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철학자들중에 루소를 좋아한다. 루소를 엄밀하게 철학자, 라고 부를 수 있는가, 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활동한 분야가 많았고 다채로운 업적을 남겼으니 말이다. 루소 본인도 자신을 사상가나 철학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스스로가 음악가이기를 간절히 바란 사람이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식물학자로 알려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떠올릴때에는 인간 불평등을 인식하고 그것의 극복 방법을 고뇌한 사람, 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할것이다. 또한 칸트에게 끼친 영향과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탄생을 예고한 점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마 철학자, 적어도 사상가로 부르는 것도 괜찮으리라.

 

철학자로서 루소를 본다면, 사실 루소의 저서들은 머리아플정도로 여러 개념들을 정의한 책들과는 달리 매우 뚜렷한 편이다. 우리는 루소의 저서를 읽을때 초월적, 이나 상징계, 기표라던가, 코나투스, 엔텔레케이아, 코라와 같은 현학적인 개념을 굳이 알 필요는 없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런 용어들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용어들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적절한 순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다만 '일반의지' 라는 개념이 하나 나오기도 하는데, 이 또한 적당히 즐기는 선에서 해석할 수 있다. (루소 본인의 일반의지, 에 대한 개념규정이 명료하지 않기에 깊이 파고든다면 좀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리라.) 그 외에는 루소의 감정을 그대로 따라 읽어나가면 된다. 루소는 말한다. '내 감정을 따라 생각하다보면 어느 새 그 감정이 떠오른 상황이 뚜렷하게 자신에게 다가온다' 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따라 읽다보면 루소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루소가 그냥 별다른 일관성없이 그냥 즉흥적으로 자신이 하고싶은 이야기들만 잔뜩 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오해는 루소를 좀 더 읽고 또 읽다보면 바뀌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루소의 사상은 거대한 하나의 체계를 만들고 있다. (물론 루소를 읽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루소의 저작들을 읽어나가면서, 어떻게 행복과 평등, 이 그의 전 작품에서 구현되며, 어떻게 그의 광증과 외부의 적이 그를 괴롭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원론적인 선과 악의 대비는 아니다. 마을의 점쟁이, 로 돈을 번 루소도 루소며 광증을 가진 루소도 루소며, '실패의 예감' 으로 기어코 헛된 일을 저지르는 루소도 루소다. 결국 루소는 그 자신을 그대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킬 수 밖에 없었다. 

 

루소 평전.

루소를 읽을때는 먼저 이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 사람의 생애로부터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애와 저작들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책은 평전이다. 이 책은 매우 꼼꼼하게 생애와 저작들에 관하여 잘 소개해두었다. 특히나 이 평전이 빛을 발하는 특징이 있는데, 루소가 그 자신에 대해서 쓴 고백록을 세밀하게 비교해서 과연 그 고백록이 옳은가, 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고백록 뿐만 아니다. 연이은 대화, 에서도 수많은 내용을 참조한다. 아마 이렇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자료가 필요했으리라. 또한 각종 저작들이 나왔을 당시의 상황도 잘 전해주고 있다. 신 엘로이즈, 를 썼을때는 루소가 받은 편지들의 내용도 알려주는 등 어느 정도로 루소의 책들이 인기가 있었는지 잘 드러내주고있다. 또한 루소의 글들을 읽다보면 사전지식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장세니즘, 제수이트 등의 용어는 분명 낯설 것이다. 그러나 각주를 다 읽고 확인한다면 적어도 우리가 읽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수준으로 배경지식들을 쌓게 만들어준다. (꼭 위의 장세니즘이나 제수이트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아무리 루소처럼 흥미로운 인물을 다루더라도 페이지가 700페이지를 넘어가기에 읽기가 그리 쉽지많은 않을 것이다.

 

고백.

