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곡미풍 -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위화 지음, 백도라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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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그의 신발 끈을 다시 알아보았다. 현장에 있는 청중에게 그는 자신이 왜 신발 끈을 묶지 않는지 설명해주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긴장하지 않고 이완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만약 신발 끈이 꽉 묶여 있다면, 그건 그가 긴장해서 언제든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아주 좋은 설명이다. 긴장이건 이완이건 모두 삶이 우리에게 준 것이다. 언제 무엇을 주는가는 ‘삶 마음‘이다. 우리는선택할 수 없고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 쿠스트리차의 풀어진신발 끈은 하나의 태도다. 그가 현재 긴장에서 멀어져 있음이아니라, 긴장이 언제든지 자주 그를 찾아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안다. 더 이상소년 쿠스트리차가 아니라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쿠스트리차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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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새의 말이 들린다
스즈키 도시타카 지음, 김소연 옮김 / 오팬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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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조는 생물을 사육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 있었다. 벌레나 물고기를 상자에 넣어 관찰하는 것은 자연의일부를 잘라내 자신의 손바닥 위에 두는 행위다. 거기에는 천적도 없거니와 먹이도 내가 마련해 준다. 한편, 들새관찰은 그들이 자연에서 사는 본연의 모습을 본다. 먹이를 찾고, 동료들과 무리를 이루고, 새끼를 키우고, 때로는적에 맞선다. 들새를 관찰하고 있으면 마치 내가 작은 새가 되어 그들의 세계로 들어간 듯한, 그런 묘한 기분이 든다. 동물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일지도모른다.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느꼈다.

경계 시간이 감소하기 때문에 그만큼 해바라기씨를 먹을 시간이 확보된것이다. 어느 종류든 이런 경향은 유사하게 나타났다. 즉,
새들은 혼종 무리를 이루어 먹이를 먹음으로써 서로 경계행동을 분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뿐 아니라 보는 눈이 많기 때문에 천적의 습격을 더 빨리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들 중 한 마리만 매가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채도 ‘삐삐삐!‘ 신호를 보내 모두를 초목 수풀로 도망치게 할 수 있다.

박새류는 해바라기씨를 발견하면 다른 새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제야 새들의 마음을 알게 된 것 같아기뻤다. 먹이가 있는 곳에 다른 새들까지 부르다니, 언뜻생각하면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에게도이익이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내용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북방쇠박새의 ‘지지‘, 박새의 ‘치지지지‘, 곤줄박이의 ‘니니‘. 이것은 모두 동료를 부르기 위한 울음소리다. 그리고 이 소리는 무리 속에서 안심하고 먹이를 먹기위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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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위성의 법칙에 따르면 비정상적으로 좋은 결과 뒤에는 대개 평범한 결과가 따라온다. 따라서 훈련생이 실수를 한 번 저지른뒤라면, 교관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다음 기동에서 더 나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교관이 목격한 일련의 변화는사실이었다. 그의 말처럼 훈련생들의 기량이 실제로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경향을 보였지만, 그 이유가 호통에 있다고 착각한 점이 바로 교란 요인이었다. 진실은 단순하다. 사건이 평균으로 회귀하고있던 것이다.

평균회귀는 현실에서 꽤 미묘하게 작용하지만, 세상의 수많은믿음을 설명한다. 그중 동종요법 제품의 효과에 관한 믿음이 있다.
굳이 복용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통증에도 제품 덕분에 나아졌다고 느끼는 상황 말이다. 이처럼 볼테르(Voltaire)의 말로 알려진다음 격언이 때로는 옳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의술이란 자연이 병을 고치는 동안 환자를 기분 좋게 하는 기술이다.

