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소설에 대해 편견을 버리게 만든 [칼의 노래]를 쓴 김훈씨. 원래 기자였던 그는 주관이 너무나 뚜렷해 자신이 빠진 팩트만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나보다. 여행가방에 책을 싸 들고 호텔에 칩거하며 읽어 내려갔던 그는 소설을 쓰고, 또 세설을 썼다. 이르지 않은 나이에 쓰기 시작한 그의 작품들에는 그렇기에 오히려 삶의 고뇌와 고단함이 묻어 있어 읽는 이에게 거부할 수 없는 공감을 주기도 한다.

 

  그의 글은 솔직하다. 그는 경험한 것 이상의 것들을 쓰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나의 멘토이다. 그의 여성에 대한 관점이나 일부 묘사 방법적인 면에서 내가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솔직한 글을 쓰는 면을 배우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쓸 수 있는 단어가 줄어든다고 한 그의 말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가 쓴 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조심해서 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지..

 

  김훈의 관찰력은 독창적이다. 그는 여성의 탱크탑의 끈과 브라 끈을 가지고도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런 것들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흘러내린 끈은 쳐다보지 못한다는 부분이 재미있다. 악기를 여성성에 비유한 것이라든가 아줌마에 대한 그의 관점, 그리고 마냥 즐기기만 하는 축구 경기 뒷면에 있는 축구공 꿰매는 아시아 저임금국 소년소녀의 이야기와 빛나는 골 뒤에 숨은 문지기들의 애환 등 그는 우리가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렇기에 신선하다. 나도 사물이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나만의 관점으로 새롭게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약간은 유머러스한 제목에다 크기가 다른 책에 비해 2/3정도인 이 책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읽혀질 거라고 생각하며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글의 무게는 다른 책들이 가진 무게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른 뒤에 한 줄 한 줄 곱씹으며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다.

 

 

---본문 내용---

 

- 악기는 인간의 몸의 일부로써만 작동한다. 인간의 몸이 아니면 그 악기로부터 소리를 끌어낼 수가 없다. 타악기는 팔의 일부이고 관악기는 호흡의 일부이며 건반악기, 현악기가 다 몸의 일부이고 성악은 몸 그 자체이다. 그래서 모든 악기는 인간의 몸과 친숙하게 사귈 수 있는 물리적 구조로 태어난다. 가야금, 거문고, 기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하프 같은 현악기들은 인간의 몸에 안기기 편안한 구조를 갖고 있다. 연주자는 악기를 안거나 무릎에 올려놓고 켠다. 그 악기의 구조는 여성성을 연상시킨다. 악기는 기계가 아니라, 몸 그 자체인 것이다.(17-18)

 

- 악기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디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한다. 그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태어나고 죽는다. 문질러야 소리가 나오고 불어야 소리가 나오고, 손가락을 놀려서 바람구멍을 막고 열어야 소리는 춤을 춘다. 소리의 춤은 아날로그의 춤이다.(19)

 

-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37)

 

- 세월은 무자비한 불도저처럼 인간의 얼굴을 밟고 지나간다. 아무도 그 불도저의 궤도 자국을 피할 수는 없다. 늙음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이지만, 그 자연현상은 사회적인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다. 노인은 배척받고 소외돼야 마땅한 혐오스러운 인종쯤으로 여겨지고 있다.(39) - 늙기란 힘든 사업이다

 

- 자전거는 땅 위의 바퀴다. 자전거는 갯벌을 지나서 물 위로 갈 수 없다. 자전거는 늘 갯벌에서 멈춘다. 그리고는 갈 수 없는 먼 바다를 다만 바라본다.(171) - 자전거에서 내려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저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연어들은 자신의 몸과 자신의 몸을 준 몸을 서로 마주보지 못한다. 이 끝없는 생명의 반복인 무명과 보시(죽은 후 다른 물고기에게 먹히는 것)는 인연이고, 그 인연은 세상의 찬란한 허상이다라고 고형렬은 썼다. 조국의 연어들은 이 인연의 강을 따라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죽음에 삶을 잇대어 가며 그것들은 돌아온다. 돌아와서, 생명의 기쁨과 생명의 허무를 사람들에게 알게 한다.(185)

