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삶을 견디게 하는 것들
방종우 지음 / 라의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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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춤을 출 때 어떤 느낌이 드니?" 이때 뮤지컬의 메인 넘버라 할 수 있는 ‘Electricity(전율)‘가 나오는데 가사는대충 이런 내용이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어요. 표현할 말이 없어요. 내가 통제할수 없는 감정을 느껴요.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동시에 나를완성시키는 기분도 들어요. 귓속에 음악이 울려 퍼지면 듣고 있는 나는 사라져 버려요. 깊은 곳에서 불이 타오르듯 내 안에서뭔가가 튀어나와 감출 수 없어요. 그러면 이제 나는 갑자기 새처럼 날아올라요.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내 안에서 불꽃이 튀고, 나는 마침내 자유로워져요.

그러자 조금씩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원하는 기적은 대개 단 한 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상황과 사람들의 노력이 겹쳐져 생겨난다. 기적은 시간이 필요하다. 즉, 일정 시간 동안 작은 기적들이 모이고 모이면마침내 눈에 드러나는 커다란 기적이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이 올림픽 금메달을 따면 기적같은 일을 해냈다고 칭송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갑자기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재능과 노력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놀라운 결과일 뿐이다. 그것이 기적이다.

따지고 보면, 기적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 원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우리는 한순간 크고 위대한 일이 벌어지는 것만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기적은 결코 그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많은 이들이 연구실에서 머리를 맞대 백신을 만들고, 시민들은 옷소매로 입을 막으며 기침을하고, 모두가 손을 깨끗이 씻고, 몇 명 이상의 모임은 기꺼이 참아내고, 한 번도 내 건강에 신경 써주지 않던 국가가끊임없이 재난 문자를 보내고. 이러한 사소함이 모이고 모여 마침내 기적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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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
황선엽 지음 / 빛의서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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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로 ‘하다‘는 ‘크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한쇼, 한새, 한숨, 한아비, 한어미 등의 단어가 만들어졌어요. 즉 한쇼란 의미적으로는 큰 소를 뜻하나, 결과적으로는 다 성장한 수소를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고, 이 말이 변하여 황소란 어형이 된 것입니다.

저는 작은 궁금증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사소하다 여겨지는 것들에 궁금증을 품을 줄 알면 더 많은 것들이 궁금해지고 더 알고 싶어집니다. 흔히 듣고 보던 말과 물건을 달리 생각해보고, 습관처럼 하던 행동에 의문을 품어보고 질문해보는 것에서 남다름은 탄생하는것일 테지요. 지금 고개를 들어 주변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익숙하다 여겨지는 것을 달리 볼 줄 아는 사소한 궁금증이 위대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알던 단어가새로운 의미로 쓰일 때,
그리고 그 단어를 자신도 쓰게 될 때
"왜 이런 의미로 쓰이는 걸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많은 단어를 무심코 써왔다는 사실을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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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
황선엽 지음 / 빛의서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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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변화는 오래된 과거의 일이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당근이 당연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시적 유행으로 그치지 않을까하였으나 지금까지 사용될 뿐만 아니라 국립국어원에서 운영하는오픈형 사전인 <우리말샘>에까지 등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단어는 의미를 더 확장합니다.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 당근마켓이 등장하면서 당근은 또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가고 있지요. 홍당무를 뜻하는 당근과, 당연하지를 의미하는 당근, 당신 근처의 마켓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했다는 당근은 동음이의어이지만 한때 ‘당근이지‘를 ‘말밥이지‘라고 말했고 당근마켓의 로고가 홍당무인 것은 사람들이 이 세당근을 다의어 (같은 말)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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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생의 끝자락은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돌봄의 경로가 삶을 ‘임시적인 상태‘로 만든다는 점이다. 환자가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이 없다. 집, 요양원, 요양병원, 급성기 병원 모두 불안한 장소이다. 환자는 의료라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자꾸 어딘가로 이동해야 하는 대상으로 변모한다. 의학적 판단에 따라서 환자 삶의 형식이 규정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일상,관계, 역사, 즉 목소리는 주변으로 밀려난다.

