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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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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얽힘의 시대, 는 양자역학의 정립을 둘러싼 여러 물리학자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단순히 연대기식으로 어느 연도에 무엇이 있었고, 그 다음 연도에 무엇이 있었다, 와 같은 책이 아니며, 마치 제목 그대로 얽혀있는 물리학자들의 이야기들을 다룬 책이다. 그러나 쉽게 구성된 것 처럼 보일지라도 이 책 또한 양자역학을 다룬 책이다. 역사책으로 여기며 읽어나가더라도 물론 재미있겠지만, 양자역학을 다룬 책이기에 어느 정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을 짚고 읽어나가면 좋을 것이다.

 

처음 다룰 이야기는 얽힘, 이라는 것이다. 얽힘Entangled은 미시적 세계에서 나타나는 양자역학적 현상 중 가장 특이한 현상들 중 하나로, 어떤 소립자 두개가 얽혀있다면, 그 소립자쌍을 아무리 멀리 떼어놓더라도 각각에 가해진 조작때문에 다른 소립자에도 영향을 미친다. 얽혀있는 소립자 한 쌍을 상상해보자. 이제 소립자 하나를 안드로메다 은하에 놓아두고, 하나는 우리 은하계에 놓아두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 은하계에 있는 소립자쌍을 괴롭히면 안드로메다 소립자도 즉각적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이 얽힘 현상이 신기한 것은 바로 이 '즉각적' 이라는 부분이다.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은하의 거리는 빛으로 250만년을 달려가야 한다.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걸 잘 이용하면 빛보다 빠른 전달 체계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 잘 알려진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구슬이 있다. 이 구슬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쪼개지는데, 이 쪼개진 단면은 매번 측정할 때마다 다르다. 만약에 이 구슬이 쪼개질 때 항상 단면이 매끈하다던가, 등등 일정하게 쪼개진다면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어떤 정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구슬은 거칠게 쪼개지고 (가끔가다가 매끈하게 쪼개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더 크게 쪼개질지조차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런 것으로 정보를 보낼 수 있겠는가?

 

두 번째 다룰 이야기는 불확정성 원리, 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간단하게 말해서, 미시세계에서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결정할 수 없다, 라는 이야기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모른다. 어떤 시점에서 우리가 소립자를 관찰했을때 그 소립자가 또렷하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고 설명을 해두도록 하겠다. 마치 진동하는 볼처럼 덜덜덜 떨린다거나(아주 안좋은 비유지만), 분명 본 것 같은데 알고보니 내가 본 녀석은 안드로메다 은하에 가있다거나 등등 말이다. 우리가 소립자 하나 하나를 맨눈으로 볼 수 있다고 가정할 때 말이다. (물론 이 문장 자체가 모순이지만 더 나은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굳이 현미경으로 소립자를 본다, 와 같은 예를 들지 않은 까닭은 자칫하면 광양자때문에 소립자가 교란당해서 생기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산란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불확정성 원리이다.

 

그 다음 다룰 이야기는 EPR 역설이다. EPR 역설의 이 이름은 각각 아인슈타인EInstein, 포돌스키Podolsky, 로젠Rosen의 이름의 앞머리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아인슈타인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고, 로젠은 웜홀을 상상한 아인슈타인-로젠 다리로 유명하다. 이 EPR 논문이 쓰여진 이유는 일반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에 대한 반감(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라고 아인슈타인이 말했었다.)때문이다, 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양자역학의 반감보다도 양자역학이 완전하지 못하다, 라는 감정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물론 완전함을 지향하는 사람이 불완전함을 보고 느끼는 감정과 단순한 반감은 그 표현형은 같을지도 모른다.)