위의 평전을 읽고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루소의 저작들을 읽어볼 차례다. 루소의 저작을 읽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여긴다. 첫번째는 그의 인생을 따라서 그대로 따라서 읽어나가는 것이고, 두번째에는 그의 학문적인 성취를 따라서 읽어나는 것이다. 세번째에는 그의 문학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두번째의 경우에는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정도만 읽어도 초기 목표는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고, 마지막의 경우에서는 에밀, 신 엘로이즈 정도만 읽어도 초기 목표가 달성된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의 사상은 거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여겨지기에, 설령 그런 책들을 읽었다고 할지라도 루소 본인의 고백으로부터 이어지는 삼부작, 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피상적인 지식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그의 인생을 따라서 읽어나가는 방법을 취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고백, 이 된다. 우리나라에는 고백록, 참회록, 고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번역되어있는데, 몇 가지 저서가 있다. 왼쪽 위의 박영률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있고, 나남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있다. 또한 동서문화사에서 참회록, 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셋 중에 어떤 책이 좋은가, 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개인적으로는 박영률 출판사, 의 번역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는데, 박영률 출판사의 판본은 크기가 포켓북 사이즈이다. (상품정보에서는 A5크기라고 되어있는데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아무리봐도 A5보다는 작은 듯 하다.) 그리고 글씨가 좀작다. 다른 두 책은 적당한 크기에 활자도 괜찮다. 가격만 따진다면 참회록이라는 이름의 동서문화사판본도 괜찮은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남이나 박영률출판사에서 나온 번역이 나로서는 더 읽기에 좋았다. 제목을 보면 고백, 이라는 번역이 더 제목에 어울린다고 여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첫째, 루소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나쁜 일들도 같이 이야기하는데, 초점을 참회보다는 자신의 진실함(나는 이런 것 까지 당신들에게 알린다)에 더 두고 있다. 둘째, 원래 이 책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낭송을 목적으로 한 원고를 바탕에 두고 있으며, 이를 보여주는 부분인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오직 침묵만이 남았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 고백록, 이라고 묶인 원고라면 이 부분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백, 이라는 제목을 취함으로써 이런 문장 하나하나에 다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가? 바로 이런 것이다. 루소 자신은 진실하게 사람들에게 털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끝끝내 사람들은 자신을 밀어내었다.

 

대화.

