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뿌리깊은나무>를 열심히 보았는데
백성을 사랑하는 의로운 군주 세종과 충심으로 가득한 무휼을 볼 수 없으니
겨울밤이 지루하기만 하다.
뿌나에 대한 그리움에 절절매고 있는데 여주 영릉을 먼저 떠올린 건 남편이었다.
지난 일요일 집을 나서기 싫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여주로 향했다.
원주에서 40분 거리.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함께 묻혀 있다.
영릉 역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입장료 500원을 내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세종대왕상이 있다.
세종은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1397년에 태어나 1450년에 돌아가셨다.
셋째였지만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물러나자 세자로 책봉된 지 두 달 만에 왕위에 올려져 조선 4대 임금이 되었다.
재위한 32년 동안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설치, 6진 개척, 쓰시마 섬 정벌, 측우기 제작 등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전 분야에 업적을 남겨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대접 받고 있다.
세종대왕상 건너편으로는 세종의 업적을 볼 수 있는 세종전(박물관)이 있고,
그 옆으로 세종 때 만들어진 수많은 과학 기구 모형을 전시해놓아 발길을 잡아끌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혼천의, 간의, 측우기 외에도 훨씬 많은 발명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감탄은 끊이지 않고 나왔으니...
누군가는 평생을 살면서 그런 업적 한 가지도 간신히 남기거늘 세종이 왜 불면증에 시달렸는지 알 만하다.
제사 준비를 하던 재실.
훈민문을 지나면 홍살문과 금문교가 나오고 정자각이 보인다.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丁字閣). 丁 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문 번역은 T(티) 자로 되어 있었다.
정자각 뒤로 영릉이 보인다.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원래는 헌릉(아버지 태종의 능- 지금의 내곡동, 가카 때문에 전 국민이 알게 된 바로 그 동네) 곁에 있었으나
문종, 단종이 단명하고 세조의 일을 거치고 나자 예종 때(1469년) 신하들의 건의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세종보다 두 살이 많은 소헌왕후는 심온의 딸로 1408년 12살의 충녕대군에게 시집 와서 왕비가 되었다.
세종과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었다고 하니 부부간의 정도 좋았던 모양이다.
조선 왕비 중 자녀를 가장 많이 둔 왕비로 궁궐 안주인의 소임도 잘해서 후궁들의 질투가 없었다고 하니
어찌 세종의 사랑을 안 받을 수가 있었을까?
죽어서도 한 무덤 안에서 알콩달콩 하고 있을 왕과 왕비의 모습이 그려진다.
조선 왕릉에는 각 공간에 맞는 건축물과 조형물들이 조성되어 있는데
문인석, 무인석, 석호, 석양 중에서 유독 무인석의 인상이 강렬하다.
"무사 무휼 전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렇게 외치며 세종의 아버지 태종을 향해 칼을 겨누던 그 멋진 호위 무사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
왕릉 앞에서 바라본 모습. 주변에 소나무숲이 양쪽으로 잔잔하게 펼쳐져 있다.
세종대왕릉을 산책한 후 효종릉에도 다녀왔다.
조선 17대 임금인 효종과 왕비의 능이 세종 능 곁에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 <뿌리깊은나무>를 보는 동안 열독했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