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는 책들을 스스로 살펴보면, 별다른 기준이 없고 그리 계획적이지 못하다. 이런 막무가내식 지식의 수집은 그저 내가 무언가 알기를 원한다, 라는 그런 내면의 욕구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각 분야에 대한 깊이는 들쑥날쑥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점이 있다보니 A에 관한 말을 할때 A에 대한 말을 하다가 B로 화제를 연관시키는, 일종의 돌려막기식 이야기를 가끔 하게 된다. 사실 상대방이 A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A에 대해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 옳을 수도 있을 텐데, 아무래도 나는 A의 어느 특성과 유사한 B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서는 못배기게 된다. 이건 좋은 점일 수도 있지만 별다른 기준이나 이념이 없다는 약점을 가질 수 밖고, 내가 독서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뚜렷하게 전하기 힘든 결과를 낳게 된다. 아니,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있긴 있는가? 라는 의문도 낳게 될 것이다. 최근에 읽은 리영희 선생의 독서 편력에 관한 글에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이념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지식을 쌓더라도 일종의 '지식의 상인' 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지난 번 글에서 별다른 이념이 없다고 말한 나로서는 그야말로 정곡이 찔린 기분이지만, 솔직한 말을 하자면, 지식의 상인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그저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끄적거리는 거라면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식의 상인역할을 한 번 해보고자 한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서 저자는 먹기 위하여 이탈리아를 가고, 기도하기 위하여 인도를 찾아갔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 사랑하기 위해서 인도네시아를 갔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이탈리아편이 가장 좋았고, 그 다음부터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읽기가 힘들었다. 저자가 인도를 기도하기 위해서 찾아갔는데, 그러고보면 참 요즘 인도는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라는 말에서 말하듯 일종의 영적편의점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녀도 사실 그런 느낌을 조금은 받았는지, 기도하기 위하여 찾아간 인도에서 별다른 깨달음은 얻지 못한 모습을 글에서 보여주었다. 어떤 인도 사람들이 요기, 혹은 스승이랍시고 아쉬람을 짓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이끄는 모습을 가끔씩 다큐멘터리에서 보는데, 그럴때마다 나로서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정말 갠지스강이 성수라서 그 물을 마시면 모든 일이 다 잘될거라고 생각하는건가? 이는 일종의 강박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짓는 쓴웃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저런 의구심이지만 다른 하나는 처연한 감정에서 드는 쓴웃음이다. 강박증은 이렇게 정의된다. 분명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증세다. 설령 그들 중 일부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도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잘못되고 죽을 것 같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서 서양문명에 대한 염증으로 인한 동양문명의 대두이다. 서양문명은 항상 물질주의이고 동양문명은 항상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문명인가? 인도는 정녕 그 정신세계 문명의 중심에 있는 곳인가?
옆의 이미지가 없는 책은 저 인도 구루 중 가장 유명한 오쇼 라즈니쉬의 저서, 배꼽이다. 지금은 품절되었지만 괜찮은 책이다. 오쇼 라즈니쉬가 자신이 주장하는 것 처럼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인가, 하는 것에는 사실 이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도 사실 그가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정말 깨달음인건지 고개를 갸웃거릴수 밖에 없다. 그는 말한다, 깨달음은 말로 전해질 수 없는 것이며 (여기에는 나도 동의한다. 불교에서 염화미소, 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스승을 배반하지 말고 믿고 따르라고. 이런 깨달음에 관한 문제는 뭐라고 판단하기 어려우니 그의 책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꽤 옛날에 나온 책이지만 이런 책도 있다. 아래의 책도 옛날에 나와서 이미지가 보이지 않지만, 제목을 '내가 사랑한 책들' 이라고 한다. 오쇼의 글쓰기를 보자면 하나 특징적이 것이 있는데, 정말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그의 책은 지루하지 않다. 물론 책 중간 중간에 나오는 자기 자랑은 (그가 진실로 깨달은 자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으며, (그가 깨닫지 못한 자라도) 치기겠거니, 하고 그냥 흘려볼 수 있는 수준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책들은 니체의 '자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부터 시작하여 붓다의 '법구경', 성경의 '산상수훈' 등과 같이 잘 알려진 책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전혀 이름을 듣지 못한 책들, 책이라고 불리기 힘든 노래, 항간을 떠도는 시구들까지 모두 아우르면서 독자들에게 각각 대화를 건다. 