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가능한가?

 

 

 

미리 몇 부분을 밝혀둡니다. 일단, 저는 저 빵가게 재습격님이 분류한 진영에서 '인신공격하지 않았으며, 개인적 이익을 공공의 이익과 정의의 이름으로 제시한다면 불편한 쪽' 으로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적립금을 둘러싼 논쟁에서 한 발 빼고 있었고, 사실은 '아무래도 좋다' 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보면 저 또한 일종의 수혜자처럼 보일 수 있으리라고 여겨저서 좀 우습게 들릴 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주면 좋고 안줘도 어쩔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지금껏 글을 쓰면서 '이달의 당선작' 에 뽑히는 것이 명예다, 라고 여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당선작이라는 이름보다는 당선작에 따라오는 적립금이 더 좋았고, 좀 더 나아가서 적립금에 대해서도 받으면 좋고 없으면 그냥 없구나, 하고 여기고 있었거든요. 무관심하다면 무관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여기 알라딘 서재가 제 첫 블로그는 아니라는 점, 즉 다른 곳에서 블로그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어 커뮤니티에서 그 운영자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바랄 수 있는가, 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회사도 회사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회사'다, 많은 것을 굳이 바랄 필요가 있겠는가? 였습니다.) 그런 제 눈에서 볼 때, 처음 문제제기를 하신 스텔라님의 글은 솔직히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격앙된 어조로 알라딘에 대해서 비판을 하시고 군림을 하신다고 하셨지만, 솔직히 제 심정으로는 어디를 어떻게 보면 군림이 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지요. 알라딘 회사가 알라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글을 명예롭지 못하게 대하고 있다는 부분 또한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후에 글이 올라온 것이 한사람님의 글이었습니다. 스텔라님의 글 보다 약간 더 정제되어있고 몇 가지 대안을 내세우셨지만, 이 또한 저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저는 사실 이웃분이 거의 없습니다. 저를 즐겨찾기하신 분도 많지 않으시지만 제가 즐겨찾기한 분은 손에 꼽을 정도이지요. 그래서 제 이웃인 한사람님에게 개인적으로 매우 고마워하고(처음 서재를 만들었을때 말을 걸어주시고 때때로 덧글을 달아주셔서) 있지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에 다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대안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글이라서 충분히 존중받을만하고, 저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구나, 알라딘이라는 여기 이 공간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시구나, 라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네, 저 위의 두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마음에는 와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런 부분에 대해서 굳이 무엇이 잘못되었다, 혹은 옳다, 라고 말하는 것이 굳이 필요하다고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뭐, 솔직히 말하면 사실 그 이후에 나온 아프락사스님의 글이 제 심경을 많이 대변해주기도 했었고 말입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덧붙이느라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렇게 어찌되었든 일단락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빵가게재습격님이 글을 올리셨습니다. 최근 글 '대화는 가능한가' 가 바로 그 글입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의 저 최근 글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대략 뒷부분의 내용은 '최근에 몇 몇 사건들이 연결되어있었고, 한사람님의 페이퍼는 본질적으로 나를 겨냥한 것이다' 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 글을 읽으며 솔직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한 두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분들의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 친분관계를 언급하자면, 저는 빵가게재습격님이 타겟으로 삼은 '마녀고양이' 님이나 '한사람' 님 중에서 마녀고양이님은 위의 스텔라님처럼 아예 친분관계가 없으며, 한사람님의 서재에는 자주 들러서 글을 읽는 편입니다. 그리고 빵가게재습격님과는, 제 블로그에서는 빵가게재습격님이 댓글을 몇 번 달고 가신 것 외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습니다. 또한 빵가게재습격님의 글을 아예 안읽은 것은 아니지만(한 때 서평단을 같이 했었고, '스피노자는 왜' 와 같은 흥미로운 도서를 올리셨던 적이 있었기에) 최근 서평단을 그만두시고는 거의 안들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저는 한사람님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라는 말을 듣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되더라도 저는 여기서 빵가게재습격님의 글에 대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이 언급하신 첫 번째 사건, 마녀고양이님의 알라딘 서재레터 사건은 솔직히 제가 아는 것도 없고 제가 그때 제대로 활동을 하지도 않았기에 잘 모르겠지만, 두 번째 에릭호퍼에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는 생생히[...]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지요. 자세한 이야기야 빵가게재습격님의 글에 적혀있으니 가서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만, 빵가게재습격님은 그 글 중간에 이렇게 언급하십니다. 한사람님이 '며칠 뒤 자신이 너무도 억울하고 비열한 인신공격' 을 당했다고 호소했다고 말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한사람님의 글은 하소연이라면 하소연이었지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호소한 적은 없는데 말입니다. (제 입장은 그다지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으니) 사람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겠고, 사건의 두 당사자 중 한 분인 빵가게재습격님이 비열한 인신공격을 했다고 기억을 하고 계시다면 어쩔 수 없는 이야기겠지요. 자, 그런데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럼 결론적으로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께 '비열한 인신공격' 을 하신걸까요? 이 부분은 글 전체에서 일부이지만 사실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빵가게 재습격님의 글은 궁극적으로 '양 진영 간의 대화가 가능한 것인가?' 에 대한 글이니 말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올바르게 보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감정에 눈이 멀어 있다면 발전적인 대화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서 몇 가지 가설을 세워봅시다. 이 외에 다른 가설들이 있을 수 있다면 이야기를 해주셔도 좋습니다.

 

1번,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께 비열한 인신공격을 했고, 한사람님은 그에 따라서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호소했으며, 다시금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이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호소했다고 적어두었다.

2번,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께 비열한 인신공격을 했고, 한사람님은 글에서 비열한 인신공격이라고 호소하지는 않았는데 빵가게재습격님은 (자신이 비열한 인신공격을 했기 때문에 그게 기억에 남아서) 한사람님이 비열한 인신공격이라고 글에서 썼다고 기억한다.

3번,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께 비열한 인신공격을 안했고, 한사람님은 (별로 대단한 공격도 아니었는데) 비열한 인신공격이라고 받아들이고 글에서 비열한 인신공격이라고 말했다.

4번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께 비열한 인신공격을 안했고, 한사람님도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밝힌 적이 없으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한사람님이 그때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말한 것 같아서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적었다고 언급했다. 

 

