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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개천에서 용나면 안 된다‘를 읽다가 우연히 재미 삼아 해본 나의 상위 여섯 가지 자질 알아보기.

내 자질로 나온 것들은 1) 절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내치지 않습니다. 2) 절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3) 언제나 희망을 품습니다. 4) 항상 사람들을 믿어줍니다. 5) 감성 지능이 높습니다. 6) 매우 재미 있습니다 등이다.

대체로 이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물론 갑질과 대체로 무관한 나의 이력은 나의 낮은 사회적 지위나 힘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다만 말할 수 있는 점은 나의 이런 무지위적 삶은 어느 정도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를 싫어한 결과란 점이다.

강준만 교수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은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코리안 드림의 토대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신분 서열제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왜곡된 능력주의‘ 즉 갑질이라는 실천방식을 내장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문제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은 각개전투 사회의 시스템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용과 미꾸라지를 구분해 차별하는 신분 서열제를 깨거나 완화하는 동시에 개천 죽이기를 중단하고 개천을 우리의 꿈과 희망을 펼칠 무대로 삼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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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만해의 ‘알 수 없어요‘의 한 구절을 들춰 본다.

이 부분에서 의미 있는 구절은 언뜻이란 말이다.

좀 더 말하자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이란 구절이다.

언뜻은 잠깐 나타나거나 문득 생각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인데 다른 부분도 아닌 이 시의 그 부분을 인용하는 이유는 책 한 권을 전부 읽고 리뷰를 쓰던 습관을 지양(止揚)하고 부분 부분을 읽고 생각 거리를 얻는 내 행태(行態)가 마치 언뜻 언뜻 보이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을 통해 푸른 하늘을 보는 것 같아서이다.

아니 지양한다기보다 전부를 뜯어 먹기 힘든 책이 점점 많게만 느껴져 이제는 책 속을 어슬렁거리다가 이거다 싶은 구절이 있으면 눈을 굴려 사람을 만들 듯 생각을 붙여나가 글 한편을 만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뜯어 먹기 힘든’이란 말은 노혜경 시인의 ’뜯어 먹기 좋은 빵‘이라는 시 제목에서 따온 말이다.

소설에 비유해 책을 말하자면 대개의 것들은 장편이 아닌 소설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단편들을 하나로 묶은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의미이다.

전체를 다 읽고 리뷰를 쓰는 것도 좋지만 단편적인 부분들을 읽고 단상 형태의 글을 쓰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김행숙 시인의 평론집 ’천사의 멜랑콜리‘도 그런 방식으로 읽는다.

’우리가 엄마, 언니, 소년소녀를 불렀을 때‘란 글에서 나는 무엇 무엇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구절과 어쨌든이란 구절(을 시인이 쓴 것)에 주목한다. 내가 자주 쓰는 어법이기 때문이다.

무엇 무엇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구절은 사랑스런 엄마와는 다른 초자아(超自我: 금지하고 억제하는)적인 엄마로 소개된 기형도 시인의 ’바람의 집 – 겨울 판화‘의 “어머니“ 때문에 있게 되었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시인은 초자아로 군림하는 무서운 어머니의 단초를 ’바람의 집 – 겨울 판화‘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201 페이지)

지난 화요일(7월 11일) 백범 기념관에서 동기(同期) 모임을 가졌다. 잘 알다시피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을 독립운동가로 키운 강한 어머니이자 그 자신 독립 운동까지 하신 분이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어떤가. 이 분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으로 옥에 갇힌 아들에게 ”장한 아들 보아라.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란 편지를 쓴 분이다.

불온한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분들의 (슬픔과 아픔을 이긴) 강함을 초자아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나는 초자아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식의 상투(常套)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

이를 위해 이철송의 ’황지우와 박노해, 증상과 욕망의 시학‘을 읽을 필요가 있겠다. 말 그대로 참고서로.

저자 이철송은 노동자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박노해의 시적 실천은 정확히 정신분석학적 처방이라 말한다.

이 부분이 초안(草案)일 뿐인 내 생각에 실마리를 준 것이다.(초자아란 말은 정신분석학의 주요 용어이다.) 내 생각은 어디로 가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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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중 있는 문예 계간지 ‘문예중앙‘이 사실상 폐간되었다고 한다. 통간 150호인 이번 여름호를 마지막으로 휴간에 들어갔으나 복간 일정을 제시하지 못하니 사실상 폐간인 셈이다.

정기 구독자의 수가 고작 몇 십명이었다고 하니 길이 없었을 것이다.

요즘의 문학의 무력을 감안하면 150호를 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정도이다.

내가 이렇듯 문예중앙 이야기를 하는 것은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유료 구독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내가 사는 동네의 도서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데도 잡지에 눈길도 주지 않았던 입장으로서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는 처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휴간이 좋지 않은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지난 해 여름 문예중앙에서 시집을 낸 성윤석 시인이 쓴 관련 글도 페북에서 접했다.

출판사가 문을 닫을 경우 시집의 저작권과 출판권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란 글이다.

