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의 관계에서평화를 발견하는 사람만이 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부모에게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를 있는그대로 인정하면 부모의 약점과 장점, 상처와 불안과 갈망을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부모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고, 부모의 생각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스스로 행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경우라 할 수있다.

좀 가혹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더욱 잘 어울리는 인생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삶이란, 사실 나 자신에겐 괜찮지 않은 삶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한 애정을 거두어들일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안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관계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우리는 상대방을 실망시킬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부모가 우리에게 보내는 애정이 깃든 눈길과 축복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특히 자신의 부모를 실망시킬 수 있는 능력은하나의 기술‘이다. 즉, 건설적인 방식으로 실망시키는 것 말이다. 최선의 경우는 실망을 통하여 부모와 새롭고 더욱 깊으며인격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물론 부모와의 관계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부모와의관계가 각별한 성격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외에도 우정이나, 사랑, 혹은 직장에서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생산적실망을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내적 자세가 있다.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는 모든 과정은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사로잡혀 있던 모든 착각과 환상,
기대심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신이 겪는 실망들을 어떻게 건설적으로 대할 수 있는가는,
나를 둘러싼 세상과 다른 사람이실제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자 하는열린 마음에 달려 있다.

모든 실망은 곧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모든 착각과환상, 희망사항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실망할 때 비로소 착각이 사라진다. 실망하다‘라는 독일어 단어의 구조가 이를 보여준다. 우리는 착각에서 벗어나며(ent-täuchst), 우리가 틀렸고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ent는 ‘제거‘의 의미를 지닌 전철이며, täuschen은 ‘속이다‘, (재귀용법으로) 착각하다‘, ‘속다‘의 의미-역주)이는 대단히 극적일 필요는 없다. 휴가 중에 매혹되었던 포도주를 집에 돌아와서 마셔보니 그때의 맛과 다를 때, 우리는실망한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결심이라는 것은 매우 모순적이다. 이러한 격언이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결심으로 포장되어 있다."
좋은 결심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성을 지닌다. 원칙적으로는 분명추구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누구도 반대할 수는 없으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목표를설정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과도한 이상향을 목표로 지향하는 반면 실제의 삶에 부합되며 자신에게 어울리는가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는 하나의 신호이기도 하다.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삶을 간과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좋은 결심들이 데려가는
‘지옥‘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할 때 스스로에 대해 내리게되는 판단, 자기 자신 안에서 만나는 부정적 자아상 등을 의미한다. 결국에는 이제 좋아지기는 결코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 기분만 쌓여갈 뿐이고, 자신은 결심한 바를 해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괴감만 커진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 결심들에 대해 의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그 결심의 기저에깔린 자신의 이상적 이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실망과 대결하는 과정을 통해 점점 더 나의 한계를 잘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들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 훨씬 더 많은 공감을 하면서 다정다감해지고 너그러워진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평가하기를멈추었을 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 역시 그만둘수 있다. 다른 사람을 엄격하게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으로 분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내 인생은 있는 그대로의 그것이고, 무언가를 해내거나 바꾸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자신에 대해 고민할 필요 또한 없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대로 놓아두어도 된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깊고 새로운 경험으로 이끌어준다. 이것은 곧 놓아둠과 안정감의 경험이다. 내 인생을 세워둘 단단한 기초를 놓으려 애써 긴장하고 큰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 이로써 깊은영적 체험으로 모여질 가뿐함과 인생의 기쁨이 생겨난다. 내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연연하는 대신 나의 실재를 직시할 수 있는 만큼 내 인생과 나에게 정말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 안의 갈망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갈망에 휩쓸리게 된다.
그때 갈망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어딘가로우리를 끌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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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삶의 밑바닥을 헤매면서도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 이라는신분만큼은 한사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부자 관계를 증명해주는 그 소중한 칼마저 팔아치웠을 겁니다. 작은아들의 단검은 비록 거지꼴을 하고 부랑자 신세가 되어 돌아왔을망정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걸 잊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아들이라는 신분을 한시도 잊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탕자의 마음가짐이 고향을 향해 발길을 돌리도록 이끌었던 겁니다.

