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님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그 총량만큼의 기쁨이나 행복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한 뼘 햇볕만큼의 기쁨이면 된다"라고 하셨거든요.

‘라면 패러다임의 대전환 서론
라면에 대한 모든 논쟁은 오직 최고의 면발을기 위한 것이었다.
동기 : 동료 물리학자에게 "그냥 처음부터 면을 찬물과함께 넣고 가열을 시작하면 된다" 라는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실험 : 찬물에 가면과 스프를 넣고 물을 가열하기 시작했다.
물이 끊기 시작할 때 계란을 투하했고, 30초 후자른 대파를 넣고 10초후 불을 껐다
경과는 완벽한 면발이었다.
결론 : 라면 끓이는 시간을 절반 이하로 줄였고, 에너지도 그만큼 절약된다.

또라이 짓이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첫 번째 팔로워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게 아니라 관계가 세상을 바꾸는 거죠. 둘의 관계가 셋의 관계가 되고, 넷의 관계가 되어 수많은 관계가 맺어질 때 결국 세상이바뀌는 거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니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진실에 가깝다고 믿어지니까요. 100%는 아니겠지만 이전과는 달리 예측 능력까지 가진 철학인 거죠. "세상은 무엇으로 되어 있나?" "원자로 되어 있지." "증거가 있나?" "증거가 있어." "이증거가 맞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이건 빨간색이 될 거야." 실험해보면 빨간색이 돼요. "이렇게 하면 약이 될 텐데, 이거 먹어봐. 열이 내려갈 거야." 열이 내려요. 이렇게 작동할 수 있는 철학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 철학을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죠.

이때 시스템이란 완벽한 제도를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끊임없이 논쟁과 논의를 할 수 있는 장이필요하다는 거예요.

어쨌든 때로는 아무 의미 없는 물질의 분리에 의미를부여하고, 도덕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을 따를 때 인간이 되는거죠.

…여기에 어떤 물리적 의미는 없어요. 우리가 합의한 것뿐이에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까 이분법이라고 했는데요. 하나는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 자체인데, 여기에는 어떤 의미도, 의도도, 가치도 없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인간이 만든 법칙이죠. 이렇게 두가지 측면이 있어요. 좋게 보면 좋은 거예요. 덕분에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소통하며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이게 우리를 옭아매기도 하죠. 갈릴레오 시대 사람들이 가졌던, 지구가 돈다는 것은 옳지않다" 라는 믿음도 그들이 합의한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는 어떤 근거 없이 인간의 합의에 따른 것뿐이기 때문에 검증할 수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엇이 옳은지 정확히 알 수도 없어요. 그래서 크로스체킹을 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그걸 놓고 저한테 과학자니까 A와 B 중 누가 옳은지

제동 모른다고 하면 된다고요? 전 점점 더 과학이 쉽고 좋아지네요. (웃음) 증거가 없으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가볍게 모른다고 하면 되는 거네요.
상욱 제가 어디 가더라도 별로 겁이 없는 것이, 질문을 받았을 때모르면 모른다, 그러면 돼요. 모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거든요.지금 과학이 모르는 게 많죠. 하지만 과학은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과학이라는 학문이 역사적으로 다른 학문과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무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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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루소는 산책자였다. 그는 자주 걸었고, 혼자서 걸었다. 물론 걷기 모임에서처럼 가까운 친구와 걷는 데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다. 우리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걷는다. 자유는 걷기의 본질이다. 내가 원할 때 마음대로 떠나고 돌아올 자유, 이리저리 거닐 자유,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처럼 "변덕이 이끄는 대로 이 길 저 길을 따라갈 자유.

"혼자서 두 발로 여행할 때만큼………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 있고,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걷기는 루소를 살렸다. 또한 걷기는 루소를 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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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실체는 외부로 나타난다.
현명한 사람은 한결같이자기 자신의 것,
자기만의 것에 집중한다."
-『예기』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집을 옮기면서 부인을 잊어버린 사람이 있다는이야기를 들었소. 그게 가능한 일이오?"
‘그보다 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최악은 자기 자신을 잊는 일이지요."
공자

"현자는 부족함에 분노하지 않는다. 왜인가?
태어날 때부터 현자인 사람은 없고 만들어져갈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소수만이 지혜로워진다는 사실을 안다.그는 인생의 한계를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분별 있는 자는 본성에 화내지 않는다.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 관대하고,
실수에 너그럽고, 한결 편해지는 길로 나아간다.
현자는 집에서 매일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분명 꽤 많은 술주정뱅이와 본능에 충실한 사람,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좌절된 야망으로 분노를 억압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그러고는 의사가 환자를 보듯 태연하고 친절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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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군이란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물레를 뜻하는 균‘ 이란 단어가 가지는 이미지이다. 균‘은 진흙 덩어리를 올려놓고 회전시켜 둥근 모양의 도자기를 만드는 데 이용되는 원형의 회전 장치, 즉 물레를 말한다. 물레가 회전할 때 만약 우리가 정확하게 그 물레의 중심부에 흙덩어리를놓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흙덩어리는 물레의 중심을 벗어나가차 없이 땅바닥에 나뒹굴게 될 것이다. 가령 ‘조삼모사 이야기‘ 에적용한다면, 원숭이에게 내민 저공의 처음 제안이 바로 땅바닥에 나뒹굴게 된 흙덩어리로 비유될 수 있다. 반면 그의 두번째 제안은 정확히 물레의 중심부에 놓였기 때문에, 바닥에 나뒹굴게 되는 결과를피할 수가 있었던 흙덩어리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중심 잡히고균형 있는 상황을 장자는 천균‘ 이란 용어를 통해 묘사했던 것이다.

"천균에서 편안해 한다" 라는 장자의 표현에서 우리는 어떤 안일한 순응주의나 정적주의를 읽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편안해 한다‘ 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인지 손쉽게 이런 인상에 빠지곤한다. 그러나 내가 판단중지의 상황이라고 풀이한 천균의 상태는, 단순히 고요한 상태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상태는 빠르게 회전하는 물레의 모습처럼 강렬한 역동성을 가지고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역동성에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맡긴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타자의 타자성에 부합될때까지 부단한 판단중지를 수행하는 주체의 끈덕진 의지를 함축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판단중지의 상태에서만 타자에부합되는 새로운 제안이나 행동을 마련할 수 있다.

판단중지의 상태란 실은 태풍의 눈과도 같은 상황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태풍의 주변부는 너무도 거칠고 위협적이지만 그 중심부는 고요해서 맑은 하늘이 보일 정도로 안정되고 평온하다. 겉으로 보기에 이 중심부는 마치 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태풍의중심부는 단순하게 비워져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곳의 비어 있는 상태란 강렬한 태풍을 가능하게 하는 부동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비어 있는 태풍의 내부가 외부로의 강렬한 운동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내부가 더 비워지면 질수록, 태풍의 파괴력은 더 엄청난 법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원환의 중심을 얻는다" (得環中)는 장자의 표현을 통해, 중심에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리는 물레의 강력한 회전력을 직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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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해선 무시당한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습니다. 땅에서 개가 짖는다고 하늘 위에 뜬 달이 괴로워하나요? 인정받는 느낌을 남에게 의존하면 안 됩니다. 남에게 인정받기를 포기하는 연습을하세요. 자기 가치는 자기 안에서 찾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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