 

-‘문화방송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중계하지 않기로 했다. 충북의 한 도시는 지난 2000년부터 사과아가씨를 없앴고 사과아줌마를 뽑고 있다. 실제로 사과를 재배하는 30-50대 여성농민들 중에서 뽑는다. 시청 관계자는 아줌마들이 많은 상금을 요구하지 않아 행사비용이 1200만원에서 600만원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또 선발된 뒤에도, 사과농사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새침데기 미녀들보다는 이 농사꾼 아줌마들이 스스럼없이 관광객들에게 접근하기 때문에 홍보 효과도 커졌다고 한다. 자본의 힘은 미녀들을 찬양해서 억압하고, 아줌마들을 폄하해서 억압한다. 그래서 아줌마의 해방은 곧 미녀의 해방과 같다. 몸과 삶이 맞닿아 있는 것이 아줌마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삶으로부터 유리된 몸의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아줌마들의 싸움은 힘들어 보인다.(225-226)

 

- 축구는 단순한 공차기가 아니라 문명의 위상을 누린다. 거룩한축구공은 아시아 저개발 국가 어린이들의 수탈노동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축구공은 오각형의 가죽조각을 손으로 꿰매서 만든다. 아디다스 등 스포츠용품업계의 초국적기업들은 파키스탄, 인도, 스리랑카 같은 아시아 저임금지대를 옮겨가며 생산 공장을 차리고 값싼 어린이 노동을 고용했다. ‘월드컵 후원 초국적기업 반대 공동행동은 축구공을 꿰매는 어린이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방한한 국제시민단체의 연대조직이다. 축구공을 꿰매다가 눈이 멈 인도 소녀 소니아(15)도 따라왔다. ‘공동행동은 세계 최대의 축구공 생산지인 파키스탄에서 15천여 명의 어린이들이 한 개에 120-200원을 받고 축구공을 꿰매고 있다고 밝히고, 이에 대한 세계축구연맹(FIFA)의 답변을 요구했다. 초국적기업들의 후원금은 텔레비전 중계료와 함께 FIFA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다. 월드컵의 함성에 묻혀서, 축구공 속에 들어있는 세계의 온전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월드컵이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고멀다.(227-228)

 

- 미드필드에서부터 아군 진영이 뚫려서 수많은 적들이 골문으로 몰려들 때, 김병지는 골문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에 갈팡질팡했다. 그는 마치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를 홀몸으로 막아내는 인간과도 같았다. 그가 실패했을 때 관중의 함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실패한 문지기들은 자신의 몸 뒤에서 그물을 흔드는 공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문지기들은 또 다시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골에는 함성이 일었고, 그때마다 문지기들은 무너졌다. 김병지도 무너졌고, 바르테즈도 무너졌다. 문지기들은 자신의 참패에 열광하는 관중의 함성을 들으면서 어떤 마음이 되는 것일까. 함성이 일 때 경기장엔 오직 문지기 한 개인만이 외톨이가 돼 골문 앞에 서있다. 승리의 맥락을 따라서 축구를 보는 일과 패배의 맥락을 따라서 축구를 보는 일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패배의 맥락으로 축구를 볼 때는 개별적 인간이 잘 보이고, 승리의 맥락으로 축구를 볼 때는 인간의 집단이 먼저 보인다.(134-135)

 

- 거대담론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적이 거의 없다. 몸이 검증 안 한 언어를 쓸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역사적 이런 말들이 잘 안 와 닿는다. 어떤 문제든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게 나와는 안 맞다. 언어를 사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쓸 수는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언어는 한줌밖에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쓸 수 있는 언어가 점점 적어진다.(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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