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원문: http://blog.naver.com/kelly110/220518230806


  오래 전 <향수>라는 영화를 보면서 광기 어린 주인공의 눈빛에 경악하던 일이 기억난다그래서인지 동명의 소설을 읽어보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얼마 전 그 책을 쓴 저자가 <<좀머 씨 이야기>>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다른 스타일의 책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도서관 서가를 지나다 오래 전 이웃 블로그에서 보았던 <<깊이에의 강요>>라는 얇은 책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낡고 낡아 잘못 잡으면 찢어질 것 같은 책이어서 더 흥미로웠다지하철에서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곱씹으며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깊이에의 강요승부장인 뮈사르의 유언이라는 세 편의 단편소설과 자신의 문학적 고백인 문학적 건망증이라는 글로 구성되어 있다. ‘깊이에의 강요는 제목처럼 유망하던 여성 화가가 깊이가 부족하다라는 평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서히 파멸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그녀가 죽은 후 평가가 깊이에의 강요가 숨어 있다는 같은 이의 평이 나오는데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가 없다한 사람의 날카로운 평가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그리고 그 평가는 관점에 따라 칭찬도욕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승부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기존 챔피언도전자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이다이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옮긴이의 말 그대로 우리 사회는 기득권을 가지고 그걸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과 새롭게 빼앗으려는 사람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왈가왈부하는 보통 사람들로 나누어지는 것이 사실이다물론 책에 등장하지 않는 방관자도 있겠지.언젠가 내려놓아야 할 챔피언 자리는 전성기를 누리고 생을 마감하는 우리 모두의 인생과도 닮아 있다.

 

  ‘장인 뮈사르의 유언이라는 소설은 소재가 정말 독특하다혼자만의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의 이야기 광인과 비슷한 느낌도 있었다세상이 조개로 변해간다는 비밀을 알아버린 그는 빠르게 화석화되어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의 논리가 질서정연해 그럴듯하다심지어 그가 죽은 후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바스러질 듯 굳어버리는데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정말 그럴 듯하게 써 놓아 감탄했던 소설이다.


  '문학적 건망증'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수없이 책을 읽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문학의 대가도 다를 바 없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오래 전 읽었던 책을 처음 읽는 책인양 빼들고 읽다가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는데'하고 내 블로그에 검색해 오래 전 내가 쓴 리뷰를 발견한 적도 있다. 건망증은 불행인 동시에 축복이기도 하다.

 

  요즘 이야기들의 소재에 관심이 많다. 이 작가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참 독특한 소재를 가져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생각을 했다.쉽지 않은 일인데 그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그가 쓴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향수>>도 읽어야하나? 영화와는 다르겠지.



- 체스 고수, 일흔 살 가량의 적잖이 비열하고 왜소한 남자는 모든 점에서 젊은 도전자와 정반대였다. 그는 프랑스 퇴직자들이 입는 제복, 여기저기 음식물 자국이 배어 있는 푸른색 바지와 모직 조끼를 입고 있었다. 떨리는 손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었고, 숱이 적은 머리와 포도주빛의 붉은 코, 그리고 얼굴에는 자줏빛 혈관이 불거져 있었다. 수염마저 깎지 않아 텁수룩한 모습에 눈 씻고 보아도 은근한 분위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담배꽁초를 푹푹 빨아 내뿜었으며, 공원 벤치에 앉아 불안하게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고 미심쩍다는 듯 쉴새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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