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정호승 시집 창비시선 36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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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blog.naver.com/kelly110/220366628836


  ‘연탄이라는 시로 유명한 정호승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일본 가는 크루즈 안에서 그가 낭송해 주는 자신의 시들을 들으며 감동의 시간을 보냈습니다그 이후로 팬이 되었습니다일본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부산역에서 처음 들어간 화장실에 붙어 있던 그의 시를 보는 순간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의 새로운 시집이 나온 것을 알게 되었고도서관 서가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시집을 보는 순간 바로 데리고 왔습니다시인의 시 스타일이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부모님을 떠나보낸 시인은 인생에 대해 깊이 있는 사색을 했음이 분명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시들을 읽으며 시인과 함께 인생을 되돌아보기도 했습니다.

 

  여행에 종종 비유되기도 하는 인생길의 시작에는 설렘이 가득합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 수많은 난관을 만날수록 만만치 않은 여정에 고단함을 느끼기도 합니다그제야 먼저 그 길을 걸어 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먼저 걸어간 그들의 존재가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여행의 막바지를 보내고 여행길에서 벗어나 다시는 함께 걸을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여행객

은 추억도 많지만 아쉬움도 큽니다. 시인의 삶의 깊이가 더해갈수록자신이 뱉어낸 수많은 거짓들에 대한 후회도 커집니다. 

 

  이 책에는 유독 상상력을 발휘한 시들이 많록습니다과거의 아름답던 시들은 보다 과감한 표현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하지만 그의 처절한 시어조차 멋지게 느껴집니다


  이미 여행을 끝낸 사람들처럼 우리도 언젠가 여행을 마칠 때가 옵니다.햇살 가득하던 시절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중반을 넘어가면 서서히 끝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그럴수록 우리는 무언가를 남기고자 합니다느지막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하지만 너무 섣불리 뱉어버린 말들은 후회로 박히기도 합니다한 마디 한 마디에 더 신중해야겠습니다나의 여정의 끝에 다가갈 때 좋은 여행이었다고 회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변산에서 쓴 편지 (66-67쪽)

변산에서는 낙조대에 가지 않으려고 해도 가게 된다
낙조대에서는 해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지게 된다
아들아
서울에서 지는 해도 보지 못한 채 떠돌지 말고
빌딩 사이로 뜨는 해도 보지 못한 채 잠들지 말고
변산 앞바다에 와서 먼저 지는 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라
해가 왜 지는지
해 지는 갯벌이 되어 세발낙지처럼 편안히 발을 뻗고 누워보라
소라껍데기 속에 웅크린 주꾸미처럼 웅크려
고요히 해 지는 소리를 들어보라
골목 끝까지 너를 따라다니던 희망의 흰 그림자가 비로소
웃음을 되찾고 자꾸 웃을 것이다
너도 덩달아 하얀 웃음의 알을 주꾸미알처럼 자꾸 낳을 것이다
지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지 않고 어떻게 해가 뜨고
지지 않고 어떻게 너를 이길 수 있겠느냐

아무리 바빠도 아들아
오늘은 변산 앞바다에 떠오른 일몰의 연꽃처럼 왔다 가라
직소폭포 물소리에 한쪽 귀라도 씻고 돌아가라
가다가 격포 채석강 붉은 절벽에 매달려
만권의 책을 꼭 읽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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