산상수훈은 고향, 곧 아버지의 집으로되돌아가는 가장 단순한 경로를 제시합니다. 그 길을 따라가노라면위로를 받고, 사랑을 입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등 두 번째 유년기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된다는 건 산상수훈을 삶으로 살아내서 하나님나라로통하는 좁은 문을 찾아낸다는 뜻입니다. 렘브란트는 그 사실을 알고있었을까요? 탕자의 비유가 이 그림의 진면목을 발견하도록 이끌었는지, 아니면 거장의 작품이 예수님의 비유에 담긴 새로운 의미를깨닫게 해주었는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집으로돌아온 젊은이의 머리를 보면서 작가가 두 번째 유년기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짐작할 따름입니다.
언젠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여주고 느낀 점을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젊은 친구(똑똑하게 생긴 아가씨였습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탕자의 귀향>을 복제한커다란 포스터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더니 작은아들의 머리에손을 올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이건 자궁에서 막 나온 갓난아이의머리예요. 보세요. 아직 젖어 있어요. 얼굴에도 여전히 태아의 느낌이 남아 있잖아요." 젊은이의 얘기를 듣고 거기 있던 이들이 모두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렘브란트는 정말로 집으로 되짚어왔을 뿐만아니라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신 하나님의 자궁으로 돌아온 탕자의모습을 그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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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자신을 성장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걱정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의 삶을 허락하게 된다. 내면에 숨겨져 있던 자신의 부정적 감정과 결점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보다 솔직하고, 즐겁고, 자유롭길 바라는 깊은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과 아끼는 사람에게만시간을 허락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원하는 대로 친구들과 수다를떨고, 자신에게 꽃을 선물하며, 달빛 아래 춤을 출 수 있다. 평범한주변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면 일상생활에서도 화려한 이벤트를 찾을 수 있다.

진실성에는 정해진 기준이 없다. 마리아에게 진실성이란 원하지않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흰머리를 염색하지 않고, 불편한 옷을입지 않는 생활을 의미한다. 예타에게 진실성이란 일요일 아침에늦잠을 자고 아침 식사로 파이를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 자유를의미한다. 나오미는 폭력적인 성향의 남편에게 행동을 고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선언한 순간 온전한 자유를 느꼈다. 질은 죄책감에 움츠러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안을 털어놓을때 진실성을 느낀다.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통제 불능의 아기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어쩌면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혜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관대해지는 법을 배우면 그 관대함을 다른 이들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모습을 숨길 필요없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고, 스스로 성장하는 동시에 타인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결점과 모순을 가진 인간이라도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는 교훈을 선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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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진실을, 오로지 진실을 얻어내려 애써온 방법의 역사가 무엇보다도 실패와 좌절의 역사인 것은 우연한 일이 전혀 아니다. 고통이나 두려움, 처벌의위협 혹은 심지어 구원의 약속도 진실을 강제하지는 못한다. 거짓말은 자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픔과 두려움과 위협과 약인간이 진실을, 오로지 진실을속으로 우리는 정확히 정반대의 것을 얻어낼 뿐이다. 고문받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기보다, 고문관이 무엇을 진실로 여기는지 알아내려 안간힘을 쓴다. 고문관이 진실로 여기는 것을 말해주어야 고문의 고통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지. 이제야실토하는군" 하고 의기양양해하면서 고문관은 결국 자기 생각만 강제할 뿐이다. 속내를 정확히 말해주는 것보다 어른의 좋은기분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고문은 암시의 이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정하는 기준은 오로지 상대방의 생각일 뿐이다. 바꾸어 말해 고문받는 사람은 고문관의위에 맞추려 되도록 그럴싸하게 거짓말하려 시도한다.

거짓말과 비슷하게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현상은 오로지 하나, 곧 거울이다.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거울이 보여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들림 없는확고함으로 거울은 정확히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거울에 무슨 짓을 하든 거울이 그 앞에 선 우리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의 교차된 시신경과 다르게 거울은 측면을 헷갈리지 않으며, 오른쪽은 오른쪽에 왼쪽은 왼쪽에, 위는 위로 아래는 아래로 놔둔다. "거울은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말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이 말대로 우리는 거울을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믿는다. 거울은 반응하지 않으며, 해석하거나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거울은거짓말과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거울을 도구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는 거울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거짓말 읽기는 다각도로 충분한 거리를 두고 관점을 바꾸어가며 살필 때에 가능하며, 어떤 이해타산으로 거짓말에 휘말려서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 그러나 거짓말 전체를 놓고 성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로지 거리를 두는 태도와는 다른 조건도필요하다. 거짓말 성찰은 오로지 그 자신이 거짓말의 능력을 아는 사람, 곧 잠재적인 거짓말쟁이만이 할 수 있다. 우리가 거짓말 전체를 살피려는 결심을 어려워하는 구실이 차고도 넘쳐나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거짓말을 하려는 결심의 도덕적인 정당화가 가능할까 하는 물음 앞에서 사람들은 거짓말 전체를 살피기 꺼려한다.

