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뭘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충고’를 합니다. 그런데 충고 뒤에는 ‘체념’이 숨어 있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체념의 경험이 많은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의 충고는 오히려 희망의 싹을 죽이고 실망과 체념을 퍼뜨립니다. 마음속에 은밀히 체념을 키워 온 사람들의 충고를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경험으로 정신을 옭아맨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충고만큼 희망을 꺾는 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말을 믿으면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것입니다.

일상의 실망과 충격은 우리 삶에 흔적을 남깁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넘어질 수도 있고, 뒤흔들릴 수도 있다. 넘어진 마음은 사로잡힌 죄수와 같고, 뒤흔들린 마음은 미치광이와 같다." 둔탁하고 막힌 소리가 나거나 경박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악기는 조율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든다면 우리 마음에도 조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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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길은 어쩌면 우리의 이상과 희망과 염원의 통로일지 모른다. 그래서 엄청난 사건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작은 발걸음 역시 ‘새로운 시작’일 수가 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독과 같다. 물론 항상 동행은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대면하고, 대화한다. 모두가 우리 자신을 찾고자 하는 길이다. 그래서 세상을 뒤로하고 수행의 길에 나서는 사람들의 화두가 늘 ‘나는 누구인가?’인지도 모른다. 길 위에 묻는 그 물음이 바로 우리 삶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은 자유의 길" ...

"내 영혼에 걸고 말하건대 걷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생각하고 우연히 발견한 방법에 따르면, 그냥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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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복‘은 아비가 이러하더라도, 형이저러하더라도, 묵묵히 숫돌 같은 세월을 보내며 자기 삶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런 한복‘이가 내놓은 "나는 여기 살 기다" 라는말은, 그래서 자기 삶의 확신이자 자기 존엄의 증명에 다름 아닙니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여기 산다고 말하는 인간, 그리고 어디든찾아가서 여기 인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흑인 음악가. 그들이 보여주는 존엄한 인간의 모습에 지금의 옹색한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그리고나는 어떤 나이고 싶은가. 한복‘의 말, "나는 여기 살 기다"라는 저 말을 나는 어디에서 외칠 수 있을까요.

