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장 자크 루소 지음, 김붕구 옮김 / 박영률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Quos vult perdere Jupiter dementat.

쥬피터는 그가 파멸케 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의 이성을 빼앗았도다.

 

 

 

일찍이 전례가 없고, 앞으로도 이런 일을 하겠다고 나설 그런 모방자조차 없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펜을 든 장 자크 루소는 일필휘지의 기세로 2부로 나누어진 글을 쓴다. 일각에서는 그를 음해하기 위한 사람들의 무기로 사용되어지고, 일각에서는 그를 추종하게 만드는 이 글의 이름은 바로 '고백Les confessions이다. 이 고백이 쓰여질 당시의 루소는 매우 힘든 상태였다. 물론 그의 그 '힘든 상태'는 그 자신이 자초한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밖의 상황이 그를 그렇게 '자초하도록' 몰고 간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루소가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인 디드로나 그림은 어느 새 그의 뒤에서 짐승같은 사람, 이라고 비난을 내뱉고, 그가 사랑을 주었던 두드토 부인은 그를 꺼리게 되었으며, 든든한 후원자들은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거나 발을 끊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교계에서의 서투룸, 어수룩함, 재치없음은 하나같이 큰 문제로 부각되어 그의 발목을 잡고 귀부인들의 수근거림을 듣게 만들었고, 이윽고 그에게 '에르미타주', 그러니까 당분간 거처를 잡고 살 시골 전원집까지 제공했었던 데피네 부인과도 멀어지게 되자, 그는 그저 한숨만 내뱉게 된다. 자신의 옆에 머무르고 있는 두 가정부 - 테레즈와 그의 어머니 르 바쇠르 부인 - 들은 정신적, 사회적 면에서 각각 자신의 편이 아니었고(테레즈는 정신적으로 루소를 따라가지 못했고, 르 바쇠르 부인은 더 나아가 루소가 친교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루소의 이야기를 팔아먹기에 이른다) 이윽고 그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실 이 고백, 이라는 저작을 쓰게 된 것이 글로 내 상처받은 가슴을 치유하겠다, 라는 그런 거창한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이 고백, 의 토양은 이미 이전에 마련되어 있었다. 루소가 위에서 언급한 저런 어려움들이 슬슬 싹이 보이기 시작할 때, 루소에게 어느 출판인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당신의 삶을 글로 옮겨보지 않겠습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루소의 삶은 당시에서 볼 때 흥미로울만한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루소는 프랑스인이 아닌 제네바인이었고, 그 제네바에서 도망쳤으며, 나중에 가서는 그 도망친 제네바를 '나의 마음의 고향' 운운하며 다시 찬양하게 되었으며, 기사처럼 칼을 잘 다루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후리는 기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음악을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결국에는 불굴의 의지로 사교계 한 가운데 뛰어들어, 왕의 연금마저 거부해버리는 대담함과 소심함을 동시에 보여주니 그야말로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출판인이 그런 이야기를 쓰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보면 일종의 관음증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루소란 인물을 한 번 보니까, 그 인물됨이 순진한건지 멍청한건지 대담한건지 소심한건지 알 수가 없어서, 어쩌면 살살 부추겨주면 내밀한 육체관계를 다룬 이야기들까지 쓸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런 이야기들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거기에 끼여서 한 몫잡게 될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을까? 루소는 루소 나름대로 한 사람이 자신만의 진솔한 경험과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용감한 일이며,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동시대에 자기 뿐이라고 생각했었을지도 모른다. 루소는 몽테뉴의 글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비판한다. '아니, 이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는 척하면서 그 실수를 예쁘게 꾸며서 친근감있게 내놓고 있잖아? 이게 무슨 고백이야?' 그런 일종의 사명감, 용기 등이 얽혀서 결국 이 고백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앞서의 거창한 목적, 그러니까 글로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겠다는, 은 다른 일로 성취되게 되는데, 그의 찢겨진 마음은 '루소 - 장자크를 심판하다' 라는 이명이 붙은 대화, 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을 씀으로 간신히 한 곳에 모이게 된다.