둘째, 생애 말기 돌봄을 함께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는 점이다.
생애 말기는 갑자기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 아니다. 여전히일상의 연속이다. 다만 돌봄의 중요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기이다. 예컨대 생애 말기를 어디서 보낼지, 누구에게 돌봄을 받을지, 어떤 의료 처치를 지속하거나 중단할지,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지, 임종은 어디서 할지 등등 여러 사안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 생애 말기 돌봄은 내밀하고 복잡하고 전문적인 일이다. 개인이혼자 하기는 힘들다. 누군가와 함께 대화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문제는 그 ‘누군가(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환자와 가족이 생애 말기 돌봄을 요양병원 의사나 대학병원 의사와 논의하기는 어렵다. 만약 생애 말기 돌봄을 시장에 내맡긴다면, 정치의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생의 끝자락에 대한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대개 생의 끝자락에 대한 상상은 어떤 병원을 가서, 어떤 의사를 만나고, 어떤 약을 먹고, 어떤 수술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상상은 치료를 받고 회복을 기대할 수있는 시기에는 유용하다. 하지만 치료를 받아도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생애 말기에는 어울리는 상상이 아니다. 생애 말기는 ‘지난한돌봄‘과 함께한다. 가령 환자가 음식을 삼키지 못할 때, 의학적 진단과 처치를 넘어서 어떻게 그 ‘취약함에 응답할 수 있을지 다양한 사람들이 다각도로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다.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 돌봄과 의료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생의 끝자락에 대한풍부한 상상력이 절실하다.

송병기 ‘삶과 죽음이 부드럽게 연결된 느낌‘이라는 말이 마음에와닿습니다. 앞으로 하나씩 살펴보겠지만, 저는 그 말이 호스피스 공간의 핵심을 이룬다고 봅니다. 대개 환자 삶의 역사는 투병과 입원으로 쪼개지거나 끊어지기 쉽습니다. 호스피스는 또 하나의 입원 장소가 아니라 ‘돌봄‘을 통하여 그 단절된 삶을 회복하는 곳입니다. 즉,집과 일상으로 대표되는 환자의 관계망을 다시 연결하는 곳입니다.
호스피스에서 환자는 가능한 한 ‘나답게‘ 생의 끝자락을 보내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람들은 고인을 기억하는 일상의 의례를 행합니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부드럽게 연결된 공간이 호스피스라고 생각합니다.

하루는 제가 동백 성루카병원 간호부장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환자가 호스피스에 와서 하루 만에 돌아가시면 간호사로서 기운이 빠지지 않느냐고 말이죠. 마치 ‘임종 처리‘를 하는 기분이 들지 않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간호부장님은 환자가 하루가 아니라 반나절이라도 통증이 조절된 상태에서 평온하게 지내다 돌아가시는 것도의미가 있다고 하더군요. 생의 끝자락이 어떤 시간으로 차 있는가?

시간의 밀도와 질이 중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환자에게는통증이, 또 다른 환자에게는 가족 관계가 중요한 사안일 수 있다는거죠. 앞서 저희가 이야기한 결혼식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대목입니다. 또 어떤 환자는 호스피스에 와서 두 달 가까이 지내다돌아가셨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보호자가 생업과 간병에 지쳐 병실에 오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송병기단순히 병원 수를 늘리는 게 아니라, 선생님 지적대로 다채로운 공간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골절로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회복 때까지 단기간 입원해 돌봄을 안심하고 받을수 있는 공간이 동네에 하나쯤 있으면 어떨까요? 환자의 평소 삶의리듬을 존중하는 재택의료가 늘어나면 어떨까요? 이는 말기 환자나노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이와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플 수 있으니까요.

김호성환자에게 술을 허용한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놀라곤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희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요즘에는 무알콜 술도 꽤 많이 있습니다. 물론 환자의 몸 상태를 고려합니다. 호스피스의 목적이 단지 치료가 아니라, 돌봄과 완화이기 때문에 음식의목적도 달라지는 거죠. 설령 술이라고 해도 환자의 삶의 질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소량 고려해볼 수 있는 겁니다.

생각나는 환자가 있습니다. 외국에서 살다 온 젊은 환자였는데, 요즘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니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햄버거를 사와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어느 날엔 술을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기름진 음식에는 맥주의 청량감이 때로 필요하잖아요. 환자라고 해서 그게 생각이 안 날 리가 있나요? 물론 병원에서는 술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중독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환자에게 여러 약물들이 투입되기 때문에 간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술 한 잔 마셨을 때 정말로 말기 환자한테 의학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치느냐?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환자가 원해도 절대 안 됩니다‘도 아니고, ‘환자가 원하니 그냥 다 줍니다‘도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각 사례별로 세심한 판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환자 삶의 질은 숫자로 나타낸 지표가 아니라 다학제팀의 관찰, 관여, 숙의를 통해서 해석된 ‘가치‘라는 점에주목하게 됩니다. 여기서 가치는 생명 존중, 해악 금지, 환자의 자율성 존중 같은 ‘선언적 윤리로서의 가치 value‘로 요약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환자의 신체 상태, 성격, 경제력, 가정환경 같은 ‘세속적 평가로서의 가치worth‘로 환원되지도 않죠. 호스피스 다학제팀은 이 두 가치의 한계를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가치를상호보완적으로 다루는 한편, ‘호스피스 돌봄‘이라는 새로운 가치를생산하고 순환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에 대한 이야기도차근차근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환자와 보호자들은 흔히 "무엇을먹어야 되고, 무엇을 못 먹나요?"라고 물어봅니다. 의학적 지침을 구하는 것이죠. 하지만 저희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무엇을‘ 먹느냐보다는 ‘왜‘ 먹는지 그리고 ‘얼마나‘ 먹는지가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즉의학적 판단 안에서 큰 무리가 없으면 섭취를 허락해드립니다. 너무뜨겁거나, 차거나, 딱딱하거나, 기름지거나, 맵거나, 날것인 음식 이외에 모든 음식들은 그 ‘종류‘보다 ‘정도‘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섭취 중이나 섭취 후에 통증 등의 증상이 생기면 중지하고 이후에는 시도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정도의지침을 제시하죠. 그 지침은 명시되고 변하지 않는 기준이 아닌, 환자의 상태와 바람 사이의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기준입니다.

