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괜찮다, 다 괜찮다- 공지영이 당신에게 보내는 위로와 응원
공지영.지승호 지음 / 알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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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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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1619년~1659년)은 조선 17대 왕으로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머물렀던 봉림대군이 바로 그다.

귀국 후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세자가 되었고, 1649년에 왕이 되었다.

하지만 재위 기간은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북벌 정책 외엔 특별히 떠오르는 업적이 없다.

 

주차장을 가운데 두고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이 있었다.

세종이야 워낙 유명한 왕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었지만 효종 능으로 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효종이 어떤 임금이었던가 기억을 더듬으며 걸어 올라갔다.

 

세종대왕릉도 영릉(英陵)이고 효종대왕릉도 영릉(寧陵)이다. 그래서 여주 영릉 하면 두 임금의 능을 다 이른다.

업적을 늘어놓은 전각 하나 없고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 표지석도 세종대왕릉 앞에만 있어서 후손에게 인기가 떨어지는 왕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주차장에서 요런 숲길을 10여 분 올라갔다.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

조선 왕릉 재실 대부분이 원형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곳은 옛모습 그대로여서 보물로 지정.

앞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품위가 느껴지고 좋은 느낌이 드는 재실이었다.

이런 집에서 살고 싶을 정도로.

 

마당에도 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저 앞에 보이는 건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느티나무.

 

재실 후문.

 

왕릉을 바라보고 세워진 정자각(丁字閣).

 

정자각 뒷문을 열면 왕릉이 보인다.

이곳에서 왕릉을 바라보며 제사를 올린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홍살문과 금천교.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이고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을 구분하는 다리.

 

위쪽이 효종릉이고 아래쪽이 인선왕후릉이다.

효종의 능은 건원릉(구리시에 있는 태조의 능) 서쪽에 있었는데 현종 14년(1673년)에 이곳으로 옮겨왔고

인선왕후는 현종 15년에 이곳에 모셨다.

 

인선왕후는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이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가 있을 때 다음 왕인 현종을 낳았다.

 

효종은 소현세자와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지만 소현세자와의 의리를 생각해 북벌 정책을 추진했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효종보다 개방적이고 전향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서구 신문물의 통로였던 청나라에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인조에게 제거당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버지 인조와 형 소현세자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림)한 치욕을 씻는 길은 오직 북벌(北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시열을 비롯한 신하들은 효종을 의리의 군주라 했다고.

효종실록에는 효종의 소현세자에 대한 애틋하고 살갑고 끈끈했던 기록이 많다고 한다.

 

 

 

왕릉 주변을 둘러싼 석물.

 

왕들의 업적은 다 밀어두고 산책하기 좋은 왕릉의 순위를 꼽으라면 단연 효종의 영릉이 세종의 영릉을 앞섰다.

아늑한 산골짜기에 부부가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도 좋고 넓게 펼쳐진 잔디(사초)도 좋아서

봄에 신록이 살아나면 다시 가보기로 했다.

 

세종대왕릉에 가실 분들은 그 옆에 있는 효종대왕릉에도 꼭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 집에 와서 바로 주문한 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효종의 북벌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어 흥미롭다.

 

적자가 아니라는 자신의 정통성 콤플렉스 때문에 소현세자는 할 수 없는 북벌을 명분상으로만 내세웠다는 것이다.

거봐, 소현 형님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걸 내가 하고 있으니 내 정통성도 인정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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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1-1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희도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아직 못가봤네요.
이렇게 생생한 사진이랑 같이 보니 더 좋네요~^^
소현세자와 효종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역사의 치욕적이고 아픈 순간과 맞물려 안타까울 뿐이예요.

소나무집 2012-01-18 09:13   좋아요 0 | URL
이런 데 다녀오면 관심이 생겨서 공부를 하게 되니 좋더라구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해석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구요.
사실 알고 보면 효종도 괜찮은 왕이될 수 있었는데 그놈의 종기 때문에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꿈을 못 이룬 왕이에요.

무스탕 2012-01-18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먼 거리도 아니건만 맘만 먹으면 휭~ 다녀올수 있는 곳인데 왜 그렇게 움직이질 못했을까요?
몰랐기도 하지만 맘 먹을 생각도 안 했었던게 사실이네요;;
소나무집님께 잘 소개 받았으니 이제 날 풀리면 꼭 나들이 한 번 하겠습니다 ^^

마녀고양이 2012-01-18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항상 후문이 좋더라구요.
머랄까, 속닥대는 느낌, 무엇인가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일들이 일어났을 느낌이 든달까요.

서삼릉하고 서오릉이 가까운데, 이번에는 공부 좀 하고 다녀와야겠어요.
겨울 나들이로도 좋겠다는 생각이 소나무집님 페이퍼를 보면서 떠오릅니다.

소나무집 2012-01-19 18:06   좋아요 0 | URL
후문,
사람들의시선을 덜 받아서 뭔가 더 저지르기 좋은 장소이기도 하죠?ㅋㅋㅋ
저도 서울 주변 살 때는 서삼릉 서오릉 표지판을 늘 보면서 다녔건만
거기에 누가 누워 있는지 생각도 안 해봤답니다.