이 책은 먼저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번역이 적합하게 된걸까? 원문을 읽을 줄 모르는 나로서는 번역의 적합성을 그저 가독성이 얼마나 좋은가, 직역체가 얼마나 없는가,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명료하게 드러나는가, 정도에 둘 수 밖에 없고 따라서 한계점을 분명 가진다. 누군가 원문을 읽을 수 있는 분이 한번쯤 확인해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심정이다. 번역이 적합하게 된 책이라면, 이 책은 좀 이해하기 까다로운 책이다. 고백 삼부작은 이제 고백, 을 거쳐 대화, 로 넘어왔다. 앞으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을 향해 달려나갈 것이다. 사실 좀 당황스러운게, 앞의 고백과 뒤에 언급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은 상당히 쉽게 읽힌다. 유독 이 책만 어렵게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번역이 올바르게 되었다면 저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무래도 루소에 대한 비난들 중 일부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르겠다. 정말 루소가 좀 편집증적인 모습을 가지기는 했었다, 라는 것과 이 책의 일부분은 분명 그런 부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부분을. 하지만 편집증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장 자크 루소는 자신을 장 자크, 라는 사람과 루소, 라는 사람으로 분리시켜서 대화, 를 진행한다.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게 된다. 장 자크 루소라는 아주 사악한 놈이 있는데, 그 놈은 사실 좋은 놈이었어, 라고. 어찌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남에게 비난받는 것을 대부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남이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비하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태도를 취하면 당연히 상대방이 나에게 온정적으로 대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안고서. 아마 루소 또한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루소가 처해진 상황은 슬픈 상황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자신을 솔직하게 말한 위의 고백, 은 흥미 위주의 부분만 보게 되는 상황이 생기는 등 생각과는 달리 오해가 쌓였다. 하지만 그 상황이 루소 자신이 자처한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뒤에 설명하겠지만 루소 자신은 그렇게 자처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루소는 자신에 대해 먼저 '심판' 을 내리고 복권을 꾀하는 것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오른쪽의  동서문화사에서 나오는 책은 제목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을 포함한다. 동서문화사의 번역도 전반적으로 괜찮은 편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나로서는 원문과 대조할 방법이 없다.) 왼쪽에 있는 책 또한 읽기에 좋고 흥미로운 책이다. 루소 고백 삼부작을 장식하는 마지막 책인 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은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 혹은 꿈, 이라는 제목으로도 번역이 되어있다. 아래의 범우사 번역이 바로 그렇다. 루소는 저 대화편 이후에 몇 가지 풍파를 겪고는 다시금 홀로 틀어박혔다. 세상을 아주 등지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주로 이 책의 내용은 루소가 산책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이나, 혹은 생각한 것에 대해서 적은 글들이다. 여기서도 루소는 괜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듯한 서술을 할때가 있지만 (오늘 산책을 했는데 어제는 웃으며 맞이하였던 사람이 오늘은 괜히 얼굴을 찌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것 같다, 처럼) 한편으로는 그의 글의 원숙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글들이 많이 있다. 식물학에 대한 애정 또한 여전하다. 그러고보면 루소가 대화편에서 그의 생계를 꾸리기 위하여 행했던 일은 필경사, 음악 악보를 베끼는 일이다. 어찌 보면 단순작업에 지나지 않지만 루소는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일이다. 직업으로는 음악 악보를 베끼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실 루소는 악보를 굳이 베끼지 않아도 연금과 출판 서적의 수입으로도 삶을 어느 정도 영위할 수는 있었으리라 -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겠지만) 취미로 여러 풀들의 모습을 밝힌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음악 악보를 베끼는 것과 풀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인간불평등기원론, 같은 저서와 너무 동떨어져 보인다. 그러면 그런 그의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길러진 것일까? 아무리 직업과 어떤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과는 별개여야만 한다, 라는 말이 있더라도 말이다. 비슷한 경우로 스피노자, 를 들 수 있을 것이다.스피노자 또한 직업적으로 사색을 진행시킨 것도 아니면서 오늘날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한 학자라 일컫어지고 있다.  (스피노자 또한 광학 렌즈를 가공하여서 그걸로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사실 스피노자도 연금을 모두 합치면 그런 일을 하지 않더라도 살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뭐라 단정지을 수 없지만 적어도 루소에 대해서는 이런 모습이 이상하지는 않다. 그에게는 몽상이 일종의 사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말한다. 사색은 정신의 노동이지만 몽상은 정신의 쾌락이다, 라고. 그렇기에 지식인들은 몽상을 멀리하고 사색을 해야만 한다,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루소는 그런 말과는 정반대에 있었다. 루소에게 있어서 사색은 자신을 방해하는 것이었고, 이성 또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었으며 격식마저도 자신을 괴롭히는 가면과 같은 것이었다. 이 세계에 그를 새기는 것은 몽상이었다. 그리고 그 몽상을 거닐며 자신의 생각들을 자유로워지게 만든 것이다.

 

신 엘로이즈

그렇다면 그 몽상의 힘을 확인할 차례다. 그 힘은 문학작품으로 구현이 많이 되었는데 특히 지금 소개하는 신 엘로이즈, 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루소는 그의 고백, 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산책을 다니다가 어느 호숫가에서 몽상에 잠겼는데, 그때 사랑스러운 두 아가씨를 떠올렸다고 말이다. 실제 인물은 아니지만 루소의 머릿속에서는 그들은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생명력을 획득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이 신 엘로이즈의 창작에 도움을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상상이 그대로 이용된 것은 아니다. 루소와 두 여인은 신 엘로이즈, 에서 쥘리와 생프레, 그리고 볼마르로 변용된다. 여자 한 명과 두 남자의 이야기로 바뀐 것이다. 그 본바탕을 루소 자신의 몽상에 두고 있어서일까, 루소는 신 엘로이즈의 앞부분에서 신 엘로이즈가 창작아 아니냐는 질문에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창작이면 어떻고 창작이 아니면 어떻단 말이냐. 중요한 것은 이 신성한 사랑에 그대들을 맡기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엘로이즈, 라는 말이 일컫듣 순수하게 루소의 몽상에만 바탕을 둔 이야기는 아니다. 엘로이즈는 실제로 있었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일에서 그 모티프를 가져왔다는 것을 밝히는 이름이다. 철학자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가정교사로 있다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아벨라르는 그 사랑의 대가로 거세당하고 쫓겨나가게 되고 엘로이즈는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가 루소의 손에서 변모한 것이다. 가정교사 생프레와 쥘리의 사랑으로. 원본대로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쥘리는 볼마르, 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생프레가 그들 사이에 다시 찾아오는데..

