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게임에 깊게 빠져서.. 한 때 그만두었던 팬픽마저 끄적거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냥 단순하게 짧게 끄적거릴 생각이었는데, 쓰다보니 각종 스토리가 폭주해서, 적당히 짜집다가 스스로가 지쳐버렸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글을 접을 수가 없어서 결국 하나를 쓰고 나니.. 더이상 못쓰겠는거야. 머릿속으로 망상하는 것은 잘하지만 역시, 그 망상을 직접 현실에다가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팬픽과 같은 소설을 쓸 때 미리 모든 줄거리를 머릿속에서 그린 상태에서 써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 머릿속에서 이미 이 등장인물이 어떤 삶의 과정을 거쳐 어떻게 끝이 날 것인지 다 떠올려놓은 상태였고, 남은 것은 그저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냥 쓰기만 하면 된다, 라는 것이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의지력이 먼저 고갈될 것인가, 혹은 소설이 먼저 끝날 것인가, 의 문제인 것이다. 이미 나는 내가 쓰는 이 글의 등장인물이 어떤 운명을 겪게 될 것인지 다 알고 있다. 이것만큼 나를 모순되게 괴롭히는 일은 없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내가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있는가? 굳이 핑계를 짓자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면서 즐기자, 라고 둘러댈 수 있겠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건 이유가 아니다. 나는 어떤 팬픽션을 쓸 때 나 스스로의 재미를 더 추구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나중에, 몇 년 뒤에라도 내가 우연히 내 글을 봤을때, 오? 이거 의외로 재미있는데? 라는 소리가 나왔으면 좋겠다. 내가 일단 만족해야 글이 쓰여지는 거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아주 탄탄한 스토리를 떠올렸지만, 그 스토리를 굳이 글로 옮겨야 되는가, 라는 물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결국 이 팬픽을 끝내야지, 고작 단편에 지나지 않으니까, 라는 생각이 이겼지만, 다음번은 또 무기한 연장되었다. 역시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이렇게 팬픽션을 꼼꼼하게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면 본인도 모르는 줄거리로 쓰면 되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순간순간의 영감에 맡겨서 백지를 채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 설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앞뒤가 어긋나게 되니까. 한 두 번 그렇게 글을 쓴 적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렇게는 못한다. 일종의 딜레마인거다.

 

 

 

그러고보면 나는 생산자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소비자의 입장이 더 강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금병매, 와 같은 책도 일종의 통 큰 팬픽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그렇게 옛날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터넷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 이런 저런 팬픽을 많이 보게 된다. 그 많은 팬픽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팬픽을 들자면.. 가장 먼저 마법 소녀 리나, 그러니까 슬레이어즈에 관한 팬픽을 쓴 Gaya님이 떠오른다. 세일룬의 역풍, 이라는 팬픽이나 인연의 끝, 과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자랑한다. 세일룬의 역풍, 은 리나나 가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아멜리아가 주인공이다. 아멜리아와 제르가디스의 관계를 부각시켜 스토리를 잘 진행시켰는데, 사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리나-가우리 라인과 아멜리아-제르가디스 라인은 슬레이어즈 애니메이션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실제 원작에서는 별다른 그런 러브라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죽하면 거대 슬레이어즈 팬 커뮤니티 중에 린젤, 리나-제르가디스, 이라는 이름이 있는 커뮤니티가 있겠는가.) 뭐, 생각해보면 아멜리아와 제르가디스의 사이가 크게 나빠보이는 것 같지는 않으니 상관없기는 하다. 이 작품은 현재 개인 홈페이지에 보관되어 있는 상태이다. 물론 Gaya님은 개인적으로는 다른 것으로 더 기억한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크툴루 신화에 대한 것으로. 크툴루 신화에 대한 글을 많이 남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크툴루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분명 이야기를 들어본 분이리라.

 

그다음에는 창세기전 팬픽들이 기억에 남는데, 그 중에 동방검사열전, 을 쓴 검신, 정하늘님의 글도 정말 대단한 필력으로 기억한다. 칠성전기, 라는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분이기도 한데, (칠성 전기는 팬픽이 아니다..) 동방검사열전은 창세기전, 이라는 게임의 세계관에 나오는 동방대륙의 검사, 낭천을 주인공으로, 한대륙, 이라는 곳에서 무협 느낌을 적당히 섞어서 쓴 글인데, 이후에 나온 다른 창세기전 팬픽들이 많지만, 아마 이 팬픽 이상으로 나에게 감명깊게 다가온 글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창세기전2 소설화 프로젝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작가가 내 기억으로는 시드 노벨, 이라는 출판사에 있는 아크, 라는 필명을 쓰시던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작품도 괜찮게 읽었지만(이 아크님은 현재 개발 중에 있는 창세기전 4 온라인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검신님이 이 프로젝트를 맡았다면,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다. 물론 검신님이 동방검사열전 뿐만 아니라 창세기전2 시리즈의 팬픽도 어느 정도 남겼었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지금 어느 한 팬사이트에서 보관중에 있다.

 

에반게리온에 대한 추억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한창 신극장판 제작 중이라 느낌이 새롭기도 한데, 에반게리온의 팬픽 중 정말 유명한 팬픽이 두 개 있다. 둘다 일본에서 쓰여진 건데, 하나는 제네시스 큐Genesis Q이고, 다른 하나는 2nd ring이다. 둘다 뛰어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Genesis Q의 손을 더 들어주고 싶다. 에반게리온에 나오던 사도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주인공인 이카리 신지와 아스카, 레이가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면? 물론 그런 상황이 원작에 아무런 연원도 두지 않는 것은 아니다. Genesis Q의 경우에는 에반게리온 TV판의 앤딩에서부터 시작한다. 에반게리온 TV판에서 희대의 낚시가 나온 적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마지막화로 알고 있는데, 주인공인 이카리 신지의 환상에서 레이와 아스카와 함께 학교 생활을 보내는, 그런 장면 말이다. 물론 에반게리온은 그런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아마 결말은 미적지근하게, 신지가 '그래, 내가 결심하면 이렇게 할 수 있어' 와 같은 식으로 끝났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종의 자유로운 결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결심은 극장판 Death and Rebirth, Air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Genesis Q는 바로 저 장면, 레이와 아스카가 함께 지내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러고보면 셋 다 아직 미완결 상태라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 슬레이어즈 팬픽인 인연의 끝은 완결 상태이지만 세일룬의 역풍은 아직 미완결 상태이고 (다른 작품을 보면 이미 이후 스토리들은 다 짜여져 있는 듯 하다.) 창세기전 동방검사열전을 쓴 검신님은 넷상 활동에서 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거의 모뎀 통신할 때 활동을 하셨던 분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에반게리온 팬픽인 2nd ring은 완결되었지만, Genesis Q는.. 아직 완결될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거의 최종장 페이스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에반게리온 팬픽 중에서 은근히 명작들이 많았던 것 같다. 리턴 투 에반게리온, 과 같은 작품도 명작 대열에 넣을 수 있으리라. 이런 팬팩들을 몇 가지 부류로 자세히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것은 미루고, 적어도 저 사실은 그만큼 에반게리온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적어도 창작욕, 이라는 것을 불태우게 만들 정도로, 라는 것을 반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작 이렇게 말하는 본인은 에반게리온 팬픽을 쓰지는 않았지만, 풋.

 

적어도 가야Gaya님이 팬픽을 쓰시다가 멈춘 이유는 약간은 짐작이 된다. 물론 실제 생활에서 바쁘기 때문에, 와 같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이유를 제외하자면 이미 큼직한 스토리가 짜여져 있기에, (가야님의 다른 단편팬픽들을 보면 세일룬의 역풍, 에서 리나 등등이 어떤 결말을 맞을 지 이미 드러나 있는 상황이다.) 앞서 내가 겪은 것 처럼, 의지력과 소설 분량이 서로 싸운게 아닐까, 하고. 처음에 그 작품을 좋아한 상태라면 어떻게든 의지력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사람의 감정은 계속 열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진한 사랑이라도 결국에는 식어 사라진다.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런데 하물며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나, 혹은 소설과 같은 사물이라면. 그렇기에 더 쓰기가 힘들어지지는 않았을까? 이는 에바 팬픽인 Genesis Q를 쓰..고 있는(거의 10년, 아니 20년은 된 팬픽션인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Nary님도 마찬가지리라. Nary님은 팬픽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다. 겨우 힘을 모아 썼다고.

 

그렇다면 이런 팬픽은 왜 쓰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스토리를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주축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만 해도 작가에게 '누구랑 누구 이어지게 후일담 좀 써주세요' 라고 메일을 쓸 정도였으니, 풋. 그러다보면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를 작품 속에 집어넣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이야기가 한 편 뚝딱 써지는 것이다. 그 캐릭터가 너무 악질적으로 원래 작가의 등장인물들을 속된 말로 깔아뭉갠다거나, 혹은 능력적으로 너무 우위에 있다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오리지널 캐릭터들을 삽입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리라, 글을 써내려가는데. 기존 작가들의 등장인물들로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다 보면 등장인물들의 이미지가 너무 소모가 빨리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들이 쓰이다보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지게 되고, 그러다보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도 들게 된다. 이쯤 되면 만약에 자신의 오리지널 캐릭터를 삽입한 경우라면 그 캐릭터에 당위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도록 말이지.

 

앞으로 이런 팬픽션들은 어떻게 될까? 적어도 혼자서 품는 상상이 실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상상은 그저 품고 있다면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나서기 시작할 때 현실이 된다. 상상만으로 만족못할 때 그 지점에서 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내가 든 예들은 모두다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 소설에 관련되어있지만, 꼭 저런 장르가 아니더라도 좋다. 사실은 어디서든 단초가 되어 글이 쓰일 수 있는 것이다. 백년의 고독, 처럼 아예 이야기가 그 구성상으로 완벽하게 완결되어버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에서 에르큘 포아로가 죽은 뒤에 그의 친우 헤이스팅스가 탐정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이고 (물론 직접 써서 발표하겠다면 저작권부터 알아봐야겠지만 - 그러고보면 셜록 홈즈의 경우에는 최근에 코난 도일 재단에서 인정받은 '팬픽' 아닌 '팬픽' 이 나왔다. 왼쪽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나로서는 코난 도일이 직접 쓰지 않은 책이 아니면 안돼, 하는 심정이지만.. 일종의 원리주의 셜로키언이라고 볼 수 있겠다, 풋.) 그 외에 다양한 고전 소설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전 소설 뿐만이 아니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 의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를 기억하는가? 한니발 렉터는 한니발, 에서 별다른 사건 없이(그의 식인 행각에 비하면 전혀 아무런 응징이나 보복 없이)그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그 다음부터는 독자의 영역이다. 독자는 한니발 렉터가 그 잔인성을 계속 드러내는 이야기를 택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숙적이었던 그레이엄이 부활하는 이야기를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상상력이 어디든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면 팬픽션은 어디서든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팬픽션이 소설 형식으로만 남게 되는 시기도 사라지지 않을까? 예를 들어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라면 만화 형식으로 후일담을 그려낼 수 도 있을 것이고(이미 동인지, 라는 형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19금 내용이 많아서 그렇지..) 원본이 게임이라면 게임 형식으로 팬픽션 작품이 나올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다른 작품들의 영상을 하나로 묶어서 줄거리를 이어내는 형식도 생길 것이다. (소위 말하는 MAD무비의 경우가 이와 같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해당되는 시간은.. 공들인 만큼 많이 들겠지만. 그렇다고 소설 형식으로의 팬픽이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글쓰기, 라는 것은 이야기하는 것, 다음으로 누구나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이다. 이제는 컴퓨터가 생겼기에 글쓰는데 시간도 그만큼 오래 걸리지 않기도 할테니. 팬픽이 사라지는 시기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흥미있는 주제가 없을 때 다가올 것이다. 감정이 죽은 뒤 행동의 죽음이 온다. 아마, 이 말은 굳이 팬픽션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리라.

