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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웅(吳經熊)의 ‘선학의 황금시대’에 시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일화가 나온다.

한 할머니가 덕산 선사에게 금강경은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에 점심을 들자고 하시는 것이냐, 대답을 잘 하면 점심을 공짜로 드리겠다는 제의를 했는데 답을 못한 선사는 점심을 얻어 먹지 못했다는 일화이다.

선사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우리는 밥을 먹는 것이지 시간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학의 황금시대‘라는 불교 철학의 정수가 말하는 시간에 대한 결론과 일치하는 내용이 물리학과 뇌과학을 전공한 슈테판 클라인의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에 나온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절대 시간은 없다는 결론이다. 물론 우리는 정확하게 지정되는 표준 시간에 따라 자신들의 일정을 맞춘다.

하지만 하는 일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면 생활 패턴이나 리듬, 속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절대 시간이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너무나 다양한 삶의 여건과 처지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는 의미이다.

자신만의 리듬을 찾고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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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로움을 열망하는 마음이 이 만큼 강합니다‘로 요약 가능한 말을 하지만 내 삶의 대체(大體)는 기존의 편안함과 익숙함에 물들어 있는 듯 하다.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내 이의 제기는 거품 같은 불만의 반영이고 열등감의 표현인 듯 하다고 말해야겠다.

앞서 갈 능력도 없으면서 화려함과 색다름에만 눈길을 준 것 같다고 말해야겠다.

색다름과 새로움도 기본을 쌓은 후의 일이고 체계 안에서 추구해야 하는 일이란 생각을 한다.

이상민 작가의 ’책쓰기의 정석‘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책을 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결핍이나 열등감이나 절박함이 있다는 것이다.”(129 페이지)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고 또 공감한다. 하지만 나와 이상민 작가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상민 작가는 평범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주역(周易)을 쓴 사람에게는 큰 우환(憂患)이 있었을 것이란 말을 떠올리며 내 다독(多讀)의 이유를 분석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박정대 시인이 ’달‘이란 시를 통해 표현한 “무너진 언덕 너머에” 있다는 “어디로도 가려 하지 않는 바람과 배 한 척”이란 말을 나에게 적용시켜 본다.

책을 많이 읽기에 심심치 않게 책을 써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듣는다.

오늘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불현듯 한 것은 어설픈 시연 결과 때문이다. 이상민 작가는 책을 많이 읽었음에도 작가가 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용기가 없어서라고 말한다.(같은 책 ’145 페이지)
이제 나는 불안을 견디는 용기를 내야 할 것이다.(자가自家 정신분석을 닮은 이 글을 쉬이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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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가는 곳이 아닌 곳도 대안이나 보완재의 의미로 갈(行) 필요가 있다.

해설 자료로 쓸 사진을 출력하려는 중에 우연히 자주 가는 교보문고가 아닌 영풍문고에서 스마트폰 사진 출력 기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성공적으로 석 장의 사진을 출력했다.

프린팅박스라는 어플을 설치하고 회원가입을 한 뒤 원격조정되는 시스템에 따라 출력하면 되는 간펀한 프로그램의 혜택을 본 것이다.

스마트폰을 일부러 늦게 구입한 지 이제 10 개월 정도 되었는데 이런 편리는 반갑기만 하다.

아침 열 한시쯤 집을 나서 바로 그 영풍문고에서 해당 프로그램으로 사진을 출력하고 밥을 먹고 창덕궁에 두시쯤 도착해 폭염 속에서 두 시간 넘게 리허설을 했다.

고치거나 보완할 것을 메모한 뒤 걸어서 정독도서관까지 가서 문서 작업을 하고 인쇄를 한 뒤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이다.

지난 7월 22일에서 25일까지 만 나흘간 극심한 피로와 두통, 현기증 때문에 꼼짝하지도 못 하는 등 6월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7월 2일 아침까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 할 정도의 무력감과 그로부터 기인하는 난감함에 마신 현미송엽흑초(玄米松葉黑醋)가 이렇게 큰 선물이 될 줄 몰랐다.

첫 만남에서 내가 마신 것은 우유 200밀리 리터에 탄 소주잔 한 잔 분량의 현미송엽흑초였다. 이 작은 양으로도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난 것이고 그 첫 사건 이후 내가 마신 것은 여섯 잔의 현미송엽흑초였는데 그 이후 내 머리는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팔꿈치나 어깨 수술을 받은 투수가 재활 후 전력 투구를 하는데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원하는 만큼 책을 읽고 글을 써도 아프지 않은 정도이다.

