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블룸의 저작, 세계문학의 천재들, 을 읽으며 저자에게 놀랐던 점은, 문학 비평이라는 부분에 카발라를 접목시켰던 점이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밝혀놓는다. 이 책은 완역본이 아니다.) 카발라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여러 가능성이 열려있지만, 문학 비평이라는 측면에까지 이용할 거라고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카발라가 이용된 다른 측면을 본다면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에 적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독자적으로 문학 비평에 카발라를 적용시켜서 문학사의 걸출한 인물들을 카발라에서 말하는 생명의 나무, 그러니까 세피로트의 각 위계에 위치시켜놓았다. 세피로트에는 10계의 위계가 있는데, 그가 적용시켜놓은 위계와 그에 따른 작가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케테르 -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톨스토이, 호크마 - 야훼스트, 플라톤, 무함마드, 비나 - 니체, 키에르케고르, 카프카, 헤세드 - 던, 스위프트, 포프, 딘(게브라라고도 읽지만 여기서는 책을 따르겠다.) - 에머슨, 디킨슨, 프로스트, 엘리엇, 티페렛 - 앨저넌, 크리스티나, 월터, 네자 - 호메로스, 조이스, 헤밍웨이, 호드 - 휘트먼, 페소아, 하트, - 예소드 - 플로베르, 보르헤스, 칼비노, 말쿠트 - 발자크, 캐럴, 예이츠. 해럴드 블룸은 총 100명의 작가들을 위계에 배열시켜놓았지만, 그 모든 것을 적을 수는 없고, 간략하게 적어보았다. 위의 케테르 등등의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사실 카발라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무슨 뜻인지 모를것이다. 이 글에서는 카발라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나름대로 각 위계에 적절한 문학작품들을 하나씩 배열해볼 생각이다.
카발라, 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유대교의 비교, 혹은 비술과 같은 것, 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정도에서 그쳐야 할 관심이 그래도 일부 대중들에게 생명력을 획득하여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에반게리온, 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에반게리온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세피로트의 나무, 상징은 그 당시 그 애니메이션을 본 많은 사람들에게 '세피로트의 나무' 라는 것이 있다, 라는 것을 강렬하게 심어주었다. 어디에 등장했는가? 에반게리온 극장판 air를 보면 마지막에 신지가 탄 초호기가 각성하여 아스카를 구하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아스카와 아스카가 탄 에바는 양산형 에반게리온들에게 철저하게 파괴된 상태였고, 양산형 에반게리온들은 초호기에게 눈을 돌린다. 결국 초호기를 붙잡고 대기권 위로 올라가게 되는데, 이는 일종의 의식 - 인류보완계획 - 이었다. 바로 그 때 허공에 세피로트의 나무, 가 그려지면서 의식의 시작을 알린다. 에반게리온을 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무슨 장면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가 빠르겠지만, 사실 에반게리온과 카발라는 그다지 관련이 있다고는 못하겠다. 왼쪽 위의 책은 그 상징에서 나아가 에반게리온 전체를 관통하는 카발라적인 의미, 를 찾..으려 애쓴 책으로 보이는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에반게리온 해석서, 이상으로는 보기 어렵다. 여하튼,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을 보면 세피로트의 나무와 카발라에 대해서 이런 관념을 가지게 된다. 생명의 파괴와 창조에 관련된 어떤 비술이라고 말이다.
어느 종교에나 비술이나 비밀적인 교의가 있다. 불교에서는 금강승이라고 해서, 대승과 소승을 넘어 현세에서의 구원을 위한 비법이 밀교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우리가 티벳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등을 볼 때 무언가 물레같은 것을 돌리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물레라기보다는 바퀴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한데, 이를 두고 마니차, 라고 부른다. 이 마니차에는 경전이 겉면에 빼곡히 적혀있거나 혹은 경전을 안에 품었기에 한 번 돌릴때마다 경전을 한 번 외운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가져온다. 단순히 읽는 것보다 몇 번이고 돌리는 것이 훨씬 쉬우리라. 그렇기에 순식간에 경전을 몇 번이고 읽은 인과를 현세에 만들게 된다. 이를 두고 기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그런 바퀴를 돌린다고 과연 자신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하지만 기만이라고 불리지 않기 위해서 금강승 수행자들은 엄격히 선발된다. 밀교 교의에 맞게 일대일로 스승에서 제자로 밀교적 성격을 가지고 비의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 금강승에 애초에 입문할 정도라면 경전은 벌써 수만번은 읽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뛰어난 인격자로 판단된 사람이리라.
카발라도 이런 비의적 개념이 강한데, 다만 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위의 금강승의 전통의 경우에는 엄격히 전승된다는 점이 있겠지만, 이 카발라는 일종의 민족개념으로까지 퍼져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중들에게 알려진 어떤 창조와 관련된 비술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앞서 언급한 금강승의 경우에도 창조나 파괴의 비술과는 거리가 멀다. 금강승에 관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설명하기로 하고, 카발라와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사실 카발라의 문헌들 - 뒤에 말할 조하르나 바히르 서, 탈무드에 이르기까지 - 에서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한 두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심지어 '창조의 서' 라고 이름이 붙은 문서에서도 생명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저 창조의 서, 에서 말하는 창조란 전혀 다른 의미로, 생명을 무에서 만들어내는 비술같은 것은 적혀져 있지 않다(고 알고 있다. 직접 읽은 것이 아니지만 신뢰할 만한 문헌의 정보다.). 말하자면 천지창조의 그 창조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바람의 정령을 불러낸다거나 불의 정령을 부르고 땅의 정령을 사역하는(중세 메르헨들에서 많이 언급되는 묘사들) 방법은 적혀있지 않다. 천지창조이외의 어떤 창조에 관한 개념은 마치 이런 것이다. 비가와서 죽은 나무가 썩었는데, 며칠 지나서 그 나무 속을 파보니 애벌레들이 꿈틀거린다거나, 하는 것이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서의 창조뿐이다.