2012-01-18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나무집 2012-01-19 18:07   좋아요 0 | URL
뭔?^^
 

드라마 <뿌리깊은나무>를 열심히 보았는데 

백성을 사랑하는 의로운 군주 세종과 충심으로 가득한 무휼을 볼 수 없으니

겨울밤이 지루하기만 하다.

 

뿌나에 대한 그리움에 절절매고 있는데 여주 영릉을 먼저 떠올린 건 남편이었다.

지난 일요일 집을 나서기 싫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여주로 향했다. 

 

원주에서 40분 거리.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함께 묻혀 있다.

영릉 역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입장료 500원을 내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세종대왕상이 있다.

세종은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1397년에 태어나 1450년에 돌아가셨다.

셋째였지만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물러나자 세자로 책봉된 지 두 달 만에 왕위에 올려져 조선 4대 임금이 되었다.

재위한 32년 동안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설치, 6진 개척, 쓰시마 섬 정벌, 측우기 제작 등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전 분야에 업적을 남겨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대접 받고 있다.

 

세종대왕상 건너편으로는 세종의 업적을 볼 수 있는 세종전(박물관)이 있고,

그 옆으로 세종 때 만들어진 수많은 과학 기구 모형을 전시해놓아 발길을 잡아끌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혼천의, 간의, 측우기 외에도 훨씬 많은 발명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감탄은 끊이지 않고 나왔으니... 

누군가는 평생을 살면서 그런 업적 한 가지도 간신히 남기거늘 세종이 왜 불면증에 시달렸는지 알 만하다.

 

 

 

 

 

제사 준비를 하던 재실.

 

훈민문을 지나면 홍살문과 금문교가 나오고 정자각이 보인다.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丁字閣). 丁 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문 번역은 T(티) 자로 되어 있었다.

정자각 뒤로 영릉이 보인다.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원래는 헌릉(아버지 태종의 능- 지금의 내곡동, 가카 때문에 전 국민이 알게 된 바로 그 동네) 곁에 있었으나

문종, 단종이 단명하고 세조의 일을 거치고 나자 예종 때(1469년) 신하들의 건의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세종보다 두 살이 많은 소헌왕후는 심온의 딸로 1408년 12살의 충녕대군에게 시집 와서 왕비가 되었다.

세종과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었다고 하니 부부간의 정도 좋았던 모양이다.

조선 왕비 중 자녀를 가장 많이 둔 왕비로 궁궐 안주인의 소임도 잘해서 후궁들의 질투가 없었다고 하니

어찌 세종의 사랑을 안 받을 수가 있었을까?

죽어서도 한 무덤 안에서 알콩달콩 하고 있을 왕과 왕비의 모습이 그려진다. 

   

조선 왕릉에는 각 공간에 맞는 건축물과 조형물들이 조성되어 있는데

문인석, 무인석, 석호, 석양 중에서 유독 무인석의 인상이 강렬하다.

"무사 무휼 전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렇게 외치며 세종의 아버지 태종을 향해 칼을 겨누던 그 멋진 호위 무사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

 

왕릉 앞에서 바라본 모습. 주변에 소나무숲이 양쪽으로 잔잔하게 펼쳐져 있다.

 

세종대왕릉을 산책한 후 효종릉에도 다녀왔다. 

조선 17대 임금인 효종과 왕비의 능이 세종 능 곁에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 <뿌리깊은나무>를 보는 동안 열독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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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2-01-1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주에 영릉이 있었군요. 저희도 기회되면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정말 무인석이 인상적이네요.^^

꿈꾸는섬 2012-01-17 13:30   좋아요 0 | URL
아차, 소나무집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소나무집 2012-01-17 16:36   좋아요 0 | URL
여주는 가려고 마음 먹으면 가가운 곳이지요?
꿈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무스탕 2012-01-1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비에서 보던 왕님을 바로 만나고 오시다니 좋은 시간 보내셨군요.
울 애들도 도대체 다니기를 싫어하니 강제로 업고라도 가야 할텐데 엄마도 못지않게 게을러서리..;;;
저 무인석이 무휼이었다면 나인들에게 별로 인기는 없었겠습니다. ㅋㅋㅋ

(저도 꿈섬님 따라서) 소나무집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소나무집 2012-01-17 16:38   좋아요 0 | URL
세종릉에는 겨울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더라구요. 드라마 덕분인인지.
울 애들도 이젠 안 가려고 해서 그날 강제로 데려갔어요.
뿌나에 나온 무휼은 너무 멋있었지요?

마노아 2012-01-18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사 무~~휼!! 화면이 진동하는 느낌이었어요. 사진 보면서 다시금 뿌나로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려요. 세종대왕, 뿌듯한 이름이에요.^^

소나무집 2012-01-19 18:09   좋아요 0 | URL
그죠? 저는 뿌나에서 무휼 보는 재미가 엄청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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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많은 광고가 박웅현의 작품이었다. 광고의 생명인 창의력은 결국 독서에서 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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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든 문화가 뒤섞여 있는 나라 터키,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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