 

이 EPR 역설은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초를 이루는 것은 두가지이다. 실재와 국소성. 가장 먼저 실재, 라는 것이 있다. 실재라는 말을 사용하면 어렵게 여겨지지만, 당신의 눈 앞에 있는 연필을 생각해보라. 그 연필이 실재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그 연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모두 다르겠지만) 지금은 침대 위에 놓여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연필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바닥에서부터, 벽에서부터 등등 50cm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라거나 좀 더 편리하게 기준점을 잡아서 좌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편의상 침대로부터의 거리를 쓰도록 하자. 이건 논리학적인 명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방에서는 바닥에서 50cm위의 벽으로부터 50cm 떨어진 곳의 침대위에 연필이 존재한다"

 

논리학에서라면 한 명제에서 그 역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르겠지만, 이건 논리학적인 명제가 아니기 때문에 '연필이 침대 위에~' 말고 위와 같이 쓰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저 문장에서부터 일반화시키면(물론 몇가지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어떤 물리적 실재는 그 실재에 해당하는 물리적 값을 가진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를 연필로 두고 값을 거리 등으로 둔다면 자명할 것이다. 이제 저 연필의 크기를 매우매우매우 작게 만들어보자.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연필의 크기는 너무 커서 양자역학적인 법칙이 전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노벨물리학상을 탄 연구 중 하나가 원자 크기에서의 거시적인 면에서 양자역학이 성립함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원자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너무나 작다.) 그런데 이 연필을 우리가 너무 작게 만들었는지, 갑자기 뻥, 하고 반으로 쪼개져서 서로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현상이 나타나버렸다. 말하자면 앞서 말한 '얽혀있는'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이제 원래 정지해 있었지만 쪼개진 저 연필의 한 조각을 A라고 하고, 다른 조각을 B라고 하자. 편의상 왼쪽으로 날아가는 녀석을 A라고 하고,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녀석을 B라고 두면, 모두가 아는 운동량 보존의 법칙 때문에 A의 운동량과 B의 운동량을 합한 값은 초기 상태, 그러니까 정지 상태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각각의 운동에 대하여 우리가 세울 수 있는 전제와 가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전제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옳다. 그리고 가정으로는 첫째,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것 처럼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 둘째, 보어가 맞다. 이렇게 두 가정을 살펴보면 첫째 가정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값만 보아도 매우 든든하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안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둘째가정) 보어는 이렇게 말한다. 아인슈타인, 신한테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지 마라! 이 두 가지 가정 중 일단 보어의 가정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A, B 조각에서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것들은 단면의 거친 정도, 속도, 질량(합쳐서 운동량), 그리고 얼마나 멀리 각각의 방향으로 나아갔는가, 정도일 것이다. 보어의 세계는 양자역학이 날뛰는 세계이고 불확정성이 돌아다니는 세계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불확정성 원리는 앞서 말했다시피 위치와 운동량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미시세계에세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앞서 보듯이, 연필은 이미 미시세계에 접어들었으니 불확정성 원리가 작용하기에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잴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EPR 역설의 시작이다. A조각의 위치를 측정해서 +5라는 값을 얻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B조각의 위치의 값은 -5가 될 것이다. (초기가 정지 상태였기에 이후 설명한 국소성의 원리에 의하여) A조각의 운동량은 잴 수 없다. 왜? 보어가 맞다면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작용할테니 말이다. A조각의 위치가 운동량을 교란시켜서 잴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B조각이 있다. B조각의 운동량은 교란되지 않은 상태이다. 아직 B조각의 위치를 측정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앞서 얻어낸 -5는 산술적 계산으로 나온 엄밀한 값이다. 하지만 어쨌든 측정은 하지 않았잖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B조각에서 운동량을 측정해서, 그 운동량을 가지고 운동량보존의 법칙을 이용 A조각의 운동량을 거꾸로 역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을 가지고 우리는 A조각의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엄밀한 값을 모두 구해낼 수 있다.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 아닌가.

 

그런데 이건 모순이다. 방금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구해낼 수 없다고 (불확정성 원리) 했는데 지금 사고 실험에서는 다 구해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보어는 틀렸다. 결국 아인슈타인이 맞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본인 스스로의 이론, 그러니까 상대성 이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성 이론에는 아래에 이야기할 국소성이 있고, 그는 이 국소성을 바탕으로 보어를 논박한 것이다. 자신의 이론이 맞다고 여긴 아인슈타인은 숨은 변수 이론을 내세우게 된다. 자신의 역설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아직 완전하지못하다. 그렇기에 완전하게 만드는 숨은 변수가 필요할 것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왜 EPR 역설이 역설로 불리겠는가? 옳다면 이론이라고 불릴 것이다. 결국 EPR 역설은 이후에 설명할 한 부등식과 그 실험 때문에 역설로 남게 된다.