하지만 현대에서 카발라가 창조와 관련지어지는 것은 아마 골렘, 에 얽힌 전설때문이리라. 왼쪽의 골렘, 이 그런 전설들을 그리고 있는 책인데, 사실 잘 알려진 유대전설을 그리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저런 골렘의 창조가 널리 알려진 것은 거의 현대에 들어와서이다. 1900년대에 많이 알려졌다고 해야 할까, 그 전에는 저런 설화는 일종의 지역적 설화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에 어느 작가가 그걸 바탕으로 살을 붙인 이후에 폭발적으로 퍼져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저 골렘전설의 내용은 간단하다. 압제에 못이기던 유대교 랍비가 카발라의 힘을 빌어 진흙에서 유대인들을 지켜줄 골렘을 만들었고, 압제에서 해방시킨 뒤 그 골렘을 파괴했다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두자면 카발라는 이런 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 (어떤 마법이나 주술에 궁금증이 많다면 미국에서 팔리는 위치크래프트 서적들을 찾는게 훨씬 좋을 것이다. 미국은 그런 것들이 많이 팔리는 나라들 중 하나이다.) 카발라는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신비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며 다만 ( )에 다다르기 위해서 받는 것이다. (( )가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나 또한 설명할 수 없다.) 왜 받는다, 라는 말을 내가 사용했는가? 그건 카발라Kabbalah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받는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받는다, 라는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 신(유대교이니 아무래도 야훼, 가 그 대상이 될 것이다.)이 모세에게 10계명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야훼는 잔인한 신이었고, 유대인들을 비호하며 그들을 매우 사랑하던 신이었다. 예수가 등장하면서 유대인들의 신에서 세계의 신으로 발돋움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구약에서의 야훼는 상당히 종잡을 수 없던 신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카렌 암스트롱이 지은 축의 시대, 는 그런 부분을 가감없이 적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늘의 비밀을 잠깐 보여주었다. 바로 여기서 카발라, 받는다, 라는 의미가 나온다. 받은 것은 무엇인가? 하늘의 비밀이다.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유대인들이다. 왜 받았는가? 야훼는 유대인들의 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 유대인들이 특별한 사명을 가진 민족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비밀이 카발라로 전수되었다. 그 하늘의 비밀에는 여러가지가 담겨있는데, 대략 카발라 저서라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천지창조. 둘째, 신의 힘을 빌려오는 주술이나 마법들(이런 의미에서 신비주의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셋째, 천궁의 모습. 넷째, 천궁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하늘의 비밀을 기술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인간의 그림은 하늘의 모습을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조악하며, 인간의 정신은 하늘의 뜻을 떠올리기에는 너무나 어리석다. 결국 카발라는 아파티스Aphatis, 즉 언어로는 도저히 닿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를 담게 된다. 카발라에 있는 어구들을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는 종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구들 이상에 위치하는 무엇인가를 갈구하기에 카발라가 카발라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 경향은 뒷날에 신지학에 영향을 주었다 - 앞서 썼던 글 중 하나에 그런 내용이 있을 것이다.) 적혀있는 어구를 그대로 믿지 않는다. 그 이상을 추구한다. 이것이 카발라와 종교의 차이점이다. 간단한 예로 일반적인 종교의 경전에 '착한자는 복을 받는다' 라고 적혀있다면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은 그 말을 그대로 따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카발라의 비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의구심부터 가질 것이다. 이 말에 담긴 진정한 뜻을 찾아서 말이다. 신은 항상 옳은가? 가톨릭, 기독교의 전통을 잇는 사람이라면, 신정설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신은 항상 옳다.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여 악을 만들고, 그 악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다다르기를 바란다. 겉으로는 이상해보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항상 옳다. 하지만 카발라는 다르다. 신은 그 내부에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잘못으로 악이 생긴 것이 아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성스러운 빛의 유출과정에서의 이상이 바로 잘못된 것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신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카발라가 신비주의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방향의 차이이다. 비록 마법이나 주술에 관련된 이야기를 (릴리스를 쫓는 부적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마치 만다라와 같은 그림에 천사들의 이름을 가득 적어놓았다.) 다루고 있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발라는 신비주의와 다르다.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것은 바로 힘의 방향의 차이이다. 카발라에서는 힘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하지만 신비주의에서는 힘이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힘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이야기를 좀 더 다듬으면 '유출'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세피로트의 나무, 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앞서 에반게리온을 이야기할 때 세피로트의 나무, 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꺼내었었다. 그렇다면 세피로트의 나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에 대한 설명에 앞서서, 기존의 카발라 문헌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꺼내고 진행하고자 한다. 탈무드와 토라(모세 5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당연히 연구해야 할 문헌들이리라.