사실, 이전까지는 나 자신이 중심이었습니다. 나를 기준으로삼아, 가깝고 먼 것을 일렬로 나란히 세워두고 살펴봤으니까요.
그러나 노안이 왔다는 이유로, 세상과 나의 관계가 변했습니다.
내게 가깝고 멀다는 거리 감각이야 여전했지만, 더 이상 내 눈을기준점으로 삼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내게 가까운 것이 흐릿해 보이고 어중간한 것들이 또렷해 보이는 상황이 마구잡이로벌어졌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노화란, 나이 들어 세상과 다시 관계 맺으라는 신의 명령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이 듦이 자연의 섭리라면, 그것은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멀리 바라보라는 그런 도리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싶습니다. 물론 그 이치가 노인에게만필요한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자기 범주를 넘어서 자기 시야를세계로 확장시키는 일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들을 살펴봅니다. 그 가운데 버려야 하는 것,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으로 맨 먼저 손꼽는 것이 ‘자기 집착입니다. 그의 설명을 대강 옮겨보자면 이러합니다. "자살할 생각을 품고 살던 내가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무엇보다도 나에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에 있다. 나의 죄와 어리석음, 결점에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장점이든 결점이든] 자기도취는 어느 정도까지는 정상적인 것이고 탓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도취는 큰 해악이 된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자아는 세상에서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그래서 러셀은, 자기 집착과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이들을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이라 부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에게는 "걱정의 심리학"이라는 공통 구조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나의 걱정과 결점 그리고 나의 만족과 자랑거리 따위의 일에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들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러셀의 말대로 어느 정도의 자기도취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다만 나로부터 이웃에게로, 세상으로 시야를 돌려 세상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일이 더 중요함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봐라. 니는 펭생을물지게 지고 니 어무니는 죽는 날꺼지 품팔이나 하고, 니 동생들이라고 다를 기이 있을 성싶으나? 좀 펜하게 살잘 것 같으믄 술말고 갈 곳이 따로 없인께. 너거들 겉은 사람들이 세상에는쌓이고 쌓일 만큼 많다. 밥 묵는 사람보다 죽 묵는 사람이 많고뺏는 사람보다 뺏기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그래 니가 조준구 한놈직이서 아배 원수를 갚는다고 머가 해겔되었나? 달라지는 것은 쥐뿔도 없일 기라 그 말이다. 세상이 달라지야 하는 기라, 세상이."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건, 눈앞만 바라보지 않는, 자기 집착을 벗어난, 멀리 보는 자의 조망입니다. 때로 높은 산에 올라가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만사가 사소하게 느껴집니다. 야~호!
힘을 모아, 큰 소리를 내지르면 그동안의 근심 걱정이 씻겨 내려
가는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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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내게 "왜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살아왔는가, 미래가 있을 수 있다면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살아왔던 대로 계속 사는 대신,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할 기회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질병의 가치입니다. 이이런 가치가 질병과 관련된 고통에만 해당하는 것은 당연히아닙니다.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 갇혔던 빅터 프랭클은 ‘고통의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를 고통에서 구해주거나 자기를 대신해서 고통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지만, 바로 그 고통 앞에서 인간은 마지막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어떤 고통일지라도,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말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그 폐허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보았습니다. 낯선 사람들끼리, 아니 이전이라면 그 어떤 관계 맺음도 거부할 그런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눠 주고서로를 보살피는 가히 혁명적 공동체‘를 건설해나가는 것이었며, 이를 두고 "재난은 지옥을 관통해 도달하는 낙원"이라지칭하기도 합니다.
한편 리베카 솔닛은 재난이란 영어 단어를 다시 곰곰이 살펴봅니다. 재난 재앙‘ 비상(상황)‘은 모두 예상치 못한 상황이나 새로운 환경을 뜻하는 어원을 가진 말이랍니다. 재난(disaster)이라는 말은 멀리‘ 또는 없음‘을 뜻하는 라틴어 dis-‘와 별 또는행성을 뜻하는 astro‘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별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재앙(catastrophe)은 ‘아래‘를 뜻하는 그리스어 kata와 뒤집어지다‘를 뜻하는 streiphen에서 나온 말이며 그래서 재앙은본래 예상되는 상황이 전복되는것, 즉 반전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재난은 새로운 능력을 발휘할 기회라는 겁니다. 익숙한 모든 것과 결별하고, 그래서 고달프고 버거울지라도,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희망을 세울 기회 말입니다. 리베카 솔닛이 재난의 어원을더듬어가며, 실제 재난 상황을 살펴가며 찾아낸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재난은 중생에 대한 측은지심, 집착 버리기, 자신이 독립적인존재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기,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기, 무상함의 각성, 불안에서 벗어나기,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적어도 태연자약하기 같은 불교 원칙들을 집중 훈련하는 과정이라고도 할수 있다.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란 피해와상실 없이 재난의 열매를 얻도록 고안된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명확성과 용감함, 이타주의, 위험과 세상의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평온한 마음 유지하기는 정신수양으로 어렵게 얻어지는 것이지만, 때로는 재난 시에 끔찍한 상실 속에서 선물처럼 갑자기주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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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은 송대의 인물로 팔방미인이라 불릴 만큼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서예와 그림을 좋아했고, 좋아하는 작품을 만나면 결국 꼭 소장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그것을 가지고 가더라도 그리 대단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일이 없었던 겁니다. "아지랑이와 안개가 눈앞을 스쳐가듯, 온갖 새들의 노래가 귀에 들리듯" (『보회당기) 여겼지요.

군자는 사물에 뜻을 둘 수 있지만, 그 뜻을 사물에 매어 두어서는 안 된다. 사물에 뜻을 두더라도 소소한 대상을 즐거움으로 삼는 데그쳐야지, 지나치게 매혹적인 대상에 병이 되도록 매달려서는 안 된다. 뜻을 사물에 매어 두면 소소한 대상에도 병이 되도록 집착하고 매혹적인 대상조차 즐거움으로 삼을 수 없게될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이라는 대상도 소식이 이른바 ‘사물‘에 대한 태도와 같이 대하는 것이 옳습니다.
뜻을 매어 두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너무 탐닉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천기‘를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을 때는 서로 입김을 불어주고 서로 침을 내어 발라 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의와 같은 긍정적인 가치가 불필요한 것이라면, 선악의구분 또한 불필요할 것입니다. 장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임금을 찬양하고 걸 임금을 비난하느니, 차라리 둘다 잊고 도를 실행하는 것이 낫다." 성인인 요와 폭군인 걸 사이에서 경중을 따지며 시비를 가리느니, 차라리 둘 다 잊고 도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는 뜻이겠지요.
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것을 의미합니다. "물고기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어버리고,
사람은 도 안에서 서로를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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