정말 복잡한 가설들입니다만, 대략 이 정도가 대개의 경우의 수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일단 마지막 부분에 빵가게재습격님이 한사람님이 비열한 인신공격이라고 호소했다, 라는 부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깐요.(2*2니깐 모든 경우의 수라고 말해도 괜찮으려나요, 하하) 사실 앞서 제가 제기한 질문은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에게 비열한 인신공격을 했나? 였지만, 이렇게 가설들을 세워보는 것만으로는 그것에 대한 답을 내리기 어렵네요. 그런데 이렇게 가설을 세우니 하나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위 경우의 수들을 살펴보면 어쨌든 4번을 제외하고는 어떤 가설의 경우든 현재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이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여기고 있을 거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4번의 경우에는 빵가게재습격님의 기억력의 문제가 될 터이니 여기서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 일단 제외해보겠습니다. 사실 관계의 문제가 여기서 문제되기보다는 논리가 좀 더 문제가 될 듯 하니 말입니다.빵가게재습격님은 전체적으로 글에서 대화를 원하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빵가게재습격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은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 고 여기고 있는 한사람님(적어도 빵가게재습격님 입장에서는)과 과연 공정한 대화를 할 수있을까요? 방금 말씀드렸지요, 감정에 눈이 멀어있는 이상 대화는 힘들것이라고. 이는 빵가게재습격님이 하이드님의 댓글에 단 답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빵가게재습격님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은 적대의 위치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대화를 나누자고 말씀하시지만, 이는 사실 한사람님과 빵가게재습격님의 관계에서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말이지요.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는데(적어도 당했다고 여겨지고 있는 상태인데) 적대의 위치로 가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한사람님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 등의 페이퍼를 쓴 것도 아니고(물론 빵가게재습격님은 내가 용서받을게 어디있는가, 하는 입장이실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저 한 문장을 가지고 너무 과장하는 것이 아니냐, 그냥 줄이기 위해서 저렇게 쓴 것이 아니냐, 라고 반론을 제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제 빵가게님과 한사람님의 논쟁(이라고 쓰기는 힘들지만 적절한 말이 없으니 그대로 쓰겠습니다.)의 시발점이 된 글을 살펴봅시다. 빵가게님은 에릭호퍼 책에 대한 한사람님의 리뷰에 대해서 첫머리에 혹평을 가합니다. (사실 여기서도 저는 개인적으로는 한사람님의 리뷰에 대해서 그리 동감하지는 못했지만ㅠㅠ 아하하, 죄송합니다.) 전문이야 http://blog.aladin.co.kr/bkinterface3/5176745 여기에 가보시면 누구나 읽으실 수 있을 터이고, 첫머리에서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의 리뷰를 '저주' 그리고 '악연' 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자신의 주장을 시작하시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사실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글을 쓰는 것이야 개인 나름대로 쓰는 것이고, 제가 당사자가 아니니 굳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부분을 보시면 설령 한사람님이 본인 스스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여기신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에 대해서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후에는 '우아한 블로그에서 자뻑'이나 하라고 하는 글로 마무리짓지요. 이와 같은 일들을 저 한 문장으로 줄인 것입니다. '비열한 인신공격' 이라고 말이지요. 위와 같이 경우의 수를 나누어 각 부분을 생각해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지요.

 

여기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 도 있습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은 이때 한사람님과의 '대화'를 원했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대화를 요청했는데 대화를 거부하고 감상적인 페이퍼를 쓰니 화나서 '우아하게나 살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빵가게재습격님과의 '대화'는 분명 피가 튀고 칼이 튀는 논리의 대화일 것입니다. 울면서 나약하게 감성적인 길을 쓴다면 그저 단칼에 베어버릴 그런 대화만을 인정하시는 것이 되겠지요.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의 빵가게재습격님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대화'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으리라고는 생각이 안듭니다. (최근의 기억의 집님과의 '대화'를 미루어 짐작할 때) 하지만 그 논리적인 대화, 를 위해서는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둘 다 냉정한 상태에서 시작되어야 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빵가게재습격님이 다시금 대화를 요청하셨지만 동시에 빵가게재습격님은 다음과 같이 한사람님 그리고 마녀고양이님의 상태를 정의합니다. 분명히 상처받았으며, 상처를 내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자, 그럼 빵가게재습격님의 상황을 다시금 살펴봅시다. 빵가게재습격님은 지금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다시금 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논리의 대화를 말이지요.(빵가게재습격님의 원 글은 대화는 가능한가? 가 주제이지만 대화가 가능하다면 대화를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그리고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대화의 가능성을 알아 볼 필요가 없으니 대화를 요청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여겨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런데 상처를 입은 사람이 과연 제대로 된 논리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방금도 이야기했다시피 먼저 둘 다 냉정한 상태에서 감정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논리의 귀결이 완전할 터인데(감정이 개입되면 왜 논리가 완벽해지지 않는가, 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상처를 입은 상태, 그리고 그 상처가 치유도 안된(빵가게재습격님의 말을 빌리자면 '내재된') 사람에게 그 상처를 '준' 사람이 아무런 화해의 모습이나 위로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대화를 건다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혹은 그때 일은 그냥 별 일 아니었으니 잊어버리고 새로운 대화를 하자, 라는 말씀이신걸까요? 혹은 상처를 입긴 했을텐데 그런 상처는 혼자서 삭히고 다시 대화를 하자, 라는 말씀이신걸까요. 또한 양 진영간의 대화를 원한다고 하셨는데, 첫 번째 진영(빵가게재습격님의 분류에 따르면)인 피해받고 부당하게 공격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수장이라고 여겨도 무방할 분들(빵가게재습격님의 페이퍼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분들)인 한사람님과 마녀고양이님이 댓글을 다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빵가게재습격님은 그저 다른 사람의 의견, 다른 사람의 의견만을 찾고 계십니다. 이는 빵가게재습격님의 답글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빵가게재습격님이 아침에 글 말미에 잠깐 썼다가 지우신 부분..으로도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만 지우셨으니 굳이 언급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새로고침을 하다가 우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양 진영간의 대화를 하는데 도대체 다른 사람, 제 3자의 의견이 왜 필요한지도 의문이 남습니다. 3자의 조정을 원하시는 걸까요, 혹은 3자 중에서 얼마나 자신의 의견에 공감하는가, 를 찾으시는 걸까요. 조정을 원하신다면 양 진영간의 제대로 된 '대화'(빵가게재습격님이 원하시는)가 선행되는게 옳을 듯 하며(3자의 조정에 모두 따를 수 있을 리 없으니) 제 3자의 공감하는 의견은 사실상 그냥 진영에 포함되는 것이니 따질 이유가 없구요. 혹은 빵가게재습격님은 덧글은 대화로 생각하지 않으시며, 오직 트랙백한 글만이 대화인 것이다, 라고 여기시는 것일까요.

 

빵가게재습격님과 기억의 집님과의 논쟁(인지 아닌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적절한 말이 없으니 논쟁으로 해두겠습니다.)이 이전에 있었습니다. 그때 자세한 부분은 다 기억이 나지 않으나 빵가게재습격님의 말씀 중에 기억의 집님이 자신의 글에, 언급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닌데 김용민을 욕하는 것 같으니 쪼르르 달려와서 덧글을 단다, 라는 내용의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도 '아주머니', '아주머니' 라는 말을 써가시며 대화를 나누시는게 솔직히 감정적으로는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일단 이 부분의 논리관계를 떼서 지금 빵가게재습격님의 글에다가 옮겨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빵가게재습격님이 기억의 집님이 빵가게재습격님에게 한 행동을 그대로 한사람님에게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보여집니다. 한사람님이 한나 아렌트를 언급하실때 빵가게재습격님을 떠올린 분이 과연 몇 분이나 될까요? 냉철한 척, 잘난 척 논리를 들이미는 사람이 많다고 할 때, 빵가게재습격님을 떠올린 분이 몇 분이나 될까요? 이런 의문을 던져볼 수 밖에 없지요. 저는 빵가게재습격님을 그 글과 도저히 연결시키지 못했으며,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서 파악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적어두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다른 분들이 그 글을 읽고 아, 이건 빵가게재습격님을 겨냥한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셨는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제 입장에서 말씀드리건데 이는 기억의 집님에 대해서 빵가게재습격님이 '언급한 사실도 아닌데' 라시며 '자기모멸'이다, 라고 말씀하신것을 그대로 본인이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문이 남습니다.

