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 가던 날 엄청나게 밀리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피해 국도로 들어섰는데 국도도 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왕 늦은 거 하면서 쉬어가자며 해미읍성에 잠깐 들렀다. 6학년 1학기 읽기책 둘째마당에 해미읍성을 찾아서라는 단원이 나오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해안 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230여 년간 종2품 병마절도사가 주둔한 성이라고 한다. 선조 때(1579년) 이순신 장군이 10개월간 이곳에서 근무한 기록도 있다. 해미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 때 정해현과 여미현을 합하면서 두 현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190여 곳에 읍성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까지 원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해미읍성과 고창읍성 정도라고 한다. 해미읍성도 일제 시대 해미가 서산에 통합되면서 읍성의 역할이 끝났고, 관청 건물은 민간에게 매각되고 학교와 면사무소 등이 들어섰다가 1970년대부터 복원과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담쟁이가 무성하게 늘어져 있어서 성벽이 훨씬 운치 있게 보였다. 신혼 초 남편과 친정에 가다 들렀을 때는 근처에 흐르는 냇가도 있고 길도 지금처럼 넓지 않았는데 주변을 너무 깔끔하게 정비를 해놓았다. 연휴라 그런지 사람들도 너무 많고 관광지가 된 느낌이 들었다. 예전의 느낌이 더 좋았던 것 같다.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이다.
읽기책에 나온 것처럼 진남문에 올라가서 본 성 안 풍경.
읍성이 평지에 있어서 성 밖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 딸의 말에 의하면 실제보다 국어책에 더 멋지게 표현해놓았단다.
내 마음 같아선 1800미터인 읍성을 한 바퀴 다 돌고 싶었으나 오랜 시간 차 안에서 지친 아이들의 불만이 커서 잠깐 걷다 내려왔다.
성 안으로 걸어가다 보면 중앙에 가장 눈에 띄는 게 이 회화나무이다. 해미읍성이 더 유명해진 까닭은 이곳이 바로 천주교 성지이기 때문.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와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 도굴 사건 이후 극심해지는데 당시 천주교인들을 잡아다가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다. 이곳에서 처형당한 분들이 1000여 명이나 되는데 이 나무에 철사줄로 매달아놓고 고문을 했다고 한다.
이 순교기념비 뒷면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가독성을 생각해서 안내판을 다시 설치해줬으면 싶을 정도로 인내심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씨와 세로쓰기 설명이었다.
회화나무 바로 앞에 있는 옥사. 직접 옥사 안에 들어가서 체험해볼 수도 있다.
병마절도사와 현감의 집무실이었던 동헌.
재현해놓은 신기전이 신기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아들.
성 안에서 바라본 진남문. 성문 중앙에 붉은 글씨로 황명홍치4년신해조라고 쓰여 있다. 이때는 성종 22년(1491년)에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