사람에게 음식은 ‘영양‘의 차원에서 그치지않습니다. ‘입맛‘의 차원도 있습니다. 한 노인요양원에서 현장연구를할 때 이야기를 잠깐 하면, 아침마다 예쁜 컵에 레몬즙을 떨어뜨려물을 마시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레몬즙 두세 방울이 들어간 물이 영양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떤 방문객은 그의 행동을마뜩잖게 봤습니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쓸데없는짓을 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입소하기 전부터 해왔던 습관이었고,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요양원에서 단체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라는 고유한 존재가 여기 살고 있음을 나타내는 의례였습니다.
‘당뇨와 치매가 심한 202호 어르신‘과 ‘아침마다 레몬즙이 들어간 물을 마시는 할아버지‘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예쁜 컵, 레몬즙, 물의조합은 요양원의 대다수 구성원들을 할아버지의 일상으로 초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인생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여전히 제가 그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국에 ‘캘리포니아에서 온 딸 증후군Daughter from CaliforniaSyndrome‘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합니다." 평소 환자와 연락이 뜸하던가족이 갑자기 나타나 의료진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한다는 겁니다.

호스피스 현장은 사실 모든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극한‘
적인 현장입니다. 여기에 입원한 환자·보호자들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때와는 다른 감정 상태가 됩니다. 이전 삶에서 쌓아왔던 스스로와 가족들에 대한 감사, 미움, 죄책감, 두려움 등이 한꺼번에 올라오며 시시각각 변하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게되죠. 그러한 상황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인 것같습니다.

주목할 점은 완화적 진정의 목적이 환자의 증상을 경감하기 위・것이지, 환자의 의사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완화적 진정은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한편, 사람들의 돌봄을충분히 받으면서 임종할 수 있도록 돕는 의료행위입니다. 그렇기에 ‘약물의 적정한 비율‘은 ‘소통의 적정한 비율‘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이런 관점에서 선생님이 언급한 완화적 진정의 시기와 방법을 다시생각합니다.

돌봄을 생각할 때, 저는 거꾸로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을 상정해봅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신체의 건강이 유지될 때, 스스로 자율적 판단을 할 수 있을 때 등등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이 말은 그런 상황 외에는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시기가 특수한 상황이며, 그 외 삶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돌보는 사람은 "상대방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번 살고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번 더 사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돌봄이란 상대가 미래에 겪게 될 불편함을 미리 살피는 동시에 현재 그와 함께시간을 보내는 일이라는 겁니다.

임종실 안의 그 흐름은 환자의 마음, 환자와 보호자 사이,
또 삶의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환자가 노래를 듣기 싫어할 수 있고, 설사 본인이 원하는 노래를 들어도 무료하고, 피곤하고,절망적이고,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 호스피스 임종실 내부는 그 외부, 이를테면 연명의료결정법 및 호스피스라는 제도, 정부의호스피스 정책, 호스피스를 후원하는 개인 및 단체 등과 불가분의관계에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임종실은 격리된 장소가 아니라 세계의 일부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임종실의 모습은 한 개인의 바람이 투영된것을 넘어, 사회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체essence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개인이 희망하는 바가 있어도 그것을 실행하려면 가족자원,돌봄 여건, 호스피스 시설·의료진·정책 등이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하지만 그런 외부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일반 시민들은 평소에 임종의 모습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 정도를 가지고 있죠.

