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동기화, 자유 - 자유를 빼앗지 않는 돌봄이 가능할까
무라세 다카오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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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다. 환자식이 아니라 흔한 집밥을평범하게 먹고 싶다. 혼자서 쓸쓸하게 먹는 게 아니라 많은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먹고 싶다. 기저귀에 싸기는 싫다. 대소변은 화장실에서 스스로 시원하게 보고 싶다. 부탁하지도않은 재활은 하기 싫다. 누군가 맘대로 만든 일정표 때문에내 생활 리듬이 흐트러지는 게 싫다. 그보다는 낮잠을 즐기고 싶다. 입 안 가득 과자를 먹고 싶다. 옛날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날씨가 좋으면 훌쩍 나가서 계절의 흐름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익숙한 동네에서 마지막까지 나답게 살고 싶다. 모르는 장소에서 쓸쓸하게 죽기보다 낯익은 사람들이 많아 안심할 수 있는 곳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고 싶다.
만약 ‘요리아이‘에 이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이처럼 당연한 바람과 생활을 ‘가능한 지원하는 것이겠습니다.
우리는 고령자를 부담스러운 짐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격리하지 않습니다. 구속하지 않습니다. 약에 찌들게 하지 않습니다. 노화의 시간과 리듬에 어우러지며 고립되기 쉬운 어르신및 그 가족들과 함께합니다."

더 이상 손 쓸 수단이 없어졌을 때야말로 자유롭게 해방되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르신과 나, 두 사람의 ‘바람‘이 성취되지 않을 때, 그 너머에서 ‘해주다‘와 ‘받다‘를 뛰어넘어 서로 돌보는 상황이 태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어르신들을 돌보며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세계와 개념이 일치하는 순간. 실천과 언어가 동기화된다고 하면 될까.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내 기술이 향상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 느낌은 때로 나를 ‘다 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했다. 공부한 지식에 어르신을 끼워 맞춰서 내가 다 이해한다고생각했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태도는 어르신들에게 있는 ‘저항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알아주면 좋겠다. 하지만 너무 쉽게 알아서는 안 된다‘ 어르신들에게는 그런 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닥치는 대로 ‘이론‘을 머릿속에 담으면서 ‘육성‘으로 부딪쳐본다. 내게 돌봄이란 그런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간섭을 받는 할머니는 점점 이상해졌고, 간섭하는 나 역시점점 이상해졌다.
‘사람을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다. ‘나 역시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 상냥하게 대하고 싶지만, 상냥해질수 없다. 느긋하게 대응하고 싶지만, 마음이 조급해진다. 내속에 숨어 있던 폭력성이 드러날 것 같아서 스스로가 무서워진다.

나는 점점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 나를억제한 것은 할머니의 슬픔 가득한 말이었다.
"
"내게도 아직,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왜...왜...."
할머니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호흡에 맞춰 훌쩍거리는 콧물. 할머니는 점점 리듬감 있게 훌쩍거렸다. 리듬은 허밍으로 바뀌었고 허밍은 소프라노의 멋진 노랫소리로 변화해갔다.
할머니는 자신의 노랫소리에 힘을 얻었다. 슬퍼하던 표정은 후련해졌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편안하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겨우 몇 분동안 벌어진 일은 나를 극적으로 바꾸었다.

그때껏 나는 재택 돌봄을 하려면 일종의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바로 혼자 죽을 각오다. 당사자와 돌보는 사람, 모두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그렇지만 최근 들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죽을 때는 언제나 혼자다. 혼자 죽는 건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제어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집에 돌아가니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 이 문장에는 사실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나 자신이 홀로 생활하는 어머니를 돌보게 되면서 생각이바뀌었다. 좀더 마음 편하게 집에서 죽어도 된다고.

할머니는 ‘죽음‘과 맞바꿔서 마스크를 벗은 게 아니었다.
‘연명‘을 원하지 않아서 산소마스크를 벗는 선택을 했다고는생각할 수 없다. "아무튼, 싫어."라고 했던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싫어‘를 따르는 결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결정은 ‘미래‘로부터 ‘지금‘을 생각하지 않는,
‘지금‘으로부터 ‘미래‘를 예상하지 않는, ‘지금‘만을 붙잡으려하는 육체에서 비롯된 염원 같았다.