지연은 필터링의 딜레마이다.
우리는 성가신 잡음을 제거하는 일과신호의 지연을 줄이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라면 그러한 실수는 절대 하지 않는다. 표본이 작을수록평균에서 크게 벗어난 수치가 나올 가능성이 큰 법이다. 이는 통계학적으로 지극히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은 본래 표본의 크기에 둔감하다고 하지 않던가. 휴가 중에 만난 네 사람을 근거로 ‘벨기에 사람은 무뚝뚝해!‘라거나, ‘오스트리아 사람은 이상해‘라고 단정 짓는 것도 같은 충동에서 비롯된다. 이 책의 근본적인 교훈은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우리의 직관은 통계를 알지 못한다.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적은 데이터만으로 쉽게 일반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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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이 모든 것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마치 화학자가 향수를 분석하면 결국 드러나는 원료들은 단순한 것들인 것처럼철학은 인간을 해체해 그 속의 본능적 재료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이 욕망과 오류, 본능과 탐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을 배우는 일은 불편하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영원히 환상 속에머물게 된다.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스스로의 민낯을 보는 훈련이다.

고대인들이 말한 otium, 즉 한가함은 단순한 놀이나 나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가장 고귀한조건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정신은 늘 일을 한다.
otium의 순간에서야 정신은 자신의 과거를 정리하고, 현재를성찰하며, 미래를 내다본다. 여유는 게으름이 아니라 성찰의 공간이다

내가 가장 쉽게 속이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에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의 지성도혼의 성장도 모두 멈춘다. 오직 멈추지 않고 꾸준히 배우는 사람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뿐이다. 모른다는 건아직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고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사람만이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진짜 지성이다.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마라. 배움의 시작일 뿐이다.

허무를 느끼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많이 보고 너무 깊이 느낀 사람이지만 모든 게 덧없다는 것을알면서도 그 덧없음 속에서 무언가를 붙잡으려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통과의 시간이다. 깊은 허무를지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진다. 예전에는 모든 걸 잡으려 했다면 이제는 놓을 줄 알게 된다. 모든 걸 설명하려 했던 마음이그냥 받아들이는 쪽으로 바뀐다. 허무는 절망이 아니라 거짓된위로를 버리고 진정한 평온으로 가는 길이다. 모든 게 덧없다고 느껴져도 그 덧없음을 알고도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삶의근본에 대한 깊은 허무는 인생의 두 번째 시작을 알리는 포문이다.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단어를 바꿔야 한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지금의 나를 만든 셈이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는 내 마음의 구조를 결정한다. 무심코쓰는 말 속에 내가 어떤 세계에 사는지가 드러난다. 한 번쯤은멈추고 생각해야 할 때다. 나는 어떤 단어를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 말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더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가? 습관적인 말이 습관적인 생각을만든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를 바꾸는 것은 자기 인식의 새로운 틀을 짓는 일이다.

진짜 정의는 증오가 아니라 절제 속에 있다. 악을 미워하면서도 그 미움에 휘둘리지 않는 것. 그 미움 속에서도 인간을 잃지 않는 것. 싸워야 할 때는 싸워라. 그러나 그 싸움이 나의 본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괴물은 외부에 있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 있다. 내가 분노할 때 눈을 뜨고 내가 확신할 때 웃는다. 악과 싸우면서도 악을 닮지 않아야 한다. 나의 싸움이 나를 타락시켜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이 미워하는 것을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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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 - 고통 없이, 내 뜻대로, 존엄하게 죽는 일은 가능한가
박혜윤.신성준.최은경 지음 / 아몬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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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배경에는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규범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질병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죽음은 ‘치료의 실패‘로인식된다. 환자에게는 끝까지 치료에 매달려야 한다는 압력이, 가족에게는 끝까지 살려야 한다는 도덕적 부담이, 의료진에게는 최신 치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기대가 작동한다.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제안하는 것은 쉽게 ‘포기‘로 오해받는다. 그 결과 임종에 관한 대화는 미뤄지고, 연명의료나 호스피스에 대한 결정은 지나치게 늦어진다. 환자의 고통이 충분히 조절되지 못한 채 임종에 이르는 일이 한국 의료 현장에서 되풀이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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