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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ㅣ 다빈치 art 11
구로이 센지 지음, 김은주 옮김 / 다빈치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어떤 화가 좋아하세요?" 라고 누군가 물어오면 반드시 이러하다고 대답하는 화가가 있다. 바로 '에곤 실레'이다. 많은 화가들을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특유의 강렬함으로 언제나 나를 또 다시 사로잡고 마는 그, 에곤 실레…….
어린 아이들에게 급습하게 되는 생애 첫 성의 호기심은 의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강하게 반발해야할 터부로 자리잡고 있다. 사회적인 관습도 그렇지만, 부모님 역시 겪어봤으면서도 자녀에게는 강한 압박으로 성에 대한 호기심을 폭력으로 잠식시켜 버린다. 동물적인 성적 욕구는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지극히 당연한 순리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에곤 실레는 어렸을 적 강력하게 솟구치는 성적 욕망과 호기심을 '공포'에 비유한다. 나와 다른 생김새를 하고 다른 기능을 하는 상대방의 생식기를 처음 봤을 때 충동적으로 느껴질 그러한 공포심. 거추장스럽기만 한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며 침울해 했지만, 얼마 후 그것의 기능을 알아버렸을 때의 낭패감. 어쩌면 가장 혼란스럽고도 흥미로운 유년의 기억이 될 그 어린 날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처음 에곤 실레의 작품들을 보면서 매우 선정적인 에로티시즘의 도발로 곤욕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차츰 그를 알게 되면서 관능이 아닌 순수함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고, 점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클림트의 화려한 에로티시즘과는 대조적으로 에곤 실레는 성을 포장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강조하는 손가락 관절의 투박함, 그리고 역동적인 힘, 그리고 그 아래 다리를 벌린 채 묘한 흥분의 표정으로 도발하는 모델들을 바라보면서 성적인 흥분이 일기 보다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야만 할 인간이라는 동물의 솔직함만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묘사해서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매우 관심 있게 지켜보는 프랑스의 영화 감독 '프랑소와 오종'을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과 비슷하다. 그 역시 성을 다루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솔직하고, 대범하고, 또 근원적인 순수를 지향하고 있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는데에는 그 어떤 장애도 없다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 외설이냐, 예술이냐의 구분은 당사자 개인의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곤 실레와 프랑소와 오종은 성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을 하게 만드는 원천적인 힘이 있음이 분명하다.
자화상을 에곤 실레처럼 많이 그린 화가가 또 있을까? 무엇보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가장 깊이 몰두했었던 에곤 실레는 인물화를 특히나 많이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자화상이 압도적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지나친 나르시시즘의 결과라 예상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했던 에곤 실레의 표현 방식은 매우 난해하고 복잡하기만 하다. 실험정신 가득했던 초기작부터 빈 분리학파 시절의 그림들을 보면 미화된 자화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자화상은 한결 같이 음습하고, 쾌쾌하고, 지린내 나는 황폐함만을 연상시킨다. 그 일그러진 얼굴에서 어떻게 나르시시즘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서는 누구보다 본인이 태초부터 간직하고 있었을 욕망에 대해 순응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허공을 바라보는 퇴색 되어버린 잿빛 눈동자, 일그러진 표정, 불안하게 요동치는 피날레를 향햐 달려가는 듯한 아슬아슬함. 에곤 실레의 그런 면들이 나는 참 좋았다. 너무도 인간적이기에.
본서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의 저자 '구로이 센지'는 처음에는 클림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가 클림트의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에곤 실레라는 사람에게 점차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저자가 미술을 전공한 화가나 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문학을 업으로 삼는 작가에게 에곤 실레는 얼마나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일까? 10년간 에곤 실레를 연구해서 완성한 책이라고는 하지만, 미술 전공자가 아니기에 본인의 추측이나 작품을 보는 사견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나지만, 평론가 입장이 아닌 팬의 입장으로 기술한 책이기에 더 정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두 살 때부터 그림에 미쳐 그림만 그려댔던 화가 에곤 실레에게 28년은 너무 짧았다. 화산처럼 폭발하던 창작욕을 제어할 수 없어 어느 장소에 있건 가리지 않고 그림만 그렸던 에곤 실레에게 신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래서일까? 요절한 젊은 천재 화가의 삶에 사람들은 더욱 큰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 에곤 실레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카리스마 있는 잘생긴 그의 모습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마성을 느낀다. 성이라는 드라마의 가장 멋진 연출가 에곤 실레, 그의 내면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