‘노화=부자유‘라는 등식이 뇌리에 새겨졌다.
내 착각이었다.
입보다 유창하게 말하는 눈빛.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동자.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무당과도 같은 말솜씨. 독창성넘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창의력.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혼란. 자신의 위기를 남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감각. 신념으로 가득한 주관. 추종을 불허하며 뻗어나가는 사고. 순발력 있는 지성. 체력과 비례하지 않는 지속성. 시간과 공간을뛰어넘는 도약력.

앞선 문단의 내용은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노쇠한 사람의모습을 긍정적으로 바꿔서 적어본 것에 불과하다. 노쇠한 몸에는 우리에게 없는 약동이 있다. 그 약동은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얻은 개념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 같다.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자유롭지 않게 된 몸은 나에게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준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됨으로써 나는 시간에서 자유로워진다. 내가 있는 공간이 어딘지 모르면 상황에 맞춰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는 규율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설령 누워서만 지내게 되어도 정신까지 그 자리에 묶여 있지는 않는다.

자식의 얼굴을 잊어버림으로써 부모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신선하다. 분노와 증오에서 잘 벗어나게 되고, 기쁨을 느끼기 쉬워진다.
내가 지니고 있던 자기 개념이 무너지는 동시에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했던 규범에서 해방된다. 나라면 이래야 한다는믿음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변화하여 새로운 ‘나‘로 바뀔 뿐이다. 돌봄이란 그 과정을 함께하는 일이 아닐까.

몸이 점점 자유롭지 않게 되면서 사회의 개념적인 것에서점점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늙는 것이라고 한다면, 노쇠의 세계란 과연 어떤 곳일까.
그곳이 어떤 곳이든 ‘늙음‘이란 ‘노쇠=기능 저하‘라는 등식에 전부 담을 수 없는 생기 넘치는 과정이다. 호들갑스럽게말하면 번데기 속에서 몸이 걸쭉하게 녹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듯한, 그런 역동적이고 극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어르신들이 돌봄을 기꺼이 받지는 않았다. 돌보는나도 돌봄을 기꺼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시작되는 일이었다. 노쇠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몸에 손대게 한다. 그 몸을 맡은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손을댄다.

그렇지만 나는 바로 어쩔 수 없이 시작된다는 점이 우리를구제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떠한 방책도 남지 않았을 때 시작되는 협력 관계와도 비슷하다. 잘난 체라고는 하지 않는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서로 협력한다. 서로에게 큰기대를 품지 않은 채 당면한 일과 마주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다‘에는 수용이나 공감과는 다른 긍정이 존재한다.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안녕히‘라며 작별조차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음. 둘이서 하나의 행위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합의‘하는 것부터 시작하는게 마음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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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 김창완 에세이
김창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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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생활이란 것도47일 근무 중에
이틀이 동그라면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기분은 날씨 같은 것이라고

어떤날은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지는 게 힘이 펄펄 나는가하면 또 어떤 날은 몸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때가있습니다. 몸이 힘들면 마음이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날씨 같은 거라고 여기면 되는 거예요. 바람 불다,
비가 오다 그러다 햇살이 비추기도 하는 거거든요. 또 그러다 흐리기도 하고.

잡초에 관한 얘기였는데요. 고려대 강병화 교수가17년간 전국을 다니며 채집한 야생 들풀 100과 4,439종의 씨앗을 모아 종자 은행을 세웠다고 소식을 전하면서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잡초가 되는 것이지요.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겁니다."
이런 말을 덧붙였더라고요. 그러니 스스로 잡초라 할 일이 아니네요. 용기를 갖자고요.