 

무엇보다도 빵가게재습격님의 글에서 고개를 젓게 만드는 부분은 자신을 '변태'라고 지칭하며, 늘 알라딘을 떠난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이번에 올린 글도 알라딘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비열한' 짓을 하고 떠날 뿐이라고 하십니다. 자, 단순하게 생각해봅시다. 왜 비열한 짓을 하고 떠나야 하는 건가요? 그것도 본인 스스로 비열한 짓, 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부분인데 말입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은 굳이 '비열한 짓' 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으셨거나, 혹은 비열하다고 스스로 진심으로 생각했다면 저 '대화는 가능한가?' 라는 글을 쓰지 않으셔야 했지요. 비열한데 욕먹으려고 글을 쓰시는 것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혹은 변태라서 나는 욕을 먹어도 좋다, 라고 여기시는 거라면 악플러때문에 알라딘을 떠날 필요도 없을테고 말입니다. 악플러들이 욕을 해도 괜찮다, 라고 충분히 여기실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그리고 악플러들때문에 떠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실제로도 아니실것이라고 보여지고) 빵가게재습격님은 그저 남들이 자신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비난하여 껍질을 둘러싼다고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욕하는 것보다 미리 자신이 이러한 사람이다, 라고 전제를 두고 들어간다면 논쟁에서 어떤 방식을 사용해도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변태라고 스스로를 주장하는 사람과 과연 대화를 꼭 해야 되는가, 라는 의문이 꼬리를 연이어 생깁니다. 이미 타인이 할 비난을 본인이 스스로에게 하면서 두꺼운 껍질을 만들어 방어하시는 사람에게 굳이 논쟁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지요.

 

사실 저는 제 3자 입장이고, 굳이 따지자면 앞서도 밝혔다시피 한사람님에 더 가까운 입장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써내려온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모두 에이, 주관적이야, 라고 떠넘겨버리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논쟁에 끼는 것을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서 (이전 커뮤니티가 이렇게 논쟁과 친목질로 더불어 멸망했던 모습을 지켜본지라...ㅜㅜ) 이번에도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했고, 될 수 있는대로 책에 관한 이야기만 쓰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좀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이렇게 몇 자 끄적거렸습니다. 물론 적립금 논쟁에 있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왜 끼어들었나? 라는 의문을 품으실 수도 있을 것이며, 페이퍼에서 한사람님을 끌어들여 이야기한다고 나서는 거냐, 라고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으실지 모르기에 분명히 말씀드리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적립금 논쟁에 있어서는 사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아프락사스님의 글이 이미 나와있기에 굳이 제가 더 덧붙일 이유도 없거니와, 논쟁으로 인하여 커뮤니티가 패망[...] 하는 모습을 보았기때문에 나서기 싫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후에도 왠만한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여간하면 글을 굳이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굳이 이렇게 몇 자 끄적거리는 이유는 '대화'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상대방과 논리를 나누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갖추어져야 할까요?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 또한 감정적인 이야기들보다는 논리를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만, 그 논리가 발전적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몇 가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몇 자 끄적거리는 것은 과연 이런 상태에서 발전적인 결론이 나올 것인가, 나는 이러이러한 부분이 발전적인 대화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데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인가, 혹은 다른 것인가 라는 생각때문이지요. 대화를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한사람님의 글에 대해서 '악연'이나 '저주' 라고 말씀하셨던 것에 대해서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시거나 혹은 서로 간에 쌓인 감정에 대해서 화해하려는 그런 몸짓이 먼저 선행되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다시피 대화는, 특히나 빵가게재습격님이 원하는 논리적인, 그리고 발전적인 대화는 서로가 냉정한 상태에서 서로의 근거를 차분하게 검토할 수 있을때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빵가게재습격님께는 비판하는 글이 되어 죄송합니다. 그러나 대화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꼭 필요하며, 싫든 좋든 그 상대방에 대해서 배려를(감정적으로 안정적으로 만들든 어느 정도 논리를 인정하든) 해야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대해서 한 번 검토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는 저도 유의해야 할 부분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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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4-19 20:48   좋아요 0 | URL
가연 님 말씀처럼,
'대화'를 하자면,
서로가 평등하고 평화로울 뿐 아니라,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마음으로 좋은 이야기를
좋은 꿈을 담아 나눌 때에
알라딘서재이든 네이버블로그이든
또 진보이든 보수이든 이것이든 저것이든
서로 아름다운 길을 즐거이 찾는다고 생각해요.

가연 2012-04-19 21:02   좋아요 0 | URL
아, 된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저번에 아하하.. 폐를 끼쳤지요. 좋은 말씀감사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ㅎ 저도 아직 모자라서ㅠ 잘 안되네요.

stella.K 2012-04-19 20:56   좋아요 0 | URL
공감이 안 가시면 그냥 모른 척 하시지 그러셨어요.
저도 가연님 관심없는데...
저는 그러거든요.
그냥 우연히 빵가게님 서재 들렸다 보게 되었습니다.

가연 2012-04-19 21:14   좋아요 0 | URL
그래서 한참 적립금 이야기로 달구어져 있을때는 모른 척을 했지요ㅠㅠ 아하하.. 그럼 지금와서 왜 언급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서두에 스텔라님과 한사람님의 글을 언급한 것은 거리를 떨어뜨림으로써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악[..] 같은 거라고 해야 되려나요. 일단 글이 빵가게재습격님을 비판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으니깐.. 사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더 할 말이ㅠㅠ 한사람님의 글은 자주 보니깐.. 트랙백 된 원문을 보게 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모른 척 하라, 라는 말씀이 혹시 차라리 들르지 않았으면 되었던 것 아닌가, 라고 말씀하신 거라면 그건 좀 곤란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저'도' 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스텔라님이 알라딘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으시다고 그때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죄송하지만.. 관심없다, 관심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곤란하네요.

2012-04-19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07: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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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0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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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1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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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0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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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0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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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14: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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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17: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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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으아.. 이제 한 숨 돌리고 끄적거리네요, 풋.

 

 

 

너의 목소리가 들려.

워낙 이야기도 많이 들었구, 이상문학상도 탔겠다, 기대가 상당히 큰 책이었는데 다 읽은 후 보니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다, 또 읽고 싶다 등의 그런 소설이 아니더군요. 읽으면서 당황스러웠던 것은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다고 여기지도 않았는데 이 책을 잡고는 도저히 놓지 못하고 거의 30분만에 다 읽어내려갔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한 번 잡으면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런 이상한(정말 이상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힘이 이 소설에게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볼 수 밖에 없었고, 그 이상한 힘은.. 비유하자면, 가파른 벼랑에서 자전거를 타고, 핸들을 놓고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런 힘처럼 느껴졌습니다. 너무 무서운데도 눈을 감지 못하는 그런.. 하지만 그런 감정은 놀이공원의 어트랙션 기구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스릴과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놀이공원의 어트랙션을 타고 스릴을 느끼지만, 결국엔 우리가 '살아서' 지상을 다시 밟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죽음'을 그대로 맞닥뜨리게 만듭니다. 아마 그 묘한.. 위험을 마주보는 그런 경험이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그런 묘한 '힘'을 소설에 구현해내기 위해서 작가가 희생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제이와 동규이고, 그들은 소위 말하는 거리의 아이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이가 주인공이겠지요. 소설은 동규의 눈을 빌려, 제이의 행적을 함께 밟아나갑니다. 소설 말미에서는 우리가 '동규의 눈' 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동규로부터 제이의 이야기를 들은 '소설가의 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실존하는 이 책을 쓴 '김영하'와 소설 속의 '소설가' 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되며, 이는 어떤 뉴스나 매체보다도 더 이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동규'의 눈을 빌려 쫓아왔던 '제이'의 성장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 서사가 실제로는 '소설가'까지 거쳐서 들려온다는 점을 독자에게 일깨워주어, 제이의 작중 행동들(마치 거리의 아이들의 교주처럼 행동했던)이 그저 기벽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화를 걸어오게 만듭니다. 즉, 작중에서 이 이야기(제이와 동규의 이야기)를 쓴 소설가로 인하여 현실의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는 현실성을 획득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를 부정하는 결말을 맞게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이지요. 어쩌면 그런 자기 파괴적인 부분은, 희생한 부분이 아니라 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힘의 구성 요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무슨 말을 덧붙이든지 이 책은 (적어도 저에게는) 재미있지는 않지만,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책에게 기대를 만족시켰다, 기대보다 못하다, 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할 책이 아닌 것 같으니깐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 밖에, 하하. 하나만 더, 김영하작가는 요즘 '작가' 이야기를 쓰는데 재미가 붙은 모양입니다. 혹은 가장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를 택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스노우맨.