카발라의 문헌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천궁의 모습을 그려낸 책도 있고, 앞서 말한 바히르 서도 있다. 이 바히르 서는 카발라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차지한다. 어떤 문서가 카발라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규정을 바히르 서는 대략 드러낸다. 10가지 신성한 힘에 대한 서사, 그리고 10가지 힘 중 하나의 여성적인 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란Ilan이라는 나무 형태로 그려지는 힘의 궤적. 가장 중요하다고 일컫을 수 있는 문헌은 조하르, 이다. 한국어로는 아직 번역이 되어있지 않지만 (그리고 나 또한 읽어보지 못했다.) 내가 본 이차문헌들에서는 대부분 조하르를 카발라의 중심 서적으로 두고 있다. 왼쪽의 책이 조하르 : 광휘의 서이다. 이는 일종의 가상저자를 내세워 현실의 저자가 책을 쓰는 그런 방식으로 쓰여져 있고, 한 명의 저자가 대부분을 쓰긴 했지만, 후에 덧붙여진 것도 상당한 양을 차지한다. 마치 주역에서 주역 본문과 십익의 관계를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랍비들은 앞서의 세 가지 규정들에 더하여 세피로트의 10가지 위계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한다. 그 위계는 한 가지 법칙을 따른다. 바로 신인동형론이다. 신이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고는 각 부분에 위계를 그려낸 것이다. 신의 머리에 세 위계가 있다. 각각 케테르, 호크마, 비나, 라고 일컫는다. 신의 오른 팔은 헤세드가 차지하며, 신의 왼 팔은 게브라(혹은 딘)이 그 위치를 가진다. 신의 심장은 티페레트, 라고 불리며 신의 오른다리는 네자라고 불린다. 신의 왼다리는 호드라고 불리며 신의 성기는 예소드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한 위계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여성적인 힘이다. 가장 아래에 배치되는 그 위계의 이름은 셰키라, 라고 불린다. (말쿠트, 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셰키라, 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여긴다.)
각각의 위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케테르는 왕관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자 무한하고 신성한 빛, 아인 소프(곧 설명할 것이다.)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무에서 유로 나아가고, 다시 집약되는 가장 강력한 그릇을 가진 위계이다. (신성한 빛 사이의 어떤 우열은 없지만 그 그릇의 우열은 있다. 이 또한 곧 설명할 것이다.) 영지주의적 환상에서는 신과의 합일, 과 같은 환상을 보았을 때 이를 케테르와 연관짓는다. 호크마는 그 신성한 빛의 집적이 어디로 나갈 것인가, 그 계획성을 가리키는 위계이다. 비나는 이제 현실에 그 빛이 현현하는 그 상황을 가리킨다. 신성한 빛의 흐름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각각의 위계의 그릇을 채우다가 마치 물이 넘치듯이 '유출'된다. 헤세드는 신의 사랑을 뜻하고 게브라는 신의 정의를 뜻한다. 심장인 티페레트는 헤세드의 영향과 게브라의 영향 모두를 받아 복합적인 것을 뜻한다. (티페레트는 10번째 위계 셰키라, 에 상대되는 남성성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있기에 이런 복합적인 성질을 가진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네자와 호드는 상위 위계인 헤세드와 게브라의 약한 성격을 가진다고 알아두어도 좋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좀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예소드는 신성한 힘의 흐름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셰키라, 는 그 힘이 아래의 피조물들에게 향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셰키라가 열번째 위계에 있다고 해서 그 영향력이 작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셰키라는 가장 피조물들과 가까이 있는 위계이고, 따라서 가장 피조물들이 영향을 끼치기 쉬운 위계이며, 동시에 가장 피조물들에게 영향을 주기 쉬운 위계이다. 셰키라가 하늘로 떠올라 티페레트에 가까울때 피조물들은 신성한 힘을 고루 받는다. 하지만 아래로 향하며 각종 타락에 더럽혀질때 피조물들의 세상은 괴롭다.
아무래도 신이 인간과 동일한 모습을 가진다, 라는 신인동형론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때도 있었으리라. 그 완전하고 위대한 신이 인간과 동일한 모습을 가진다니, 그렇다면 그 신은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이미 불완전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신의 형상을 인간의 인지로 파악하려들다니, 그리고 그 형상을 끝끝내 인간의 모습으로 끌어내리다니, 정말 오만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신인동형론은 꽤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고, 이윽고 세피로트의 나무는 그 기반을 단단하게 한다. 하지만 여전히 불협화음은 남아있었다. 저 세피로트의 나무에서 어떻게 세계가 창조될 수 있었을까? 악은 어디서 생기게 된 것일까? 저 세피로트의 나무는 인간뿐만의 편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카발라 비의 중의 비의로 판단되어 왔으며, 이윽고 신성한 빛의 유출로 설명이 완료되었다.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신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라는 관점을 바탕에 두도록 하자. (범신론과는 다르다. 그리고 이를 잠깐 위의 세계문학의 천재들, 의 저자 헤럴드 불룸의 평론과 비교해보면, 그는 천재성이 내재되어있고, 그 빛이 나뉜다, 라고 판단했으며, 그런 면에서 볼때 카발라를 적절하게 사용한 듯 하다.) 여기서의 신은 신성한 빛이며 모든 것의 근원이자 말로 더 설명할 수 없는 ( )이다. 이를 우리는 앞서도 말했다시피 아인 소프, 라고 부른다. 이는 일종의 부정적 개념과 부정적 개념의 합이다. '끝'이 '없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아인 소프라는 개념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조악한 언어때문이다.(앞서 언어 그 이상을 카발라가 연구한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하라)
그런데 이 아인 소프는 사실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여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지 못하다. 인격신으로 현현한 모습을 그린 구약성경을 보라, 야훼는 인간을 시험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파라다이스에서 쫓아내는 존재이다. 사실 완전한 신이라면 애초에 그런 상황이 있겠는가? 물론 현대 크리스트교에서 내세우는 신정론적인 해석에 따르면 완전한 신이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기 위하여, 라는 해석을 내놓겠지만, 카발라에서 보는 신의 모습은 다르다. 여기서 셰비라, 짐줌과 테히르, 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아인 소프에서 어떻게 악이 형성되는가? 그 전체적인 과정은 셰비라, 라고 불린다. 셰비라, 라는 것은 그릇이 깨어진다, 라는 의미이다. 그릇이란 무엇인가? 앞서 10개의 세피로트의 위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생명의 나무, 그림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생명의 나무 체계에서 각 위계는 원으로 그려진다. 하나의 신성한 빛이 아래로 유출되어 흘러나올때, 그 빛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원으로 그려진 것이다. 원은 그릇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 그릇은 사실 신성한 빛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그릇도 유일하게 '무에서 유로 현현하는' 신성한 빛에 의하여 창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릇이 자신이 담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면 그릇이 그릇으로서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중세의 랍비들은 이렇게 가정했다 : 그릇을 이루는 신성한 빛은 그 내부에 가득 차 있는 빛보다는 덜 신성하다.