사진을 힐끗보니 가슴에 또 틈이 벌어집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다시웃습니다. 왜냐면 막내는 아직 저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인디언의 지혜에서 빌려 왔습니다. 인디언들은 진짜 사람이 죽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이 죽을 때라고 믿는답니다. 그분이 할머니를 잊지 않는한 할머니는 그분 가슴에 살아 있는 것이지요. 우리 또한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면 하늘나라로 간다 해도진정으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사람을 애태우며 잊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향기로운 그들을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살아가면그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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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 디지털 인프라를 둘러싼 국가, 기업, 환경문제 간의 지정학
기욤 피트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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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는 날로 커져만 가는 기술의 힘과그 기술을 사용하는 우리의 지혜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될 것이다."
스티븐 호킹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이러한 일상이 1829년 10월 6일에 대전환을 맞는다. 그날, 영국 출신 기술자 조지 스티븐슨이 설계한일종의 로켓, 그러니까 증기기관차가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이어주는철로 위를 시속 4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림으로써 우편마차와 중소형쾌속 범선들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기차는 전신기, 비행체 등과 결합하면서 우리가 시간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했다. 인간과상품은 물론, 아이디어조차도 항구와 공항, 송신탑 등을 연결해주는전 지구적인 운송망을 타고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속도로 세계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1971년 10월 2일, 미국 출신 공학도 레이 톰린슨이 과학자들과 미국 군인들 사이에서 애용되던 정보통신망 아르파넷Arpanet‘을통해 최초의 이메일을 보낸다. 이로써 인류는 급작스럽게 즉시성의 시대로 들어선다. 오늘날 모든 것은 (거의) 빛의 속도로 교환되고 달라진다. 우리는 고대의 포석 깔린 도로, 산업화 시대의 철도를 지나 이젠또 어떤 기초 설비가 우리의 일상적인 디지털 행위를 가능하게 해줄지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당신이 한 통의 이메일을 보내거나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엄지 척‘(그 유명한 ‘좋아요‘)을 누를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수십억 번의 클릭은 어떤 지리적 분포양상을 보이며, 그것들의 물질적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것들은 어떤 생태적 · 지정학적 위협을 가하는 걸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질문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아르파넷은 이제 디지털 선사시대의 유물에 속하며, 그것을 탄생시킨 설계자들, 즉 정보과학계의 선구자들은 우리의 머나먼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한 족속처럼 여겨진다.

이와 관련된 숫자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세계 디지털 산업은너무도 많은 물과 자재,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이것이 남기는 생태발자국은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가 남기는 생태발자국의 세 배에이른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은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10퍼센트를 끌어다 쓰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거의 4퍼센트를 차지하는데,이는 세계 민간 항공업 분야 배출량의 두 배에 약간 못 미치는 양이다." "디지털 기업들이 그들을 규제하는 공권력보다 더 힘이 세질 경우, 그들이 생태에 끼치는 영향을 우리가 더는 통제하지 못할 위험이있다"고, 스카이프 공동 창업자이자, 기술의 윤리 문제를 연구하는 생명의미래연구소Future of Life Institute 창립자인 얀 탈린은 경고한다." 우리는 확신한다. 디지털 오염은 녹색 전환을 위험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향후 30년을 뜨겁게 달굴 도전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이미 경주는 시작되었다. 한편으로, 디지털 기업들은 인터넷을 비롯하여 스마트폰, 심지어 본사 건물을 에워싼 잔디밭마저도 ‘녹색‘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가진 막강한 재무 역량과 혁신 기량을 총동원할 것이다. ‘친환경적‘이면서 ‘책임감 있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디지털 산업의 목표가 오늘날 업계의 최대 관심사인데, 이는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가 클릭하기를 계속하고 마음껏 ‘좋아요‘를 보낼 수 있기때문이다. 디지털 업계의 선두를 달리는 GAFAM‘은 더 나아가 그들이 바친 기막힌 물질적 조공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어떻게 해서든 유지하고자 기를 쓴다. 우리가 상시적으로 들여다보는 화면 안 어디에나 깔려 있으나 우리를 둘러싼 대지에서는 좀처럼 실체를 파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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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일러 주는 하느님 - 오늘의 삶을 위한 식별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자코모 코스타 엮음, 정강엽 옮김 / 성서와함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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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성인은 두 가지 생각의 차이점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은 3인칭 시점으로 쓴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사를 공상할 때에는 당장에는 매우 재미가 있었지만, 얼마 지난 뒤에 곧 싫증을 느껴 생각을 떨치고 나면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는 길, 맨발로걷고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는, 성인전에서 본 고행을 모조리 겪는다고 상상을 하면, 위안을 느낄 뿐만 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흡족하고 행복한 여운을 맛보는 것이었다"(8항). 성인전은 그에게 기쁨의 여운을 남겼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이 경험에는 주목할 만한 측면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입니다. 즉, 세상에 대한 생각은 처음에는 매력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매력을 잃고 공허함과 불만족을 남깁니다. 반대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처음에는 ‘나는 이 지루한 성인들의 이야기를 읽지 않겠어‘ 같은 일종의 저항감을 일으키지만, 성인들의 삶이 마음에 들어오면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평화를 느끼고 그 평화는 오래 지속됩니다.

두 번째 측면은 생각의 종착점이 어디인지입니다. 처음에는 상황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아 보입니다. 식별에는발전 단계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추상적이거나 통상적인방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여정을 통해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를 이해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 근본적인 경험의결실인 ‘식별의 규칙‘에서 이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전제를 제시합니다. "대죄에서 대죄로 나아가는사람들에게 원수는 노골적인 쾌락을 제시하고 감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상상하도록 하여 악덕과 죄들을 유지하고더욱 키워 가게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한 영은 이성의 분별력으로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을 일으키는 등 정반대의•방법을 쓴다" 《영신수련》, 314항).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않습니다.

