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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만년필 ㅣ 박완서 산문집 2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원문: http://blog.naver.com/kelly110/220614404487
도서관 서가를 지나다 ‘만년필’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릴 때 엄마가 늘 만년필로 가계부를 쓰시는 걸 봐서인지 만년필로 글 쓰는 게 좋습니다. 심지어 ‘만년필’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만년필은 관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필통에 넣고 다니다 보면 금세 잉크가 다 말라버리기도 하고, 요즘 나오는 얇은 종이에 썼다간 번지기 일쑤입니다. 몇 십 년 전 작가들은 타자기도 없었을 때 원고지에 연필이나 만년필로 소설을 쓰고, 수필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 동경 때문인지 자주 쓰지는 않지만 만년필을 갖고 싶어집니다.
이 책은 고 박완서님이 쓰신 산문들을 모은 것입니다. 시리즈 중 두 번째 책인데 제목에 끌려 이 책을 먼저 빌려와 읽었습니다. 서울대를 잠깐 다니다 전쟁 통에 학교를 그만두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해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40대의 어느 날 여성잡지를 보고 처음으로 1200매나 되는 소설을 써 투고해 곧바로 당선이 됩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지 상상만 해도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이후 글을 계속 쓸 것인지 아닌지 고민도 하고, 작은 돈벌이를 위해 산문들을 의탁 받아 기고하기도 합니다. 물론 후에 좋은 소설들도 많이 쓰셨습니다. 이 책 속에 그런 삶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만년필 이야기는 책 속 여러 글들 중 하나입니다.
그동안 작가님이 그렇게 많은 글을 쓰셨다는 생각은 못했었는데 작품들도, 산문집도 많이 있다는 걸 알고 더 대단하게 여겨졌습니다. 아이들 키우는 틈틈이 책상 한쪽에 정갈하게 앉아 만년필로 글을 쓰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면 같은 여자로 부럽기도 하고, 희망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비오는 날 버스에서 잔돈을 줍기 위해 딱 붙은 동전들을 집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구걸하는 사람을 스치며 갈등했던 모습, 시조작가로부터 좋은 글을 써 달라는 말과 함께 만년필을 받고 마음의 부담을 느끼던 것, 박수근 작가를 우연히 알게 되고 함께 이야기 나누던 것들,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들입니다. 작은 것에도 마음 쓰고,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감싸주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알았던 작가의 삶이 그대로 느껴져 작가가 더 좋아집니다.
파카 45 만년필을 받았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그 제품으로 구매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년필이 두 개나 있는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찾아봐도 보이지가 않아 혹시 못 찾으면 나를 위한 선물을 해야겠습니다. 며칠 전 생일이라 부모님이 상품권을 보내주셨는데 옷이나 다른 것보다 만년필로 살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다가도 가지고 있던 만년필들도 자주 쓰지 않았는데 또 사서 쟁여만 놓는 게 아닐까 하는 망설임도 가져 봅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살까 말까 망설이는 내 모습을 보면 우습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진 게 많지 않아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내가 좋습니다. 박작가님의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박작가처럼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것 같아 기분 좋아집니다. 내가 쓴 글을 읽고 누군가가 이런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남자들이여, 부디 딛고 선 여자로부터 그대의 억센 발을 거두라. 그리고 여자가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라. 그 여잔 혼자 일어나기엔 너무 오래 짓눌려 있었다. 그리하여 여자를 억누르는 쾌감보다 여자와 손잡는 즐거움에 눈뜨라. 여자와 더불어 같은 수평면에 손잡고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남자는 비로소 남자다워질 테고, 남자가 남자다워질 때 여자 역시 진정한 의미의 여자다움을 회복할 것이다. (101쪽)
- 어머니란 이들이 너무 아는 게 많고 욕심이 많아졌다. 도대체 어수룩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다. 가뜩이나 학교생활도 예전에 비하 바 아니게 심한 학습과 경쟁으로 아이들에게 긴장을 강요하고 있는 터에, 집에 와도 긴장을 풀 도리가 없다면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 아이들에겐 나무라지도 않고 어리광을 받아줄 맹목의 사랑이 필요하다. 긴장 해소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그게 결코 아이들을 해칠 까닭이 없다. 수염이 시커먼 우리들의 남편조차 가끔 그들의 울분과 긴장을 마누라의 치마폭에서 풀고자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가. 그들의 어리광을 맹목으로 달래려들지 않고 꼬치꼬치 따지고 든다면 어찌 현명한 아내랄 수 있을까.(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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