의(28 페이지)한 뒤 이곳이 정치의 장이 아닌 것 같지만 반드시 정치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공간이기에(31, 32 페이지) 대학은 나라이고 하나의 작은 폴리스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32 페이지)

 

저자는 대학을 대학으로 존재하게 하려면 대학으로서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3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대학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저자는 대학에서 쫓겨난 자신의 처지가 학생들의 머지않은 미래라고 말한다. 정치철학자인 저자는 그에 맞게 고대 민주정에서 민주주의를 이루는 세 요소를 언급하며 대학과 기업의 차이를 논한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라 대학다워야 한다는 취지에서다.(이소노미아, 이세고리아, 이소크라티아가 그것이다. 이소노미아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고 이세고리아는 똑같이 발언할 수 있는 권리이고 이소크라티아는 동등한 힘을 갖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책임지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라 말한다.(39 페이지)

 

저자는 비전임 교수가 전임 교수보다 훨씬 많고 비전임 교수 중에서 시간 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60퍼센트를 차지하는데 강의를 개설하거나 배정할 때 실제 강의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적이지 않다고 말한다.(41 페이지)

 

박정희 정권이 비판적인 지식인들과 젊은 소장 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법을 개정하고 강사들을 교원에서 제외시켰음을 상기시키며 저자는 21세기 대학은 엔클로저, 젠트리피케이션 등이 일어나는 장소로 정의한다. 우리나라 사립대학은 국민의 세금인 공공 자원이 투입되기에 공공재이다.(엔클로저는 대학을 사유재로 봉쇄하는 것이다.)

 

대학은 모두의 것이다. 우리의 대학, 우리의 공화국을 자본으로부터, 국가로부터, 소수의 지배로부터 구해 내는 일이 필요하다.(49 페이지) 저자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만드는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로 정의한다.(53 페이지) 저자는 민주주의를 시민의 정치가 아닌 노동자의 정치로 정의한다.(56 페이지)

 

저자는 인문학을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과학, 실천 등 다방면의 길을 통한 인간의 자기 해명과 자기 인식으로 정의한다.(57 페이지) 저자는 2() 노동 없는 대학에서 노동()에 적대적인 사회 환경을 문제삼는다. 대학 역시 노동()에 적대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시수라는 말이 있다. 이는 1학점에 대해 인정하는 강의 노동 시간을 말한다.

 

시수당 51,000원의 강사료를 받는 경우를 보자. 시수에 대한 노동 시간을 계산할 때 통상 3을 곱한다. 1학점 강의를 할 때 사전 사후 강의 시간이 앞뒤로 최소 한 시간씩은 더 들 것이기 때문이다. 1 시수는 대략 세 시간 노동으로 인정받는 셈이니 51,000원 나누기 3을 하면 시급은 17,000원으로 계산된다.

 

그런데 대학 교원으로서 강사는 강의 뿐 아니라 연구를 하고 학생도 만나는데 연구에도 시간이 들고 학생 상담 지도에도 시간이 든다. 1 시수당 아홉 시간의 노동 시간이 소모되는 것이다. 그렇게 계산하면 시간당 5,600원을 받는 것이니 최저 임금보다 못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이다.

 

저자는 독재자의 반대편에 섰다고 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민중의 편에 서야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노동자 의식을 가지고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 때 민주공화국이 되는 것이다.(70 페이지) 저자는 뒤로는 이권을 챙기면서 박근혜, 최순실의 나라에서 잘 살았던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감옥에 갇혀 가며, 한 농민은 쓰러져 죽으면서까지 정권을 때려눕혀 놓으니까 죽은 개 위에 올라 타 민주주의자인 척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3강에서 저자는 1987년 민주 대항쟁과 2016년 촛불 집회를 대비하며 투쟁 현장에서 학생들(사회화된 집단으로서의 대학생)이 사라진 원인을 분석한다.(1987년에는 매일 데모를 했다. 2016년에는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만 시위했다. 학생들도 학교에 가지 않으면 학사 경고 받지만 단체로 가지 않으면 자를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과거에는 등록금을 교육에 대한 대가로 생각했지만 오늘날은 등록금을 상품 구매 형식으로 생각하는 변화를 이야기한다.(등록금으로 학점을 사고 학위를 사는 것이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도 어떻게 보면 학생들을 으쓱하게 만드는 브랜드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93 페이지)

 

교육이 상품 구매 행위로 이루어짐으로써 학생이 소비자가 되면 고육의 주체이자 정치적 주체로서의 학생 존재가 사라진다.(94 페이지) 학교는 학생을 돈으로 보고 학생은 자신이 낸 돈 만큼 가져가겠다고 하는 관계에서는 참된 교육도 우정의 관계도 성립할 수 없다.(95 페이지) 권리를 이익으로 환원하고 개인화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극단적 개인주의를 통해 공동체를 파괴하는 길이다.(105, 106 페이지)

 

저자는 취업의 대안을 창업으로 설정한 현실을 비판하며 1인 기업체의 사장이란 것이 실은 자기 회사의 노동자인데 기업가와 노동자라는 이중적 존재를 하나의 몸 안에 체현한 이들에게 노동자라는 것은 쏙 빼고 사장님만 강조하는 비정상을 지적한다.(114 페이지) 대학에는 다시 대학생이 필요하다. 이 사회도 다시 대학생을 필요로 한다.

