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는 존재론이고, ‘되다‘는 생성론이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만들어진 것은 이미 ‘있는‘ 거야. (...) 하지만 어린아이는 (...) 모든것이 ‘되는‘ 생성론이지. 출발점에 있으니 모든것이 될 수 있는 무서운 존재거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 속에 먹혀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거꾸로 시간을 적극적으로 내 생명 안으로 끌어들인다는것이다. 그것이 슬픔이든 고통이든 늙음이든 한 사발의
사람은 태어나면서 사람인 것이 아니라, 끝없이사람이 되어가는 존재다. 한 발 한 발 걸어가는그 모습(人)은 바로 사람이라는 이 목표,이상적인 인간상을 향해서 가는 형상이다. 그래서 겉만 사람, 생물학적으로만 사람이라고지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완성체가 아니라 죽을때까지 되어가는 과정의 존재, 즉 ‘비잉 Being‘인것만이 아니라 ‘비커밍Becoming‘이기도 하다.
예수는 혼자서 다만 혼자서 외롭게 십자기에 못 박혀 죽었다. 모든 인간의 괴로움, 원죄의 무거운 짐을 혼자서 걸머지었다. 길에서 십자가를 같이 짊어지자고 했을 때에도 그는 그것을거부하였다. 그러나 식사만은 혼자서 하지 않았다. 그는여럿이 자리를 같이해서 먹기를 희망하였다. 그것이 바로<최후의 만찬>이었다. 죽음을 홀로 감수하는 사람조차도 빵을먹고 술을 마시는 데만은 타인이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옆에는 최후 만찬의 또 다른 식탁의 의미가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창을 가리키는 영어의 윈도window는 ‘바람의 눈Wind+Eye‘이라는 뜻에서 나온말이라고 합니다. 집에 창이 있다는 것은영혼에 눈이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바람의 눈, 영혼의 눈으로세상을 보고 배웁니다. 왜 학교를 배움의 창, 학창꽃이라고 하고 왜 옛 친구를 동창이라불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시인 랄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잡초를 ‘가치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식물들‘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잡초란 존재하지 않아. 아직 발견되지 않은 버추virtue, 즉 미덕이라는 겁니다. 뭔가 발견되지 않은 풀일 뿐이지모든 만물은 제각기 생겨나서 언젠가는 인간에 의해 덕성이밝혀지면 약초가 된다는 얘기지요.
암기한다는 것은 어떤 사상에 항복한다는 것이다. 어떤 아름다운 시도 암기하고 있는 순간만은 축문과 다를 게 없다.
명칭을 모르면 형용사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다이애거널diagonal(대각선) 무늬의 외투를 입고"라고말해도 될 것을 그 명칭을 모르면 손짓 발짓부터 나온다. "아! 왜 이렇게 생긴 것 있잖아. 옆으로 얼룩말처럼 줄이비스듬하게 굵게 죽죽 쳐져 있는 무늬, 왜 그거 있잖아. 언젠가 왜 길거리에서 만난 그 여자가 입고 있었던 것 말야. 아 글쎄 그런 옷 입고 말야." 얼마나 정력의 낭비며 시간의 허비인가? (...)어휘와 이름이 빈약했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불합리한 불모의 사고 속에서 살아왔는가를 의미한다. 애매하고 모호한 사막에서 벗어나 존재의 푸른 평원으로나가기 위해선 많은 ‘이름‘들을 발견해야만 할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전락La Chute』에서처럼떨어지는 세계에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떨어져보지 않고서는 상승하지 못합니다. 지렛대는 한쪽이 아래로 내려가야 다른 쪽이올라갑니다. 아무리 세속의 조건이 나를 행복하게한다 하더라도 나는 꿈(문학) 속에서늘 추락하리라. 나의 지식으로부터, 재력으로부터, 명성이나 박수 소리로부터자진해서 추락하는 꿈을 꾸어야만내 신장은 멈추지 않고 커갈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의 신기루에 속지 않기 위해서.
등자는 사람이 말에 오를 때 필요한발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말 왼쪽에만달았다고 해요. 그런데 누군가 말 오른쪽에도똑같은 등자 하나를 더 달 생각을 했지요. 그 순간 등자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두 다리로 등자를 딛고 일어설수 있게 된 겁니다. 달리는 말 위에서도 마치땅에 딛고 있는 것처럼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고깃발을 들고 달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단지 등자 하나를 더 단 것인데 말이 무서운신무기로 변하여 일기당천-騎, 말을 탄 기사하나가 천 명의 보병을 이기는 세상이 온것입니다.
그래서 왕과 기사 계급과 기사도의 새로운세력이 일어나 왕국의 크기가달라지고 성곽의 높이가 달라졌지요. 기사들의 이야기가 로망스가 되고『돈키호테』 같은 소설이 나오는 문화가 탄생했지요. 세상을 바꾼 것은 말이 아니라 등자입니다. 아닙니다. 등자가 아니라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그냥 생각이 아니라 작은 생각입니다. 당신의 작은 생각이 세상을 바꿉니다.
즉 문자는 깊은 연관성을 가지면서 자연의 이치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어서 "물 미음ㅁ에서 뿔이 난 것이 불 비읍ㅂ이다. 이토록 선명한 대칭을 이루는 말과 문자가 세상에 있을까." 글씨 쓰기를 업으로 삼은 나는 어떤 글을 글씨로 옮기기 위하여 글이 가지고 있는 뜻을 먼저 분석한다. 이어서 글자의 구조를 해체하여 공간을 열어 이야기를 심고 다시 조합하여 글이가진 뜻이나 소리를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선생님은 문자의 구조나 형태를 넘어 물과 불의 상극이 오히려 "상생으로 변해 날것도 아니요, 탄 것도 아닌 맛있는 문명의 밥상이 차려진다"는 해석으로 한 차원 높은 인문의세계로 우리를 이끌었다.
"사랑은 관찰이 아니다. 잠수다. 강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뛰어든다"는 구절에 멈추게 된다. 선생님의 글쓰기 사랑에 대해서도 그러셨으리라, 죽음 앞에서조차 자신을 던지는 마음으로 뛰어드셨으리라 감히 짐작해본다.
인터뷰를 하는데 한 구절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2020년7월 5일.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깃털은 흔들린다, 날고 싶어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공깃돌은 흔들린다, 구르고 싶어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내 마음은 흔들린다, 살고 싶어서"
도서관에 가보면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얘기를 더 보태겠어? 다만 79억 지구인 중에서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모든 사람은 각자 고유의생각을 하고, 그 생각은 제각각 소중해요.
그것은 제 마음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명문 "당신이 배를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하지 마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처럼 새로운 동경으로 이어졌습니다.
‘방향‘과 ‘디렉션direction‘은 말의 뿌리 자체가다르다. 한자의 ‘방‘은 사각을 나타내는 문자로 동서남북전방위를 포함한다. (...) 그러나 영어의 ‘디렉션‘은어디까지나 그 어원대로 화살표라는 직선의 의미밖에 없다. 한자의 방향이 포용적인 데 비해 서양의 방향은 배제적이라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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