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평전 - 천재의 의무 Meaning of Life 시리즈 8
레이 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 / 필로소픽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성난 독일인이 강의가 끝난 후 와서 논쟁을 했습니다."

 

1911년 11월 16일,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이 사랑하던 오톨라인 부인에게 저런 편지를 썼다.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러셀의 역설' 이라는 역설을 통해서 수학계와 철학계 모두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그는, 그 자신의 지적 능력만큼이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강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던가, 그의 여성편력은 처녀, 유부녀를 가리지 않았지만, 불륜이라고 규정하는 사회적인 시선따위는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위의 오톨라인 부인도 마찬가지인데, 그녀는 유부녀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러셀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여기서 당시의 상황을 조금 살펴보면, 러셀은 수학원리, 라는 뛰어난 책을 막 펴내었었다. 그런데 그가 그 책을 쓰느라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책을 쓴 뒤에는 모든 '진력이 빠져버릴 정도'였었다. 그래서 러셀은 스스로에게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된다. 아, 논리학자, 혹은 철학자로서의 러셀은 이제 죽었구나, 라고. 누구나 자신의 일, 이라고 규정지어진 그 무엇인가를 해내면 홀가분하기도 하고, 시원섭섭할 것이다. 결국 그런 생각이 들면 감정적으로 위로를 받고 싶어한다. 러셀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는 오톨라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그대는 나의 별이라고. 그대의 광채 때문에 내가 세계를 볼 수 있노라고.

 

이때의 러셀은 사실 합리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들에 대한 러셀의 독설과 날카로운 지성의 번뜩임은 '사랑'의 이름으로 잠깐 잠이 들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능력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처음에 기껏해야 '성난 독일인' 에 불과했던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에게 '전형적인 천재' 라고 인정받을때에는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 의한 보정이 분명 있었으리라. 사랑에 빠져서 연약해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떠넘긴다. 자신의 일을 다 했다, 더이상 이것보다 나은 일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라고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제자로 삼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 은 자신의 근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근처에 있는 사람은 늘 똑같은 상황을 반복한다. 내가 이것을 시키면 이렇게 하겠지, 저렇게 시키면 저것을 하겠지, 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이 반복되는 일상에 끼어드는 사람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판단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왠지 더 능력이 있어보이게 된다. 그러니 이 때 찾아온 비트겐슈타인은 저 두 조건을 모두 갖춘 최적의 사람이었으리라.

 

그런데 러셀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러셀이 은인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은 줄곧 자살충동에 시달렸노라고, 러셀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라고 인정하자 비로소 자신의 자살충동을 해소할 수 있었노라고 말이다. 아무리 보석이 있더라도 그 보석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원석과도 같은 재능을 발견한 사람이었고, 그 재능을 개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러셀은 분명 비트겐슈타인의 은인이리라. 그런 재능을 발견하는데 앞서 말했듯 오톨라인 부인과의 사랑, 큰 과업을 이루었다는 생각, 등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이런 일들을 생각해보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결국 이뤄낸 업적을 본다면 무의미할지라도)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 만약에 러셀이 합리주의자에 강력한 무신론자인 채로 있었다면? 러셀이 아직 난 더 잘할 수 있어, 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을 구제해주었을까, 와 같은 일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여기에 대한 답을 달아보자면, 그는 결국에는 비트겐슈타인을 인정하였으리라. 러셀은 스스로의 재능에 취해서 다른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달랐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충동에 빠져서 구제를 받아야만 했을까? 그 해답은 비트겐슈타인의 어린 시절에 읽은 책에 있다. 이 책 비트겐슈타인 평전, 에 따르면 오토 바이닝거의 책이었던 성과 성격, 이 어린 비트겐슈타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바이닝거는 자신의 책에서 천재성의 획득을 일종의 정언명령 - 칸트의 정언명령 - 으로 파악한다. 천재성을 가져라. 그것은 선이다. 그렇기때문에 그것은 무조건 수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말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천재성이란 어떤 것인가, 에 대한 규정이 (있기는 있지만) 세밀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천재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바이닝거의 이야기를 따라 정말로 정언명령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칸트의 정언명령과 비교하면서 파악해보자. 칸트의 정언명령 중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을 예로 들어보면, 거짓말을 하지 말라, 와 같은 말이 있다. 이 말은 정언명령이다. 그러니까 선이기에 무조건 수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만약에 정언명령이 무조건 절대적으로 모든 경우에서, 삶의 모든 각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우리는 이 정언명령을 수행하지 않았을때 수많은 고통과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절대적, 과 같은 말은 이상세계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살아가다보면 거짓말은 대부분 할 것이다. 당장 이 책의 주인공인 비트겐슈타인이 어릴 때 가졌던 의문이 '거짓말을 해도 이로울 때 진실을 꼭 말해야 하는가?' 였고, 그 의문에 대한 스스로가 가진 답이 '그럴 때는 거짓말을 해도 꼭 잘못은 아니다' 였으니 말이다. (비록 사유의 과정은 다르지만 흥미롭게도 루소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에서 거짓말에 대해서 내린 결론과 동일하다.) 어느 누구라도 거짓말을 했으니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어' 라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를 보고 칸트의 철학은 이렇게 대답을 한다. '분명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은 분명 절대적인 정언명령이다. 하지만 그 명령을 준수하는 사람도 있고, 준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마치 법률이 있지만 범죄자들이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오토 바이닝거가 정언명령에 포함시키려고 했던 천재성은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파악할 수 있을까? 