두꺼운 책이긴 합니다만,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성적인 묘사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크흠) 어쨌든 책에 집중하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고, 읽는 재미도 그럭저럭 있었습니다. 네.. 그럭저럭 있었습니다. 사실 요즘 추리 소설의 경향은 탐정 대 범인이 아니라 독자 대 범인이 되는 경향이 되어가고 있다고 저는 여기고 있습니다. 독자를 직접 책에다가 끌여들여서 머리를 쓰게 만드는 거지요. 그렇게 만들면 책의 내용이 어떻든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데는 최고일테니깐요. 독자는 자신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가면서 탐정못지않게 추리합니다. 그러다가 독자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으면 서술트릭을 묘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면 독자는 한 대 맞고 와우 이 책 대단한데, 라고 여기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서술트릭 등을 배제하고 완고하게 탐정 대 범인의 구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탐정이 아니라 경찰 해리 홀레겠지만요. 그래서 신선하다고까지 여겼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중반 이후로는 흥미를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중반이 되자 범인이 누구인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독자는 소설 안의 '해리 홀레'가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소설을 쓴 작가의 문체나 서술 방식 등으로 쉽게 '볼 수 있'으니깐요. 저자는 안간힘을 다해서 소설 내용의 흐름을 작중의 실제 범인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으려고 합니다만 도리어 그 부분이 독자에게 어색하게 다가온다는 점을 생각했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뭐, 사실 개인적으로 범인을 확신하게 된 것은 수많은 다른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이 숱하게 물어봤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어떤 것' 때문이었지만요.

 

 

 

어나더.

그런 의미에서 이 어나더, 는 철저하게 독자 대 범인 (이 책에서는 범인도 아니지만..) 의 구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는 범인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독자가 추리해내어야 할 대상은 존재하지요. 이 책의 장르를 분류하자면 호러미스테리 소설이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추리할 대상만 있는게 아니라 귀신도 나옵니다. 이야기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어느 중학교 3학년에는 학급이 세 개가 있는데, 3학년 3반이 저주 비슷한 것을 받아서 (소설에서는 죽음과 가까이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만) 매년 귀신이 반에 함께 지내게 되고, 귀신이 그렇게 있는 1년 동안은 매달 한 명 이상이 죽어나가게 됩니다. 죽는 방식은 별의 별 방식으로 다 죽어나갑니다. 심지어 그 맞기 어려운 벼락을 맞아 죽은 학생도 있으니 말이지요. 그러나 귀신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아이들을 죽이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웃긴 것은 그 귀신도 자신이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평범하게 학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포에 떨면서 1년을 보낸다는 것이지요. 영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과 흡사합니다. 단순히 죽기 때문에, 혹은 잔인하게 죽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죽기로 예정된 사람은 죽음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정말로 무서운 것이지요. 이는 심지어 보고 있는 독자들의 간담마저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요, 이번에는 앞서 스노우맨, 과는 달리 너무 독자들과 죽은 자, 의 구도로 맞추었기에 곰곰히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맞고 이해도 안되는 내용이 생기고 말았지요. 무엇보다도 주인공들의 모습은 아무리 중학교 3학년 학생이라지만 그다지 공감이 와닿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특히 결말은.. 고대 희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어떤 작품성으로는 부족한 소설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오락성은 뛰어나다고 봅니다. 읽는 중에는 이런 저런 단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수난.

저는 무슨 종교든 믿을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어느 종교든 다 배척하면서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곧 책에서 특정 종교의 색이 강하다고 해서 그만읽는다거나 처음부터 바라보지도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조금의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실 이 수난, 이라는 책의 원제는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Christ, recrucified' 입니다. 그래서 읽을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저자를 보니깐.. 그 유명한 그리스인 조르바, 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였더군요. 어쩌면 저 recrucified가 너무 종교색이 강해서 수난, 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일 수도 있겠고, 더 엄밀히 원제를 쓰자면 'The greek passion : Christ, recrucified' 라서 수난,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괜찮은 제목으로 여겨집니다. 만약 이전에 번역된 (지금은 절판된) 책처럼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라고 적혀있었다면, 분명 좀 더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을테니깐요. 터키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의 어느 지방에 '수난곡' 을 7년마다 재연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예수가 어떻게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십자가에 매달렸는가, 를  재연하는 행사라고 합니다. 이 행사를 위해서 마을의 장로들은 예수, 요한, 베드로, 야곱, 막달라 마리아, 유다를 각각 선정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정말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이 배역에 있습니다. 이전에 '우상의 눈물' 이라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 설령 악인이라도 사회가 강제적으로 어떤 역할을 부여하면 별 수 없이 그 역할에 따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며 살게 된다, 라는 말이 아주 그르지는 않다는 이야기이지요. 장로들이 저마다의 이득을 위해서, 혹은 별 생각없이 정한 배역은 그 배역을 맡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점차적으로 예수역의 마놀리오스와 유다역의 파나요타로스는 대립을 하게 되지요.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맘에 들었던 말은 마을의 터키 지배자 아그하의 말이었습니다. '당신네 예수와 우리네 알라가 술을 이렇게 한 잔씩 주고 받는다면 전쟁같은 것은 없을 텐데' 정말 그렇지 않을까요? 카라마조프가네 형제들, 의 대심문관 부분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p.s. 이 글을 쓰면서 위로가 되어준 에미넴 Stan (feat. 엘튼 존) 에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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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9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9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5시.