덜 신성한 것으로 신성한 것을 가둘 수 있겠는가? 인류학적으로 볼때, 신성한 것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이 서재에서 몇 번이나 언급한 왼쪽의 프레이저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황금가지에서는 부정한 것과 신성한 것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서술한다. 둘 다 닿으면 죽는 것이다. 안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류는 그때 비의에 손을 뻗는다. 더 신성한 존재의 힘을 빌린다. 그러면 신성한 힘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말해서, 덜 신성한 힘은 더 신성한 힘에 의하여 막힐 수 밖에 없다. 위의 카발라에서의 유출도 마찬가지이다. 그릇이 신성한 빛을 품고 있지만, 그 그릇자체로는 도저히 그 광채를 견딜 수 없다. 겨우 견딜 수 있는 위계는 최상위 위계인 케테르, 호크마, 비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남은 7개의 위계는 어떻게 되는가? 깨어진다. 그리고 빛은 폭포수처럼 아래로 유출된다. 이것이 셰비라이다. 이 파국은 악을 가져온다. (하지만 동시에 삼라만상의 형성을 가져온다.)
짐줌은 저 셰비라의 시작과정이다. 짐줌은 물러남, 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모든 계에 영향을 미치고 가득 차 있는 아인 소프는 국지적인 상황에서 그 힘을 '거둔다' 잠깐 물러나서 공백을 만드는 것이다. 그 공백을 테히르라고 부른다. 그 테히르에 세피로트의 그릇들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그릇들은 좀 특이한 상황에 빠져있다. 아인 소프의 모든 곳에 있는 성질때문에(이부분의 이해가 어려울 것이다. 방금전 물러난다고 했는데 모든 곳에 있다는 말은 모순적인 어법이다. 하지만 사실 나로서는 당장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아주 조악한 이야기지만 아인소프는 당신이 생각하는 완전함 그 이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내부에 레시무, 잔여물들을 남긴다. 이 잔여물들은 타자성을 가진다.(이 부분의 설명도 사실 어색하다. 이 과정이 괜히 비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 타자성은 그릇이 깨어질 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빛을 받아 그회복을 더디게 한다. 레시무들이 신성한 빛과 잘 융합한다면 파국의 과정은 해소되겠지만, 잘 융합하지 못하고 끝내는 아래로 가라앉는다. 여기서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결국 아래로 가라앉으면 그 신성한 힘들은 악의 의지에 (신성한 빛에 비교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악이 될 수 있다.) 공격당하고 괴로워한다. 둘째, 불합리한 융합 (레시무와 신성한 빛) 은 그 모순으로 불합리함을 가져온다. 셋째, 위의 설명을 종합하여 악과 만물이 생성된다.
완전한 존재이고, 완전해야만 하지만 그 내부에 모순을 품고 있다. 바로 이것이 카발라의 비의다. 그 모순은 카발라를 크리스트교와 선과 악의 이원론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구분짓게 만든다. 카발라에 의하면 인류가 이렇게 괴로운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한 아담의 원죄때문이아니다. 인류는 사실 무슨 짓을 해도 결국에는 악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왜? 아인소프에 그 악의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악을 떼어내서 최대한 신성함을 보존할 수는 있다. 결국 앞서도 살펴보았다시피 악 또한 신성한 빛 (그릇이든 레시무 또한 신성한 빛에 의하여 생긴다. 아인소프와 신성한 빛을 근본적으로는 동일하게 두고 -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인과 형상인을 떠올려보라. 동일한 질료로 빛어진 서로 다른 형상들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형상인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 설명한다는 점에 유의하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신성한 빛을 위로 올린다면 악은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폭포수같은 물을 받아먹으며 악의 식물이 살아가는데, 어느 순간 그 폭포수가 역류해버린다면 식물은 말라죽으리라.) '빛을 위로 올리는 과정' 을 그릇의 수선, 티쿤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티쿤, 을 얻을 수 있을까? 여기서 카발라의 민족적인 성향이 나타난다. 카발라에서는 그 티쿤의 임무가 유대민족에게 지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민족이 말 잘듣고 바르게 살면 '들어올려진다' 고 한다. 그대,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를 지었는가? 하지만 그 죄를 짓는 것 자체도 티쿤의 일종이었다.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들어올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다시금 내려와 악의 의지에 고통받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은 너무 가혹하다. 아담과 이브처럼 단 두명 뿐이라면 숨막힐듯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수십만명이 되는 유대민족 전체가 어떻게 율법을 지키며 바르게 살 수 있을까? 여기서 '메시아' 의 존재가 필요하게 된다. 민족 전체의 죄를 대속할만한 그런 메시아, 말이다. 여기서 그 메시아는 예수는 아니다. (카발라는 시기적으로 중세에 그 이론들이 엄밀하게 정립되었다는 점을 잊지말라.)