 

일단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천재성에 대한 규정을 해보자. 우리가 쉽게 천재성, 이라는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천재들, 의 공통된 특성을 뽑아내는 것이 빠를 것이다. 천재들의 예를 들자면, 아인슈타인, 뉴턴과 같은 사람이리라. 그런데 이들은 무엇을 했는가? 먼저 뉴턴의 경우에는 고전 역학의 세계를 열었다. 그의 프린키피아, 는 심지어 칸트의 초기 철학에도 (순수이성비판을 쓰기 전의 칸트의 철학) 영향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에 대한 개념을 모조리 뒤바꾸어 놓았다. 정리하자면 무언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사람들을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새롭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동안 있지 않았던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다는 말과 동일하다. 이런 규정은 필연적으로 천재라는 이름에 타인에 대한 우월성을 부여한다. 바이닝거 또한 이런 사고과정을 따랐다.

 

그런데 천재라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고, 천재성이 그 천재들이 가지는 특성이라면, 오토 바이닝거의 이야기에는 결함이 생긴다. 천재성을 추구하는 것이 선이고 정언명령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런 상황을 상정해보자. 모든 사람이 그 천재성을 실현한 상황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우월성을 가진다, 라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이럴 때 도대체 '천재성' 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국 오토 바이닝거의 이야기가 천재성, 에 대한 이야기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다음이 요구된다 : 모두가 천재성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이는 정언명령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모순이 된다. 앞서 칸트의 정언명령의 예로 들었던 '거짓말을 하지마라' 와 같은 문장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이상사회고 정언명령이 이루어진 사회이다. 하지만 그 명령이 천재성에 이르면 이런 일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기어코 모순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천재가 되지 못하면 죽으면 된다. 죽은 사람은 그 사회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천재성은 사회에서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산 사람들은 모두 천재이기에) 그리고 동시에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 비하여 우월한 위치에 있다. (죽은 사람들은 천재성이 부족한 사람들이기에) 이로서 이 모순이 해결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저 결론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에게는 천재와 죽음, 단 두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자살충동에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을 '구제받아야만 할 사람' 이었고 러셀은 그런 그를 (비록 합리적으로 내린 결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죽음으로부터 '구제'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깊게 볼 부분이 있다. 앞서 말한 천재성의 규정을 따르자면, 천재성은 항상 한 업적이 이루어진 뒤에 알아볼 수 있으리라.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에 관한 이론을 세우지 않았다면 누가 아인슈타인보고 뛰어나다고 인정했을까? 카프카는 그 뛰어난 문학작품들을 남기지 않았다면 단순한 공무원 정도로만 여겨졌으리라.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러셀의 인정 - 너는 천재다 - 을 받고 난 뒤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구태여 부연하자면 러셀에게 비트겐슈타인은 다음처럼 계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너는 위대한 일을 할 것이다.