 

이 작품은 매우 중요하다. 이 작품 중간에 마치 단테의 신곡처럼 등장인물의 말을 빌어서 루소는 하고픈 말들을 한다. 특히 일반의지를 이해하는 실마리도 이 책 안에 담겨있다. 마을의 축제가 있던날, 모두가 어울리는 풍경을 그려내면서 루소는 일반의지가 어떠한 것인가 간접적으로나마 밝힌다. 얼핏 내용 줄거리만 보자면 사실 우리나라의 아침드라마의 줄거리 일부와 '아내가 결혼했다' 라는 영화의 내용을 섞은 것 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얼개가 비슷하다. (그리고 이런 삼각관계가 보통 인기가 높듯이 - 우리도 욕하면서 드라마를 보는 것 처럼 - 당시에 이 책의 인기가 매우 좋았다) 하지만 이 신 엘로이즈가 그 얼개를 뛰어넘는 부분은 바로 이부분이다. 보통 드라마의 경우 볼마르는 생프레와 쥘리의 사이를 의심하고 결국 가정이 붕괴될 것이다. 하지만 볼마르는 생프레에게 이야기한다. 내 앞에서도 내가 없는 것 처럼 행동하든지, 아니면 내가 없더라도 내가 있는 것 처럼 행동하라고. 결국 세 명은 서로의 방식대로 그들을 보듬어안는다. 루소의 고백, 을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루소 자신이 이미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자신의 바랑부인과의 경험이 녹아들어있기에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에밀

신 엘로이즈에서 쥘리는 아이들을 훈육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생프레는 누가 가정교사였던 사람이 아니랄까봐 아이들을 일찍부터 교육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쥘리는 그 말에 반대한다. 여기서 쥘리의 말이 루소의 생각과 동일한 면모를 보여준다. 무엇이 옳은 일인가? 어떻게 하면 옳은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옳은 교육을 통하여 개인은 어떻게 발전해 나갈 수 있을까? 쥘리는 아이들에게 지나친 교육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자연과 합치되는 성향을 그대로 따라가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스럽게 세계의 사물을 인식하고 흥미를 가지며 깨닫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은 이 에밀, 이라는 저서에 그대로 나타나있다. 에밀에서는 교육에 대하여 자연성을 주장하고, 스스로 흥미를 가지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책을 버리고 직접 사물을 보라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의사에 대한 불신도 조금 드러난다. (대화편에서는 의사에 대한 불신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 이 관점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병은 스스로 낫도록 약초술에 대한 언급도 있다.(고백, 의 바랑 부인이 약초술을 공부하였다는 것을 잊지말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왼쪽의 한길 그레이트 북스에서 나온 에밀이 완역본판으로 알고 있다. 제대로 다 읽지는 못했지만 에밀을 읽고자 한다면 저 책을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른쪽의 범우사 책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에밀, 이다. 사실 에밀은 끝까지 읽지를 못했다. 생각보다 쉽게 읽히지는 않는 책이다.

 

루소의 개.