 

대학생들이 먼저 대학 안에서 싸워야 한다. 학생 사회가 해체되면 대학에서 사회의 공공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단위가 해체되는 것이고 전체 사회로 볼 때도 결정적으로 불리하다.(120 페이지) 4강 교수 없는 대학에서 저자는 지식인을 단지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해서만 지식을 가진 기술직 전문가가 아니라 총체적이고 통찰적인 앎, 전일적인 앎을 갖춘 사람으로 정의한다.(125 페이지)

 

저자는 교수와 학생이 편의점 점원과 손님처럼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가 된 지 꽤 오래인 것 같다고 지적한다.(132 페이지) 저자는 대학 교수가 하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 순위인지 묻는다. 연구 강의 사회실천이 아니라 강의 연구 사회실천의 순서이다. 저자에 의하면 교수는 존재론적으로 정의상 강의하는 사람이다. 학문과 지식의 시작은 교육이고 그 교육의 시작은 말이다.

 

배움이 서로 배움인 것은 서로 마주 보고 선 사람이니 가능한 것이다.(135 페이지) 강의는 항상 연구를 수반한다.(137 페이지) 그런데 오래 통합되어 있던 연구와 강의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분절이 생기기 시작했다.(138 페이지) 연구중심대학은 소련으로부터 스푸트니크 쇼크를 당한 미국이 군산학 복합체 연구 단위를 중심으로 우주 개발, 군비 확장 등을 위해 국가가 나섬으로써 비롯된 제도이다.

 

이 시스템은 엄청난 대학 관료 시스템을 낳았다. 대학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죽은 것은 학진(학술진흥재단) 체제와 더불어서이다. 학진은 1981년 교수들의 연구비 지원을 위해 교육부 산하기관으로 출범했다. 문제는 학진이 거대 권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권력과 지식 엘리트들은 공생관계가 되었다. 대학에서 가장 많이 지원되는 분야는 곧 가장 많은 자본이 투자되는 시장 영역이다.(155 페이지)

 

]저자는 대학을 공공재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국가 예산을 시장성이 없지만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분야에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155 페이지) 지금 대학은 더 큰 프로젝트를 따오는 교수들이 금권을 얻고 발언권을 얻는 구조가 되어 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상황을 맞고 있다. 돈에 길들여진 것이다. 상상력이 빈곤해진 것이다. 돈의 노예가 되면 연구의 자율성은 포기될 수 밖에 없다.

 

산학협력과정에서 교수들은 외부적으로는 업자이고 내부적으로는 관료화된다.(158 페이지) 저자는 교육과 학문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연구 결과물을 만인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한다고 말한다.(160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알아볼 수 있게 교육과 학문 연구 결과물을 민중의 언어, 시민의 언어, 일반의 안어로 번역하는 과정까지를 국가 서비스로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160, 161 페이지)

 

피해는 만인이 보고 이익은 특정한 사람들이 챙기면서 불상사가 나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테크노크라시를 해체해야 한다. 연구 결과물에 대해 강력하게 책임지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161 페이지) 저자는 입학 성적이 대학 교육의 결과가 아닌데 그 성적이 대학 서열화의 기초가 되는 것을 모순으로 선언한다.(171 페이지)

 

저자는 공공성의 원리가 깨지면 대학 교육은 공동체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개인들이 자신에 대해 투자하는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174 페이지) 대학 교수의 임금이 교사보다 높은 이유를 그들이 그만큼 오랜 교육 기간 동안 금전적, 시간적으로 투자했기 때문이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을 공동체 교육이 아닌 개인의 자본 취득 과정으로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174 페이지)

 

저자를 통해 우리는 백화점의 인문 교양 센터와 차별성이 없는 대학 교양 교육 과정이란 인문학 앵벌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식의 인문학 붐은 좋지 않다. 인문학의 대중화는 인문학의 상품화와 다르지 않다.(184 페이지) 오늘날의 인문학은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중산층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속물주의적 교양으로 전락한 면이 있다.(185 페이지)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인문학의 생명은 저항성과 비판정신임을 확인한다.(187 페이지) 저자는 대학을 정치의 장소로 본다.(20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성직자와 관료, 귀족들을 양성하는 제도권 대학들이 대부분 산속 수도원에 있었던 반면 그 성스러운 캠퍼스를 박치고 나와서 철학과 법학 같은 세속의 학문을 커리큘럼으로 삼고 자유학예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대학들은 도시의 거리와 장터 광장 옆에 자리 잡았다.

