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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먹는 염소
진주현 지음 / 더시드컴퍼니 / 2016년 8월
평점 :
원문: http://blog.naver.com/kelly110/220818284277
참 재미있는 책인데 다른 책 읽느라 오랫동안 읽었습니다. 첫부분을 읽으며 놀랐습니다. 철학책인가 할 정도로 철학적이고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멋있었습니다.
베일에 쌓인 듯한 저자와 닮았을 것 같은 주인공 유리는 이름처럼 깨지기 쉬워 보이는 인물입니다. 언젠가부터 찾아오는 안개와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빠져드는 잠, 그리고 염소 꿈. 마냥 자기도 모르게 한참을 자다가 깬다는 건 무서운 일입니다. 왜 그녀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차츰차츰 그녀의 과거가 펼쳐집니다.
거대한 서사가 있다거나 사건이 꼬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겪는 상실감과 그로 인한 아픈 기억은 어쩌면 평생 동안 발목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에게 가족이 그랬습니다. 사라지고 싶었던 그녀가 자신의 물건을 하나씩 처분하는 장면이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책과 음악 CD를 하나씩 없애는 그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하지만 유리에게는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과거를 알고도 사랑해주는 남편과 잊혀졌던 기억 속 아이 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분히 환상적이기도 한 이 소설에는 멋진 문장들이 많습니다. 이야기가 독특하게 펼쳐져 마지막이 궁금했던 이 책은 지적이고 따뜻한 모습이 좋습니다. 유리창을 매일 닦고 의미도 모르는 물리 책을 필사하는 독특한 주인공의 내면이 매력적입니다.
- 나는 줄이 끊어진 바이올린 같다. 너무 낡아 조율이 불가능한 피아노 같다. 단조로만 이뤄진 악보를 받고 온 힘을 다해 연주하는, 아무도 모르는 미쳐 버린 천재 같다. (42쪽)
- 더 커진 무기력은 두툼한 솜이불이 되어 나를 덮었다. 무언의 시간을 어떤 소리로도 채우지 못하고 잠 속으로 도망치지 못하고 그저 방속의 방으로, 소수처럼, 식물처럼 생존한다. (119쪽)
- 나는 방 안을 둘러본다. 내가 소유한 것들을 응시하고 탐색한다. 방 안에는 무수한 내가 있다. 한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한 건지 거부감이 구역질처럼 왈칵 치밀어 오른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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