인간은 자기 행동에 밑받침이 되어주는 것이라면 참으로 여긴다. 또 바로 그래서 우리는 진실을 마음에 드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 끌어다대기도 한다.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 곧 어떤 행동을 선택하되 다른 대안은 고려하지않기로 결정해야 하는 사람은 진실을 아는 지식이 유용하다고여긴다. 또 물론 이 지식은 행동 조건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아는것이기도 하다. 성인은 시간과 인내심을 가지고 아주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교환하면 지식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수 있음도 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지식을 실제 참으로 여길 것인가 하는 물음은 이지식을 행동에 고려해야 하는지, 곧 우리 행동에 유용한 것인지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실에 가지는 관심은무엇보다도 목적에 합치하는지 따지는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바꿔 말해 우리는 유용하거나, 심지어 꼭 필요할 때에만 진실을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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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소리들은 말합니다. "네가 괜찮은 녀석이란 걸 보여줘. 적어도네 친구보다는 나은 인간이 돼야 하지 않겠어? 성적은 어때? 상위권에 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 분명히 말하지만, 네 힘으로 해낼수 있어. 교우 관계는 어떻지? 꼭 그런 친구들과 사귀어야겠어? 여기 이 트로피들을 좀 봐. 네가 얼마나 훌륭한 선수인지 알 수 있잖아. 약한 꼴 보이지 마, 괜찮아질 거야! 노후 대책은 다 세워놓은 거야? 별 볼일 없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관심을 거두는 게 인지상정이야. 쓸모없어지면, 그걸로 끝이라고."
사랑하는 아이‘ 라고 불러주시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 이런 질문과 조언들은 전혀 해로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부모, 친구,
스승, 더 나아가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들조차도 대부분 각자의 이해에 충실한 법입니다. 무슨 경고와 충고를 하든지 속내가 있게 마련입니다. 결국 조언이라고 해봐야 한계가 명확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데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단 무조건적인 사랑의 목소리를 잊어버리고 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 자체로는 별 해가 없는 제안들이 삶을 지배해서먼 지방으로 끌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시점을 짚어내기가 특별히 어려운 건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누구에게 속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하루하루 지내는 모습을 보면 나는 하나님보다는 세상에 속한 인간처럼 보입니다. 누가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해도화가 납니다. 별것 아닌 거절에도 깊이 상심합니다. 의미 없는 칭찬에 화색이 돕니다. 사소한 성공에 흥분합니다. 아주 작은 일들에 들뜨기도 하고 구덩이에 처박히기도 합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그만 나룻배와 같아서 물결이 일렁이는 대로 고스란히 흔들립니다.
균형을 유지하고 자칫 뒤집혀 침몰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깡그리 쏟아붓다 보니 삶 자체가 생존 경쟁처럼 돼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나 되게 하는 게 세상이라는 착각에서비롯된 불안한 씨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해 쉴 새 없이 "나 사랑해? 정말 사랑하는 거지?" 라고묻는 한, 그 목소리에 휘둘리고 거기에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 한다면 으로 가득 차 있는 까닭입니다. 물론이지. 잘생기고 예쁘다면, 똑똑하다면, 돈이 많다면 사랑하지. 일류 대학교를 나왔다면, 좋은 직장에 다닌다면, 멋진 친구들과 사귄다면.....

하느님은 팔을 거두거나, 축복을 도로 빼앗아가거나, 사랑하는아이‘로 여기는 마음을 거두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을 억지로 집에 눌러앉히지도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금쪽같은 자자녀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가면 아버지 또한 막심한 고통을 겪을 게 불 보듯 빤하지만 선선히 떠나보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선선히 떠나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이 자기 삶을 찾아가도록 허락하는것 또한 사랑입니다.

평생 궁금해하던 수수께끼가 이제 풀렸습니다. 내키는 대로 집을나갈 수 있는 건 그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팔을 내민 채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언제라도 자식이 다시 돌아오면 반가이 맞아들이고 그 귓가에 "사랑하는 아이야, 네게 은혜를 베풀어주마"라고 속삭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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