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저리 스티븐 킹 걸작선 10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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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부분으로 가면서 책장이 더 남아 있었으면 하는 책이 있다. 이 책이 그 중 하나다. 며칠 전 다시 본 영화 속에서 작가 자신을 그려냈다는 <미져리(영화에서는 ‘져’로 번역했다)> 속 폴은 대중 소설을 썼지만 늘 순수문학을 하고자 했던 재능 있는 작가다. 애니에게 고통 받는 동안에도 그는 훌륭한 작품을 쓴다. 그가 글을 쓰는 장면 묘사를 자세히 보고 싶어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렸다.

 

  폴의 ‘넘버 원 팬’인 애니는 폴이 마지막에 쓴 <<미저리>> 시리즈에서 여자 주인공 미저리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는 눈길에 미끄러져 뒤집힌 차에서 자신이 살려낸 폴을 가혹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녀는 살인 전력이 화려한 전직 간호사 출신이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폴은 애니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다. 시간이 갈수록 멍해진 뒤 정상이 아닌 행동을 하는 애니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다리 부러진 환자 신세의 자신을 깨닫고 좌절한다. 하지만 엄청난 생명력으로 그는 온갖 고통을 참아내고 애니로부터 벗어날 날만을 기다린다.

 

  인정 사정 없는 애니에게 약한 부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녀가 사랑하는 소설 <<미저리>> 시리즈이다. 그걸 쓴 폴이니 그녀는 그를 죽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마지막 편에서 죽은 미저리를 살려낼 사람은 바로 폴이기 때문이다. 타자기를 사 와 <<돌아온 미저리>>를 쓰게 한 그녀는 폴이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잔혹한 행위를 하지만 책을 잘 쓸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폴이 자신을 빗대어 세헤라자데를 떠올린 건 그 때문이다.

 

  이 책에는 그가 순수문학으로 쓴 <<과속 차량>>과 <<돌아온 미저리>>에 대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글을 쓰는 장면 묘사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아이디어를 얻고 싶을 때 산책을 한다는 부분을 읽으며 참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과속 차량>>의 집필 아이디어도 비디오를 사러 나갔다 얻었기 때문이다. <<돌아온 미저리>>를 쓰는 폴은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상상하며 글을 쭉쭉 써내려간다.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타자기 앞으로 가는 장면을 읽으며 미친 듯이 글을 쓰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장면들이 잔인한 묘사와 욕이 심심찮게 나오는 이 책을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다.

 

  영화와 다른 부분은 애니에 대한 묘사와 마지막 부분이 아닐까 한다. 영화에서의 애니는 느낌 따뜻한 배우의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귀여움과 섬뜩함을 오가는데 비해 책에서의 애니는 아주 잠깐 따뜻한 모습을 보이는 것 외에는 주로 이상하거나 폭력적인 것으로 나온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영화와 달리 깜짝 반전이 하나 더 등장한다.

 

  이 책을 읽으며 스티븐 킹의 독자를 사로잡는 스토리텔링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책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대중 공포소설 치곤 문학적인 면도 많이 느껴졌다. 소설 속 폴이 순수문학을 쓰고 싶어 했던 건 어쩌면 스티븐 킹 자신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

- ‘미저리Misery'는 보통 명사로서 고통을, 일반적으로 길고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의미했다. 그런 단어가 적당한 소설에 인용되면서 등장인물의 이름과 구성 방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확실히 끝을 알 수 없는 구성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곧 대단원을 맞을 참이었다. 미저리는 폴의 인생에서 마지막 4개월(어쩌면 5개월)을 관통하여 흘러왔다. 그렇다. 수많은 미저리가 있었고, 미저리의 날이 밝았다가 미저리의 날이 저물어 갔다. 확실히 너무나도 단순한 인생이었고, 확실히……. '오, 아니야, 폴. 미저리에 관해서라면 단순한 것은 하나도 없어. 네가 미저리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만 빼면. 아마도 넌…… 결국 세헤라자데가 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야. 안 그래?’ (398-399쪽)

- 폴은 한동안 생각에 잠긴 뒤 연습장을 열고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종이 속에서 구멍을 발견해 냈다. 폴은 애니가 날카롭게 깎아 준 연필 세 자루가 전부 다 끝이 뭉뚝해질 때까지 네 시간 동안 흐트러짐 없이 글을 썼다. 그리고 나서 침대로 굴러 가 드러누웠고, 편안하게 잠들었다. (4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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