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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원문: http://blog.naver.com/kelly110/220348951056
아이들이 우리보다 바쁜 중간고사 후 연휴를 보내면서 남편과 집 근처에 있는 낮은 언덕을 찾았습니다. 가는 길에는 언제나 그렇듯 가벼운 책을 한 권 데리고 갑니다. 이번에는 박경리님의 유고시집입니다.
아직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조그마한 산책로를 따라 가며 쉬엄쉬엄 시를 읽었습니다. 아직 채 조성이 안 된 체육공원에 앉아 호젓하게 시를 낭독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함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시인의 삶을 반추하게 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했던 시인의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일찍 남편과 아들을 잃고 외로운 평생을 보내면서 그녀의 고독을 다독여 주었을 책들을 떠올렸습니다. 책만큼이나 좋아하던 바느질도 눈이 침침해지면서 흥미를 잃게 되고, 몸도 조금씩 아프게 되었을 때 그녀는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짧은 인생을 잠시나마 함께 보냈던 사람들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여행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그녀는 혼자만의 상상 여행을 즐겼다고 합니다. 몸은 늘 자신의 집 안에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정말 자유롭게 떠돌아 다녔을 것입니다. 글쓰기라는 고된 노동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집에 있기 좋아하는 성격 덕분인지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인생 여정에 다정한 남편이 오래동안 함께 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골방에 홀로 앉아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책을 읽었을 그녀가 새삼 존경스러우면서도 안쓰럽습니다.
- 옛날의 그 집(15-16쪽)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으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어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어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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