다만 나희덕 시인의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란 시처럼 시연을 겨우 사흘 남겨둔 시점에 경험하게 된 사건인 것이 아쉽다.

물론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좀 더 일찍 현미송엽흑초를 만났다면 시나리오를 더 쉽게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나는 짧게 쓸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 길게 썼다는 파스칼의 선언을 응용해 쉽게 쓸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 어렵게 썼다는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내게 일어난 반전이 더는 심화되지 않고 현상 유지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피가 잉잉거리던 병은 이제 다 나았다는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음미하는 귀로(歸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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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와 마음’, ‘미술관으로 간 붓다’의 저자이신 명법 스님의 페북 글을 읽었다. 많은 생각을 하며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며 읽었다.

많은 생각을 한 만큼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에게 참고점이 되는 것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스케줄에 ‘어떻게든 6월만 넘기자‘란 생각을 하셨다는 글, “여기저기서 실패했던 경력들이 이 소임에 필요한 경험들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하신 말씀, ”평생을 두고 하실 일”이란 말씀 등이다.

지난 나의 2017년 6월은 네 권으로 책을 역대급으로 가장 적게 읽고 리뷰를 쓴 달이었다.

내 처지가 식음을 폐하고 엎드려 있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책없는 무인도에 갇힌 사람 같기도 했고.

책에 의지해 겨우 바보를 면하는 나에게 책은 말할 필요조차 없이 중요한 것이다.

일이 바빠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서였으니 겹으로 아팠다.

이동순 시인의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는 시집 제목이 나에게 들어맞는 상황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궁즉통이라고 어제 드디어 마음만 먹고 있던 요법을 시행했다. 결과는 그렇게 생각을 해서는 아니고 정말 드라마틱하게 통증과 현기증이 가벼워졌다.

결과론이지만 그간 내 선택은 허수경 시인의 시어처럼 ˝각각 따로˝인 ˝치병과 환후˝였다고 말할 만하다.

무엇보다 희망스러운 것은 호전된 퀄리티가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조심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호사다마(好事多魔)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각설(却說)하고 스님께서 하신 “여기저기서 실패했던 경력들”이란 글에서 얻은 위로와 함께 내게는 너무 큰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면 된다는 깨달음으로 인한 위로와 천혜(天惠)의 선물인 약(藥)으로 인한 실제의 무엇.

그런가 하면 평생을 두고 할 일이란 말씀으로부터 나는 내 이상(理想)을 발견한 마음에 자신감까지 얻었다.

물론 어제의 호사(好事)들이 단발성으로 끝나더라도 다시 도전하고 모색하고 다시 희망할 것이다.

7월은 밀린 책들이 나를 부르는 첫 달이 될 것이다. 스님께 감사드리고 천혜의 선물에 대해서는 놀라움의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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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6일 경복궁 경회루 2층에서 본 그물을 창덕궁 돈화문 처마에서도 보았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거리라도 되느냐 묻는 말씀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그 그물을 부시(罘罳)라 한다고 하네요.(그물 부, 면장面墻 시) 새가 날아들지 못하게 하는 그물이라네요.

경회루에서 듣기로는 새가 날아들면 지저분해지기도 하고 어린 생명이라도 생길 경우 뱀이 침입해 살생을 할 수도 있으니 궁궐에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 그물을 친 것이라 합니다.

당시 제가 물었습니다. 궁 밖에서는 살생이 일어나도 되는 건가요? 해설사는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 외에는 새 답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난감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궁궐 (그물)이 살생 자체를 막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궁궐이 자신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살생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그것까지 책임지고 생각할 의무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 창덕궁 외전(外殿) 시연에서 부시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제가 이의를 제기했으면서도 경회루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넣은 것입니다. 아, 저도 같은 해설을 하는 것이 된 셈입니다.

오만하지만 악보(현악4중주 16번 4악장)에 ‘그래야만 했나?(Muss es sein?)’라는 말과 ‘그래야만 했다!(Es muss sein!)’는 자문자답을 적어놓은 베토벤 생각이 납니다.

베토벤으로서는 선문답 같았겠지만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다 이루었다(Es ist vollbracht)‘는 말씀을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로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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