 

 

 

 

 

 

 

 

 

p.s. 으아.. 너무 바쁜데 이런 글을 쓰고 있다니.. 오늘 밤은 하얗게 새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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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4 16:50   좋아요 0 | URL
"머릿속에 이미 얘기가 결말까지 다 있다면 피곤하게 굳이 문자 형태로 써 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랑 싸우는 집필이라니, 생각 못 해 본 점인데, 설득력 있어요.ㅎ
말씀하신 여러 팬픽 중에 제네시스 큐 제일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

추천은 며칠 전에, 댓글은 지금.^^
그나저나 가연님도 글 좀 자주 쓰시면 좋겠네요. 날이 많이 추워져서 이젠 슬슬 무를 수 없이 겨울이려나 봅니다. 가을은 이제 내년에나..

가연 2012-12-29 01:42   좋아요 0 | URL
ㅎㅎ 제네시스 큐 재미있지요. 너무 추워서 죽는 줄 알았네요. 글은.. 시간이 없어서..
 

 

 

 

  레이 뭉크가 쓴 전기,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천재의 의무, 가 재출간 예정인 듯 하여 이렇게 글을 남긴다. 서재의 오른쪽에서 보이는 독자 북펀드에서 비트겐슈타인 평전이 눈에 띄길래 확인해보니 이전의 레이 뭉크가 쓴 책인 듯 하다. 그동안 구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는데, 이제 이렇게 재출간이 눈 앞에 있으니 기쁜 일이다. 레이 뭉크가 쓴 책은 바로 아래의 책인데, 이 책이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과는 달리 새로 출간 예정인 비트겐슈타인 평전은 한 권으로 출권 예정인 듯 하다. 나로서는 한 권을 더 선호하기에 더 기분 좋은 소식이다. 부디 잘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적어도 평전이라는 범주에서는 저 천재의 의무, 이상 가는 책은 없으리라. 레이 몽크는 다른 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오른쪽의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그것이다. 오른쪽의 책 또한 괜찮은 책인데, 여러 사료들을 많이 인용해서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독특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전쟁에 자원했다던가, 자신 몫의 유산을 자신의 누나에게 주면서 '재산은 독이다, 그렇다면 이왕 독에 물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는가' 와 같은 말을 한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도 그의 업적 앞에서는 그 빛이 바래진다. 저런 독특한 삶 이상으로 독특하고 독자적인 것은 그의 사상이다. 그의 책은 (그의 생전에 미출간된 저서들을 포함하면) 대략 예닐곱 권 정도 되는데, 그 책들은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다.

 

 

 

 

 

 

 

 

 

 

 

 

 

 

 

원래는 공학을 전공하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 흥미를 가지고 버트런드 러셀, 을 찾아간다. 처음에는 버트런드 러셀의 제자였지만, 어느 순간 그의 철학은 러셀을 압도하기에 이르고, 러셀은 항상 그와의 대화 끝에는 기진맥진하기를 거듭했다. 저 논리철학논고, 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출판사들은 출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러셀의 서문이 있으면 출판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하지만 러셀의 서문을 본 비트겐슈타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러셀도 그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서문과 내 글은 출판되지 않을 것이오.' 논리철학논고, 는 전쟁 중에 쓰여졌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기고 더이상 철학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은거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곧 사람들의 비판에 부딪히게 되고, 램지의 비판 등을 바탕으로 그는 새로운 생각에 접어들게 된다. 그 결과물은 청색책, 갈색책 등을 거쳐서 이윽고 철학 탐구, 로 완성된다. 하지만 끝내 그의 생전에 출간되지는 않았다. 마지막의 확실성에 관하여, 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우리 나라에서 논리철학논고는 몇 권으로 번역이 되어 나와있다. 동서문화사에서도 번역이 되어있고, 위의 책세상에서 나온 이영철 교수의 번역도 있는데, 양 쪽 다 개인적으로는 장단점이 있다고 본다. 논리철학논고에 한정해서 이야기하면 동서문화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것은 읽기가 좋다. 이 읽기가 좋다, 라는 말은 그 문장 그대로의 뜻이다.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뜻이다. 우리는 수동형 문장보다 능동형 문장에 더 익숙한데, 이 동서문화사판본은 최대한 능동형문장을 많이 사용하고, 덕분에 우리에게 더 잘 다가온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익숙한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영철 교수의 판본은 거기에 비하면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풍부한 주석도 저 동서문화사판본의 장점이다. 마지막의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에 관한 부록이 있는 것 또한 장점이다. 가격에 비하자면 좋은 번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읽기 좋다고 해서 꼭 그게 철학적으로 엄밀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동서문화사판본은 그 번역에 있어 약간이지만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aRb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판본은 자의적으로(출판 상의 오류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부의 문장기호와 글을 생략하여 그 문장의 뜻이 달라지게 만들었다. 비트겐슈타인의 개념 'aRb' 에 대한 번역 부분은 저 판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영철 교수가 번역한 논리철학논고가 빛을 발한다. 그의 책에서는 모든 개념이 잘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연구 목적으로 읽을 생각이라면 이영철 교수의 번역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단순히 어떤 내용이다, 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라면 동서문화사의 판본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한 쪽의 애매한 문장은 다른 쪽의 문장으로 보충되어지는 경우가 생기고 두 권 다 장단점이 있기에 둘 다 읽는 것도 괜찮다. 원문을 자유자재로 읽을 수 없는 한 그런 방법도 좋으나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양 쪽 책에서 동일한 개념을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첫 번째 문제이고, 두 번째 문제는 똑같은 단어라도 양 쪽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다른 인물들의 관계를 다룬 책들도 흥미롭다. 가장 왼쪽의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도 나쁘지 않은 책이지만, 비트겐슈타인과 포퍼 사이의 관계를 다룬 '비트겐슈타인은 왜?' 도 읽을만한다. 물론 저 비트겐슈타인은 왜, 는 가장 오른 쪽의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으로 개정되어 출간되었다. 적어도 저 가장 오른 쪽에 있는 기막힌 10분, 은 읽어보는 것이 좋다. 포퍼는 비트겐슈타인과 대립각을 세운 학자였는데, 그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부지깽이 사건, 이라는 일이 있었다. 포퍼와 말다툼을 하다가 흥분한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로 몇 번 바닥을 치고 나가버렸다던가. 이 상황에 대한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후에 여기에 대한 언급을 아예 하지 않았지만, 마치 잊어버린 것 처럼, 포퍼는 자신이 논쟁에서 승리했다고 여기고 몇 번 저서에서도 언급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기막힌 10분, 을 읽는다고 해서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각 주인공들의 성장과정을 최대한 따라가면서 이윽고 한 점에서 두 선이 교차되는 그런 형식을 취하며 그 극적인 구성은 독자들을 더욱 그들의 상황에 몰입하게 만든다.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사실 곤란할 것이다. 그의 열정과 광기에 따라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에. 그렇기에 말년의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좀 빈정거리기도 했다. 러셀 또한 대단한 철학적 업적을 남겼고, 다작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 스스로가 비트겐슈타인에 비하여 철학적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을 보고 철학에 대한 연구에서 손을 떼기도 하였고, 그의 비판을 (심지어 자신이 충분히 받아들이지도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수긍하고는 쓰던 저서를 접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무어에게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걱정마시죠, 당신들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아니깐.'

 

그러나 그 열정과 광기의 결과물은 논리철학논고로부터 시작되는 일련적 철학적 작업으로 나타났으며, 아직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가 끝난 뒤에는 '사다리를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물론 사다리를 치우기 전에는 사다리부터 놓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출간되는 비트겐슈타인 평전이 그 사다리를 놓는 그런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p.s. 이제 아인슈타인의 평전 'Subtle is the lord'가 번역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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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6 23:09   좋아요 0 | URL
레이 뭉크 전기 읽고 싶어지네요. 그 이상의 비트겐슈타인 독서는 저로선 무릴 것 같습니다.ㅎ 그나저나 가연님은 과학전공 및 그쪽 직업이신 걸로 아는데 언제 이렇게 깊이 읽으신 건가요? 아랫글 -루소 소개에 이어 놀랍기만 하군요!

가연 2012-11-08 01:55   좋아요 0 | URL
ㅎㅎ 전기가 잘 출간되었으면 좋겠는데.. ㅎㅎ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는 철학 탐구는 아직 잘 못 읽고 있는 상태라.. 깊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풋. 논리철학논고는.. 그 편린을 겨우 잡고 있는 상태인 것 같고.. 괜히 부끄러워지네요ㅎ 요즘은 거의 시간이 없네요, 잘 지내고 계세요?

2012-11-09 17:06   좋아요 0 | URL
저도 서재에 글 남길 시간이 거의 없어요. 네. 잘 지냅니다. 추위 오기 전의 가을을 최대한 즐기려는 날들이죠. 11월은 스산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괜찮은 시절임을 올해 실감하면서...^^

가연 2012-11-10 00:44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가요, 슬슬 요즘도 춥네요. 건강조심하세요.
 