 

그렇게 루소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려고 살펴보니, 자신의 삶에는 너무나 많은 실수와 후회와 죄가 있었다. 실수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자신의 실수는 그야말로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충분히 회피할 수 있는 실수들이었기에 더욱 더 큰 실수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 집을 나온 일부터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도제 역할을 조금만 더 버틸 수 있었다면, 대문호라는 허명은 얻을 수 없었겠지만 뒷날 그의 마음을 그렇게 괴롭혔던 우정과 사랑의 문제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집을 나와서 어느 부인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 부인의 집에서 나갈 무렵에 훔친 빗도 문제가 되었다. 그걸 왜 훔쳤지? 사실은 그는 좋아하는 하녀가 있었다. 그래서 그 하녀에게 주려고 빗을 몰래 훔쳤는데, 결국 들켜버린 것이다. 서슬 퍼런 추궁에 그는 자신의 좋아하는 그 하녀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바로 저 애에요. 저 애가 이 빗을 훔쳐서 저한테 줬어요. 평생 그는 그 거짓말의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다른 세도가의 집에 들어갔을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그 세도가가 시키는데로 공부를 꼬박꼬박 다 하고 했더라면 뒷날에는 고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공부를 다 못하고 음악에 흥미를 느껴 뛰쳐나가고 만다. 결국 방황을 하게 된 것이다.

 

커서는 어떤가? 바랑 부인과 함께 지내면서 그녀의 재산을 축내는 경우가 잦았고, 뒷날 그를 그렇게 도왔던 바랑 부인에게 적절한 원조를 해주지는 않았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서로 맞물리지가 않아서 자신이 매달린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열정은 베토벤의 뺨을 후려갈길 정도였지만 결과물로 그가 내밀 수 있었던 것은 어딘가 수상한 악보 표기법 (숫자로 음계를 표시하는)과 마을의 점장이, 라는 희곡 뿐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이 느끼는 쾌락, 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개 육체관계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이 쾌락에는 한 생명의 수태가 따른다. 쾌락에의 의무라는 말이 적절할런지는 모르지만, 육체 관계 뒤에는 특별한 피임을 하지 않았다면 출산이 뒤따르게 된다. 이는 테레즈와 루소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그들은 아이를 일곱 명이나 낳게 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루소의 손에서 자라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루소는 고백, 에서 뻔뻔스럽게 '자신과 같은 부모에게서 자라느니 차라리 고아원에서의 교육을 받는 것이 좋다' 라고 변명하지만 그 앞서서는 '끔찍한 죄악' 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서술한다.

 

하지만 그의 삶에도 빛은 있었다. 가장 그에게 먼저 다가온 빛은 후에 '벵상에서의 계시' 라고 불리게 된다. 감옥에 갇힌 친구 디드로를 만나기 위해서 매일 같이 감옥과 자신의 거처를 왔다갔다가 하다가 어느날 쉬려고 앉은 나무 아래에서 들고다니던 잡지를 보고는 머리속에서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그 잡지에 실린 문제는 학문과 예술이 과연 실제 인류를 진보시켰는가, 혹은 타락시켰는가, 였는데 그는 그것을 보고는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문제임을 예감한다. 대부분의 다른 인물들이 학문과 예술이 인류의 진보에 영향을 미쳤다고 쓰는 것에 반하여 루소는 그에 반대 입장을 전개하고는 당당하게 수상하고 만다. 그것이 그의 학운의 시작이었다. 그것으로 이름을 얻은 그는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쓰기도 했고, 당시의 여러 지식인들과 편지로, 지면으로 토론을 진행하며 자신의 명성을 쌓아갔다. 볼테르는 그의 끈질긴 맞수였다. 볼테르의 눈에는 루소가 눈의 가시처럼 보였고, 루소 또한 볼테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의 편지 뒤 적어도 루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볼테르의 예봉을 꺾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루소는 자신 스스로에 뿌듯함을 느꼈다. 아, 자신의 왕국 속에서 안락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저 볼테르에게 한 방을 먹여주는 이 기쁨이란! 그런 일은 자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으리라.

 

신 엘로이즈, 의 성공은 당시로서는 놀랄정도였다. 그의 거처로 수많은 인물들의 각양각색의 편지들이 날아왔다. 신분의 고하는 상관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 엘로이즈, 를 보고 감탄을 하고 그와 친교를 맺고 싶어했다. 당시 인물들과는 거리를 두던 루소에게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성공이었다. 단순히 글만으로 이런 성과를 올린 것이니 말이다. 에밀, 또한 그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물론 그 에밀, 대로의 훈육 방식이 잘 들어맞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그 훈육 방식이 애를 한 번도 길러본 적 없는, 그러니까 고아원에다가 자신이 낳은 자녀를 모두 맡겨 버린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는 해도, 어떻게 하면 품위있게 기를 수 있을까, 와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들의 최고의 선택은 에밀, 이었다. 그리고 앞서 마을의 점장이, 뿐이라고 했지만 그의 마을의 점장이, 는 상당한  인기를 가졌다. 국왕앞에서 시연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표절시비도 많이 겪고 (음악을 제대로 모르는 녀석이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 수 있겠어!) 제대로 된 저작권도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었으며 그의 친구들의 질투심의 시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전역을 강타하는 그 마을의 점장이, 는 루소의 작품이었다.