다른 거의 대부분의 25시에 관한 글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쓰는 이 글도 25시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한다. 25시는 구세주가 왕림해도 구할 수 없는, 24시간 이후의 시간이다. 24시간까지는 빛이 있으라, 라고 외쳐서 세상을 창조한 신의 시간이라면, 그 최후의 최후까지 다다른 후에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은 절망과 적막의 시간 뿐이다. 저자 게오르규는 25시에 다다른 세상의 모습을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열거하듯 주인공을 내세워 그려나간다. 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루마니아인인 주인공은 주인공의 아내를 탐낸 군대의 소장때문에 실제로는 유대인이 아닌데도 유대인이라고 규정지어져 강제 노동에 동원되게 되고, 그 후에 간신히 루마니아인의 신분을 회복했나 싶더니 이번에는 루마니아인이기때문에 수용소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작중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순박하다기보다는 멍청하며, 날래기보다는 둔하며, 현명하다기보다는 어리석다. 그저 주인공이 내세울 점은 순수하다는 점인데, 이미 현대에 이르러 순수하다는 말은 바보같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이미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이 되어버린 우리가 어떻게 그가, 주인공인 요한 모리츠가, 멍청하다고 규정지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서양의 철학은 데이비드 흄에 의해서 그 극한까지 이르렀다가 칸트가 범주를 내세워 다시 반석 위로 올랐다. 그러나 그렇게 범주를 이용하는 방법이 인간들을 분류하는데 쓰이게 되기 시작하자 인간들은 그 자신들의 이성보다도 더 소중한 생명을 잃기 시작했다. 게오르규는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하고 범주로, 사회적 관계로 사람들을 규정짓는 서양의 제도에 대해서 이렇게 진단한다 - 이대로 가다가는 문명때문에 인간은 절멸할 것이라고. 잠수함에서는 흰 토끼를 기른다고 한다. 잠수함이 위험심도에 이르면 흰 토끼가 산소부족으로 먼저 죽기 때문이라던가. 그런데 흰 토끼가 죽을 때가 되면 벌써 늦은 것이다. 우리 주변의 흰 토끼는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가?

 

 

 

독일인의 사랑.

정말 상투적이라는 말밖에 더 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사실 저번에 은희경의 책에 대해서 끄적거리면서 '나왔을 당시에는 상투적이지 않았겠지' 라고 말끝을 흐린적이 있었는데, 분명 이 책도 나왔을 당시에는 상투적이지 않았을거다. 하지만 지금의 눈으로 볼때는 신분격차가 나는 두 남녀 사이의 사랑, 게다가 여자는 병약한 몸이라는 전개는 정말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게다가 결말까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바로 그 결말 맞다. (아닌가?) 하지만 다른 부분은 다 그냥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랑은 좀 부럽다. 책에서 남자주인공은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그녀의 연인이라도 좋고, 그녀의 오빠라도 좋으며, 그녀의 아버지라도 좋다. 그 어떤 것이든 나는 그녀의 '무엇'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이 무엇인지 강제한다, 라고.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보니 좀 달라졌을까? 하지만 저 마음이 나를 가슴아프게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

구입은 옛날에 했는데 이제 다 읽었다. 읽고 나서 소감은.. 제일 마지막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의 개관, 이라는 부분만 읽으면 로마 제국이 왜 망했는지 대충 감이 잡힐 것 같다는 것 정도. 그렇게 여기고 나니깐 앞에 힘들여 읽은게 괜히 아쉬..워 졌달까. 물론 읽고 나니 개운하기도 하고, 기번이 글을 정말 잘 써서 읽기가 편했지만 (축약본인데도 말이지) 정말 급하게 로마 제국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마지막 장의 서로마 제국의 멸망의 개관만 읽어도 될 것 같다.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나로서는 딱히 아쉬울 것은 없었다. 사실 내 안에서의 로마에 대한 이미지도 거의 서로마제국 중심이라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 아내 테오도라의 이야기 정도, 그리고 불가르족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니케포루스 황제 정도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역시 돈이 있다면.. 원본을 사서 읽는게 좋겠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읽었던 부분은 로마의 최전성기였던, 그리고 로마의 쇠망이 시작된 오현제 시대.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

정말 별의 별 책을 다 주워읽는 본인이지만, 그런 본인에게도 잘 안 읽는 부류의 책이 있으니 바로 자기계발서 부류다. 이는 절대 자기계발서 부류의 책이 다른 부류의 책에 비하여 뒤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본인의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다지 책에 취향을 타는 사람은 아니고 여성잡지나 남성잡지에 만화책도 들여다보지만, 이상하게도 자기계발서들은 읽으면 자꾸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서 어느 순간부터 잘 읽지 않게 되더라. 이 책도 살짝 자기계발서 느낌을 풍기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별다른 거부감없이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역사와 자기계발을 절묘하게 잘 섞은 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정리해놓은 지식 경영법들을 보면, 당장 수업들으면서 사용할 수 있을 것 처럼 보인다. (나로서는 직접 시행해본적 없기에 정말 수업에 효과가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논문을 써야 할 일이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게 좋을 듯.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어느 서점에서 이 책을 에세이부분에 분류해놓은 바람에 찾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난 당연히 과학분야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뭐, 어쨌든 이 책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고 앞부분을 좀 읽어봤는데 와우.. 역시 스티븐 제이 굴드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재미있는 글을 쓴다. 전혀 생물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이라도 별 생각 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그러면서도 그 내용은 간단한 내용이 아닌 그런 글이랄까. 그러고보면 스티븐 제이 굴드는 본문에서 본인을 에세이스트로 자처하는데, 이를 보면 에세이에 분류해놓은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가 가는 것은 인간 본성에 관하여 기술한 5장인데, 굴드의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사이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이 몇 권 더 눈에 띄는데, '시간의 화살~' 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도 출간되어있던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개념어 사전.

 최근에 많은 개념어 사전이 출간된 듯 한데, 다른 책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조금 읽어본 결과, 개념어들을 이렇게 정리해서 책으로 내는 것도 분명 독서에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 이런 책의 원류가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에 실린 '철학 용어 사전'일 것이다. 형이상학 5부에 실려있던가. 그런데 형이상학에 실린 철학 용어 사전은 철학 용어 사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논지를 펴기 위해서 개념들을 미리 정의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고 보이나 (그 후에 여러 후학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지를 따라가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접어두고서라도) 이 책은 정말 개념어들의 풀이에 충실하기에 하나의 표지판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여러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그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도 예도 들고 있고 말이지.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막스 쉘러라던가, 독일 철학자인데, 그의 신앙심은 대단했지만 그의 사생활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쉘러와 동시대에 살던 신앙심 깊은 어느 주교가 쉘러에게 이르길 '당신은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하나님의 품에 인도해놓고는 왜 스스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라고 질문한거야. 그러자 쉘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지. '목적지까지 같이 가는 길안내인을 봤냐?' 이 책도 마찬가지다. 목적지까지 같이 가는 표지판은 없다. 

 

 

 

p. s. 게오르규의 '25시에서 영원까지' 도 읽는 재미가 있지요.

       '25시에서 영원한 시간에 이르기까지'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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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3-27 13:33   좋아요 0 | URL
앗 오늘 책들은 제가 흥미를 갖지 않는 부류의 책들이네요. [독일인의 사랑]은 저 아직 안읽어봤는데, 읽어봐야 겠어요. 읽어보지 않은채로 대체 독일인의 사랑은 어떤 내용일까, 하고 궁금해만 했거든요. 언급하신 부분중에 나는 그녀의 무엇이 되든 좋다, 하는 부분을 책에서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요. 읽고나면 가슴이 아플지 애틋할지 아니면 고개를 젓게 될지, 그것도 궁금하구요.

가연 2012-03-28 16:15   좋아요 0 | URL
ㅎㅎ 다락방님의 페이퍼들을 잠깐 살펴보았는데, 그러고보면 여기다가 끄적거려놓은 책들이 다락방님께는 조금 구미가 당기지 않는 부류의 책들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ㅎ 사실 제가 힘주어 추천하고 싶은 책은 25시라서, 젤 첨으로 올려놓았는데, 독일인의 사랑이 더 인기가 많다니, 하하하. 저자인 막스 뮐러는 평생에 소설책이라고는 저 책 한 권만 썼대요. 사실 동양학자인데. 그래서 그런지 좀 동양적인 분위기가 책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구.. 하지만 사랑이야기로는 손색이 없어서 저는 저 부분이 참 찡했는데, 다락방님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고개를 젓게 되시는 건 아닐지ㅎㅎ 책이 사실 길지는 않아서 빨리 읽으실 수 있을거에요. 생각나시면 한 번 읽어보시구.. 부디 실망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요.