 

네, 나는 위대한 일을 할 겁니다.

 

오토 바이닝거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던 비트겐슈타인은 (나중에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 을 다른 철학자들에게 권하기까지 했다.) 이 간극, '천재성을 판단하는 것은 업적이 이뤄진 뒤에 행해진다, 와 먼저 이루어진 러셀의 인정 ; 너는 재능이 있다. ', 을 어떻게 매웠을까? 여기서 그는 베토벤의 예화를 가져온다. 베토벤은 식음을 전폐하고 36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위대한 작곡을 행한다. 36시간이다. 바로 여기서 간극이 메워진다. 위대한 결과를 낳을 시간을 나에게 주겠다. 그 시간은 36시간이다. 36시간을 투자한 결과가 위대하지 않다면 주저없이 나는 죽음을 택하리라.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명료해지기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저 36시간은 그야말로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전장이다. 베토벤에게는 그 시간이 지옥의 입구이자 지옥 그 자체였다. 그럼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그 자신의 삶이 걸린 시간이었다. 왜? 36시간을 겪고 위대한 작품을 만들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국 비트겐슈타인을 세계대전에 참전해 직접 전쟁을 경험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결국 그는 정신적 의미 뿐만이 아니라 신체적 의미로도, 그 자신의 모든 부분에서 그 36시간을 겪었던 것이다. 

 

이 후 논리철학논고를 쓰고, 다른 업적을 선보였지만 죽을때까지 그는 저 자세, 천재성을 향한 경건한 자세, 를 잊지 않았다. 러셀의 인정으로 겨우 살 권리를 받았다지만, 그리고 위대한 과업을 남겼으니 이제 살아도 좋다, 라고 여기게 되었다지만 이제는 천재, 라는 그 개념 자체가 그 자신을 얽어매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 자신에게는 명료하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았고, 그것은 다시금 그 자신을 천재성, 이라는 것을 얻기 전의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그러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시금 철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비트겐슈타인 평전, 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때때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의 수명은 이제 6개월 정도 남았을 뿐이라고. 왜 이런 말들을 계속 반복적으로 했을까? 이것이 명료하게 되지 않는다면 (천재성을 다시금 얻지 못한다면) 그는 죽어야 하였기에 그런 말을 계속 반복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그가 자신의 삶의 이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만들어낸 철학들은 지금도 논의가 계속되고있다.

 

그의 철학은 어렵다. 그의 철학이 특히나 어려운 까닭은, 그는 자신의 생각에 다다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가 (자신이 쓴 책을 오독한) 괴팅겐 서평을 보고 자신의 철학을 쉽게 이야기한 형이상학 서설, 을 썼던 일처럼 비트겐슈타인도 도움이 되는 글 하나 정도는 사실 남길 수도 있었을텐데, 끝끝내 그는 입을 다물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비트겐슈타인 평전, 은 그의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이리라. 하지만 레이 몽크의 이 책이 가진 더 큰 장점은 아마 천재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으리라. 평생 칼날 위에 선 것 처럼 천재, 아니면 죽음, 이라는 일견 오만한 태도를 고수해왔던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어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마 비트겐슈타인은 독자들에게도 자신의 철학에 대한 태도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생각에 다다르려면 당신들도 죽을 각오로 뛰어와야만 한다, 라고. 하지만 끝내 그가 우리에게 천재, 아니면 죽음,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재촉한다면

 

"답장하지 않을 생각이다." 라고 무어는 일기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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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4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7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9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3-02-23 03:03   좋아요 0 | URL
사람도 만나야 할 때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을 나중에 인정했다 할지라도, 참지 못하고 죽은 뒤였다면...
비트겐슈타인, 이름만 아는 사람입니다
어쩐지 자기가 자기를 아주 힘들게 했을 것 같네요


희선

가연 2013-03-05 16:1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읽을때 드는 게 바로 그 생각, 자기가 자기를 괴롭혔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