 

참고 : 물론 위의 예가 완전히 옳은 예는 아니다. 정말로 연필조각이 한 쪽이 +5가 되었다고 다른 쪽이 -5가 되는가? B조각에서 운동량을 측정하면 B조각의 위치가 바뀌게 되는 것 아닌가? 등등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질문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초래된 국소성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 질문은 중요한 것은 A에서 둘 다 측정할 수 있다, 라는 것이기에 비껴나갈 수 있다. 또한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숨은 변수를 제안한다. 하지만 옳은 비유라고는 하기 어렵다. 실제에서는 파이온 입자가 전자와 양전자로 붕괴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그리고 위치와 운동량에서 확장해서 위치와 각운동량 등으로 확인해본다. 하지만 어느 쪽이는 결론적으로는 이 말이다.

 

네 번째로 이야기할 것은 국소성이다. 국소성은 이런 것이다. 태양 주위를 돌고있는 우리 행성계를 생각해보자. 모두 공전 궤도를 따라서 돌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태양이 사라져버린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공전 궤도를 따라서 돌고 있는 수금지화목토천해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갑자기 원심력으로 튕겨져 나가버릴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실제로도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수성부터 궤도를 이탈하게 될 것이다. 중력이 미치는 속도는 빛의 속도와 동일하니(초끈이론이 제안하고 있는 중력자의 성질 중 하나가 질량이 0이다.) 태양빛이 지구에 도달할때쯤 걸린 시간이 지나면 이제 우리 행성도 궤도를 벗어나 우주로 방랑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런 것이다. 어떤 것도 빛의 속도 이상으로 달릴 수는 없다. 어떤 것도 빛의 속도 이상 가는 속도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 앞서 태양이 사라졌다면 태양이 사라졌다는 정보는 빛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정보를 전달한다는 말이 단순히 인터넷에서 패킷 몇 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개념을 넓게 보면 우리 인체도 정보의 덩어리이다. 당신이 보고 있는 컴퓨터 자체도 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물론 플라스틱과 쇠 등으로 만들어졌다고 반론할 수 있겠지만, 당신이 그걸 알 수 있는 것은 빛이 우리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영화나 만화 등에서 나오는 양자 전송의 개념은 바로 여기서 착안한 것이다.

 

그렇기에 반대로 말하면, 빛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전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계에 무슨 작용이 미치지는 않는다. 바로 이것이 국소성의 원리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서는 물리적 작용이 멀리 떨어진 두 계에 동시에 미칠 수 없다.

 

따라서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한다면 앞서 연필의 한 쪽이 +로 나온다면 다른 쪽은 당연히 -로 나올 수 밖에 없다. 다른 쪽도 +로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지는 못할 거라는 말이다. 실제로는 파이온 입자의 붕괴를 상상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국소성의 원리는 정확한 것인가? 그렇다. 정확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정확한 만큼 정확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가장 최근의 실험에서도 그 완벽함을 자랑했다. 매우 정밀한 시계를 만들어 고도를 바꾸었는데 실제로 시간이 달라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앞서 EPR역설과 위의 국소성을 종합해 만들어진 것이 국소적 숨은 변수이론이다. 앞서 말했듯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론에서 유추된 국소성의 원리를 가지고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 불완전함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를 기억하는가? 그 스스로가 최대의 실수라고 불렀던, 하지만 결국에는 옳은 예측처럼 여겨지고 있는. 바로 그런 상수처럼 변수를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숨은 변수이다. 이 변수를 넣으면 완전하게 양자역학적인 문제들이 없어질 거라고 여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숨은 변수는 우주 상수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아래의 벨 때문이다.