한걸음 물러나 루소의 문학작품들을 살펴보면 위의 세 가지, 고백 3부작에서의 각 요소를 문학작품으로 배열시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는 마치 움베르트 에코를 떠올리게 한다. 에코는 말한다 : 자신의 작품은 자신이 창조한 것은 없고 기존의 저작물들의 짜집기라고. 루소의 문학작품도 비슷한 면모가 있는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생애의 짜집기라는 측면이 다르다. 생애를 살아가면서 강하게 느낀 감정들의 짜집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중시하던 루소는 이성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던 철학자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그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데이비드 흄, 과의 엇갈림이었다. 그리고 그 일화를 다룬 것이 바로 왼쪽의 책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왜?, 라는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는가?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의 부지깽이 다툼을 둘러싼 일화에 대해서 극적으로 그려낸 책말이다. 그 책의 저자들이 다시 뭉쳐서 이번에는 루소와 흄에 관한 일들을 파헤쳤다. 한 번에 두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다만 좀 더 깊은 내용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런 류의 책 중 개인적으로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라는 긴 이름의 책을 추천한다) 루소는 편집증에 시달려(실제로 그의 주위에 어느 정도는 루소를 음해하는 사람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영국으로 일종의 도망을 가게 되지만, 그 영국에서 흄과 다툼을 벌이게 된다. 루소는 흄이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들과 이어져 그들의 지령을 따른다 여겼다. 하지만 흄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고 (위의 평전에서도 다루는 일이지만 약간의 의혹이 있기는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결국 루소는 다시금 도망쳐버린다. 바로 그 부분을 이 루소의 개, 가 다룬다. 그 이후에 루소와 흄은 각자의 생을 살게 된다. 이건 퀴즈인데, 위의 삽화에서 누가 장 자크 루소이며 누가 데이비드 흄일까?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

사실 나는 이 책을 범우사에서 나온 책으로 읽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나온 번역들에 대해서는 이 동서문화사판본밖에는 모른다. (찾아보니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된 책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범우사에서 나온 책과 이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책을 비교하면서 읽은 결과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이 책이 읽을만하다,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한 두 군데 문장이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만하다. (동서문화사의 번역에 대한 말이 많다고 하는데 잘 찾아보면 읽을 만한 책들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묶은 책도 '논리철학논고' 는 괜찮은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번역에 관한 글을 한 번 써 볼 생각이다.) 루소의 이 두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자유다. 무슨 자유인가? 그것은 그가 고독한 몽상가의 산책, 에서 말하듯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다. 얼핏 보면 같은 말처럼 느껴지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자유는 전혀 다른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살아가는가? 그것은 인간은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법과 제도가 우리 인간을 갈라놓기 때문이다. 어째서? 인간이 서로 가진 재산이 다른데 가진 사람들은 재산을 보호하려고 법과 제도를 공고히 하려고 한다. 어째서? 재산이 달라진 이유는 소유물을 어떤 사람은 더 쉽게 획득하였고 어떤 사람은 덜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람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남는 물품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잉여 생산물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된 (사회를 이룬다) 것이 만악의 근원이었다.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자연이라는 말이 정말로 노루가 뛰놀고 새들이 노래하는 '자연'일까? 정말 그가 예찬하는 야만인들처럼 우리는 숲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 루소는 사회계약론, 을 내놓으며 말한다. 이미 사회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대한 자연에 맞게 사회를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즉, 합리적인 사회를 이루어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라고 말이다. 사회계약으로 형성된 사회가 바로 그런데 이는 그 사회구성원들의 합의가 기저에 깔려져 있다.

 

그런데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의 관계가 이렇게 연이어지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혹자는 사회계약론이 인간불평등기원론서 말한 자연법을 지양하고 새로운 사회계약이라는 사회체제를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신 엘로이즈나 에밀을 보면 여전히 자연법을 높게 - 신이 주신 위대한 것 - 평가한 것으로 느껴지기에 이 글에서는 이어진다고 보았다. 사회계약론은 특히 일반의지라는 개념으로 매우 유명한데, 이 일반의지는 파괴되지 않는 그 어떤 것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국가를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해보자. 이 국가씨가 나아가는 방향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국가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서 걷는 것이다. 이를 국가의 의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는 사는 사람들이 많다. 국가씨 내부의 A씨와 B씨, C씨는 국가가 걷는 길에 만족하고 있을까? 일반의지 개념에서는 이들 각자가 국가씨의 의지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말해서 이들이 국가씨의 의지를 형성할 때에 일반의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각 사람은 멋대로 춤추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일반의지가 발현된 상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과 비교해보고 싶은 사람은 나 또한 제한적인 부분밖에 모르지만 헤겔이 이야기하는 구체적 보편자, 혹은 국가의 인격화, 같은 것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런 일반의지가 구현될 수 있는 곳은 그리스의 폴리스국가만 남을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정착해있어야만 가능할 것 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그렇지 않다. 위의 정치가들을 뽑아서 정치를 전담하게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성의 문제가 생긴다. 정치가들의 이성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나? 소수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움직인다면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더이상 일반의지가 아니다.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서 무한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개념이다. 일반의지로 제도가 형성된다고 여기고, 일반의지가 국민들의 밖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라캉의 이론(상징계 - 기호의 체계, 실재계 - 상징계 너머의 불안)과 접점이 생기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라캉에 대해서 그리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방향으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투명성과 장애물.