중국 고대 철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흥미로운 개념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고대 철학이란 적어도 하나라, 그러니까 공자 이전을 이야기한다.) 중국에서는 천도, 라는 개념을 매우 강조한다. 하늘의 도, 라는 이야기이다. 이 하늘의 도가 내면화된 것이 인간의 근본 정신이다. 그렇다면 그 하늘의 도를 받아들이데 왜 악이 생길까? 대답은 바로 이것이다. 부족하게 받아들였기때문이다. 도가 불충분하게 내면을 채우면 거기서 악이 생긴다. 그렇기에 우리는 도를 갈고닦아야 하리라. 위의 레지무와 셰비라, 그리고 티쿤의 과정과 흡사하지 않은가?
하지만 카발라는 각각의 의식마다 또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다.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 유럽에 전반적으로 지식인들 -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같은 - 에게 비의로 전해진 카발라 의식은 또 차이가 있다. 전반적인 내용은 동일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중세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카발라 의식은 마지막 여성적인 힘을 왕국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향상시키고는 호크마, 라고 이름을 붙인다. 이 카발라는 당시 인간들의 의식체계를 장악하고 있던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무시 못할 정도로 받았다. 또한 각각의 위계에 여성적인 힘들이 쌍을 하나씩 이루고 있다고 가정하기도 하고, 음존재, 라는 것을 가정하여 인간의 인식을 넘은 초공간을 가정하였다. 아인 소프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아인 소프, 만 있던 것으로는 주술사들과 비의의 집전자들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인 소프를 세분화하여 아인, 아인 소프, 아인 소프 오르, 이렇게 3계로 나누었다. 각각 없다, 끝이 없다, 끝이 없는 빛, 으로 해석되며, 각각의 계는 아인으로부터 순차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주술사들은 이야기한다. 절대로 카발라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카발라 명상으로만 본 뜻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이런 저런 사람들 - 블라바츠키와 같은 인물이나 마법사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와 같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 영지주의와 카발라, 뉴에이지 운동 등이 섞여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쪽의 미스티컬 카발라는 카발라를 연구할 때 한 번 읽어보면 좋은 책이다. 제목은 오컬트의 느낌을 확실히 뿜어내지만 많은 참고 자료를 가지고 카발라의 철학적인 기초를 세우려고 노력한다.
대략 여기까지가 카발라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이다. 사실 카발라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카발라 자체에 대한 심원한 명상에 좀 더 무게를 싣는다는 위의 미스티컬 카발라, 에서의 이야기는 옳은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일반인들의 카발라에 대한 접근을 막는 어떤 핑계처럼 들릴 수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인터넷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고, 문헌들은 '고대의 신비로운 전승을 거친 문헌' 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 그 고대의 문헌들이 인터넷 세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초에는 마법적 의식을 통해서 전해내려오던 것들이 말이다.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의 법의 서, 와 같은 서적을 그대로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더이상 신비로움, 이 신비로움이 아니게 되버렸다. 여기서 마법사들이 그들의 비의에의 우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명상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아도 문헌의 지식보다도 어떤 신과의 합일에의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신과의 합일에의 경험, 이라는 말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야 한다. 대부분의 참선 종교에서는 수행자가 신과의 합일을 경험했다, 혹은 갑자기 확 맑아지는 기분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 도리어 당황스러워한다. 불교에서는 마가 끼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한다. 사실 깨달음이란 그리고 깨달음의 순간이란 담담한 것이다, 라고 말이다. ('불광'- 불교 잡지 - 에 요즘 멘토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혜민 스님이 기고한 글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맑아진다거나 하는 것은 위험한 징조다. 그리고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수행에의 진전은 더이상 없다. 그리고 카발라에서도 당연히 위험스럽게 여겨진다. 케테르에 다다르는 것은 깊은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리라. (물론 이런 이야기들 모두가 위에서의 비판, 비의에의 우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라는 것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카발라에 대한 설명이 길었다. 이제 나름대로 세피로트의 각 위계에 어울릴만한 작가와 책들을 하나씩 꼽아보도록 하겠다. 해럴드 블룸의 해석도 뛰어나지만, 저 책, 현대 문학의 천재들에는 약간 눈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밟히는 것은 해럴드 블룸이 극렬 셰익스피어 팬이라는 것이다. 한문단에 적어도 한 번은(앞부분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찬양이 나온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첫 위계인 케테르에 셰익스피어를 놓는다. 그 다음으로 걸리는 것은 해럴드 블룸, 은 서문에서 작가의 죽음, 이라는 개념을 비판하지만 나로서는 롤랑 바르트의 그 개념에 대한 비판이 일차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블룸은 이렇게 생생한 인물들을 그려내는 작가를 눈앞에 두고 죽었다는 소리를 하는가, 라고 화를 낸다. 하지만 그 화는 사실 롤랑 바르트에게 향해져서는 안된다. 왜? 그 생생한 인물들의 마음속을 작가가 전부 알 수는 없다, 라는 점을 블룸은 간과하기 때문이다. (블룸이 말한대로 인간처럼 생생한 인물들이라면 그 생생한 인물들의 속 또한 인간들만큼이나 알 수 없다는 점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앞으로 전개될 이 글의 내용에는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내가 해럴드 블룸만큼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었던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전문적인 비평가도 아니다. 다만 카발라와 문학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흥미로워보이며, 그렇기에 이렇게 몇 자 적어보는 것이다.