그런데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서 호의적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이 책에서 다른 책들을 설명하는 방식은 정말 그 책의 제목, 그리고 앞 몇장 읽어보고 말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자면 이 책에 실린 목록들 중에는 논리철학논고나, 존재와 무 등이 있는데, 오쇼 라즈니쉬는 자신의 설명의 대부분을 어렵다, 라는 말로만 되풀이해서 끝을 낸다. 그리고 책 내용과는 상관없는 저자의 인물평, 자신의 그에 대한 감정 정도로만 가득 채우고 있다. 물론 제목이 내가 사랑한 책들, 이니 소개를 어떻게 하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쇼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그가 소개하는 책의 다양함은 접어두더라도, 적어도 그가 자신있어하는 (문맥에서 자신감이 드러난다.) 니체의 책들이나 칼릴 지브란의 저서를 소개할 때에는 그는 사자가 된다. 사자는 백수의 왕이지만, 동시에 왕이기에 가질 수 있는 오만함도 있다. 그렇기에 그는 그들을 '깨닫지 못한 자', '한 발만 더 내딛으면 될 것을' 와 같은 말을 하면서 안타까워한다. 오만하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을 볼때 우리는 그들에게서 강력한 에너지를 느낀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아, 이 모습은 진정 사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오만함이다, 라고. 이 책 문맥 곳곳에서 오쇼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런데 이런 자신감과 오만함은 사람들을 이성적인 영역에서 비이성적인 영역으로 이끌어간다. 그의 가르침을 받을때에는 몰랐던 것들을, 나중에 벗어나고서야 깨닫게 된다. 마치 꿈에서 깬 것 처럼 말이다. 그의 제자였다고 주장하며, 누구보다도 가까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쓴 책이 있는데, 그 제목은 '타락한 신' 이다. 이 책도 지금은 절판이고, 매우 옛날에 나온 책이지만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어떤 사람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공과 과를 모두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는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모두 겪어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무엇이 그의 공이고, 무엇이 그의 과인가, 그리고 때로는 공과 과가 서로 뒤바뀌는 모습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왼쪽의 책의 저자인 휴 밀른은 본인이 주장하기로 접골의, 그러니깐 카이로프락틱을 주로 했던 정골의였다. 미국에서는 대체의학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처럼 의료보험제도가 제대로 확립이 안되어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이로 값이 싸고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체의학에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정골의는 우리나라의 추나요법이나 카이로프락틱 요법사와 그 위상이 다르다. 그런 휴 밀른이 오쇼의 제자로 오랜 기간을 보내며, 그의 모습을 끝까지 들여다본 후에 쓴 책이 바로 이 타락한 신이다. 휴 밀른의 말에 따르면 그가 명상에 잠긴 후 가르침을 주는 것은 질소가스의 최면효과와 마약에 따른 것이고, 그는 섹스 교주, 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수많은 여자와 관계를 가진 난잡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프리 섹스 때문에 성병이 도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하며 자신의 신도들은 굶어죽고 대열에서 이탈하고 있지만 자신은 기필코 롤스로이스 100대를 채워야 한다며 아집을 부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그리 누군가를 잘 믿는 성격은 아니다. 그렇기에 종교든 신비학적인 전통이든, 앞서도 말했지만 지식적인 측면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접해보았지만 빠져본 적은 없다. 도리어 이렇게 생각한다. 스스로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믿어라고 하는 사람만큼이나 조심해야 할 사람은 없다, 라고. 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오쇼의 책들을 몇 권 본다면 그의 책들은 그가 다른 책들을 비판한 것 처럼 말재주를 부려서 동일한 내용을 되풀이하고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게 말끝을 흐리게 되는 것은.. 오쇼의 책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들도 분명 있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내가 이렇게 오쇼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을 별개로 하더라도 저 휴 밀른, 의 타락한 신, 에 나오는 일화들을 고스란히 믿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설령 믿는다고 할지라도 여러 신비학적인 전통에 있어서 음과 양의 결합은 제의서 몇 번이고 반복되어 온 것이고.. 오쇼가 (이렇게 주장할 리 없지만) 화간도 죄가 되는가? 라고 반문하고, 오쇼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나는 오쇼를 통해서 깨달음에 가까이 갔다, 라고 주장한다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오쇼는 스스로를 광인이고, 세상의 법칙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볼 때 세상의 법칙이나 허식에서 벗어나서 보아야 진정으로 보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의 믿음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한 그의 주장에는 크게 논리적인 문제는 없다. 그리고 상대방의 믿음이 문제가 있다, 라는 것을 어떤 기준으로 지적할 수 있을까?