 

여기서 벨이 등장한다. 물리학자 벨은 고민했다. 과연 EPR과 코펜하겐 학파의 설명 중 어느 쪽이 더 옳은 것일까? 기존의 양자역학 체계는 불완전하고 현실을 기술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생각 끝에 나온 것이 벨의 부등식, 이다. 만약에 EPR 역설이 맞다면 물리적인 실재들, 그러니까 앞서 말한 연필은 절대 빛의 속도 이상으로 다른 연필로 정보가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연필들 사이에서는 분명 연관성에 있어서 한계가 지워질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노래하는 사건과 내가 오디션을 보는 사건, 그리고 내가 거리에서 차를 모는 사건을 생각해보자. 이 세 가지 사건에서 내가 노래하는 사건과 내가 오디션을 보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은 내가 내가 오디션을 보는 사건과 내가 차를 모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에서 내가 노래하는 사건과 내가 차를 모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의 차집합보다는 항상 크게 된다. 세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만큼 더 크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말하자면 상식적이고 논리의 문제이다. 불완전한 이론의 보완 및 현실의 기술을 위하여 숨은 변수를 사용했으니 당연히 숨은 변수 또한 이 상식적인 부분의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걸 일반화하여 만든 부등식이 벨의 부등식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양자역학적 세계에서는 전혀 인과관계가 없어보이는 사건들 간에 인과가 생길 수 있다, 혹은 동시에 작용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기존의 양자역학이 옳았다. 벨 부등식은 지금까지 실험 중 한 번도 숨은 변수 이론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벨 부등식이 성립하는 상식의 세계는 양자역학의 예측 결과와는 여지없이 빗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벨 부등식의 실험 결과 나타난 현상을 사실 그냥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뭐? 정말 고양이가 죽은 상태와 살아있는 상태가 겹쳐있다고? 그럼 실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여러 상태가 지금 겹쳐지 있는 건가? 물론 이런 것은 비약이다. 그럼에도 미시세계에서는 우리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일어난다는 점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벨 부등식의 실험 결과 숨은 변수들을 폐기할 수 있었다지만, 엄밀히 말해서 벨 부등식이 폐기할 수 있었던 것은 국소성의 원리였다. 양자역학에서는 실재로 얽힘이라는, 앞서 이야기한 그런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데이비드 봄의 이론이 생명력을 얻는다. 그가 주창한 것은 비국소적 숨은 변수이론이다.

 

물론 데이비드 봄이 자신의 이론을 편 것은 존 벨의 부등식이 나오기 전의 일이다. 데이비드 봄은 사실 매우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 한참 소련과 적대관계에 있던 미국에서 적색으로 몰려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당하고 결국 풀려나와서 양자론을 세우게 되는데, 그의 양자론의 중심을 이루는 사상은 전체성이다.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매우 영적인, 심하게 말하면 무슨 철학이나 종교의 사상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데이비드 봄은 신지학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대담을 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자론은 수학적으로 매우 잘 뒷받침이 되어있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게 된 것은 전자기학을 정립시킨 제임스 맥스웰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 제임스 맥스웰은 당시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어떤 스칼라장을 예측했으나 정리되어지는 과정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맥스웰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드 브로이의 논의 또한 봄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제 그의 주장을 따라 몇 가지 개념을 이야기하겠다.

 

1. 파동함수는 실재하는 장을 나타내며, 이 장 말고도 입자가 있다.

 

2. 그 입자는 고전 포텐셜 뿐만 아니라 양자 포텐셜의 영향을 받는다

 

3. 앞서 말한 실재하는 장, 은 요동치며 존재한다.

 

이 세 가지 개념에 따라서 장의 요동(3)은 양자 포텐셜(2)에 따라서 입자(1)에 전달이 된다. 그런데 이 봄의 이론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기존 양자역학의 예측과 수학적으로 동일한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 예측에 이르기까지의 논리 구조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다름 때문에 비판에 직면한다. 쉽게 말해서 숨은 변수를 가정한 봄의 이론과 숨은 변수가 필요없는 기존 양자역학이 있는데 이들 중 어떤 것을 따르더라도 예측은 같다면 굳이 복잡하게 숨은 변수를 넣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기에 파인만은 이 책에서 이야기한다. 임의로 대사의 순서를 바꾸었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양자역학이 제대로 작동해. 문제될 것이 뭐가 있겠어? 하지만 그건 내 것이 아냐. 난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 난 해결할 문젯거리가 있는 게 좋아."