김호성 ‘죽으면 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환자에게 옷을 갈아 입히는 데에 굳이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굳이 사복을입힌다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환자가 생전에 제일 좋아했던 옷이나 자신에게 뜻 깊은 옷을 입고 장례식장에 가는 겁니다. 그것을 죽음 너머의 세상을 상정하는 종교적인 것으로 볼 수도있고, 혹은 그 환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요. 어쨌거나 환자 삶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렇게 옷을 입히는 것이 보호자한테도 의미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소속, 역할, 지위 등을 옷으로 드러냅니다.병원에서 의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법정에서 판사가 법복을, 경기장에서 선수가 유니폼을, 학교에서 학생이 교복을 입듯이 말입니다.
즉, 호스피스에서 망자에게 옷을 입히는 의례는 죽음 이후에도 공동체에 그가 속해 있는 한편, 그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공식적인 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죽음‘과 ‘편안한 죽음‘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도 선생님과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좋은 죽음은 가치 판단이 강하게 들어간 말입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평가를 할 때나 쓸 수있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 들면, A는 평소 어디가 아팠지만 투병도 잘 하고, 가족의 사랑도 있었고, 간병인도 친절했고, 의료진도 유능했다. 그래서 그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좋은 죽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평가할 때 쓰기 좋은 말이죠. 혹은 남들이 보기에
‘좋은 죽음‘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 주변을 보니, 혹은 TV를 보니 이러저러하게 죽는 게 좋은 죽음인 것 같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의 죽음,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각자의 삶이 다 다르듯이, 생의 끝자락도 다양할 수밖에없습니다. 저는 ‘편안한 죽음‘은 죽어가는 과정에 가치를 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는지, 또 환자가 편안함을 느낀다는 게 무엇인지 계속 질문해야 하기 때문이죠.
환자의 편안함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환자의 일상, 역사, 관계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통이라는 ‘필연‘을 삶의 아름다운 ‘우연‘으로 채워가는 게 호스피스 완화의료라고 생각합니다.

1907년 한 논문에서 인류학자 로베르 에르츠Robert Hertz는 ‘이중 장례식‘이란 개념으로 죽음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보르네오섬 다약족은 시체를 특정한 장소에 임시로 매장하는 일차 장례식을 치른다.
그리고 시체가 완전히 부패해 뼈만 남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유해를 최종 매장지로 옮기는 이차 장례식을 거행한다. 이러한 이중장례식은 죽은 자를 ‘썩는 살‘에서 ‘썩지 않는 뼈‘로, 나아가 ‘썩지 않는 뼈‘에서 ‘다른 형태의 탄생‘으로 이끈다. 즉, 유한한 존재에서 영속적인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최종 장례식이 끝나면 상을 당한 유족은 일상으로 복귀한다. 한편 죽은 자는 조상처럼 산 자의 대우를 받고, 산 자를 돕는 이로운 존재가 된다. 이중 장례식은 죽음의핵심이 ‘삶의 끝‘이 아니라 ‘영속적 삶으로의 이행‘에 있음을, 그렇게사회는 계속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죽은 자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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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재상이었던 황희 정승 집 머슴이 다리를 절며 가는 사람을 보고 말했다.
"영감마님, 저 사람 한쪽 다리가 짧습니다."
그 말에 황희 정승이 말했다. 환과정은 감격
"그렇게 말하면 쓰나. 저 사람 한쪽 다리가 깁니다. 이렇게 말해야지."

아름다운의 어원은 ‘앓은 사람다운‘과 ‘아는 사람다운‘이라고 한다. 사람이 고통을 경험하고 아픔을 체험하면 속이 한뼘 커진다. 더 성숙해져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많이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또 사물의 이치와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원리를 아는 사람은 얼굴에서깊이가 느껴진다. 그래서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주민센터에서 상근으로 출퇴근하면서 군 생활을 했다고했다. 그 말이 재미나서 농담을 했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
그러나 청년은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예, 제가 이순신 장군 옆에 있던 병졸1이었던 것 같습니다."
재치 있는 대답에 나도 거들었다.
"저 기억 안 나요? 병졸2!"
"아, 이제 기억이 납니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건드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너도 마음이 안 잡혀서 그러는 거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겠냐."라는 말로 잘못을 저지른 아이 마음을 읽어주면 어지간한 강심장의 아이가 아니라면 눈물이 흐르는 법이다. 내 마음을 헤아려주고 다독여주는 부모 앞에서 반발하고 저항하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다. 흔히 잘못을 지적하고 나무라면 반성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집에는 바람 안불디.‘ 넉넉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좋은 부모다. 좋은 부모 되기 참 어렵다.

"그건 애들 마음이 가난해서 그래."
"아, 밥 적게 먹은 것처럼?"
"그래, 마음도 좋은 마음을 적게 먹으면 가난해져."
"그럼, 나는 마음이 부자야?"
"그럼. 너는 좋은 마음을 많이 먹어서 좋은 말을 하잖
"그럼 애들은 불쌍한 애들이네."
"그렇지. 마음이 가난하면 불쌍하지. 친구에게 예쁜 말많이 하고, 좋은 말 많이 하는 사람이 마음 부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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