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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책보다 나은 영화를 찾기 어렵다. <<안나 카레니나>>도 어떤 버전의 영화보다 책이 훨씬 낫다고 여겨진다. 영화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일의 자초지종이 상세히 드러나 있는 것이 책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심혈을 기울여 쓴 이 작품은 예술적이면서도 과학적이고, 진보적이면서도 보수적인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열정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은 후 ‘이런 게 결혼 생활인가보다’하고 여기고 있었을 때 마음을 뜨겁게 동요하게 만든 브론스키를 만나게 된다. 그 이후 그녀의 감정 변화가 재미있다. 평소에 늘 봐 오던 남편의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럽고 밉게 다가온 것이다. 심지어 사랑스럽던 아들까지도 낯설게 느낀다.
사랑을 하게 된 열정적인 안나의 감정 변화로부터 일이 벌어지는 이 책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에는 긴 이름을 가진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얽히고설키며 애증의 관계들을 만들어 낸다. 과거 우리나라도 그랬듯 당시 많은 러시아 귀족들도 사랑 없는 정략결혼으로 결혼 생활 동안 불만족을 키웠고, 곁눈질을 했을 것이다. 안나도 그 대표적인 예다. 뒤늦게 나타난 인연으로 인해 그녀는 가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한다. 물론 처음에는 불같은 사랑으로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외국으로의 도피행각 끝에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되돌아온 페테르부르크였지만 아들을 만나고자 하는 그녀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그녀의 죄책감은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불같이 뜨겁던 사랑이 식으면 남는 것은 질투일까? 안나는 브론스키가 차지하던 자리를 책으로 보내기 시작하며 박식함을 자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골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아편에 의존하며 정신적으로 나약해진다.
또 하나의 사랑은 어리고 사랑스러운 키티에 대한 수줍은 레빈의 그것이다. 청혼을 거절당한 후 오랜 시간 기다려 이루어낸 결혼 생활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씩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의미 찾기에 골몰하던 레빈은 결혼 이후 그 해답을 찾아내기도 한다.
사랑과 배신, 그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부축임과 질책은 이 책을 복잡하지만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간혹 등장하는 농노에 대한 엇갈리는 귀족들의 논쟁은 사회적 갈등의 예를 보여주기도 한다. 톨스토이가 투영된 듯 한 레빈은 농노제 폐지를 소극적으로 주장했던 인물이다. 순수한 농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자기 주변으로부터의 변화를 꾀하던 사람이다. 제목과 다르게 안나보다 레빈에게 비중이 느껴지는 건 부족한 듯 바람직한 그의 사고방식 때문일 것이다.
꽤 오래 전에 책을 구입했지만 첫 페이지 몇 장 넘기다 긴 이름에 질려 덮기 일쑤였다. 인문학 모임 2월의 도서로 선정되는 바람에 읽게 되어 뿌듯했다. 처음에는 긴 이름들을 수첩에 적어 가며 인물의 관계도를 그렸는데 인물들과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두꺼운 책이 조금은 잘 넘어갔다. 하지만 3권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이름에 동그라미를 쳐야만 했다. 상황 묘사나 연상되는 비유가 수준급인 데 놀랐고, 그의 예술적, 문학적 지식의 방대함에 감탄했다. 이 책을 읽고 소설을 술술 써 나갔다던 정유정 작가가 떠오른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에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 이유를 알겠다.
- 그는 키티에 대한 자기의 행위가 일정한 명칭을 가지고 있다는 것, 바로 결혼하려는 의사 없이 처녀를 유혹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유혹이야말로 그처럼 화려하고 젊은 남자들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의 하나라는 것을 몰랐다. 그에게는 자기가 이러한 만족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만족스런 발견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1권 118-119쪽) - 그는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존경하고 있지 않았고, 똑똑히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의 분위기와 자기의 교양에서 비롯된 극도의 순종과 공경의 태도 외에는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적으면 적을수록 겉으로는 더욱더 순종하고 공손해지는 것이었다. (1권 125-126쪽) -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이 집단이 못 견디게 싫어졌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서로를 속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 모임 속에 있기가 몹시 지루하고 거북해졌으므로 그녀는 백작부인 리디야 이바노브나에게서도 될 수 있는 한 발을 멀리하게 됐다. (1권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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