 

 

 

  미리 말하자면 나는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이 글에는 분명 엄밀하지 않은 부분이 많을 것이다. 물론 기초적인 역학이나 일반물리학, 미적분(Calculus라 불리는 바로 그것)은 수강했었다. 하지만 모든 대학의 강좌가 그렇듯 나중에는 자신이 쓰게 될 분야만 중점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고, 그 외의 것들은 기억의 저편 어딘가에 묻어두게 된다. 그리고 특히나 물리학에서 역학이나 전자기학, 파동 등 일반물리학에서 다루는 영역은 고등학교때 이과를 택한 학생이라면 겹치는 부분도 분명 있기도 있기에 현대물리학의 성과를 상상하며 물리학을 수강한 사람들에게는 분명 실망감을 안겨줄 것이다. 물리학과가 아니었던 나도 실망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끝의 맛보기처럼 실린 입자물리학과 상대성이론 약간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물리학의 성과들, 양자역학과 같은, 을 이해하거나,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고전역학 부분을 알아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물리의 언어라고 불리는 수학에 대한 이해 및 공부도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만 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양자역학만 공부하겠다는 말은 사실은 어폐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마치 허공에 구조물을 짓겠다는 말과 동일하다. 실제로 물리학과에서는 양자역학을 학부에서는 3, 4학년에 걸쳐서 배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더 심화된 학문은 대학원을 거쳐서 본인이 스스로 공부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양자역학을 알기 위해서 고등학교때 배웠던 역학과, 심화된 전자기학, 미적분 방정식을 다시 공부하라는 것은 그냥 상대방보고 물리학과를 가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중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이제 더이상 뉴턴의 사과와 같은 것이 아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정도는 되어야 우리가 특이함과 매혹, 이해함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음과 같은 양가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그러니깐 나를 포함한, 양자역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어하는 대중들은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저런 수학적인 기초와 역학이나 전자기학적인 기초가 없으면 양자역학은 공부를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인가?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학문인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사실 그렇지 않다, 일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역학에 대한 기초가 있어야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학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물리적인 상상력과 직관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직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없다.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책에 최대한 비유를 많이 들게 된다. 물론 그들 자신도 그 비유가 엄밀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수학을 피해서 직관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리학적인 개념을 사회학적이나 인문학적인 개념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한 문제점이 나타난다. 물리학자들이 책에서 드는 비유는 옳은 것이 아니다. 물론 아예 그르다고도 할 수 없겠지만,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기에 쓰는 비유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그런 비유는 실제 과학자들이라면 당황스러워할 그런 개념의 연결을 가져오게 된다. 레닌의 경우가 그럴 것이다. 레닌이 그의 저서에서 '전자는 무진장' 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사실 그 표현은 옳지 않은 표현이다. 입자물리학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보고 레닌 당시의 어느 물리학자가 말하기를, 레닌과 자신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이념뿐만이 아니군요,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불확정성 원리를 인간의 지적 능력에 지워진 한계다, 와 같은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잘못된 관점이다. 불확정성 원리가 나타나는 이유가 빛, 광자가 전자에 부딪혀서 경로가 바뀐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관점이다. 여러 비유는 이런 식의 문제점을 낳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유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저렇게 엄밀한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물리학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호기심을 접을 수 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물리학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여담이지만 사실 순수과학으로 먹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물리학자가 아니면 물리학을 하지마! 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일테니 말이다. (이 말이 얼마나 횡포인지는 잘 알리라 믿는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우리 생명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닐 테니, 충분히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순수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을 굳이 수식들을 휘갈기며 내쫓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런 호기심, 그리고 의문이 축적되어 과학이 발달하는 토양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그 열정을 잃게 하지 않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양자역학에 관련된 몇 권의 책들을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한 번 소개해 본다. 물론 여기 있는 책들을 내가 모두 읽은 것은 아니다. 사실 후반부에 소개하는 책들은 전문 서적들이기 때문에 내가 공부했다면 그 사실이 더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1. 대중적 영역.

 

 

 

한 권으로 충분한 양자론.

 야심 만만하게 한 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만, 사실 한 권으로 충분할 리가 없다. 사실 이 책 한 권만 읽는다고 할지라도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흐름을 따라가는데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수식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다른 서술 방식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데, 역사적인 사건으로 따라가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충실하게 어떻게 막스 플랑크에서부터 양자론이 태동했는가, 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만한 부분은 데이비드 봄의 해석을 크게 중요시하여 책에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는 것인데, 사실 봄의 해석보다는 좀 더 입문서에 걸맞게 코펜하겐 해석을 따라서 서술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다시피 봄의 해석과 코펜하겐 해석 둘 모두 세계를 그리는데 문제가 없다면 한 쪽의 해석만 무시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다.

 

 

 

양자역학의 법칙.

이 책은 매우 추천할만한 책이다. 저자 그룹인 히포패밀리, 는 사실 잘 모르는 그룹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는 자신들이 어떤 그룹인지 조금 소개하고 있기는 한데, 그들 말에 따르면 언어를 연구하는 그룹이라고 한다. 원래 일본에서 시작된 그룹인긴 하지만 한국에도 지부가 있다고 하던가. 대략 그들의 교육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많이 축약하자면) 테이프를 많이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교육 방법은 그들이 다른 영역을 연구할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그 결과물이 파동의 법칙, 이라는 책과 이 양자역학의 법칙, 이라는 책이다. 책은 사실 가볍게 편집된 부분이 있다. 군데 군데 만화캐릭터를 그려넣고, 글씨 크기도 매우 큼직큼직하다. 물론 반드시 조그만 글씨에 여백없이 종이를 가득 채워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런 여백없이 종이를 가득 채운 문자의 향연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왜 이렇게 가볍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경우도 분명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편집과는 달리 결코 다루고 있는 내용은 가볍지 않다. 흑체 복사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막스 플랑크,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이끌어내고, 그 후에 드브로이를 거쳐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수식을 이끌어내었는지 우리가 직접 펜을 들고 유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여기에 있는 내용을 유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나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안다, 등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여기서 유도하도록 되어있는 파동방정식은 가장 간단한 경우를 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문교양서와 대중의 눈높이, 라는 두 면을 고려했을 때 어쩔 수 없는 타협이라고 본다.) 그들의 말대로, 물리는 그 영역의 언어인 수학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명료할 것이다. 어설픈 비유가 아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특히나 고교 학력이 매우 높은 편인 우리나라라면 이과를 졸업했다면 무리없이 따라갈 것이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수학을 가지고 말이다.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이 책은 권하는 책이다. 아래에 소개하겠지만,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라는 속칭 '빨간 책' 이라는 것이 있다. 그 책은 물리학의 전반적인 영역을 강의한 책인데, 그 책에서 그나마 쉬운 부분을 골라내에 이렇게 추려낸 것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이다. 파인만은 말하기를, 우리 문명이 만약에 멸망해서, 다른 모든 지식을 잃게 되는 상황을 맞이 했을 때, 단 하나만 알고 있다면 모든 지식을 유추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단 하나, 에 해당하는 것은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라는 명제이다. 얼핏 보면 과연 그럴까, 그런 생각이 들지만, 파인만은 자신의 강의록과 그 강의록에서 쉬운 내용을 추린 이 책을 통해서 그에 대한 설명을 펼쳐나간다. 물론 파인만의 기행들, 그리고 그의 생각의 자유로움만을 즐기고 싶다면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양자역학으로, 더 나아가 물리 세계로 한 발자국 딛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숨겨진 우주.

개인적으로 호평하는 책이다. 입자물리학의 입장에서 최신물리학의 성과들을 설명하고 있는 책인데, 물론 '최신' 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번역된 것이 2008년으로 알고 있으니. 그러나 기존의 물리학에서 크게 바뀐 부분은 2012년 현재 아직은 없다. (힉스 보존의 발견을 들 수 있겠지만, 기존의 입자모형들이 힉스 보존의 존재를 가정 하에 이루어진 부분들이라 크게 개변은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은 큰 효용을 가진다. 수많은 이론들을 좋은 비유를 통해서 잘 설명하고 있으며, 이 책의 내용만 어느 정도 이해하더라도 입자물리학을 다룬 기사를 읽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특히 최근 연구 성과, 힉스 보존의 발견에 대해서 2008년 정도의 시기에서는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잘 알아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뒤의 저자 본인의 연구 결과를 설명하는 페이지들은 거의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겠지.

 

 

 

현대물리학.

이 책도 괜찮은 책이다. 아인슈타인 이래로 시공간의 곡률을 결정하는 것이 중력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중력이라는 녀석은 실제로는 입자물리학에서는 좀 소외되는 녀석이다. 표준모형에서 다루는 힘은 사실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의 세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중력, 을 다루는 이 책은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닌가,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태초의 우주는 빅뱅 가설에 따르면 매우 크기가 작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크기가 작은 (플랑크 길이 이하의) 시점에서 네 힘은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진정한 모든 것의 이론은 플랑크 길이의 크기 이하에서 융합되었으리라고 짐작되는 네 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이론이다.) 다시 따져본다면, 우주의 비밀을 탐구한다는 이 책에사 중력을 살핀다는 이유로 다른 힘들을 살피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입자들에 대한 설명도 매우 충실하다.

 

 

 

얽힘의 시대.

양자 역학을 대중이 접하는 방식으로, 위의 책들을 통해 과학적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접하는 길도 있겠지만, 이 얽힘의 시대, 처럼 역사적인 측면을 따라가는 방법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양자물리학사를 인물을 따라서 조명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물론 흐름 자체는 앞에 소개한 책들과 동일하다. 막스 플랑크에서 아인슈타인 등으로 흐르는 그 흐름 말이다. 굳이 이 책에서 특기할만하게 다루고 있는 분야가 있다면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을 비판한 데이비드 봄을 다룬 분야일텐데, 사실 제일 처음 소개한 책에서도 봄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의 책들을 읽는다면 굳이 우리는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대화' 에 있다. 우리는 한 문단으로 길게 쓰인 글보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대화에 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더 이해가 빨라질 수 있다. 이 책을 함께 읽는다면 양자역학에 있어서 분명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의 최전선.

이 책은 실험물리학자들에 대한 책인데, 꼭 실험물리에만 국한되지 않고 물리학에 대한 흥미를 계속 북돋아주는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일종의 모험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양자역학에 관련된 부분, 입자물리에 대한 부분만을 살펴보고 싶다면 뒤의 부록부분만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실험물리학자들이 우주의 비밀들을 풀어나가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할까? 이 책의 주인공들은 바이칼 호수든, 남극 대륙이든 겁없이 뛰어들어간다. 현대물리의 최전선에 서 있는 LHC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사실 실험물리분야는 쉬운 분야가 아니다. 이론물리 또한 쉬운 분야는 아니지만 실험물리의 어려움은 그것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예산' 과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강의에서 우주 탐사에 대한 비용을 늘려달라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막상 돈을 들인다고 해서 바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니 답답할 뿐이다. 

 

 

 

2. 대중적 영역과 전문적 영역의 사이.

 

 

 

파인만의 QED.