식별하는 사람은 식별에 선행되는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식별이란 두 가지 가능성을 놓고서 제비를 뽑는 일종의 신탁이나 숙명론 혹은 실험실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떤 지점을 지나는 여정을 마칠 때면 중요한 질문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여정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삶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그런데 내가 왜 이 방향으로 걷고 있지?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바로 그곳이 식별이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다리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하느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네, 그렇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마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느님을 처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놀라운 반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첫눈에매력적으로 보인 것들은 그에게 환멸을 가져왔지만, 그다지눈부시지 않은 다른 것에서 그는 지속되는 평화를 느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경험을 합니다.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거기에 머물다가, 결국에는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에 우리가 자선 활동이나 좋은 일을 하면 행복을 느끼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행복과 기쁨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사건에는 명백한 우연성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은 사소한사고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기사들의 무용담에 관한 책을 원했지만, 성인전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좌절은 하나의 전환점이 됩니다. 얼마 후에야 이냐시오 성인은 이것을 깨닫고 모든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명심합시다. 하느님은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일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나에게 우연히 어떤 일이 일어났고, 우연히 이 사람을 만났고, 우연히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계획되지 않았지만, 하느님은 계획되지 않은 사건과 심지어 불상사를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산책을 해야 하는데 발에 문제가 생겨서 산책을 할 수 없잖아." 이런 불상사를 통해서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사건이 여러분의 삶에 무엇을 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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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약이며 결국에는 다 좋아질 것이라고, 모든 고통에는 메시지가 있다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은 못 된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이 삶이니까. 부서진 파편들을 서둘러주워 모으려고 하면 안 된다. 파편에 손을 다친다. 단, 이 한 가지를 나는 안다. 칼 융이 말한 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치유받지못한다는 것. 그저 놓아줄 뿐이라는 것. 우리는 흉터를 보면서자신이 상처를 극복했음을 알 수도 있고, 흉터를 보면서 상처입은 일을 기억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파란 바다가 바라보이는 귤밭에서 뙤약볕과 장대비와 풀모기들이 그녀의 아픈 마음을 인정사정 봐 주지 않았다.
더 다행히도, 그녀는 몸은 고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은 평화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다음 문장을 발견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처럼 가벼울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한 것이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 그래야 비상할 수 있고,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높은 곳에서 멀리 볼 수 있다.
깃털처럼 중심도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새처럼 가볍게 날 수 있어야 한다. 새는 뼛속에 공기가 통하는공간이 있어서 비행할 수 있듯이 존재 안에 자유의 공간이 숨쉬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박한 가벼움이 아니라 자유를 품은가슴의 가벼움이다.

깨달음에 이른 후 싯다르타가 제자들에게 한 첫 번째 강의는
‘인생은 괴로움이고 고통이다.‘라는 것이었다. 불교도뿐 아니라비불교도들도 이 진리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모든 불상은 왜고통스러운 얼굴이 아니라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까? 심지어 크게 웃는 불상도 있다. 그렇다면 생에 대한 정의는 괴로움에서 출발해 궁극의 웃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자신을생각의 무거움으로 짓누르는 시기를 지나 경쾌한 혼의 길로 나아가는 것.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소설 『섬」에서 썼다.
"마음이 어두운가? 그것은 너무 애쓰기 때문이라네. 가볍게가게, 친구여, 가볍게. 모든 걸 가볍게 하는 법을 배우게. 설령 무엇인가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가볍게 느껴 보게. 그저 일들이 일어나도록 가볍게 내버려 두고 그 일들에 가볍게 대처하는 것이지. 짊어진 짐들은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게. 너의 주위에는온통 너의 발을 잡아당기는 모래 늪이 널려 있지. 두려움과 자기연민과 절망감으로 너를 끌어내리는. 그러니 너는 매우 가볍게걸어야만 하네. 가볍게 가게, 친구여."

여기,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가 있다.
가까이 오라, 사랑하는 이여.
우리 서로를 어여삐 여기자당신과 나갑자기 사라지기 전에.
역설적이게도 삶의 기쁨은 이곳에서의 나의 머묾이 제한적이고 유한하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봄의 풀꽃들도 그것을 아는듯하다. 지저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 새도 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가슴 안에 그 새의 공간을 남겨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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