여기까지 루소의 책들을 읽어왔다면 이제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이 책은 매우 뛰어난 루소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책을 읽기에는 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다 읽고 나면 이 책이 얼마나 뛰어난 책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루소의 사상에서의 일관성을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두 가지로 그의 사상과 저서 그리고 생애를 분석하는데 그 두 가지는 제목에 있다시피 투명성과 장애물, 이라는 것이다. 책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평생을 투명성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루소는 매번 장애물을 만난다.' 그 장애물은 루소 본인의 광증일수도 있고, 주변의 음해일수도 있고, 때로는 그에게 찾아온 행운일때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루소는 고백, 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투명성) 하지만 그것은 결벽증으로 오해받기도 하였고 (장애물) 이윽고 루소는 틀어박힐 수 밖에 없었다. (투명성의 확보를 위해서) 하지만 그가 쓴 글이 인기를 얻게 되고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자 (장애물) 루소는 더욱더 사람들을 피해서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였다(투명성) 왜 루소는 스스로의 내면에 침잠할 수 밖에 없었나? 앞서 말했다시피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었지만 다시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자연'은 외부에는 이미 없었다. 이미 외부에서는 사회에 의하여 자연은 사라져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 자연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긴 것이었고 바로 내면에 있었다. 내면 깊숙히 자신을 인도해주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루소의 자유에 관한 말이 근거를 얻는다.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을 자유 :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말인가. 그리고  왜 루소가 이성보다 감정을 더 중시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된다. 당장 자신의 내면을 보라. 내면세계까지 이성적으로 만들어져버린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 내면에 따라서 움직인다면 당연스럽게도 감정이 앞서야 하리라. 이 책의 뒤에 실린 논문들도 읽어본다면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루소사용설명서와 같은 거창한 제목이 붙었긴 하여도 이 글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천에 지나지 않는다. 본인의 성향을 잘 파악해서 좋아하는 방식대로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이는 다른 학자들의 책을 읽을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수학과 물리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인 로저 펜로즈, 의 이야기를 빌리고 싶다. 로저 펜로즈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의 집안은 모두 체스를 좋아하고 잘하지만 자신은 체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술 감상품 보듯이 마스터들이 판 위에서 불꽃튀는 다툼을 벌이는 모습과 그 수읽기를 보면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고 한다. 어떤 철학이나 인문계열의 책들을 읽는 방법도 초기에는 분명 이런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철학개념들은 요즘은 이제 인터넷 검색만 하면 대충 알 수 있다. 혹은 그런 개념을 쓴 사람에게 '여기가 잘 이해가 안가는데 무슨 의도로 쓴 겁니까?' 라고 물으면 된다. 그런 개념을 상황에 맞게 제대로 설명못한다면 그 개념을 쓴 사람도 사실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맞게, 라는 용어가 부적절하지만, 이는 상대방의 양심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설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천연덕스럽게 설명을 하겠는가? 설명을 하다보면 막히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 부분은 바로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뭐, 그다지 잘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설명이 맞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항상 물음표를 띄우기 바란다.) 그리고 그 상대방이 제대로 설명했다면, 그 설명한 내용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책을 읽으면서 갸웃거리더라도, 그 설명을 해줄 상대방이 이 세상에 없다, 가 될테지만, (몇 년 전에 자크 데리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럴 경우라면 앞서 말한듯이 자신감을 가지고 예술작품을 보듯이 한번 훑어보라. 그리고 스스로의 감식안을 기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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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7 22: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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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0 22: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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