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이 수도원을 방문하여 노 수사님께 물었다. "수도원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즉시 노 수사님의 답변이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추워서 어떻게 해요?" 지난겨울 어느 마음씨 고운 자매님이 사준 전기난로다. 내 삶의 단면이다. 이런 식으로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 같다. 참 착하고 고마운 이웃들이다. 이들의 현실적, 실천적 사랑에 비하면 내 모습은 참 주변머리 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단순, 소박한 삶을 원하기에 짐이 되는 것을 극히 꺼리는 탓이기도 하다. 무엇에 매이지 않고 참 자유로운 삶을 살고싶지만 알게 모르게 짐은 늘어만 간다.
왜 많은 사람이 수도원을 찾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수도원을찾는 이마다 좋고 편안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았다. ‘빈틈‘ 이 많기 때문이다. 빈틈이 많아 헐렁하기 때문이다. 세상살이 얼마나 팍팍한지 넉넉한 빈틈을 찾아 숨을 쉬려고 수도원을 찾는다. 빈틈을 통해 하늘 신비도 보고, 신성한 공기도 호흡하고, 쏟아지는 은총의 햇살 가운데서 영혼이 싶다. 며칠 전 중소기업을 하는 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외줄 타는 기분입니다. 뒤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만 가야 합니다. 옆을 보면 천 길 낭떠러지입니다. 빙벽을 타는 기분입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빽빽한 싸움터에서 빈틈이 많은 수도원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빈틈이 많은 수도원이고 수도자여야 한다. 가난과 겸손의 영 성은 빈틈이 많다는 뜻이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좋은 대목이 나온다고 법정 스님이 소개한 글을 보았다. 명랑성은 지고의 인식과 사랑, 모든 현실에 대한 긍정이다. 모든 심연의 기슭에 서서 자각하는 일이다. 나이를 먹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밝아지는 것, 그것은 아름다움의 비밀이고 모든 예술의 본질이기도하다. 속세의 초월자나 불타의 미소와 같은 것, 심원한 인간은 한결같이명랑성을 지니고 있다. 명랑성은 집으로 치면 창문과 같은 것, 창이 밝아야 그 집에서 어두운 구석이 사라진다.
결국 빈틈의 이야기가 아닌가? 나이 들어 성숙되어 간다는 것은 빈틈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빈틈을 통해 쏟아지는 은총의 빛에하늘이신 하느님을 뵈니 명랑하지 않을 수 없다. 빈틈과 기쁨, 행복은 비례한다. 빈틈을 찾고 마련하자. 이웃이쉴 수 있는 빈틈이 되자.
네덜란드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프레데리크 반 에덴이 동화풍으로 쓴 자전적 산문 《작은 요한네스는 유아의 혼이 성장해가는과정을 순수하고 청신하게 그렸는데,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의 의미가 깊다.
길섶에 있는 버섯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이건 독버섯이란다." 그 말을 들은 독버섯은 그만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 버섯이 그를 위로했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일 뿐이야. 식탁에 오를 수 있다‘ 느니 먹을수 없다‘느니 하는 것은 그들의 논리일 뿐인데 왜 우리가 그런 논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친구 버섯의 지혜로운 조언에 독버섯은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존재 이유를 찾아 다시 일어섰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존재 이유를 알아 갈 때 자유로운 삶이다. 한 인터뷰에서 20년의 옥중생활을 겪은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는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뎠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20년을 견디는 힘은 하루하루 오는 깨달음이었어요. 뭔가를깨닫는 삶은 지내기가 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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