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뜻있고 선이 굵게 사는 사람은 자잘한 것에는 잔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매사에 정확하고 성실하고섬세한 사람이 선이 굵고 멀리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신랑, 신부는시간을 지킨다는 작은 일부터 소홀히 하지 말고 먼 곳을 생각하기바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살다 보면 의사 결정에서 의견이 달라질 때가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판단이 다를 때 작은 일은 남자 쪽이건 여자쪽이건 어느 것을 따라도 무방할 것이니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의 큰일에서 의견 차가생긴다면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의견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것은인생의 선배로서 경험적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많은 저술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적인 삶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을 옳게 사는 자세에 대해 온화하고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셨다. 이 책들에서 인간의 본분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무문관(無門關)의 수도사만이 전할 수 있는 인생 교본이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명문이란 "가득 담았지만 군더더기가 없고, 축약했지만 빠진 것이 없는 글"이라 했는데 선생님의 글이야말로 그러했다. 나는 선생님의 책을 정말로 아껴가며 읽었다.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합니다.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2018)
톨레랑스는 타인과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관용(寬容)‘ 이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홍세화는 이보다는 ‘용인(認)‘에 가깝다고 했다. 프랑스 사전은 이 단어를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고 풀이한다. 한자로 풀자면 ‘화이부동(和而不同)‘에 가깝다. 즉 ‘남을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남으로 하여금 당신을) 존중하게 하시오‘라는 뜻이다. 홍세화의 화(和)이다.
「아침 이슬」의 김민기(1951~2024)가 세상을 떠난 것은 올해(2024) 7월 21일이었다. 향년 74세이다. 장례식은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도 따로 없었다. 그게 고인의뜻이란다. 나는 이것이 많이 서운했다. 그나마 영구차가 떠난 뒤 학전 앞텅 빈 골목길에서 색스포니스트 이인권이 김민기가 작곡한 「아름다운 사람」을 가랑비를 맞으며 구슬프게 연주한 것이 추도객들의슬픈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죽음은 자신의 몫이지만 떠나보내는 이의 몫은 몫대로 있는 것이다. 그와 한생을 같이한 벗도 그의 가족이고, 그가 반생을 바쳐온 ‘학전(學田)‘에서 일구어낸 수많은 가수와 배우도 그의 자식이나 다름없다. 최소한 이들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맘껏 울 수있는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다. 그래서 영결식이라는 죽음의 형식이 있는 것이다.
학창시절 보이스카우트에 들어가 대원들과 함께 동해안에 여름 야영을 갔다가 동료 중 한 사람이 익사를 하는 사고가 났다. 이때 선임자였던 김민기는 익사한 동료의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서울로 돌아오던 야간열차에서 그때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 바로 친구이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고등학생이 작사·작곡한 노래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세련된곡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작사·작곡도 겸하는 우리나라 최초의싱어송라이터 (singer-song writer)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더욱이이 노래의 백미는 세 번째 소절이다.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 말 할 사람 누가 있겠소
북경에선 부시장이 초청한 만찬이 있었다. 안내인이나를 소개하며 유명한 저술가라고 하자 부시장은 나에게 "유청장님, 북경을 위해 좋은 글 하나 써주십시오"라며 방명록을 내놓았다. 나는 그들 기분 좋으라고 최대의 찬사를 적었다. "북경이 중국이다(是中國)." 이에 힘찬 박수를 받으며 만찬을 마쳤다.
서안에서는 시장이 마련한 오찬이 있었다. 안내인은 덕담을 한답시고 내가 "북경이 중국이다"라는 명구를 남겼다고 치켜세웠다. 그러자 시장은 서안을 위해서도 한마디 써달라며 방명록을 내놓았다. 무어라 쓸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의 수도가 서안이 아닌가. 나는 자신 있게 써 내려갔다. "서안이 있어서 중국이 있다(西安有 中國有)."
남경에서는 시인민위원장이 마련한 만찬이 있었고 안내인은칭찬이랍시고 북경과 서안에서 내가 방명록에 쓴 글을 얘기했다. 그러자 위원장은 남경을 위해서도 한마디 남겨달리는 것이었다. 남경은 남북조시대 때 여섯 나라의 수도였던 ‘육조고도‘이고 신해혁명 후 쑨원(孫文)이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도로 삼은 곳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남경이 일어날 때, 중국이 일어났다(南 中國)."
또 하나는 일본의 고대사회는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쌀농사, 철기문화, 문자, 불교, 도자기 등이 모두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고대 문명은 ‘죄다 우리가 해준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런 일본에게 식민지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억울하기만 한데 일본 극우들이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면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 일본이기 때문에 그들이 한때는 세계 2위를 차지했던 경제 대국이고, 노벨상 수상자가 25명에 달하는 문명국이며, 유럽의유수한 박물관들이 중국문화실 못지않은 일본문화실을 갖출 정도로 일본이 세계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아도 한국인들은 전혀 인정할 마음이 없다. 이런 한일 정서는 열등의식으로 인해 서로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을 무시하고 있다."
나는 이 콤플렉스로 인한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일본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중언한다. 그래서 2,300년 전 한반도로부터 쌀농사가 전해진 규슈답사기는 ‘빛은 한반도로부터‘,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고대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인도한 아스카·나라 답사기는 ‘아스카들판에 백제꽃이 피었습니다‘, 불교 사찰과 정원에서 일본문화의 진수를 보여준 교토 답사기는 ‘일본미의 해답을 찾아서‘라는부제를 달고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일본의 문화가 한반도의 영향 하에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소화하여 이룩한 문화의 내용은 일본의 특질이다. ‘죄다 우리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 문화를 성숙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마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독일과 네덜란드로 퍼져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로 된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의 문화는 중국, 한국, 일본이 주요 구성원이 되어 유럽의 문명과 맞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답사기에서 나는 한국과 일본, 두 문화를 계속 비교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정원과 우리나라 정원은 너무도 다르다. 일본은 나무를 일일이 가위질하며 인공미를 극대화하고 한국은 자연미를 더 존중한다.
주인에게 정원 만들 때 얘기를 들어보니 두 나라 정원사는 돌 다루는 자세부터 확연히 다르더라는 것이다. 정원에 돌 10개를 깔아놓는다면 일본 정원사는 9개를 반듯이 놓고 나서 1개를 약간 비스듬히 틀어놓으려고 궁리하는데, 한국 정원사는 9개는 아무렇게 놓고 나서 1개를 반듯하게놓으려고 애쓰더라는 것이다. 일본은 인공미, 한국은 자연미를 그렇게 구현하는 것이다.
일본에는 있고 우리에겐 없는 것, 또는 일본에선 강한데 우리나라에서 약한 것도 많이 보인다. 문화유산의 입장에서 내가 본 일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장인정신과 직업윤리 의식이다. 이전통의 뿌리는 아주 깊고 오랜 것이다. 1,200년 전, 헤이안 시대에천태종을 일으킨 승려 사이초)가 세운 절 엔랴쿠지(延曆寺)에는 그가 말한 경구가 큰 비석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조천일우 차국보(一隅此则國寶)." 천 가지 중 오직 하나를 잘하면 그것이 국보라는 뜻이다. 한 가지 일에 충실하면 그것이 인생의 보람이고,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나라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말해주는 표어다. 그런 정신에서 일본은 장인을 존중하는 사회로 성장했고 직업윤리 의식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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