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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평점 :
일전에 학교 도서관에서 한 번 빌려왔다가 읽지 못하고 다시 반납했던 박완서님의 책을 다시 빌려 읽게 되었다. 빌린 것들 중 이보다 나을 것 같은 책이 없을 때에야 손에 잡게 되니 완서님께 죄송한 생각이 든다. 그 때는 무엇에 밀려 열어보지도 못하고 다시 반납했는지. 이번에는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기고, 단숨에 마지막까지 읽어 내린 소중한 책이었기에 모든 책은 만날 만한 때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박완서님은 이 책을 통해 전쟁 통의 피 말리는 아픔과 고통도 보여 주고, 학교 수업을 빼 먹고 영화를 보러 가는 여고생의 맹랑함도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뜰에 핀 우리 꽃과 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들려주고, 그녀가 책을 쓰기까지 밑거름이 된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녀가 마지막을 추모했던 박경리님도, 정작 자신도 이젠 세상에 없고 책만 남아서 못 다한 이야기들을 후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걸 보면 세월이 참 짧고 글의 생명력은 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역사의 한 모퉁이에 서서 그녀의 눈으로 본 세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남대문 방화 사건, 2002년 월드컵 등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통해 나도 그 때를 다시 한 번 회상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전쟁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여성 문인의 따뜻함과 저력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나도 그녀처럼 가슴이 뭉클뭉클한 에세이와 소설들을 쏟아놓고 싶다. 그녀로 인해 세상의 한 구석이 밝아진 것처럼 몇 명의 사람이라도 그 가슴 속에 반짝이는 보석들을 새겨보고 싶다.
* 박완서님의 또 다른 에세이
http://blog.naver.com/kelly110/40188896525
--- 본문 내용 ---
- 노후에 흙을 주무를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에 산다는 것도 큰 복이다. 내 마당에 몸 붙이고 있는 것들은 하루도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 날이 없지만 손이 많이 간다. 그 육체노동 덕분에 건강을 유지한대도 과언이 아니다. (5쪽)
- 손뜨개질 옷은 풀어서 다시 뜨는 재미도 여간 아니다. 그러나 헌 옷 푼 오글오글한 실로는 게이지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긴긴 겨울밤 방에서 주전자의 물을 끓여가며 그 증기로 오글오글한 헌 털실을 곧고 푹신한 새 실처럼 풀어내던 내 엄마 노릇의 고달픈 기쁨을 어찌 잊을까. (122쪽)
- 제목만 보고도 처음 읽었을 때의 행복감이나 감동이 젊은 날 그랬던 것처럼 가슴을 설레게 하는 책은 못 버린다. 책으로 젊은 피를 수혈할 수도 있다고 믿는 한 나는 늙지 않을 것이다. (148쪽)
- 나는 그때나 이때나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활자 중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위에 읽을 책이 없으면 불안하고, 닥치는 대로 읽고 건지는 것도 있지만 잊어버리는 게 더 많다. 소설은 읽히기 위해 있는 것이지 꽂아놓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빌려주기도 잘하고 안 돌려줘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이청준의 처음 책(별을 보여드립니다-일지사)을 아무도 안 빌려주고 여태까지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건 초심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22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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