2012-03-27 22:45   좋아요 0 | URL
아아, 세상은 넓고 책은 많고 읽을 시간은 적군요...

가연 2012-03-28 16:23   좋아요 0 | URL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ㅠㅠ 저도 요즘 참 책이 많이 쏟아져 나온다, 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네요. 정말 책이 많이 출간되고, 출간되었고..ㅠㅠㅠ

2012-03-29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9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30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3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너무 옛날에 읽었나.. 아는 책들 몇 권은 책들이 절판이네요.

 

 

 

변신이야기.

변신이야기는 원제 메타몰포시스를 번역한 제목입니다. 변신이야기라고만 적혀있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표지의 그림과는 별로 어울리지가 않지요. 물론 메타몰포시스라고 원제 그대로 적어두는 것도 좀 이상하게 보일 듯 싶습니다만. 이 책은 변신이야기라는 이름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 처럼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 어떻게 보면 변신이야기, 라는 말이 어울릴 수도 있겠네요.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말 그대로 '변신'에 관련된 내용들이니 말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신이 인간에게 힘을 작용하여 다른 사물로 변화시키는 장면이 유난히 많이 나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칼리스토가 곰이 되었다던가, 케이론이 별자리가 되었다던가 등등 말이지요. 눈물을 흘리다가 그대로 석상으로 '변신' 한 니오베의 일화도 유명할 것입니다. 말장난같지만 원제 메타몰포시스 그대로, 메타포적인 의미의 변신까지 포함한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전체적으로 신과 인간의 변신, 변형에 관련된 신화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어쨌든, 그 방대한 신화를 오비디우스가 정리한 것이 바로 이 변신이야기입니다. 제가 읽어본 것은 1권입니다만, 2권 말미에는 카이사르가 어떻게 신이 되는가, 에 대한 시도 적혀있다고 하니 한 번쯤 정독해볼만한 내용이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모든 내용이 그리스 로마 원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오비디우스 본인이 약간의 각색을 거친 부분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셔야 합니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미솔로지.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토마스 불핀치의 이름을 뺀다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겠지요. 물론 옆의 책은 품절이고,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책으로 (출판사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서..) 토마스 불핀치가 지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습니다만, 어느 책이든 '꼭' 축약본이 아니라 완역이 된 책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올림푸스 가디언, 이라는 만화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정말 인기던데, 사실 그 만화를 가끔씩 보다보면 빙긋이 웃음지을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자르고 다듬어야겠지만.. 실제로는 정말로 야하고, 정말로 비교훈적인 부분도 많기에 말이지요. 그러고보면 대부분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라고 되어있는 작품들은 실제로 그 원제는 토마스 불핀치, '신화의 시대' 로 알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미솔로지, 라는 책이 그 신화의 시대를 번역한 책인데, 보통은 그 중 적당히 추려내서 그리스 로마 신화, 라는 이름으로 출판하는 것이지요. 약간 늦은 편이지만,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신화의 시대가 제대로 번역된 것은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토마스 불핀치의 신화의 시대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도 눈여겨볼만한데, 책에서 언급되는 트로이의 마지막 영웅, 아이아네스의 '황금가지'는 이후 프레이저의 기념비적인 저서 '황금가지'에서 재변용됩니다.

 

 

 

북유럽 신화여행.

맨옆의 책은 아마도 절판이리라 짐작되고, 요즘은 오른쪽의 좀 더 내용적으로 충실한 북유럽 신화기가 출판된 터라, 굳이 권하자면 오른쪽의 안인회의 북유럽 신화, 를 권해야겠지만, 아직 오른쪽의 책은 읽어보지를 못했네요. 최근에 50퍼센트 할인행사로 정말 비싼 책을 싼 값에 살 수 있게 되기는 했는데, 돈 없는 저로서는, 하하, 계속 우선 순위가 밀리게 되는 책이기도 합니다. 맨 옆의 바이킹 전사들의 북유럽 신화여행, 이라는 책은 창조신화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한 권으로 다룰 수 있는 범위 내에 충실히 내용을 담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일화를 흥미 위주로 읽어나가고자 하는 분들께는 괜찮겠지만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지적 욕구를 채우고 싶다면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오른쪽의 책은 북유럽 신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웅' 들의 이야기도 충실히 넣은 듯 합니다. 니벨룽겐의 반지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같은 희곡을 볼 때,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을 알고 있으면 문화 생활이 좀 더 즐겁겠지요.

 

 

 

페르시아 신화.

페르시아나 이란 관련 신화에 관련된 서적은 주로 이렇게 출판사들이 묶어낸 책에 의존하게 됩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겠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책을 읽어야 알 수 있었던 일종의 고급정보였지요, 하하. 왼쪽의 책은 세계의 탄생에서부터 영웅들의 이야기까지 제법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 창조 신화는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에 좀 빚지고 있습니다만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이 살아가며 창조해내는 이야기들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색깔이 많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스 로마신화나 위의 북유럽 신화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창조신화에서만 신들의 힘이 작용하고 그 이후부터는 인간들이 선과 악의 이야기들을 엮어나간다는 점이겠지요. 물론 근원적인 힘으로서의 선신과 악신의 대립은 늘 내재되어있으며, 그 때문에 인간들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느끼며 신에게 귀의하게 됩니다만, 그 운명안에서 몸부림치는 서사시의 비장함은 어느 신화도 따라오지 못하리라 짐작됩니다. 끝이 빤히 보이는데도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그 운명이라는 놈은.. 물론 이런 운명론적 사고관은 요즘이라면 배격되겠지만 그때는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생각들이겠지요.

 

 

 

칼레발라.

솔직히 말씀드리면 왼쪽의 책은 정말 가치가 높은 책이긴 하지만 동시에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책입니다. 물론 저만 지루하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너무 파괴적이고 강렬한 사건들에 익숙해진걸까요, 하하. 핀란드 신화를 다룬 칼레발라는 다른 신화들처럼 창조신화에서부터 시작합니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다른 신화들이 그 내부에 일종의 열풍과 같은 순수하고도 파괴적인 어떤 힘이 느껴진다면, (특히나 근처의 북유럽 신화를 보면 훨씬 차이점이 두드러지겠지요) 이 칼레발라의 주인공들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음유시인의 이미지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는 것이겠지요. 왜 이것이 특이한가, 라고 물으실 수 있겠지만, 파괴 후에 창조는 거의 모든 신화에서 두드러지게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핀란드의 서사시 칼레발라는 그런 전체적인 사건들보다도 조그만 사건들의 반복을 더 많이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신화들에 비하여 생활상을 더 잘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을 수 있겠네요. 음, 몇 년 전의 연구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신화들이 좀 더 체계화되어 북유럽 신화나 이런 칼레발라로 변형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 이후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인도신화.