케테르 - 성취, 위대한 완성.
나 또한 셰익스피어를 케테르의 좌에 놓는 것에 이견이 없다. 세계문학의 천재들, 의 저자처럼 셰익스피어의 옹호는 아무래도 심정적으로 힘들지만 (혹은 내가 영문권 사람이 아니라서 이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뛰어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한여름 밤의 꿈', 그리고 '템페스트' 이다. (굳이 고르자면 템페스트, 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케테르와 좌에 오를만한 작품은 역시 햄릿, 이다. 결국 사람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비극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준다. 그래서 비극이 희극보다는 더 케테르에 어울린다. 그런데 비극중에서 왜 햄릿을 골랐는가? 햄릿에 대한 분석은 많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햄릿의 성격이다. 유유부단하고 몇 번이고 자신의 복수를 이룰 기회를 잡지만 놓치고 마는 햄릿은 현대인들의 투영이다. 프로이트는 햄릿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내리지만 -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를 두고 자신의 욕망을 대신 실현한 존재처럼 여기는 - 사실 프로이트의 해석은 미진한 점이 많다. 프로이트를 잠시 제쳐두고 이야기하자. 햄릿은 현대인들의 투영인가?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인들만의 투영인가? 아니다. 중세인들의 투영이기도 하고 르네상스인들의 투영이기도 하다. 전 시대를 걸쳐서 발하는 속성, 나아갈 길을 두려워하고 걸어온 길에 후회하는, 그리고 이윽고 '실패에의 예감 - 실패할 것을 알지만 몇 번이고 반복하고 결국에는 그것을 기대하게 되는' 을 현계시키는 인물이 바로 햄릿이다. 전 세대를 꿰뚫는 그 빛은 분명 첫번째에 합당하다.
호크마 - 지혜, 현현에의 계획.
지혜, 의 속성을 가진 호크마의 좌에는 플라톤의 작품을 쓰는게 옳을 것이다. 세계 4대 성인에 소크라테스를 놓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소크라테스가 정말 그 정도로 성인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소크라테스 본인이 직접 남긴 글은 없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플라톤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을 윤색하지 않았다는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스승이 한 말들을 그렇게 플라톤이 잘 기억하고 있을 수 있었을까? (물론 인간이란 정말 적응의 동물이라서 만약에 이 세상에 모든 컴퓨터가 사라져버린다면 갑자기 모두들 암기력이 장난아니게 증진될 것이다, 마치 반달족의 침입을 앞두었던 수도회 수사들처럼.) 그러나 그런 의문은 뒤로 하더라도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모두 현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일화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상기설, 에 관한 것이다. 어느 어린아이에게 몇 가지 방법을 알려주고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유도시켰다던가. 모든 지식은 그저 실마리만 잡히면 다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다, 라는 상기설은 인간 본연에 내재한 지혜를 설명할 수 있을것이다. 그 지혜를 잡는 실마리는 어디서 오는가? 여기서 내가 부정된다. 실마리는 나를 벗어난 곳에 있다. 너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 너 자신이 무지하다면 너는 대화를 통해 그것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든, 혹은 다른 사람을 직접 만들어 대화를 하든 말이다.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의 첫 일보이리라. 길을 예비하는 자, 죽음을 각오하듯이 현현을 계획하려는 위계는 그 자신의 공허를 깨달아야 한다.
비나 - 사유 능력, 현현.
이제 신성한 힘은 본격적인 유출을 시작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데미안의 유명한 경구이다. 마찬가지로 이 위계에서 신성한 힘은 현실계에 그 자신을 드러내어 흐르기 시작한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던 싱클레어는 밝음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커가면서 깨닫게 되고, 카인의 낙인을 가진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그 자신의 카인과 아벨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들려준다. 카인은 배제당한 것이라고 말이다. 비나 위계는 앞서 말한 셰비라, 과정에서 남아있는 위계 중 하나이며, 가장 마지막 위계이다. 비나는 파국과 존재의 경계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세피로트의 해석방법 중 하나 - 세피로트의 해석 중 번개모양으로 보는 방법때문이다.) 경계를 걷는다, 라는 말은 싱클레어에게 매우 적합하리라. 데미안에게서 시작된 배제당한 카인의 이야기는 싱클레어에게 생각의 확장을 시작하게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알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싱클레어는 언제 알에서 벗어나는가? 그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알 자신이 깨어질때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 말미에 데미안이 사라짐으로서 깨어지게 된다. 그리고 카인의 낙인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싱클레어 본인의 다리로 걷기 시작했다, 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 자신이 이제 현현하게 된 것이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 자신이 현현한 모습이 '깨어진 알' 데미안과 너무나 닮았다는 점이다. 이는 파국, 셰비라를 다시금 예비하고, 카발라에서는 이런 순환으로 하여금 전체 생명의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다.