오쇼가 어떤 신비학적인 전통을 따르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 사상계에 발을 딛었다면, 그와는 달리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일종의 전통을 따랐다고도 볼 수 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원래 몸담고 있었던 곳은 신지학 협회, 라는 곳이다. 그런데 신지학 협회가 생긴 연원은 사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미국의 헨리 스틸올코트와 러시아의 심령술사였던 헬레나 블라바츠키는 뉴욕에서 만나 신지학 협회를 창설하였다. 신지학은 좁게 보면 이들이 창설한 이 협회의 이념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넓게 본다면 플라톤의 사상적 체계 아래에 플로티누스가 일자의 개념을 도입하고, 중세의 파라켈수스와 그 외의 신비주의자들에 의하여 이어온 하나의 개념이다. 그 이름대로 신지학은 신을 우리가 알 수 있다, 라는 명제를 그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영적 체험을 특히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인간은 정상적으로는 신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넘어선 초인지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때 우리는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초인지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흔히 인도에서 요기들이 괴로운 수행을 하는 것도 그 방법의 일부이다. 이런 류의 수행은 그 근거를 인도 전통의 리그 베다 등의 경전과 그 신비학적인 요소들에 두고 있으며, 그들은 이를 통하여 우리가 신비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이런 신비학자들은 경전에 정상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방법 외에 숨겨진 비의가 있다고 믿는다. 그 예로 성경만 해도 수많은 해석이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수비학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666이 악마의 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물론 666은 유대교의 카발라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그 비의를 해석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런 전통이 집적되고, 당시 사회상 새로운 이념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서 발족된 협회가 바로 저 신지학 협회다.
신지학 협회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애니 베전트이다. 사실 신지학협회가 제대로 굴러가게 된 것에는 그녀의 영향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결국에 현재에 이르러서는 신지학협회는 거의 힘을 잃었다.) 미국에서 신지학협회가 발족했지만, 곧 그들은 인도로 옮기게 되고, 간신히 국제운동을 이끌어가던 올코트가 수명을 다하고 수장자리에서 물러나자 그 자리는 베전트에게 이어진다. 베전트는 사회개혁가로도 유명한데, 특히 인도에서 많은 개혁과 독립 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지학자로서의 그녀는 사회개혁가 이상으로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 많은 해설서를 썼고, 많은 강연을 하였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견해내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그녀가 주목하기 전에는 아무런 인지도가 없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 의해서 곧 올 세계의 스승의 매개자로 주목받은 그, 크리슈나무르티는 그 이후에 수많은 저서를 남기며 사상가로서 발돋움하였다. 왼쪽의 저서가 그의 저서 중 하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 책은 명상 서적으로서도 상당히 고전으로 꼽히지만, 단순히 철학서로 생각하고 읽어도 괜찮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의 책에는 특별히 자신을 내세우는 모습은 그리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안을 문맥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오른쪽의 저서는 두려움에 대하여, 라는 저서이다. 사는 것은 괴롭고 두렵고 불안하다. 우리 인간은 나면서부터 불안하고 힘든 존재이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는 그는, 결과적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은 시간과 생각을 근원에 두고 있을 때 생기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사실 어떻게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긴 시간동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 인간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으로 이끈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이야기들이라도 진리를 담고 있는 것에는 옛 잠언들과 다르지 않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담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양자물리학자도 있었다. 양자 포텐셜을 정식화한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이 바로 그이다. 그러나 사실 데이비드 봄은 양자물리학계에서는 일종의 이단으로 불린다. 양자물리학에서의 코펜하겐 해석이나 다세계 해석 외에 새로운 해석인 양자 포텐셜을 정식화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내재적 홀로그램이라는 개념도 만들어내었다. 단순히 주류가 아닌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단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단으로 불리는 것은 다른데 있지 않다. 그의 개념들이 실제로 좀 특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념들은 종교나 신지학에 접목하기 매우 좋게 설계되어 있다. 그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대담을 보면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인다.