 사실 제일 왼쪽의 책은 제가 읽었던 책도 아니고(읽었던 책은 출판사에서 정리한 표지 정보조차도 안뜨는 매우 옛날의 책..) 대부분의 오래된 책이 그렇듯 절판이지만, 생각해보면 인도의 신화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지만 인도신화만 다룬 책들을 읽어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누구나 베다교의 세 주신, 시바, 브라흐마, 비슈누를 알지만 이 신들과 리시들간의 알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며, 비슈누가 아바타로 현신하는 것은 잘 알지만 아바타가 각각 무엇을 했는지는 또 알쏭달쏭하리라 여겨집니다. 불교의 붓다가 비슈누의 아바타였다는 사실은 알지만 왜 붓다가 비슈누의 아바타였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는 대부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왼쪽의 책과 같은 부류는 그런 체계를 잡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오른쪽의 마하바라타는 인도 신화를 이야기할때 정말 수없이 언급되는 책인데, 이왕 체계를 잡으려고 할때, 함께 읽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중국신화전설.

누군가 중국 신화에 대한 책을 물어온다면, 단연코 이 책을 추천할 것입니다. 1권은 신화를 다루고, 2권은 전설을 다루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1권만 읽어도 충분하리라 여겨집니다. 이 책을 읽다보시면 좀 딱딱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반고가 천지를 가르고, 복희와 여와가 인간을 창조하고, 축융과 공공이 싸우는 내용들이 책 전반적으로 펼쳐져있습니다. 뭐, 사실 요즘 중국은 요순시대마저도 정식 역사로 넣으려는 주장을 펼치고 있긴 합니다만, (은나라까지는 갑골문이 출토되었기에 일단 정식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정식 역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신화로서 중국인들의 의식 상태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은 매우 큰 의의를 가지리라고 봅니다.

 

 

 

 

 

 

세계 신화 사전.

보통 이런류의 책들은 창조신화를 서술하고, 그 후에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언급하고, 북유럽 신화를 언급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를 언급하고, 이집트 신화를 언급하고, 인도의 신화를 언급한 후에 중국을 언급하는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 중국의 신화를 언급하고 난 뒤에는 보통은 인디언 신화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요즘은 종종 동아시아 신화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왼쪽의 책은 지금은 절판이고 다루고 있는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북유럽 신화에 관한 이야기만을 거의 다루고 있어서 사실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채우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갓 신화이야기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독려하는 수준에서는 괜찮으리라 봅니다. 이 책 말고도 다른 책들이 몇 권 있고 대부분 비슷비슷하다고 여겨지기에 무엇을 딱히 추천드리기는 어렵겠네요. 이런 책들은 위의 어마어마한 리스트들을 다 읽기 버거울 때 읽는 책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읽어왔던 것들을 마치 서랍 정리하듯이 묶어나갈때 읽는 책이라고 보아도 무방할테고 말입니다. 사실 시간이 많다면 위의 책들을 하나씩 다 읽어가면 좋겠지만.. 다 읽을 수 없는 경우에는 이런 책들로 채워나가는 것도 좋지요. 지적 호기심이 더 깊은 내용을 읽도록 이끈다면 훨씬 쉽게 신화들을 접할 수 있을테고 말입니다.


 

 

세계의 유사신화.

개인적으로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여기지만 품절된 듯 하네요. 여러 문화권의 신화들을 창조, 홍수, 타락 등과 같은 범주로 묶어서 각 신화에서 공통된 원형을 뽑아냅니다. 이 책의 강점은 단순히 범주로 묶었다는 점에만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여러 학자들, 그러니깐 조지프 캠벨이나 로버트 그레이브스와 같은 학자들의 주장을 가져옵니다. 융의 이론이나 프로이트의 이론을 쓰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이 조금 과한 부분이 있으니, 과학 부분에까지 확장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인디언의 신화 중 남조류가 태초에 물을 뒤덮었다는 부분을 가리켜 현대 과학의 진화론을 떠올려보라, 라고 제안하는 부분은 조금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조금' 정도로 그칠 수 있는 것은 '제안' 정도에 논의를 그치기때문이지요. 또한 자신의 의견에 아집을 가지지 않는 저자의 서술 태도도 한 몫하고 말입니다.

 

 

 

상징의 비밀.

당신이 만약에 상징에 관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라서, 상징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싶다면, 그 첫걸음은 이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으리라 여깁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아넘기는 수많은 객체들에게서 그 의미를 뽑아내는 이 책은 사뭇 경건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책 내용에서는 사실 저자의 숨결을 거의 느낄 수 없고, 딱딱하게 사전 형식으로 쓰여져있지만, 도리어 그것이 객관성을 보태주는 느낌을 줍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타로카드의 상징도 싣고 있지요. 또한 상징에 관한 책들이 가장 가져야 할 덕목이 있다면, 도판을 많이 추가하여, 최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보는데, 이 책은 그 덕목에 매우 부합하는 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징의 모든 것.

위 책을 조금 더 발전시킨게 동일한 저자가 지은 바로 이 책, 상징의 모든 것, 입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위의 상징의 비밀, 정도만 읽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하고, 겹치는 상징의 의미가 제법 있기에 굳이 이 책을 별도로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만, 이 책은 그 범위가 좀 더 넓은 범위에 걸쳐져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도판들이 책을 수놓고 있어서 상징에 대한 이해를 넓혀줍니다.

 

 

 

 

 

 

세계 문화 상징 사전.

개인적으로 매우 추천하는 책입니다. 이번에 배송받은 책이기도 하구요. 물론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도판들이 모조리 흑백이라는 점이겠지만.. 뭐, 94년도에 출간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도판이 달려있다는 점에서 도리어 대단하다고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사전이고, 표제어는 영어 알파벳으로 달려있기에, 정말 사전처럼 활용해도 좋을 것이나, 꼭 그렇게 쓰지 않고 그저 앞에서부터 읽어나가도 괜찮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읽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책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물론 내용이 위의 상징의 비밀, 등과 같은 책들에 비해서 좀 사무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참아야겠지요.   이런 상징에 관련된 책을 조금씩 들여다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지요. 예를 들어서 성당에 세워진 성모마리아상이 왜 아몬드 모양의 광원에 둘러싸여서 있는지, 왜 제단은 4개의 발을 가지는지, 7개의 단을 가지는지 등과 같은 의문에 답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리스 로마 신화 등과 같은 서구의 상징에만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상징의 의미가 기록될 수 있도록 저자가 힘쓴 모습이 책에서 잘 드러나지요. 그러나 이것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하듯이 완전한 상징 사전은 존재하지 못한다고. 우리들의 의식이 발전해나가면 해나갈수록 다양한 의미와 상징이 추가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p. s. 몇 가지 다루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조지프 캠벨의 저서들이겠지만..

아직 제가 접해보지 못했네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대해서는 번역된 길가메시 서사시를 보는 것도 좋을 듯 하고, 캠벨의 저서는.. 다양하게 나와있으니 찾아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황금가지, 도 추천할만한 책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인류학책에 더 가까운 책이기도 하고, 솔직히 약간, 아니 상당히 지루할 수도 있으니 (저만 그럴지도요) 여기서는 제외하겠습니다.

또한 쓰면서 저를 위로해준 크리솃 미셸의 What you do에 심심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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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3-19 12:10   좋아요 0 | URL
저는 캠벨보다 엘리아데 책이 더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책 잘 구경했어요. 잠깐 들렀다가 인사남기고 갑니다.^^

가연 2012-03-21 18:54   좋아요 0 | URL
엘리아데의 저서도 빠뜨렸고.. 카시러의 책들도 빠뜨렸으니 부족한게 많은 리스트이지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빵가게재습격 2012-03-22 22:06   좋아요 0 | URL
카시러의 <국가의 신화>가 절판된 건 좀 아쉬워요. 다만 카시러의 독자들이라면 주저가 번역되는 걸로 위안을 삼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가연 2012-03-24 11:59   좋아요 0 | URL
옳은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카시러를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이 리스트를 쓸 때 떠올리지를 못했네요.

