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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입들 - 개정판 ㅣ 시작시인선 93
이영옥 지음 / 천년의시작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많은 시집을 읽진 않았지만 이런 시들은 처음이다. 우리말이 이렇게 멋지게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구태의연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삶에서 늘 접할 수 있는 주제라 마음에 쏙 들었다. 방충망에 붙은 꽃잎 하나에 자신의 외로움을 이입하여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녀의 배추에 붙었던 민달팽이는 시의 주인공이 되고는 사라졌다.
지하철에서 늘 접하는 잡상인이 쉼 없이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상어가 되기도 하고, 뙤약볕 가득한 날 사람들에게 그늘을 주던 고가도로는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한 줄 뉴스의 기사로부터 시작된 상상의 사나이는 생일을 앞두고 죽기도 한다. 몇 줄 싯구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도 흔들어놓는 힘이 있다는 것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소리 내어 읽어 내렸다.
시가 모두 상상이 아니라면 예쁘장한 시인의 삶은 어두운 구석이 많다. 폐병을 숨기고 결혼했다 쫓겨 온 옆집 언니, 아이를 데리고 야반도주하는 어머니, 스물일곱 해를 살고 먼저 간 조카. 시들 속에서 사랑도, 죽음도, 욕망도, 관조도 언어의 유희 속에 엉기어 예술이 된다. 그녀의 눈을 통하면 떨어지는 꽃잎도, 구멍가게 할머니도, 자신의 집을 끌고 나온 개도, 눈 덮인 산사도 모두 말없는 주인공이다.
마음이 메마를 때, 외로움에 떨릴 때, 그리고 삭막한 하루하루가 지겨울 때 이 시집을 들추어 넘기며 소리 내어 읽고 싶다. 그녀의 시선처럼 작은 것도 아름답게 보는 눈을 갖고 싶다.
- 브라스밴드가 지나가고 나면 누구나 다 혼자가 되었지요 책임감 없이 지나가기만 하는 브라스밴드 길가의 코스모스는 새끼 오리처럼 머리를 쿵쿵 찧었지요 (20쪽 브라스밴드가 지나간 뒤 중) - 삶은 멈추지 않는 딸꾹질 같았다 그때의 모래들은 레미콘에 휘둘리며 어떤 오해를 하며 천천히 굳어 갔을까 … 이모를 견디게 했던 강은 이제 그 무엇에도 출렁이지 않고 매번 오는 저녁을 무던히 끌어안아 주었다. (23쪽 형산강 중) - 삼나무들은 그림자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키를 줄였다 늘이면서 제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 하루에 두 번 완행버스가 지나가면 변함없이 온몸을 일으켜 달려가는 것은 흙먼지 뿐이었다 흘러간 것들은 망가져 돌아오거나 아예 오지 않았다 늘 떠나기만 하던 길들도 가끔 다리쉼을 했다 그때마다 삼나무 떼들은 평생을 키워 온 짙은 그늘을 말없이 내려 주었다 (50-51쪽 삼나무 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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