현역 교수로 부지런히 강의를 하시는 한 페친이 쓴 이런 글도 보았다. 문예창작과 대학생의 고민과 갈등이라며 쓴 글로 ˝월 30만원만 벌어도 글만 쓰겠는데...˝란 것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절박한 글을 쓴 그 문예 창작과 대학생에게 그것 가지고 어떻게 생활할 수 있냐고 묻지는 못하겠다.

모두 우울한 소식 뿐인 듯 하다. 모종의 흑막에 의해 문예지들이 쏟아지기도 한다니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고 해야 할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문예지를 바람직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인가?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지는 않지만 문학계가 처한 환경이 참 빡빡하고 각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 복간 전문 출판사인 최측의 농간 블로그에서 읽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떤 계기로 연(緣)이 닿았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난 해 여름 이후 출판사로부터 허만하 시집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고형렬 시인의 ‘은빛 물고기‘, 여림 시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이연주 시전집, 서정인 작가의 장편 소설‘달궁‘, 박서원 시집 ‘아무도 없어요‘ 등을 받았다.

부지런한 문학 독자가 아님에도 귀한 책들을 받아 죄송하다.(더욱 리뷰는 허만한 시인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단 한 권만 썼을 뿐이어서 리뷰를 써줄 것을 바라고 책을 보내준 것은 아니지만 많이 미안한다.)

어제는 조연호 시인의 시집 ‘저녁의 기원‘을 소개하는 글을 메일로 받았다. 문학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문장에 신경을 쓰는데 전에도 그랬지만 최측의 농간의 대표 신동혁 님의 짧은 시평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 뒤 더욱 그랬다.

오늘 읽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길을 잊는 일‘이란 글도 그런 점을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신동혁 님 본인의 글로 시작해 정화진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내용, 김정란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내용들이 이어진 글이다.

그런데 정화진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김정란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글의 서두에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아 ‘글 잘 쓰는데...‘란 생각을 하며 한참을 읽었다.

대단한 감수성과 정교한 필치의 글이 인상적인데 중요한 것은 누가 썼는지보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다.

김승희 시인이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을 평하며 쓴 ˝원초적 야성 즉 신성(神性)의 점화를 성대하게 베풀어 주는 혈액의 혁명을 일으키는 책˝이란 생각을 하며 읽었다.

가령 이런 글들.

<죽은 이연주가 내 꿈속에서 “철사로 된 빽빽한 말다발”이라고 말하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꿈에서 깨어나 나는 한참 동안 가슴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내 울음이 저승까지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너를 위해서 내가 잘 말할 수 있을까? 허공에 목을 매달아 버린 네 잘린 말 대신?....>

‘영혼의 역사‘라는 시인의 평론집 날개에 적힌 ˝심리몽환적이며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우 지적˝이라는 글을 생각하게 된다.

˝자연과학이 주도하는 비신화화의 시대에 신화를 말하고, 합리적 개념 언어의 시대에 신비하고 풍성한 상징 언어에 주목˝(양명수 지음 ‘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 7 페이지)했다는 리쾨르를 생각하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인은 이연주 시인을 만난 꿈에서의 대화 이후 진혼곡 같은 말을 했다는 데 있다.

다양한 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시를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느끼기 위해서는 시를, 알기 위해서는 평론을 읽어야 하니 읽을 거리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물론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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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 연구‘의 박상륭 작가께서 돌아가셨다. 내공이 깊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표류(漂流)하기 딱 좋은 그 분의 문학적 깊이와 사상의 폭을 늦게나마 제대로 따라 가보자고 다짐했던 것이 얼마 전인데...

죽음이라는 슬픈 사건을 추모하며 그 분이 남기신 책의 한 단락이나마 음미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김현 평론가의 글을 읽고 내가 ’죽음의 한 연구‘를 읽었기에 이런 저런 추억들을 단편적으로나마 떠올릴 수 있는 것이리라.

‘죽음의 한 연구‘의 도입부에 나오는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이란 길고 긴 주부(主部)를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유쾌하다.

요즘 책이 최고의 명함이라는 인식이 형성되고 있는데 그 훨씬 이전부터 나는 누군가의 책을 읽고 간직하는 것으로 그 누군가를 기억하고 책을 명함처럼 소장해오고 있었다.

읽지 못하고 명함처럼 소장하고만 있는 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참 오래 전 빌려 읽고 말았을 뿐인 ’죽음의 한 연구‘를 사야겠다.(내가 읽은 것은 한 권 짜리 버전인데 지금은 두 권으로 분책되었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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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3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벤투의스케치북 2017-07-1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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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보는 적은 그대 자신에 불과하다‘...고미송의 책.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하다는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한 말(코기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내가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다.‘ 폴 리쾨르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겨냥해 한 말.

‘자아 연출의 사회학‘... 어빙 고프만의 책.

나를 다스려야 할 때 접하는 책이자 구절들.... 사회 차원의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터를 닦듯 들춰보는 책과 개념들..

내가 속한 단체에서 낭패감이나 소외감이 들 때 읽는 책이자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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