 

마지막으로 촘스키의 이야기이다. 사실 촘스키는 이 책에서는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과학에 대해서 대담을 가진 적이 있는데, 이런 말을 했었다. 거의 확실하게 옳은 과학적 이론이지만 유전적으로 결정된 우리 뇌구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이론들이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현대 미술을 보자. 요즘 미술은 밑에 설명이 없으면 사실 이게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촘스키 자신은 이런 말을 한다. 19세기 후반에 돈많고 시간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것들에 정통할 수 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성취 중 대부분은 일반인들과는 유리되어 있다고 말이다. 19세기 미술은 지금의 미술과는 매우 달랐다. 적어도 보면 무슨 그림인지는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찬가지의 일이 지금 물리학에서 일어나고 있다. 양자역학의 신비함은 사실 어쩌면 거시세계에 익숙한 우리들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쉽사리 풀리기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촘스키는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의 정신으로 과학을 세울 수 없는 듯이 보이고 지금까지 과학을 세우지 못했던 거대한 영역들이 있다' 라고 운을 뗀 뒤 '반대로 우리가 진정한 과학적 발전의 능력을 발휘했던 영역이 있다' 고. 바로 그 영역은 물리학이다. 그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촘스키의 말을 따라가본다면 '아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 정신의 본성에 관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 이라고 여겨진다. 물리학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우리 유전적 뇌의 구조때문에 양자역학에 고개를 갸웃거릴지라도 결국에는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발전을 이루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요약 정리

 

글의 내용이 잘 이해가 안된다고 여기는 분들은 이 요약 정리만 읽어도 충분하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내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에 이렇게 간단하게 얽힘의 시대, 와 관련된 내용들만 이야기해두겠다.

 

먼저 얽힘의 시대, 첫 부분을 읽고 나면 이런 느낌이 들 것이다. EPR역설이 옳고 기존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와 같은. 하지만 이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EPR역설에서 말하는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이 정확하게 말하면 불완전성이 아니었다, 라는 말이 되리라.) 저자는 아인슈타인과 봄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를 가지고 책을 서술하고 있지만 실험 결과와는 좀 다른 부분이 있다. 양자 역학의 발전 순서를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코펜하겐 학파의 기존의 해석, 양자역학의 세계는 정말 불가사의한 세계다. -> 그 다음 EPR 역설, 양자역학의 세계를 설명하는 기존의 해석은 불완전하다. -> 그렇다면 EPR 역설과 코펜하겐 학파의 설명 중 어느쪽이 맞는지 확인해보자, 존 벨의 부등식. -> 벨의 부등식을 실험해보니 코펜하겐 학파의 설명이 맞는 것 같다. 까지가 현재 전개되고 있는 순서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EPR역설은 그렇다면 폐기시켜야 하는가? 옳지 않으니? 하지만 그건 또 아니다. EPR역설의 국소성 부분은 폐기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재론 부분은 폐기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숨은 변수도 실재를 기술하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면 완전히 배제하기도 힘들다. 관측될 당시에 바로 소립자가 보이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비국소성 실재론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면 EPR역설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답은 현재의 해석으로는 전혀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이 그대로 남게 된다, 정도로 정리가 된다.

 

또 하나, 읽다보면 숨은 변수이론과 EPR 역설을 동일시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숨은 변수 이론은 EPR역설과는 다르며, EPR역설을 통해서 제안한 가설이다. 양자역학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숨은 변수를 넣어서 완전하게 만들자, 라고 하는 가설말이다. 그리고 이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른다. EPR의 해석을 받아들여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을 생각하거나, 혹은 비국소성은 받아들인채 비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을 생각하거나.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을 제창한 전자의 경우에는 아인슈타인과 드 브로이(얽힘의 시대, 에서 소개하기로는)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 봄은 비국소성 숨은 변수 이론을 제창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국소적으로 쪼개져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 강한 편이다. 그의 이론은 기존의 해석들에 비하여 더 보탤 필요가 없지만, 이런 저런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 정도로 정리를 해두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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