헤세드 - 사랑.
남자의 오만과 여자의 편견, 이라는 문장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 부족한 것 없는 재벌집 아들이 뺨을 한대 맞고는 '오, 나에게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하더니 갑자기 여자의 손에 키스한다. 많은 왜곡이 있는 줄거리지만 딱히 핵심에서 벗어났다고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로맨스 소설을 그대로 따온듯한 소설에서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사실 세피로트 상의 헤세드는 신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 소설의 어디를 어떻게 읽을때 우리는 그런 빛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실 남녀주인공은 소설의 끝까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내가 요약한 줄거리 (재벌집 아들이 뺨맞고 등등) 가 핵심을 찌른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서로 바뀌지 않았음에도 남자는 오만을 접고 여자는 편견을 접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이해관계의 결과일런지도 모른다. 그 이해관계로 결혼(일반적으로 사랑의 열매라고 이야기되는)에 이르게 되었다. 이해관계는 사랑인가, 아닌가? 하지만 사랑은 접어두더라도 적어도 사랑에 필수적인 것을 이 소설은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서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 서로에게 자의로 맞춰주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사랑의 방식인 커플이 있다면 정말 천상의 커플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슬프게도 없을 것이고, 현실에 매몰하면서 적당히 맞춰서 살아가게 된다. 하루키의 단편에서 나오는 80퍼센트의 사랑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어떻게보면 현실적인 사랑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적절한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스스로가 이렇게 쓰기는 했지만 나 자신도 이 해석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게부라 - 심판.
천지불인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 라고 직역할 수 있겠는데, 사실 이 말은 어질지 않다, 라는 말 보다는 그냥 그대로 맡긴다, 라는 이야기이다. 하늘이 인간을 사랑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땅은? 어느쪽도 인간을 어여삐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늘은 돼지를 사랑하는가? 아니다. 어느쪽도 어느 생물도 어여삐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천지간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들과 인간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을까? 답은 어느 쪽도 우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몰아치는 토네이도를 직격으로 맞으면 사이좋게 돼지와 손잡고 요단강을 건널것이다. 자연은 그런식으로 자신의 힘을 사역한다. 그렇다면 신은 어떨까? 신인동형론은 신과 자신의 거리를 매우 좁히는데 성공했다. 인간모습으로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인간의 일에 개입한다. 여기서 어떤 신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천지불인의 자연처럼 사이좋게 요단강으로 보내버리는 심판을 내리지는 않는다. (매우 거친 비유이지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여기가 유리하면 반대편에 힘을 보태주고, 반대편이 유리하면 여기에 힘을 보태준다. 일리아스, 가 바로 그런 류의 전형인데, 이를 보면 신들의 심판이 매우 불합리하다. 그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그렇게 모욕을 당했어야 했을까? (그것에 대한 반발인지 나중에 단테의 신곡을 보면 사이좋게 지옥이지만 헥토르는 그래도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마하바라타, 의 카르나를 보라. 그 카르나가 그렇게 죽어야 했을까? 그런데 이 불합리야말로 심판의 핵심이다. 인간은 아무리 인간과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도 신을 어차피 이해할 수 없다. 불합리한 심판을 내렸다고 신을 살해할 수 있을까? 그런 힘이 있다면 애초에 불합리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의 심판은 항상 공정하지는 않다.
티페레트 - 아름다움, 자비.
이 책은 그야말로 티페레트를 그대로 구현한 책이다. 티페레트를 앞서 말할때 헤세드와 게부라의 성격이 섞여있다는 말을 했었다. 레 미제라블의 전체 주제는 인간에 대한 자비, 일 것이다. 미리엘 주교는 자비를 베풀어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주었다. 장발장은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었는가? 팡틴느를 보고 연민을 느끼고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자베르 경감과는 몇 번 부딪히면서도 놓아주었다. 미리엘 주교에서 시작된 자비는 장발장에서 그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장발장의 행적은 아름답다, 라는 말 외에는 표현하기 어려우리라. 이 위계 티페레트는 열 번째의 위계인 셰키라, 와 대응되기도 하는데, 대응으로서 파악할 경우 일종의 남성적인 힘을 드러내기도 한다. 빅토르 위고, 의 문체는 남성적이며 전반적으로 힘차다. 배경설명도 충실하다. 심장으로서 적절하다. 그런데 이 티페레트에게 신성한 빛을 유출하는 것은 신의 머리뿐만이 아니라 오른팔과 왼팔 모두이다. 아름다움과 자비는 사실 헤세드, 의 사랑의 힘이 더 강하다. 왼팔에서 오는 신성한 빛은 어디에 있는가? 장발장이 레 미제라블 5권 모두를 통틀어서 겪는 일들을 그 빛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게 신은 포슐르방 노인을 만나게 했지만 그 이상의 호의는 베풀지 않았다. 그에게 내려진 심판은 가혹하다면 가혹했으리라. 하지만 끝끝내 장발장은 신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네자 - 신의 승리.