 사실 이 책은 어려운 편이다. 파인만의 이름이 있다고 해서 모든 책들이 쉽지는 않다. 앞의 책들을 읽었다고 해서 이 책을 쉽게 이해할 수 는 없다. 파인만은 일반인도 양자전기동역학, 을 이해할 수 있어 라는 마음을 가지고 강의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파인만 본인이 자인했다시피, 강의를 하면 할 수록 사람들이 빠져나갔었다. 이 책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앞부분은 겨우 읽을 수 있겠지만 더 읽다가는 머리가 아파질 것이다. 물론 다 읽는다면 결론적으로 도움은 될테지만, 아무래도 일반인들을 상대로 자신이 이뤄낸 재규격화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파인만의 양자전기동역학, 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한다고 해도 이 책은 그리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영역과 대중적인 영역의 사이에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구매해서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그런 독자라면 차라리 아래에 소개할 파인만의 물리학, 을 구입할테지만.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

감히 말하건데 이 책은 분명 어느 정도 읽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솔직히 당장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목은 매우 흥미를 유발할만한 책이지만, 책 중간중간에 나오는 별다른 설명이 없는 수식들은 그야말로 의욕을 꺾게 만든다. 원래 수식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나조차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들 정도니 수식에 거부감까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은 양자역학에의 길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책 내용은 앞서 소개한 '얽힘의 시대' 를 크게 심화시켰다고 여겨진다. 그러니깐 일반 독자 수준에서는 앞서 소개한 얽힘의 시대, 만 읽어도 충분할 것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어떻게 물리학과 철학을 합쳐보는가, 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책들이 철학의 입장에서 물리학을 합쳐보려고 했다면, 이는 물리학의 입장에서 철학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하는 시도이다. 그렇기에 사실 물리학쪽에서 공부를 해온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실체에 이르는 길.

이 책은 매우 뛰어난 책이다. 단순히 양자역학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 전반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구입하는 것이 좋다. (단순히 읽기 위해서라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 것이 좋겠지만, 책을 완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구입하는 수 밖에 없다.)  물론 내용은 쉽지 않은 수준이다. 저자는 로저 펜로즈인데, 책을 읽어보면 정말 저자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 가 군데군데 잘 드러난다. 앞서 이 책을 구입해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이 책을 완전히 즐기기 위해서, 라고 말했는데, 분명 그 말대로이다. 이 책은 연습장이 필요하다. 한 페이지에 많게는 서너개, 적게는 한개 정도 우리가 직접 증명해보아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물론 꼭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뒤의 로저 펜로즈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깊은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펜을 들고 직접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앞서 소개한 양자역학의 모험, 의 레벨업 수준의 책이랄까. 그렇게 읽으면 언제 다 읽게 될 지 모르겠다고? 그렇다. 사실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 모두 제대로 읽으면 언제 다 읽게 될지 모르는 책들 뿐이다.

 

 

 

3. 전문적 영역.

 

 

 

들어가기 전에 먼저 변명을 하자면, 여기서 소개하는 책들은 내가 직접 조금이라도 본 책들도 있지만, 내가 이야기만 들은 책들도 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은 결과적으로 '물리학과에서는 양자역학을 배울 때 무엇으로 배우나요?' 에 대한 답이 되어버릴 것 같지만, (심지어 나는 물리학 전공도 아니다.) 그럼에도 혹시나 위의 전문적 영역과 대중적 영역의 사이를 돌파해온 독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급해둔다. 물론 수학적 부분은 독자적으로 공부해야 할 것이다.

 

 

 

양자역학.

그리피스의 양자역학이다. 앞부분에는(솔직히 앞부분밖에 읽지 않았다.) 오타가 군데군데 보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학부 수준에서는 상당히 좋은 책으로 알고 있고, 부교재로도 쓰고 있다. 물론 물리학과 전공자가 아닌 이상 제일 앞부분과 제일 뒷부분만 읽어도 충분할 것이다. 거기서 양자역학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리피스,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는 이야기한다. 실제적인 수식을 다루지 않는 이상 그런 이야기들은 사실 크게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말이다. 실제로 그의 말이 그르지는 않다고 본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수학은 물리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라고 말이다.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이 책에서는 바로 어떻게 이 수학을 가지고 물리를 이해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여기서 늘어놓는다, 라는 말은 연습문제, 그리고 풀이, 라는 의미와 비슷하다.)

 

 

 

양자역학.

 대부분의 대학 교재들은 모두 외국인들이 쓴 교재들이 많다. 그리고 번역도 안된 원서를 직접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를 우리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도리어 번역을 하니 더 이해가 안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같은 주제에 대해서 쓴 책이 있다면 전체적인 학문의 흐름 전개나 문맥 이해에 매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고백하자면 이 책이 그런 측면에서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수식을 전개하는데 무슨 언어의 장벽이 있겠는가. 내용에 대해서 내가 무엇이라고 평할 처지는 못되지만,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양자 역학이 더 쉬워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겠다. 이 책에는 정말 많은 수식이 나온다.. 그 수식의 정교함은 분명 감탄할 부분이겠지만, 아무래도 한숨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3.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파인만은 자신의 업적 중 이 물리학 강의, 1~3권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이 책은 파인만이 강의한 녹취록을 가지고 책으로 편집한 것인데, 칼텍 1, 2학년 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로 알고 있다. 하지만 1, 2학년 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라고 해서 책 내용이 쉬운 것이 아니다. 책머리에도 나오지만 처음에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가면 갈수록 학생들이 아닌 교수들이 강의를 들으러 왔다고 하던가. 1권은 고전역학, 2권은 전자기학이고 남은 한 권이 바로 양자역학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은 그나마 별로 수식도 없고, 글씨도 시원시원한 것이 읽기도 편한데, 분명 읽는 재미도 있고 글에서 저자가 느껴지지만 (번역을 신경써서 했는지 유머스러움이 살아있다.) 읽다보면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한 두 부분이 아닐 것이다. 마치 파인만이 진짜 칠판 앞에 서서 '후훗, 어때? 나의 멋진 물리학 솜씨가?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어서 답답해질 지경이다. 애초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되니 말이다. 그럴때에는 다시 처음부터 막혔던 부분까지 읽어나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당장은 할 이야기가 없다.

 

 

 

 

 

 

 

 

 

 

 

 

 

 

 

 

 

 

 

 

 

 

 

 

 

 

 

 

 

 

 

 

 

 

시계방향으로부터 Liboff, shankar, dirac, gasiorowicz인데, dirac의 양자물리학 교재는 장난 아니게 어렵다, 는 말을 들었고, 마지막의 Gasiorowicz는 대학 학부에서 주교재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shankar를 대학원에서 사용한다던가..

 

 

 

이제 이 글을 맺을 때가 되었다. 먼저 밝혀두자면, 굳이 양자역학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 아래쪽의 전문적인 교재들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양자역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개념을 가지고 싶다면, 내가 제일 처음 소개한 한 권으로 충분한 양자론, 양자역학의 모험,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정도만 읽으면 된다. 그리고 과학교양서 아무 책이나 하나를 택해서 양자역학 부분만 읽으면 된다. 대부분이 거의 흡사한 말을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숨겨진 우주, 저 책을 추천하지만 사람마다 맞는 책이 따로 있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물론 효율을 따지자면 차라리 물리학과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더 효율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좀 잔인한 말이기도 하다. 사람은 효율만 따지며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할 수도 없을테고 말이다. 각자 삶이라는 것이 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호기심을 누를 수 없다면, 효율을 무시하고서라도 혼자서 무엇이든 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그야말로 양자역학으로의 초대, 이다. 여기에 소개한 책들을, 그리고 소개하지 않은 책들과 더불어 읽어나간다면 그 특이한 세계에서 우리는 흥미와 이상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점차 부딪히게 되는 것은 재능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내가 이해한 것이 정말로 이해한 것인가? 그야말로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다, 처럼 느껴지는 문장들이나 수식들을 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폴 디랙이 오펜하이머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시와 물리학이 함께 설 수 있는가? 시는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고, 물리학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와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물리학이 아니라 수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폴 디랙의 저 말은 우리가 듣기에는 사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수도 있다. 차라리 시가 더 이해가 되지 않는가? 어떻게 길게 늘어진 수식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양 옆으로 눈을 돌리면 그런 생각이 더욱 심해진다. 특히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한 번에 이해하는 사람이라도 만날 경우에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굳이 자신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모든 물리학적인 발전을 그런 사람들에게 떠맡기는게 좋지 않을까?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나 또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굳이 물리학이 아니라 어떤 철학적 개념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남은 일생동안 그들의 사상과 그들의 철학만 졸졸 따라다니며 공부할 거라면,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내세운 것이 실제로는 그들의 사상을 곡해한 거라면, 그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의 사상을 모두 접한 뒤 자신만의 이론을 세울 거라고? 애초에 그들의 사상을 다 이해할 수는 있을까? 설령 다 이해한다고 할 지라도, 그런 경우에는 제 2의 비트겐슈타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나는, 나는 무엇때문에 이런 것을 하는 것일까? 흥미 때문에? 재미있으니까? 그것 또한 답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런 흥미와 재미 뿐이라면 영영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거기서 만족하겠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고 싶다면 자신을 죽일 듯 괴롭혀야만 한다.

 

나는 흥미와 재미에 만족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이상 더 나아가지도 못한 채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마음속으로의 스승을 아리스토텔레스, 로 생각했을때부터 늘 스스로를 괴롭혀온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사람이다. 나 또한 그의 뒤를 쫓아 많은 분야들을 보고 있지만, 각 분야들에서 더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앞서 말한 물음들이 나를 붙잡는다. 내가 이해한 것이 정말로 이해가 된건가? 나는 한 발자국 더 딛을 수 있을까?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할 때마다 스스로의 자신감은 꺾여만 간다. 어느 분야에서든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혹은 나보다 더 잘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굳이 내가 그런 분야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설령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분야가 내가 좋아하는 부분과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내가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잘 할 수 있기는 한 것인가? 나는 굳이 파고들자면, '흥미로우니까.' 정도의 이야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열등감으로 괴롭히게 된다.

