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곳이 아닌 곳도 대안이나 보완재의 의미로 갈(行) 필요가 있다.

해설 자료로 쓸 사진을 출력하려는 중에 우연히 자주 가는 교보문고가 아닌 영풍문고에서 스마트폰 사진 출력 기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성공적으로 석 장의 사진을 출력했다.

프린팅박스라는 어플을 설치하고 회원가입을 한 뒤 원격조정되는 시스템에 따라 출력하면 되는 간펀한 프로그램의 혜택을 본 것이다.

스마트폰을 일부러 늦게 구입한 지 이제 10 개월 정도 되었는데 이런 편리는 반갑기만 하다.

아침 열 한시쯤 집을 나서 바로 그 영풍문고에서 해당 프로그램으로 사진을 출력하고 밥을 먹고 창덕궁에 두시쯤 도착해 폭염 속에서 두 시간 넘게 리허설을 했다.

고치거나 보완할 것을 메모한 뒤 걸어서 정독도서관까지 가서 문서 작업을 하고 인쇄를 한 뒤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이다.

지난 7월 22일에서 25일까지 만 나흘간 극심한 피로와 두통, 현기증 때문에 꼼짝하지도 못 하는 등 6월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7월 2일 아침까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 할 정도의 무력감과 그로부터 기인하는 난감함에 마신 현미송엽흑초(玄米松葉黑醋)가 이렇게 큰 선물이 될 줄 몰랐다.

첫 만남에서 내가 마신 것은 우유 200밀리 리터에 탄 소주잔 한 잔 분량의 현미송엽흑초였다. 이 작은 양으로도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난 것이고 그 첫 사건 이후 내가 마신 것은 여섯 잔의 현미송엽흑초였는데 그 이후 내 머리는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팔꿈치나 어깨 수술을 받은 투수가 재활 후 전력 투구를 하는데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원하는 만큼 책을 읽고 글을 써도 아프지 않은 정도이다.

다만 나희덕 시인의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란 시처럼 시연을 겨우 사흘 남겨둔 시점에 경험하게 된 사건인 것이 아쉽다.

물론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좀 더 일찍 현미송엽흑초를 만났다면 시나리오를 더 쉽게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나는 짧게 쓸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 길게 썼다는 파스칼의 선언을 응용해 쉽게 쓸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 어렵게 썼다는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내게 일어난 반전이 더는 심화되지 않고 현상 유지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피가 잉잉거리던 병은 이제 다 나았다는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음미하는 귀로(歸路)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