신은 변덕스러운 면모를 분명 가진다. 인간을 시험하며 번민에 빠지게 만들고 영혼을 대가로 내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악마는 한 번도 신에게 이긴 적이 없다. 적어도 문학작품에서는 말이다. 성서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그것이 악마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신은 '악마'를 이용하는 것이다. 어떤식으로? 구약에서의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신이 신약에서의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을 베푸는 신으로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신을 부르짖는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변덕에 힘들어하면서 외치던 그 목소리, 왜 신이시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를 자신이 직접 내뱉으면서 신은 인간에게 다가가고, 이윽고 악의에 대한 진정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악은 그저 대순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의미에서 이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카발라에서는 신 안에 이미 모순으로서의 악의 의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고, 그 악의는 신성한 빛을 근원으로 한다고 앞서 이야기한 바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기때문에 악마에게는 서글픈 일이겠지만, 신은 언제나 승리할 힘이 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서를 아무리 들이대더라도 찢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이 파우스트, 이다.
호드 - 위엄, 도덕.
신의 심판은 항상 공정하지는 않다. 하지만 칼같은 심판은 그 심판을 내리는 자에게 위엄을 갖추게 한다. 실제로 카발라 위계상으로 호드에게 빛을 유출시키는 위계는 (앞서 빛의 유출이 단계적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한 점을 상기하라) 물론 티페레트, 에게서도 받지만 게부라, 이다. 눈먼자들의 도시는 그런 위엄을 작품 전반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갑자기 닥쳐버린 재앙에 사람들은 존엄을 잃어버리고, 그 재앙에 힘모아 이겨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거기서도 다시 위아래를 만든다. 외부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고립된 상황에서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짐승이 되어간다. 도대체 여기의 어디에 위엄이 있고 도덕이 있는가? 작중인물 중 한 명이 있다. '안과의사의 아내' 이리라. 이는 인간의 선한 면을 드러낸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고, 그 해석은 호드좌의 도덕, 이라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보다 나는 안과의사의 아내가 깡패두목을 가위로 찔러죽이는 장면을 택하고 싶다. 앞서 해석을 따라 저 장면을 선의 이름으로서 악을 처벌했다고 본다면 안과의사의 아내는 선인인가?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선이라도 악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가 있을까? 여기에 위엄이 작용하리라. 심판은 내려져야하며 그 심판은 위엄있게 시행된다.
예소드 - 근본, 성애.
사실 예소드, 를 선택하는데 상당한 고민을 겪었다. 관능적이지만 그 관능적인 요소가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소설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선택한 소설이 바로 이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다. 사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는 자신의 소설만큼이나 특이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은사의 아내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으리라. 예소드는 세피로트에서 신의 성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성애와 근본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고등동물에서는 자신의 종족을 보전하기 위해서 짝짓기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그 짝짓기에 쾌락을 넣었다. 자신의 종족을 보전한다, 라는 것이 과연 고등동물들의 삶의 근본인가? 우리들의 삶은 그것에 다 바쳐져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고 특히나 성애가 가져오는 쾌락에의 추구가 갈수록 심화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쾌락에의 추구가 그 근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이나, 계속 부인만 할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에서는 그 근본에 대한 탐구를 실시한다. 성애에 대한 가감없는 묘사를 통해서.
셰키라 - 여성적인 힘.
사실 다른 작품들은 이 작품이 좋을지, 다른 작품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이 셰키라, 만큼은 프랑수아즈 사강, 의 작품이 바로 떠올랐다. 사실 카발라 체계에서 셰키라, 의 (나는 블룸과 달리 말쿠트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연인은 티페레트, 이다. (물론 9개 나머지 위계 전부에 대응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티페레트, 에 나는 레 미제라블, 을 놓았다. 과연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이 대응될 수 있을까? 일단 슬픔이여 안녕, 의 문체는 매우 여성적이며 섬세하다. 빅토르 위고의 만연체, 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최대한 배경에 대해서 밝고 선명한 빛으로 칠해버림으로서 사강의 작품에서는 도리어 배경에 그다지 신경을 안쓰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빅토르 위고의 끝없는 배경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장발장은 모두의 구원자이지만 여기의 주인공은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레프리컨과 같은 요정에 가까우리라. 가벼운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장난을 치지만 그 장난으로 인하여 이전에 몰랐던 감정을 깨닫는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일보를 내딛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분명 대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강의 섬세하고 십대의 일기같은 문체는 문학작품 전체에서 여성적인 힘을 보충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카발라에 대한 설명을 하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버렸다. 하지만 설명을 해도 해도 부족한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다. 말로써 표현하기가 어려운 부분도 분명 존재하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모르는 부분들이 남아있다보니 더 설명을 진행시키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카발라의 적용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 의 작가를 그대로 적용시킨 위계는 케테르, 호크마, 헤세드 정도가 그것들이다. 나머지는 내가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문학작품들을 임의로 배치시켰다. 다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식의 접붙이기는 분명 당시까지는 보지 못한 다른 부분을 보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종교적 해석을 관련지어서 읽는법도 좋을 것이다. 변증법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문학작품에서도 그 구조를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문학에서만 효용이 있는게 아니다. 루소와 카발라를 연결시키는 시도도 흥미로울 것이다. 노발리스를 매개로 삼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이런 글을 쓴다면 루소와 한번 연결시켜보겠다. 이 글에 어떤 이면이 있다면 아마 그것이 되지 않을까? 범주는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범주가 절대적이지도 않다.
p. s. 이달은 이제 더 글 안써도 될 것 같네요,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