 

이번에 노벨 생리학상에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존 거든, 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70이 훌쩍 넘은 나이의 그가 아직도 소중하게 가지고 있는 종이가 있다. 그 종이는 상장이나 표창장과 같은 것이 아닌 성적표이다. 성적표도 그냥 성적표가 아닌, 250명 중에 250등을 했다는, 꼴찌를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성적표라고 한다. 그를 가르친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적어도 과학자가 현재로서는 되기가 어렵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 성적표는 그 자체로 어쩌면 존 거든, 의 마음에 어느 누구의 말보다도, 그의 선생의 말보다도 더 깊게 상처를 새긴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꼴찌를 했다는 성적표는  '너는 과학자가 될 수 없어'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는 아마 스스로에게 오랫동안 물었을 것이다. '나는 과연 재능이 없을까?' 존 거든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 내 가슴을 찌른다. 그가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때 그는 저 성적표를 꺼내보며,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의 말이 얼마나 옳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자신은 정말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윽고 저 성적표는 오랜 시간이 지나 누렇게 빛이 바래었지만, 그 열등감, 그리고 재능에 대한 한탄은 그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있을 것이다. 노벨상을 받은 지금은 조금이나마 풀렸을까? 그는 '흥미로 시작했던' 분야를 '잘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을까. 그 또한 내가 저렇게 번민하는 것 처럼, '나보다 더 동물생식분야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국에 그는 보여준 거다. 자기 자신만의 가치를. 내가 아니면 이 분야에서 '이 시간대의'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는 자신의 필요성을.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어느 과학고 학생이 질문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의 IQ가 낮다며, 같은 급우의 IQ가 160이 넘는데, 그러면 그런 급우를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럴바에야 지금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그런 질문을 보았다. 사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많이 해왔고, 아무리 이런 저런 변명들, IQ는 두뇌의 일면적인 부분만 측정할 수 있을 뿐이다, 파인만의 IQ가 표준편차 16으로 125다, IQ높다고 다 노벨상 타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두뇌는 유동지능과.. 등등의 이야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내심으로는 스스로의 재능이 정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많이 가졌다. IQ테스트는 어떤 패턴Pattern을 측정하는 테스트이다. 그렇기에 뇌의 능력의 일부분만 측정한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겠지만, 주위를 살펴보라, 학문 중에 패턴이 쓰이지 않는 곳이 있기는 한가? 적어도 과학 분야에서는 이 패턴이 어떤 지식을 밝혀내는데 있어 큰 무기가 된다. 가장 단순한 도구인 대칭성을 보라, 대칭성 또한 사실은 패턴이 아닌가. 그래서 혹자는 이해한다는 말 자체가 어떤 패턴을 인지한다, 라는 말이다, 라고 말하기조차 한다. 그렇기에 아직도 나는 번민할 뿐이다.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세계' 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저 우주의 성간을 채우는 미지의 물질들의 후보 입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진실로 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저 기계처럼 받아들이고 그대로 출력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 없다. 나는 새로운 패턴을 인지할 수 있는가? 하지만 번민을 하면서도 저 존 거든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그리고 그런 번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명감, 을 가져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내가 아니면 안될 거라고. 어쩌면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떤 사상의 진보에 1mm라도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 사명감은, 어쩌면 명예욕으로도 드러날 것이고, 흥미 수준에도 그칠 것이겠지만, 끝끝내 마음 속에 품는다면, 이윽고 진주처럼 순수한 의지가 될 것이고, 이윽고 성과와 동시에 그대를 광기로 몰아갈 것이고, 나중에는 그대를 태워 재 하나 남지 않게 할 것이다. 혹은 그 성과가 오랜 시간이 지나 나타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대가, 내가 바란 것이기에 주저함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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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10-15 14:23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가연 2012-10-18 00:31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2012-10-16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8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2-10-19 21:02   좋아요 0 | URL
소개했었던 양자 불가사의, 라는 책도 좋은 책..입니다..

테레사 2012-10-30 10:11   좋아요 0 | URL
와우!!! 놀랍네요...저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냥 물리학이 좋아서 이런 저런 책을 사 읽는 편인데...사실 읽고 나면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모르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맞는 듯. 읽어도 참 어려운 분야에요.추천하신 책은 제가 읽거나 읽으려고 사 둔 책이라,더욱 기분이 좋네요.. ..소개의 글도 감사합니다^^

가연 2012-11-04 16:3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답이 많이 늦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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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10월에 쓰여져야 할 글이지만 10월은 너무나 바쁜 달이기에 미리 이렇게 글을 남긴다.

 

 

 

얽힘의 시대.

이 책은 9월 신간 중 정말 최고의 책이다. 서점에서 어떤 신간이 나왔나, 그 내용은 무엇인가, 얼핏 살펴보고 지나가려던 나의 발을 붙잡아 한 구석에 주저앉히고, 끝내 마지막장까지 읽게 만든 책이다. 다시 말하지만 9월에 출간 된 책들 중 가장 뛰어나리라고 본다. 물론 이런 표현은 주관적이다. 또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을 다른 사람이 그대로 느끼리라고는 생각못하겠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어렵기로만 따진다면 아마 레너드 서스킨드의 블랙홀, 과 같은 책이 더 어려울 것이고, 동일한 주제를 다룬 책들 중에서는 일전에 출간된 양자역학의 철학과 역사, 라는 책이 훨씬 심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과학에 관심이 있는가, 양자역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가, 와 같은. 하지만 이 책은 한 가지 지점에서 다른 양자역학을 다룬 책들과 차별점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대화의 재구성' 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사이의, 보어와 파울리 등 양자 역학의 기초를 다지며 초창기를 빛냈던 물리학자들의 서간과 실제 있었던 대화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저자는 이 책이 첫 책으로 보여지는데, 첫 책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재구성 능력을 보인다. 책을 읽고 나면 물리학자들이 서로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라서 울려올 정도로 말이다. 특히나 고독한 방랑자 아인슈타인, 교황 보어 등과 같이, 실제 사실에 근거하여 물리학자들의 이미지를 잘 그려내며 그들 사이의 치열한 논쟁을 그려내고 있다. 너무 전문적인 내용만 다루면 독자들의 흥미를 잃는다. 이 책은 사적인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그려낸다. 이단의 물리학자, 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는 데이비드 봄에 대하여 한 장을 할애하였다는 것도 특기할만 하다. 다만 단점이라면 너무 보어를 악당처럼 그려낸 점인데, 음.. 보어가 정말 그런지는 나로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제목인 얽힘Entanglement은 한 싱글렛Siglet상태, 스핀이 반대를 향하는 두 양자쌍, 에 있는 두 양자를 따로 떼어놓았을때 한 양자에 가해지는 조작에 따라 다른 양자의 상태가 정해지는 양상을 뜻하는 용어이다. 마치 빛보다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 논란이 되어왔고, 논란이 되는 문제이다. 물론 해석에 따라 빛보다 빠르게 '의미있는' 정보가 전달되지는 않는다, 라고 되어 상대성의 원리를 위배하지는 않는다.

 

 

 

양자 불가사의

 위 책과 더불어 이 책도 함께 읽으면 매우 좋은 책이다. 양자역학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차지하는 위상은 좀 특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막스 플랑크의 뒤를 이어 광양자론으로 양자를 처음으로 그 통찰력으로 떠올린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문을 활짝 연 사람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반대했다, 라는 말이 많이 알려져있다. 유명한 말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라고 했던가, 이는 보어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이 한 말로 양자역학에 대한 그의 반감을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사람들에게는 알려져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도대체 그는 왜 양자역학에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썼을까? 보통 반감이 있다면 그냥 무시하는 쪽을 택하지 않을까? 왜 EPR역설과 같은 논문을 쓰면서 그토록 양자역학을 신경썼을까? 아인슈타인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정작 상대성 이론에 신경 쓴 것 보다 양자역학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였었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그렇다.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역학이라는 말을 떠올릴때 가장 먼저 드는 것은 뉴턴의 운동의 법칙들이다. 뉴턴은 자신의 이론이 현실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지우지 않았다. 이를 두고 우리가 역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역학은 현실을 잘 그려내고 설명해낸다. 하지만 당시 아인슈타인이 반감을 드러내고 역설을 찾아내려고 했던 양자역학은 '역학' 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너머의 진리를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현실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이 책은 그런 그와 함께 양자역학에 대한 탐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천재의 탄생.

천재들은 어떤 창조력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 어떤 창조력을 가지고 있으면 천재가 될 수 있을까? 후자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동안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그렇기에 천재, 라는 인물들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왔었기도 하다. 이 책도 그런 류의 책 들 중 하나이다. 먼저 천재들의 창조성의 요소를 밝히고 각 인물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보이고 있는데,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그의 업적과 자라온 환경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의 창조성의 요인을 토론과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성격에서 가져온다. 아마 다른 인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윈의 경우에는 토론과 끈기가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진화론을 성숙시킬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끈기가 말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과연 이렇게 다루어질 만큼 천재성을 지니고 있는가, 라는 의문에 이르게 되면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예술과 과학의 도약, 이라는 부제가 붙은 2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야 정말 뛰어난 천재성을 보여주었지만..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보자. 그 또한 뛰어난 천재이지만 인류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라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그는 말하자면, 찰스 벤 도렌의 지식의 역사, 에서 잠깐 표현을 빌리자면, 실패한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정말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싶어했지만, 끝끝내 미완으로 남긴. 예술사가 최후의 만찬 이전과 최후의 만찬 이후로 나눌 수 있는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혹시 미리 만들어둔 틀에 맞추기 위해서 인물들을 고른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에 이 책은 답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매혹시킬 것이다.

 

 

 

칸트 미학.

 위에서 말한 책처럼 인간의 의식에 어떤 도약이 있다면, 그 도약을 소개하는데 칸트를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칸트는 그의 철학에 대한 지대한 영향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리고 그의 세 권의 책으로도 유명하지만, 미학이론에서도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미학에 대한 그의 관점을 잘 풀이해주는 책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쉬운 책은 아닐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은 쉽지 않았기에 많은 오해를 낳았고, 결국 칸트 그 자신으로 하여금 형이상학 서설, 을 쓰게 만들었다. 실천이성비판, 과 판단력비판 또한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그런데 칸트의 미학이 시작하는 지점은 바로 판단력비판, 이다. 무엇때문에 어떤 대상이 추하고 아름다운 것을 알 수 있을까, 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 이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판단에 의식을 모으면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생각은 넓게 뻗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지점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하바라따.