버벌 2012-04-01 11:39   좋아요 0 | URL
우와.... 제가 타로카드를 했었어요. 공부를 하면서 위의 책들을 꽤나 찾아서 읽었는데. 조지프캠벨의 책 신화시리즈는 소장중이지만. 읽기는 힘들어요. 절대 재미있지는 않거든요.

가연 2012-04-03 10:01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습니다ㅠ 아하하.. 저도 타로에 관심이 있어서 상당히 어릴때 좀 해보긴 해봤는데..ㅋㅋ 저의 경우에는 저 상징의 비밀, 이라는 책을 읽으니 괜스레 타로가 하고 싶어지더라구요. 또 어렸을때 읽었던 게 그리스신화랑 타로를 연결시켜서 해석하던 책이 있었는데 제목이 잘 기억이 안나서 안적어놓았습니다. 음.. 캠벨의 책은 저의 경우에는 그럭저럭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사람들마다 아무래도 다 느낌이 다르니깐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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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졌다가 다시 따뜻해졌다가, 어제는 비가 내렸네요.

 

그리고 지금도.

 

어쨌든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마지막까지 꿋꿋하게 과학부분을 추천해봅니다, 풋. 과학자가 지은 에세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책은 하이젠베르크가 지은 '부분과 전체'겠지요. 물론 전반적인 교양과학부분에서라면, 리처드 도킨스 등이 펴낸 '이기적 유전자' 등등과 같은 진화론이 득세를 하고 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진화론 관련 서적이 널리 알려지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사회진화론때문에, 그러니깐 진화론과 사회과학의 연계가 다른 분야에 비하여 수월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진화론과는 동떨어진, 물리학자의 에세이인 '부분과 전체'가 그나마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은 정말 기적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 '부분과 전체'에 맞먹을 만한 에세이가 여기 출간되었으니, 유카와 히데키가 지은 바로 이 책입니다. 유카와 히데키는 중간자의 존재를 예견하고, QCD(강력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일본의 물리학자이지요. 일본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탔다는 점이 많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는지, 아직도 일본에서는 필명을 '유카와'로 쓰는 과학저술가도 많으며, 여러 매체에서 이름을 빌려 쓰고 있는데, 그 중 친숙한 예를 하나 들자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 중 '갈릴레오' 시리즈의 유명한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는 이 유카와 히데키의 오마주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점에 대한 해명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것 처럼, 유카와 히데키의 저서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읽어야 할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을 통하여, 부분과 전체처럼 진리에 대한 탐구와 겸손함을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여덟마리 새끼 돼지.

사실 얼굴이야 라이벌인 절대 동안 리처드 도킨스에게 좀 뒤쳐지지만, 그 외에 다른 면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가 리처드 도킨스에게 뒤쳐지는 부분은 없지요. 도리어 더 뛰어난 부분도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특히 제 개인적으로 여기는 바로는 글을 풀어나가는 부분에 있어서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들은 읽다가 중간에 멈추어 쉰 적이 많지만,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은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놓을 수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스티븐 제이 굴들의 사후 10주년을 맞아, 그가 연재한 글들 중 엄선해서 에세이를 묶은 책인데, 사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또다른 책인 '판다의 엄지'와 같은 책들과 내용이 약간은 겹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판다의 엄지도 잡지에 연재한 글들을 묶어서 낸 책이라서) 하지만 설령 조금 겹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동일한 말을 반복하더라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능력을 이 책의 저자는 가졌기에, 여기에 주저없이 추천합니다.

 

 

 

멀티 유니버스.

 벌써 폭풍이 몰아치듯 한 번 알라딘 서재를 휩쓸고 간 책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시 추천하는 이유는 그만큼 기대되기때문이겠지요. 브라이언 그린은 그의 저서 '앨러건트 유니버스' 로 이름을 알린 초끈이론 학자이며, 이 책도 분명 끈 이론에 바탕을 두고 다중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가리라고 여겨집니다. 사실 초끈 이론은 불완전합니다. 아직 실험적 증거는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았고, 초끈 이론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들 중에는 정말 터무니없다고만 여겨질 정도의 현상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끈 이론의 지지자들은 말합니다. 중력자(중력을 매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가상의 입자)를 스스로 예측해낼수 있는 이론이 어디있겠느냐, 무엇보다도 이보다 더 간결하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과학 이론이 어디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사람은 대칭되고 조화로운 모습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끼고,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만족감을 느낍니다. 아름다움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현재 존재하는 궁극의 이론들 중에서 가장 앞서 있는 것은 바로 초끈 이론이며, 그 아름다움에 끌려서 많은 물리학자들이 그들의 인생을 바치며 연구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아름다움의 전도사 브라이언 그린이 이 책에서는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할 지 기대가 안될 수 없네요.

 

 

 

미셸 푸코.

언제나 다른 사람의 평전을 읽는 것은 저를 들뜨게 만듭니다. 평전은 역사책과 인문책의 그 중간에 위치하여, 그 평전의 대상이 된 인물의 인문학적인 업적에 대한 이해가 쉽도록 만들며 동시에 역사책처럼 딱딱하지 않게 옛날 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물론 일전에 읽었던, '데리다 평전'과 같은 예외도 있긴 합니다만, 대부분의 경우에 평전은 저처럼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좋은 약이 되지요. 이 책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보자면, 미셸 푸코의 개별 인문학적 성과를 흡수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나, 그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의 성과가 이런 때 나왔구나, 그의 심리가 이랬었구나, 라는 것을 생각하며 발자취를 쫓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입니다. 물론 다른 평전들과 마찬가지로 '객관성의 문제' 와 '신뢰의 문제' 가 여전히 남아있겠습니다만, 그런 어려움을 뒤로 하더라도 푸코의 생애와 생각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는 싫네요.

 

 

고백록.

개인적으로 매우 추천하고 싶은 책이 바로 이 '고백록' 입니다. 생각같아서는 1, 2를 모조리 추천하고 싶었지만, 둘 중 한 권만 추천하게 된다면 그의 유년기가 담겨있는 1권을 추천하고 싶군요. 사실 이 1권을 추천한 것에는 제 스스로 생각할때에 나름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루소는 이 유년기에 대한 고백을 통하여, 대부분의 성격 형성과 자아의 발달은 어린 시절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사람입니다. 이후 이 책은 프로이트에게까지도 영향을 주어, 자아의 형성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또한 고백록은 적어도 제가 생각할때에는 흔히 루소하면 떠오르게 되는 '사회계약론' 보다 훨씬 더 가치가 높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얼마만큼이나 진솔할 수 있을까요? 루소는 고백록의 서두에서 이야기합니다. '다른 어느 누구라도, 나 자신만큼 '장 자크 루소' 라는 인물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라고 말이지요. 물론 실제로 자기고백을 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고백을 하다보면 저절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으로 내용이 각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루소도 그 영향에서 아주 벗어낫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루소와 같은 흥미로운 인물이 과연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리라 여겨집니다.

 

 

 

10기 마지막 신간 추천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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