 

이런 죄과와 빛을 감싸안으며, 그가 빠진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기형적인 사랑이었다. 친구의 정부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그 사랑의 주인공은 두드토 부인이었다. 사랑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결국 'Quos vult perdere Jupiter dementat' 그러니까 신이 마치 자신의 이성을 앗아간 것 처럼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파국으로의 한 걸음이었다. 물론 이 사랑에 대한 고백, 에서의 언급은 사실 그리 객관적이지는 못하다. 루소는 자신의 모든 고백에서 '솔직함' 을 가지고 최대한 '객관적' 으로 보이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이 스캔들은 그에게 빛을 가져다 주지만 동시에 그에게 어둠도 주게 된다. 그에게 자신의 정부를 소개시켜준 친구와의 사이는 아주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루소가 그런 두드토 부인에의 열정을 품고 있는 한 그들 세명, 그러니까 루소, 그의 친구(생 랑베르), 두드토 부인, 의 관계는 기형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소는 루소 나름대로 자신이 꿈꿔왔던 환상 속의 여자와 그녀를 동일시했기에 쉽게 그 열정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 신 엘로이즈, 는 좋게 말하자면 루소 자신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그가 망상 속에서 살아가고, 망상 속의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루소 자신도 신 엘로이즈, 의 출판 뒤에 언급한다. '만약 두드토 부인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이 신 엘로이즈는 순전히 망상만으로 쓰인 것이다, 라는 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그렇기에 이 사랑은 그에게 빛을 준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둠을 주었다. 결국 그와 그의 후원자였던 데피네 부인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에 대한 음모(적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는)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였던 사람들은 그에게 말한다. 그런 생활방식이 뭐가 좋냐고, 왜 자꾸 시골에 틀어박혀서 사냐,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아야지, 그리고 그런 사랑은 그만두는게 좋다고. 그런 말들을 전해듣고, 혹은 직접 들은 그는 이제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조리 하직을 고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더 깊은 은둔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신이 있다면, 쥬피터가 있다면, 그가 원하는 파멸은 결국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이었음을 당시 세상사람들은 결국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물론 이 고백의 후속편으로 앞서 언급한 대화, 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등을 내놓지만 이 고백,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잘 드러내주는 글은 없으리라. 사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뒤의 대화, 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은 자신을 위한 글이었고 (엄밀히 말하자면 대화, 는 좀 수준있게 자신을 알리려는, 그러니까 고백, 만 읽고 자신을 곡해하고 음해하는 인물들에 대항해서 쓴 글이긴 하지만 그 본질은 자신을 위한 글이다.) 이 고백, 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글이니 말이다. 고백이 끝났다고 해서 삶이 끝나지는 않는다. 이 루소가 생을 다하더라도 저 루소가 등장하고, 결국 몇 십만번이고 또다른 루소가 등장해서 니체의 말대로 영원회귀를 하며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실질적인 의미에서, 실제로도 루소는 고백, 을 내놓고 꽤 오래 살아간다. 영국에 방문까지 했었으니까. 하지만 루소의 영혼이 고백, 을 경계로 조금은 바뀌었으리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자신의 죄과와 영예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었으니까. 그 깨달음의 끝은 '나는 나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이었다.' 였다. 그리고는 그는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야박한 신, 쥬피터에게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신이시여, 내 가슴을 흔들고 내 삶을 흔들어 현실에 매몰되게 만들지라도

 

이윽고 그 죽음만은 평온하게 하소서.

 

고백, 이 끝난 다음에는 이제 나의 이야기이다. 언젠가 나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 못지않게 실수를 저질렀고, 죄를 지으며 후회로 생을 점철하며 살아가고, 앞으로 얼마나 더 죄를 지을지, 얼마나 더 많은 후회를 할 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지만, 나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이다. 이렇게 삶을 겪어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고, 당신도 당신 모습 그대로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 또한 당연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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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01 00:51   좋아요 0 | URL
루소가 자기 아이들을 다 고아원에 보내다니... 그런데 에밀을 썼군요 이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교육과 관계있다는 말은 들어봤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솔직하게 쓰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루소는 이야깃거리가 많이 있었군요 저는 남다른 이야기가 없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쉽고 잘못한 일은 많지만 다 생각나지도 않고 잊어버리고 살아가는군요

저도 '내가 그렇지' 합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