사실 마하바라타(여기서는 마하바라따라고 번역되었지만 나 스스로는 마하바라타, 가 더 익숙하기에 이렇게 쓴다)를 추천하려면 바가바드 기타가 있는 6장을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을 테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지금껏 번역된 5권까지에는 6장이 실려있지 않다. 내 기억으로는 3장까지만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던데.. 아마 차분히 나오리라 여기진다. 마하바라타, 는 이 서재에서도 두 세번 언급했지만 라마야나와 함께 인도의 2대 서사시 중 하나이다. 내부에는 사상의 정수, 라고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가 실려있는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물론 후대의 연구를 통해서 바가바드 기타는 아마 덧붙혀진 장이 아닐까, 생각되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인도인들의 상상력과 의식, 그리고 우리가 인도에서 볼 수 있었던 카스트같은 부조리의 그 근원적 뿌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이 좋다. 물론 이 책은 인도인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신화들이 그렇든 인간 본성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시간동안 갈고 벼려온 성찰이 담겨져있다.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마하바라타의 악당 세력에 대한 이야기인데, 판다바 형제와 카우라바 형제의 싸움을 다루는 마하바라타에서 악역은 카우라바 형제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야말로 주인공들보다 더 주인공다운 모습들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말하는 선악의 구분은 신에게 바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마하바라타를 읽던 사람들이 주인공들을 따라서 읽어내려갔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리어 악역에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이 되리라 생각된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스스로가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 아무래도 하는 일이 과학계통이다보니 훨씬 익숙하다. 사실 내가 있는 분야는 생물학 계통이지만.. 솔직히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맨날 바쁘고 바쁜 일이다.

이제 신간평가단도 끝나가는 것 같다. 아마 나로서는 이번이 마지막 신간평가단 활동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좀 묘해진다. 딱 잘라서 이야기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번 이후에 연속해서 바로 또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쯤해서 과학책이 하나쯤 선정되면 좋겠지만.. 뭐, 언제나 그렇듯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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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29 22:06   좋아요 0 | URL
가연님의 신간소개에서 과학책을 보고 놀랐던게 생각나네요. 나는 존재유무조차 알지 못했던 책을 이사람은 어떻게 읽고싶어하기까지 할까? 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되게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을 쓸거란 편견을 가졌는데 글이 꽤 유려해서 또 감성적인 글도 보여서 감탄했었어요. 우와- 이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지? 하고 말이지요. 지금도 초속 5센티미터, 그 페이퍼가 생각나요.

가연 2012-10-01 23:43   좋아요 0 | URL
ㅎㅎ 부끄럽네요. 사실 초속 5센티미터 리뷰는 비밀의 리뷰라..ㅎㅎ 여기서 이렇게 언급하시면 부끄럽습니다?ㅎㅎ 사실 옛날에는.. 여기서 활동하기 전엔 감성적인 글을 많이 썼는데.. 요즘은 왠만하면 그런 글들을 피하려고..ㅎ 감정을 어디까지 드러내야 할까, 그런 생각도 들고.. 뭐, 곧 다가올 20000명 기념글은 좀 감정적인 글로 해볼까요, 풋.

2012-10-06 09:10   좋아요 0 | URL
초속 5쎈티미터 리뷰 숨기셨군요. 담에 한 번 더 읽어야지. 했었는데... 20000명 기념글은 숨기지 마세요~^^

가연 2012-10-06 18:37   좋아요 0 | URL
안숨겼어요ㅎㅎ 원래 제가 글은 잘 안숨깁니다, 풋. 아예 삭제를.... 선호하는 편이라...ㅋㅋ 아, 그렇다고 그 리뷰를 삭제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구.. ㅎㅎ 그 글을 보셨군요, 아하하..
 

 

 

 

  제목인 Saeculum Aureum(황금의 시대)는 오현제, 다섯 명의 현명한 군주(five good emperors)가 로마를 다스린 시대를 뜻한다. 로마는 제정으로 변모된 뒤에 여러 위기를 겪었고,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만큼 벼랑 끝에 몰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딛고 다섯 명의 군주가 차례로 나타나 로마를 최전성기로 이끌었다. 그 군주들은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일컫는데, 로마제국 쇠망사, 를 지은 에드워드 기번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오현제 시대(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로마의 쇠망의 불씨를 품게 된 시대이기도 했다. 이 글의 목적은 다섯 명의 왕에 대해서 사료를 모으고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데 있으며, 각 황제에 대하여 개인적인 평가는 내리지 않을 생각이다. 이건 여담인데 사실 오현제에 대한 책이나 자료가 너무 없었다. 특히 왕조의 시작인 네르바, 그리고 자비로운 안토니누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쓰기를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그래도 조금 끄적여보련다.

 

 

 

1. 배경.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첫 왕조, 율리우스-클라디우스 왕조부터 시작된 로마제국은 칼리굴라, 네로 등과 같은 폭군을 연달아 배출함으로써 삐걱거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황제들이 모두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저 왕조에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속하는데, 아우구스투스의 다음 제위를 계승한 티베리우스는 치세 기간 중 실적은 좋았지만 로마 원로원과의 관계가 최악이었고, 클라우디우스는 건실하기만 했을 뿐 앞서 칼리굴라가 야기한 혼란을 수습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황제라는 직업은 매우 특이하여 너무 건실하기만 하면 또 곤란하다. 게다가 클라우디우스는 나약하기까지 했으니 더 힘들었을 것이다. 보면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4명 중 3명이(아우구스투스를 제외하면) 모두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황제들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을 반쯤 속여가며 이룩해낸 제정이 그 시작부터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클라우디우스가 그나마 온화하고 괜찮은 황제였지만 그를 이은 것은 네로였다. 왼쪽의 책,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는 로마 초기 제정 시대의 사료를 모아서 소설로 재구성한 역작이다. 물론 어느 정도 야사를 참조한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네로로 이어지는 혼란의 과정,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충돌에서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망가뜨리는가, 등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 책의 내용을 완전히 진실로 믿으면 또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네로 이후에 첫 왕조는 끊어지게 되고, 로마 제국은 내란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 내란을 종식시킨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였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시작되게 된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은 상당히 뛰어난 황제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왕조에서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로마인의 삶이 이어졌다. 오른쪽의 책은 고대 로마인의 24시간, 이라는 책인데, 음.. 오른쪽의 책에서 로마의 공중화장실을 소개하면서의 소변을 수거하는데 세금을 물렸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사실 너무 예전에 읽어서 내용이 확실하지가 않다.)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치세때 일어난 일이다. 그것으로 판단한다면 저 책에서 그려지는 로마의 하루는 대략 이 왕조(플라비우스 왕조)에서 아래에 다룰 오현제 시대의 왕조 정도까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있던 플라비우스 왕조도 그 날개를 도미티아누스 황제때문에 접게 된다. 황제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상상해보면, 우리는 아무나 가볍게 처형하고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정치에서 그런 행위를 하면 꼭 역풍을 맞게 된다. 특히나 이 왕조까지만 하여도 황제의 권력이 완전히 반석 위에 올려지지 않은(아우구스투스의 이원집정제 ; 황제와 원로원이 권력을 나눠가지는, 때문에 황제 자신의 권력은 공고하지는 않았다.) 상태였기에 원로원의 힘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황제의 모습처럼 도미티아누스가 자신을 위해서 권력을 마구 남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원로원을 자극했고 결국 도미티아누스는 폭군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암살당하고 만다. 로마제국에는 다시금 내란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2. 네르바.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은 그들 나름대로 정국을 장악하기 위하여 당시 노령(70세)인 네르바를 황제의 자리에 앉힌다. 황제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황제를 왕위에 올리게 된다면 피의 숙청이 다시금 닥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권력은 원로원과 군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황제는 양 쪽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껏 황제는 군의 힘을 바탕으로 왕위에 올랐고(군이 없다면 내란에서 승리하기란 불가능하다.) 원로원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때 원로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네르바였다. 네르바는 나이도 많았고 자녀도 없었다. 네르바는 제위에 오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전에 티베리우스 치하에서 공직생활을 했던 그로서는 황제위가 비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로마에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제위 기간 동안 원로원들을 절대 처벌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으며 그것은 오현제 시대 전체를 통틀어 계속 지속된다. 사실 그가 오현제의 시작으로 꼽히긴 하지만 제위에 있었던 기간은 매우 짧았고, 설령 어떤 웅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뜻을 펼치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원로원의 뜻에 따라, 전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잘못 처리한 부분들을 되돌리는 것 뿐이었다. 그가 한 정책으로는 농지개혁 정책 정도가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은 네르바 포럼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네르바가 오현제에 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후계자를 잘 지명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후계자를 지명한 것도 네르바의 뜻과는 어쩌면 거리가 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군과는 사이가 좋았다. 비록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기록 말살형(생전에 이룬 업적들을 모두 기록에서 지워버리는)에 처했지만 근위대와 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네르바를 유폐시키고는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을 잡아 복수를 하라고 요구하였고, 네르바는 위기에 빠졌다. 결국 네르바는 당시 군공이 높았던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지명하기에 이른다. 트라야누스를 지명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그는 원로원과 군 모두에게서 환영을 받을만한 인물이었고, 로마는 다시금 혼돈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양자계승을 한 것 외에는 네르바가 제위에서 업적을 이룬 것은 사실 없다시피 했고, 요즘의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어쩌면 네르바는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은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의 제위 기간이 길지 않은 것이 도리어 다행이다, 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하지만 네르바 황제가 선량한 황제였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왼쪽의 데릭 손더스가 편집한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는 네르바의 선량함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네르바 시대에 살았던 율리우스 아티코스, 라는 사람은 가문이 몰락했었지만, 운이 좋게도 자신의 낡은 집 침대 밑에서 거액의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그 보물은 황제의 몫으로 넘어가는게 그 시대에서는 일반적이었으나, 당시의 황제였던 네르바는 공명정대하게도 조금도 받지 않고 보물 전체를 율리우스 아티코스의 몫으로 건네주었다. 하지만 율리우스 아티코스는 황제가 언제 마음이 바뀔지 두려웠는지 거듭해서 물었다. 일개 개인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거액이라서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모르겠노라고 말이다. 그러자 선량한 네르바 황제는 화를 내며 네 멋대로 사용하라, 그것은 너의 재산이니까, 라고 답했다. 율리우스 아티코스는 황제의 명을 충실히 따라, 자신의 재산을 열심히 불리고 그 대부분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였다.

 

 

 

3. 트라야누스.

 

  트라야누스는 지고의 황제Optimus Princeps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초인이었고, 검소했으며 특히 군사적 재능이 매우 뛰어난 황제였다. 트라야누스가 특히나 유명한 까닭은 왼쪽의 시오노 나나미가 이야기했듯이 최초의 속주출신 황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의 조상들은 아마 로마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속주에 정착하면서 그 지역의 여성들과 결혼을 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속주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황제 즉위는 일종의 상징적인 평등성이었다. 속주 출신도 제위에 오를 수 있다, 라는. 트라야누스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아버지는 로마 제국에서 관리로 활동하였고(그의 집안은 세도가로 짐작되지만 정작 관리의 길에 오른 것은 그의 아버지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트라야누스 본인도 군단을 지휘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트라야누스가 네르바에게서 제위를 받았을때는 45살 무렵이었다. 제위에 오르기 전에 그는 플로티나와 결혼했으며 금슬은 매우 좋았다고 알려져있다. 플로티나는 매우 중요한데, 그녀는 이후의 황제가 될 트라야누스의 사촌 하드리아누스(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종형이었다.)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고, 사료가 없어서 잘 알려져있지만 하드리아누스의 황제 계승에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이는 하드리아누스를 다룰때 다시 언급할 것이다. 사실 트라야누스는 남자라면 한창때에 더이상 올라갈 수 없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제위에 오르고 아우구스투스의 유훈이라고 할 수 있는 영토 확장을 정면으로 거스르게 된다. 도미티아누스가 포기한 다키아 원정을 다시금 시작한 것이었다.