 

대학이란 공간은 사회의 아고라, 포럼 역할을 해야 한다.(204 페이지) 모두의 일인 공공 사안을 민주적으로 처리하는 민주 공화국인 대학에는 반드시 정치(대학 구성원들 전체가 의견을 모으고 이 대학이 나아갈 좌표를 함께 결정하고 결정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가 있어야 한다.(205 페이지)

 

우려할 것은 통치가 정치를 대신하는 현상이다. 정치의 시작은 해결할 수 있는 권위자에게 답을 구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머리를 맞대고 동그랗게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213 페이지) 시민은 도시민(都市民)도 아니고 신민(臣民)도 아니다, 시민은 정치적 존재이다. 국민은 정치적 존재가 아니지만 시민은 정치적 존재이다. 그래서 시민에게는 거부권이 있다.(223 페이지)

 

시민이 된다는 것은 정치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누구의 편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22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중립은 절대 민주주의가 아니다. 아테네에서 민주정이 처음 탄생했을 때 솔론이라는 사람이 민주의 요구를 받아서 정리한 개혁안이 있는데 그 내용에는 내란이 있었을 때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사람은 시민권을 박탈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 이야기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솔론편에 나온다.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지켜보다가 이기는 놈의 편을 들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227 페이지) 저자는 편()과 선(), 두 가지만 기억하라고 말한다. 정치적 주체가 되는 것은 누구의 편이 되는 것이고 선을 넘지 않으면 끝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235 페이지)

 

주인 없는 대학은 정치 없는 대학이라는 말이기도 하다.(238 페이지) 저자는 마지막 강인 대학의 탈환에서 너의 집권은 나의 실권, 나의 집권은 너의 실권으로 보지 말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더 많은 사람들의 것이 되도록 권력의 지형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전제하며 어떻게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힘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탈환 전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77 페이지)

 

공학적으로 생각하면 힘은 어디서 어디로 이동할 뿐 커지거나 줄어듣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힘은 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생기기도 한다. 저자는 2016, 2017년의 촛불이 정치 세력화하지 않았다고, 촛불은 정치의식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광장의 촛불이 자기 동네, 자기 회사, 자기 공장, 자기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 100만의 힘으로 작은 박근혜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이다.(283 페이지)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서는 절대로 정치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287 페이지)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거론하며 40년 전 이야기로부터 우리의 시대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 것인가, 묻는다.(295 페이지)

 

저자는 사적 이익을 위한 투쟁처럼 보일까봐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에는 교과 개편 재검토와 강사 처우 개선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자신의 강의는 포기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대학 교육과 제도 문제, 시간 강사 제도의 부당함 등 객관적인 부분에 집중할수록 공허해졌다고 말한다.

 

저자는 생존권 투쟁이라는 것을 정치, 사회적 구조를 바꾸려는 근본적 투쟁으로 보지 않고 오직 먹고 살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경제적 투쟁으로만 보는 관점이 정당한지 묻는다.(300 페이지) 저자는 밥그릇 싸움은 저차원적이고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는 투쟁은 고차원적이냐고 묻는다.

 

저자는 밥그릇 싸움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투쟁이라 정의한다. 밥 한 그릇에 담긴 것은 배불릴 양식만이 아니라 삶을 지킬 주권과 존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전히 자신은 이 대학의 철거민, 난민, 몫이 없는 자로 서 있지만 또한 싸우는 사람으로 서 있다고 말한다.(306 페이지)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20176월 출간된 책이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해 읽은 것은 출간일로부터 7개월이 지난 최근에서이다. 그 이후 저자의 투쟁에 결실은 없었던 것 같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여전히 피켓을 들고 선 저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지금도 그는 국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나는 그의 페이스북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선생님,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많이 (선생님의 주장에) 공감하며, (대학 당국의 무책임하고 뻔뻔한 대응에) 분개하며 읽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의 실상, 대학의 구조적 모순, 정치와 민주주의 등 근본적인 개념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고 상투적이지만 힘 내시라는 말만 하게 됩니다.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경의 불온한 인문학을 읽은 이래 인문학의 본령을 비판정신과 저항이라 표현한 책을 만난 것이 소득이다. 요즘 인문학이란 말을 불편해 하는 나에게는 시의적절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어 감사하다.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중산층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속물주의적 교양으로 전락한 인문학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깊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