물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도 이런 저런 추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친구(이자 오랫동안 사업을 뒷받침한 사람)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출판된 적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강박적이고 사치가 심해졌다고 하던가. 그 친구의 딸이 그에 대하여 책을 출판하였다. 제목이 그늘 속의 삶들, 이라는데, 번역도 되지 않은 듯 하고, 읽어본 적이 없어서 더 부연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또한 사생활적인 측면에서 깨끗하지는 못했다, 라는 점은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의 책들도 앞서 오쇼의 책들을 이야기하면서 걸리는 부분, 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책들의 내용이 비슷비슷하다, 라는 이야기를 되풀이 하게 된다. 정치인들 투표하는 것도 아니건만, 사생활까지 깨끗한 인물은 없는 것인가? 라는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전에 글로 남겼다시피, 이정표를 들고 있는 사람이 목적지까지 따라가야 할 이유는 없기는 하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자신의 손으로 그를 길러낸 신지학협회를 해체한 때였다. 애니 베전트는 그가 세상의 스승의 매개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의 믿음과는 달리 진리에 이르는 것에 특정한 방법은 없다, 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를 따르던 협회를 해체시키고 만다. 사실 협회를 계속 유지했었다면 신지학협회가 현재에 이르러 이렇게 영향력이 줄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 개인적으로도 강연을 다니고 책을 쓰는 것만큼이나 더 쉽게 자신의 가르침들을 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도리어 해체했기 때문에 그가 이만큼 유명해졌을 것이다, 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부연하자면 해체를 통해서 진정으로 깨달은 자, 의 면모를 보였기에 이렇게 책도 많이 알려지게 되고 강연도 많이 다니게 되었다, 라는 말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 만약 여기까지 생각하고 그런 해체를 결행했었다면 진실로 용의주도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런 주장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당시 해체할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길게 늘어놓았지만.. 분명 저 사람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깨달음이라는 말 등에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 말이 다른 사람이 받은 감정과 느낌, 그리고 깨달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불교에서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를 줄줄이 읊는다고 해서, 대승과 소승, 그리고 금강승의 전통을 논한다고 해서 불교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저 삼법인에서부터 십이연기에 이르기까지 내가 언급한 것은 불교의 기본교리이자 정수이다.) 셈족 계열의 종교들이 어떻게 발달되었는가, 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정작 크리스트교나 유대교들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게 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나또한 내가 그런 것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어쩌면 (지식으로) 알고 있다, 라는 말과 (진정으로) 알고 있다, 라는 말은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남에게 말할 수 있을 때 진짜 아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깐 진짜 아는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수학 문제 풀이에 해당되는 법이다. (그리고 내가 수학 문제와 논리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아는, 그 유명한 말인 '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 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 의 마지막 명제로 남겼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전하고자 한다면 우리로서는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 글쎄, 나도 모르겠다. 누구도 만족할만한 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이 신비가들, 그리고 사상가들이다. 비의를 깨닫고자, 그리고 한단계 더 높은 정신 수준으로 올라서고자. 그 방법으로는 직접적으로 텔레파시라도 익히기 위해서 영적 체험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무의식을 그대로 책에 부딪힘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이 되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오쇼나 크리슈나무르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p.s. 이건 여담인데, 왜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는)은 사람들은 그 깨달음을 나누려고 할까? 최근 읽고 있는 축의 시대, 에서는 사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많을 텐데, 그 중에서 대다수는 숲에 들어가 은거했을것이다, 라고 머리말에서 이야기한다. 좋은 것은 많이 나누어야지, 하는 심정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종교들이 포교 또는 전도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신비가들이나 수행자들이 나를 본다면, 좋은 스승을 못만나서 그래, 제대로 믿지 못해서 그래 등의 말을 할테지만 (신비학적인 전통에서는 스승의 존재가 매우 중요하다.) 나의 입장에서는 도리어 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p.s. 2 하나만 더, 무도가 부활해서 짱이고, 국카스텐과 김연우의 노래가 좋았다, 이번주 나가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