 

다키아의 용맹한 왕 데케발루스는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더 뛰어난 군략가였고, 두 차례의 전쟁이후에 다키아는 정벌당하고 데케발루스는 자살하고 만다. 데케발루스는 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으로 다키아를 키우고 싶었지만 그 꿈은 무산되었고, 로마로서는 상당한 이득을 얻게 된다. 다키아와의 긴장으로 인하여 계속 유지해야하는 군비가 많이 감축되었고, 수많은 값진 전리품으로 경기는 매우 좋아지게 된다. 특이하게도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에 대하여 철저한 말살정책을 수행하였고, 금광과 각종 광물자원들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자원들을 통하여 트라야누스는 로마 제국 전역에 공사를 시행한다.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는 공회장을 새로 설계하였고 트라야누스 기념주를 세웠다. 지금은 파괴되었지만 트라야누스 광장과 다리 또한 그의 업적으로 들 수 있다. 이렇게 어느 정도 경기를 회복시킨 뒤에는 그는 다시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이번에는 파르티아를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키아처럼 성대한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었다. 파르티아의 영주들은 다키아처럼 철저하게 파르티아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었다. 그리고는 게릴라 활동으로 트라야누스의 진군을 막았다. 적이 확실히 눈 앞에 보인다면 싸워서 승리할 수 있지만, 공격하고 마치 물이 흡수되듯이 사라진다면 힘만 들 뿐 수고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파르티아의 수도를 합병하기는 하지만 때마침 일어난 유대반란과 새로 정복한 영토들에서의 반란때문에 로마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안티오크(파르티아 전쟁에서의 보급처)에 일어난 지진의 영향도 컸다. 지진에서 트라야누스는 겨우 살아날 수 있었고, 건강도 악화된 상태였었다. 비록 그는 페르시아 만까지 당도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그의 진군의 끝이었다. 어쩌면 그는 알렉산더 대왕을 내심 경쟁자로 마음 속에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알렉산더 대왕 만큼의 명성을 얻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탄식했었다고 한다. 결국 로마로 돌아오던 그는 셀리누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위에 보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1권, 에서 그때의 급박한 순간을 잘 묘사하고 있다. 저 책의 중후반부에서는 트라야누스가 죽고 어떻게 하드리아누스에게 제위가 넘어가는지 이야기하고 있는데, 비록 역사서가 아닌 소설이지만 엄밀한 부분이 많기에 참고할만하다. 사실 트라야누스 시절의 로마는 영토로서는 거의 최대 확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수많은 재물로 로마의 경기 또한 풍족하였다. 하지만 파르티아 원정은 가지 않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대는 일종의 정오였다. 태양은 가장 높이 떠올라있었다. 하지만 당신도 알 것이다. 가장 높이 올라간 태양에게 남은 것은 저무는 것 뿐이라는 것을. 쇠망은 이때부터 벌써 다가오고 있었다.

 

 

 

4. 하드리아누스.

 

   오현제 중 가장 복잡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진 황제는 하드리아누스였다. 그런 그에게 매료되어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는 소설을 남겼다. 이름하여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의 1권은 하드리아누스가 그의 세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종형 트라야누스가 황제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축하하러 그가 있는 곳까지 이동한다. 하지만 그는 매부인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에게 방해를 받고, 그 방해는 그가 제위에 오른 뒤에도 계속된다. 그리고 트라야누스 다음의 제위에 오르게 되고 동방의 회담길에 올라 어느 요기를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2권은 그가 제위에 올라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있다. 그가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누구보다도 복종할 수 있는 존재라 그렇다고 말한다. 그가 정책에서 추구했었던 것은 인성Humanitas, 행복Filicitas, 자유Libertas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드리아누스는 일생동안 점성술에 빠져있던 사람이었고 신비주의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왼쪽의 책은 그런 면모를 시인, 황제 등의 목소리로 바꾸어가면서 잘 서술하고 있는 역작이다. 실제의 하드리아누스도 위의 책에서 그려져있는 면모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사료를 바탕으로 저 소설을 지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저 소설에는 의도적으로 역사와 다르게 진행하는 부분(하드리아누스가 미트라교에 심취했었다던가, 요기를 만났다던가)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거의 비슷하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상당한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 대대장에 불과했던 트라야누스에게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한 것이었다. 누가 그 당시 트라야누스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겠는가, 물론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친인척이었기에 맡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되었고 덕분에 하드리아누스도 황제를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트라야누스의 황후인 플로티나와 상당히 친했었는데, 그녀의 총애에 힘입어 트라야누스의 증손녀인 사비나와 결혼하였다. 사실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는 동성애자였고 속주 시찰로 외부를 돌아다니기만 했었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로만 둘러싸인 조그마한 울타리 안에서만 평생 살았다. 하지만 황제의 인척이라는 것, 그리고 결혼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그에게 큰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집정관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 후 그의 출세는 주춤하게 되었다. 파르티아 원정 당시 하드리아누스는 지휘를 맡아 군공을 세웠으나, 확장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자주 내비쳤기에 시리아 총독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어쩌면 트라야누스가 좀 더 살아있었다면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서 멀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하게 되고, 때마침 사망시 트라야누스의 곁에는 하드리아누스를 지지하는 플로티나가 있었다. 죽기 전까지도 제위를 누구에게 계승시킬 것인가, 에 대하여 묵묵부답이었던 트라야누스였기에 어쩌면 플로티나가 어떤 술수를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있다. 군대는 바로 하드리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 오르자 트라야누스의 정복전쟁들을 포기하고 귀환한다.

 

하드리아누스는 매우 변덕이 심하고 베풀때에는 모든 것을 베풀었지만 수틀렸을때에는 매우 타산적인 정책을 펼쳤다. 자리에 오르자마자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원로원 의원 4명을 숙청한다. 하지만 그 또한 현제의 일원, 트라야누스의 정복 전쟁때문에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한 로마 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거대한 시찰길에 오르게 된다. 어쩌면 이는 그 스스로가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땅들을 모두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한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그의 결정이 어리석지는 않았다.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스페인,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단순한 지명만 열거하니 잘 와닿지 않지만, 동서로 길쭉한 로마 제국을 가로질러 끝에서 끝으로 향했다고 보면 된다. 그는 순방하면서 모든 부족한 방위체계를 고쳤다. 물론 이는 크게는 로마 제국의 균열을 메우기 위함이었지만 작게는 그 개인적인 호기심도 작용하였다. 그는 그야말로 어느 문필가가 말하듯 흥미로운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는 탐구자Omnium curiositatum explorator였다. 그런데 그의 호기심이 특히나 깊게 머문 곳은 그리스였다. 제우스 신전을 짓고 그들의 법률을 유리하게 고쳐주었으며 그리스인들에게 특혜를 많이 베풀었다. 특히나 점성술과 신비제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엘레우시스 비의에 그를 입문하게 만들었다. 그리스에게 배운 것은 그런 신비적인 의식만은 아니었다. 예술에 대한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덕분에 발달된 그의 예술가적인 성향은 그로 하여금 시를 짓게 만들고 건축물을 설계하게 하였다. 판테온 신전을 다시 지은 것도 그의 치세의 일이다. 오른쪽의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 는 하드리아누스 치세에 있던 루시우스라는 사람이 일본으로 이동해서 목욕 문화를 배워서 다시 로마에 그것을 적용한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아무 생각없이 즐기고 싶다면 한번쯤 읽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증도 제법 잘 따라가는 편이다. 저 책에도 하드리아누스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그려져 있다. 하지만 변덕스럽고 예민한 황제는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악몽이었다. 황제는 할례 금지령을 내렸는데,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었고, 그 외에 유대교에 대한 로마 황제의 오해와 예민한 황제에 대한 두려움 등이 겹쳐서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들을 매우 난폭하게 다루었고 잔혹한 처벌을 집행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복되는 반란에 지쳐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 지역에서 모조리 쫓아내기에 이른다.

 

하드리아누스는 속주의 순방 이후에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 제국은 매우 거대하였기 때문에 기력을 많이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질투심과 변덕스러움도 그의 건강이 나빠지는데 한 축을 담당했으리라. 그리고 건강이 나빠지고 투병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의 변덕스러움과 난폭함은 더욱 더 심해지고, 사납고 잔인해졌다. 그의 변덕은 후계자 선정에서도 나타났다. 그의 난폭함과 변덕스러움이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대부분의 결정은 공정하고 온당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계자를 선정할때는 위험이 따랐다. 바람둥이이며 평이 좋지 않았던 아엘리우스 베루스, 라는 귀족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었다. (사실 아엘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숙청한 원로원 의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이 맞다면 어쩌면 원로원 의원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이 작용했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가 일찍 죽었기에 오현제의 시기는 좀 더 지속될 수 있었다. 결국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되는 17세의 안니우스 베루스, 였고, 그를 세손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후계는 누구를 삼아야 될까?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분별력으로 안토니누스를 고르고, 그에게 제위를 넘기는 대신 그 다음 자리는 마르쿠스의 자리가 되어야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르쿠스 외에 아엘리우스 베루스의 아들이었던 루키우스 베루스도 양자로 삼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가 동시에 공동 통치를 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요하였다. 안토니누스는 그 말을 따랐다.

 

 

 

5. 안토니누스 피우스.

 

  안토니누스는 본래 원로원 의원이었다. 공직 생활에서 흠을 보이지 않았던 그는 어쩌면 당연히 황제 후보에 오를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실제로 그에게 황위를 물려준 것은 다른 속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안토니누스는 본래 하드리아누스가 점찍었던 세손, 마르쿠스에게 제위를 넘기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이었으리라. 하지만 안토니누스는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도 오래 살았다. 그는 온화한 성품이었고, 그의 가문은 상당한 명문가였다. 아버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모두 집정관이었으니 말이다. 보통 명문가의 자식은 세태를 잘 모르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경향이 강하다지만 그는 그런 사람들과는 달랐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오현제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특히 두 안토니누스 황제에 대한 설명으로 그 대장정을 시작한다. 책에서 말하는 두 안토니누스 황제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다음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이다. 왼쪽의 대광서림에서 나온 책은 일본어판 중역본으로 알고 있고, 아래의 민음사에서 나온 책은 완역본으로 알고 있다. 민음사판을 중심으로 참고하는 수준에서 읽어나간다면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이 책들에 따르면 안토니누스 황제는 매우 온후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전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는 변덕스러웠기에 원로원 의원들은 그에게 신격을 부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된 안토니누스는 그들을 설득하여 신격을 부여하고, 그외에 자잘한 일들을 처리함으로서 피우스(자비로운 자)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의 치세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외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실 이런 기회를 틈타 그는 다른 황제들 이상의 업적을 쌓을 수도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그의 제위 기간 중 가졌던 가장 긴 여행은 로마의 궁전에서 근처의 별장에 이동한 것 뿐이었고, 대부분은 로마의 궁전에서 통치하였다. 하드리아누스와 비교하자면 정말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로마인들은 그의 치세를 태평성대라고 여겼고, 실제로도 그랬다.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에서는 다음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학문에 대한 열기가 높았다. 그가 아테네에 세운 학교에서는 국비로 철학과 수사학 등을 가르쳤고, 철학자들을 고용하여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철학자들의 급여는 매우 높았고, 이런 경향은 아테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정신적인 수양만 쌓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라는 것은 아니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에 따르면 그는 연극을 좋아했다고 하며, 전 황제와는 달리 여성의 매력에 관심을 기울였다고도 한다. 다만 그는 자신의 양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자신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게 만들었는데 그녀는 미모도 아름다웠지만 미모만큼이나 그 염문과 불륜으로도 유명했다. 철인황제라 불리게 되는 마르쿠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오현제 중에 영화 글레디에이터, 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게 알려진 황제가 바로 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일 것이다. 그 외에 왼쪽의 책, 명상록으로도 매우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사실 명상록의 내용 자체는 딱히 특별할 것은 없다. 잘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이야기이다. 마음의 평화를 위한 금언 모음집이랄까. 정의의 가치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을 높이 평가하는 등의 내용을 품고 있다. 하지만 별로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내용을 떠올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예시로 누구나 선이 옳고 악이 그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말이 정말 필요할 때 입 밖에서 나오는 일은 드물다. (선과 악이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지는가, 와 같은 의문을 접어두자면.) 생각해보면 사실 그는 이런 책을 쓸 수 밖에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어렸을때부터 그는 소박하고 근면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열두 살 때부터 이미 스토아 학파의 철학에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17살의 나이에 공동 황제로 오르기로 예정되어있었다. 하지만 안토니누스가 오래 사는 바람에 40살이 넘어서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안토니누스의 자리를 빨리 획득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지 않았고, 적법하지 않은 수단으로 그의 자리를 뺏으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철학은 그에게 이성의 힘과 정신의 힘을 가르쳐주었으며 사악한 마음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긴 예비황제 기간은 그에게 통치술과 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파우스티나와 결혼한 뒤에는 예비황제로서 안토니누스와 함께 국정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앞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이야기를 하며 루키우스 베루스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언급했을 것이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방탕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야말로 황제로서의 모든 덕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황제가 된 루키우스는 통치는 그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맡기고 그가 누리지 않는 향락들을 모두 자신이 누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루키우스에게 유일한 장점이 있었으니 그는 대부분의 결정을 자신보다 뛰어난 형, 마르쿠스에게 맡겼던 것이었다. 무능하기만 하고 게으르기만 하다면 유능한 인물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면 된다. 그야말로 중국 삼국지의 촉의 유선이 제갈량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무능하고 게으른데다가 거기에 귀가 얇고 간신들을 가까이 하여 국정을 방해하면 그것은 정말 나쁜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읽은 사람이라면 유선이 정말 많이 제갈량의 발목을 잡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정사에서도 딱히 다르지 않다. 그 점에 있어서 루키우스는 유선보다 나았다. 전쟁, 전염병, 미풍양속 바로잡기 등 대부분의 업적은 마르쿠스가 행했다. 루키우스는 그저 마르쿠스를 따르고 그보다 나은 형을 존경할 뿐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결국 과로를 못이겨 사망했다. 마르쿠스도 마찬가지 길을 걸을 것이었다. 오른쪽의 평전은 그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자료를 모아 그려내고 있는 책이다. 물론 루키우스 베루스가 아예 게으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형과 함께 게르만족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결국 루키우스는 싸움이 끝나고 (169년)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며, 마르쿠스는 그를 마음 깊이 애도했다.

 

평화로웠던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시대와는 달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는 험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파르티아가 침공했다. 게르만족이 침공했다.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서 그는 전장으로 향했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프랑스의 문필가 몽테뉴가 프랑스로 잡혀온 야만족 추장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대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을 왕이라고 부르는가? 그러자 추장이 몽테뉴에게 말했다. 전쟁에서 가장 앞서 달려나가는 사람이 왕이다, 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왕의 이름에 걸맞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항상 최전선으로 뛰어들어갔으며 국경선을 유지하였고 외적을 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날고 뛰는 황제라도 전염병을 막을 수는 없었다.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에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군공을 세웠고 그는 동부의 로마군 총지휘관의 자리에 오르고 이집트까지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파르티아의 침공을 막은 뒤 돌아온 뒤 그의 군대가 퍼뜨린 전염병은 수많은 로마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선이 지루하게 길어지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북부에서 한동안 돌아오지 못하자 로마에는 마르쿠스가 죽었다, 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그 소문을 들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자신이 황제 위에 오른다고 (175년) 선언하고 반란을 시작하지만, 이 때 마르쿠스는 한달음에 로마에 달려와 군사들 앞에사 긴 연설을 한다. 로마의 안녕을 위해서는 카시우스에게 황위를 물려줄 수도 있다, 나는 늙고 지쳤고 힘들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카시우스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이다. 갓 북부 지역의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돌아온, 그야말로 로마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바친 늙은 황제의 초라한 모습은 군인들의 마음에 연민을 불러일으켰고 카시우스는 이윽고 부하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럼에도 마르쿠스는 자신의 말에 한 점 거짓이 없었다는 듯, 카시우스의 지지자들에 대한 원로원의 복수를 막았다.

 

파우스티나의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황제의 아내였던 파우스티나가 이 카시우스의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이 있다. 카시우스가 황위에 오르면 자신의 황후 자리도 위협받게 될까봐 카시우스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사료가 신뢰성이 없다고 하는 말도 있다. 파우스티나는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행실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명상록에서 마르쿠스는 항상 자신의 아내가 정숙하고 현명하며 사려깊다고 말했다. 황제는 그녀의 애인들을 높은 자리로 승진시키기도 했었고, 심지어 그녀를 여신으로 선포하도록 원로원에게 요청하기도 하였다. 모든 남녀는 이 '정숙'한 여신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여야 하였다. 아마 마르쿠스는 자신의 아내의 음행을 전혀 몰랐거나, 혹은 믿고 싶지 않았거나, 또는 들어도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갔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덕으로 유명한 황제였지만 아내를 여신으로 선포한 일은 그의 오점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사랑, 이라면 사랑이 통했던 것일까, 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의 힘든 원정에 두 번이나 함께 동행하였고 이윽고 원정길에서 죽었다.

 

마르쿠스는 177년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이후는 모두가 알다시피 콤모두스의 실정이 이어진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사악한 마음을 사라지게 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만들게 하려고 철학자의 강의를 많이 듣게 하였지만 모두가 마르쿠스 그 자신 같지는 않은 법이다. 한창 놀고 싶을 때의 나이인 콤모두스는 나약한,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젊은이였다. 사실 나약하고 게으르기만 했었다면 로마 제국은 다시 내란으로 빠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신들의 득세로 점차 잔인해지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이 모든 것을 내다보았을까? 아마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르쿠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주지 않는다면 나라가 반으로 쪼개질 것이고, 그것은 그야말로 내란의 시작일테니 말이다.

 
 

 

7. 오현제의 공통적인 특징.

 

  다섯 명의 현제는 공통적으로 양자계승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았고,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와 마르쿠스를 예비했다. 하지만 이 양자계승은 친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친자가 있었다면 그들은 마지막 현제, 마르쿠스처럼 친자에게 권위를 조금이라도 쥐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여겨진다.(황제의 친자, 라는 권위는 정통성 확보에 가장 유리하다. 이것이 반란의 명분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양자계승을 했고 그 계승은 성공적이었다. 모두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유능하였으니 말이다. 로마 시민들은 그들의 치세를 황금 시대Saeculum Aureum라고 불렀으며 황제들의 유능함을 칭송했다. 이 시기에는 이원집정제는 그 힘을 잃어갔으며 이윽고 로마 공화정의 주축을 이루었던 원로원에는 황제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물론 황제가 원로원과의 다툼을 피하였던 것도 컸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제외하면 원로원 의원 중에서 처벌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모습을 낳았고, 이는 이후에 콤모두스가 향략을 벌이거나 공포 정치를 행할때 아무도 쉽게 나서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저렇게 한 곳으로 권력이 모이게 되면 나라 내부의 반란은 쉽사리 일어나기 어렵지만 지방직으로 내려가는 것을 일종의 좌천으로 여기게 되는 경향도 생기게 된다. 오현제 시대는 그 빛이 너무나 찬란했지만 동시에 이렇게 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맺는 말을 대신하여 몇 마디 덧붙인다. 사실 현대 정치를 볼때, 저런 다섯 명의 왕의 특성이 좀 계승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특히 양자계승과 같은 특성말이다. 계파나 이념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을 지명하고 나라를 이끈다면, 그런 정치가가 있다면 마음놓고 두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선정은 정직한 사람들이 무참한 꼴을 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워낙 사료가 없어서 그녀의 책을 참조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녀의 책에서 얼핏 보이는 생각들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터라 대부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저 말만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선정이라는 것은 분명 그런 것이다. 중국의 요순임금시대를 태평성대라고 불렀던가, 요임금의 치세에는 임금이 있는지조차 백성들이 몰랐다. 진정한 치세는 그런 것이며 정직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저런 특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지워진다 : 좋은 왕은 죽은 왕뿐이다. 정치가와 왕은 다를 것이라고? 하지만 정치가라면 다른 정치가들을 세뇌라도 시키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저런 선정을 베풀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정을 관철시키려 한다면 그는 왕, 전제권력자가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뛰어난 한 사람의 전제정치와 다수의 어리석은 인물들의 중우정치의 대결로 귀결된다. 나는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다수의 어리석은 인물들을 싫어한다. 제대로 내용을 모르는데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엄밀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그리고 검증이 없이 한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행태를 증오한다. 현대식으로 보자면 SNS의 무분별한 리트윗들을 정말 혐오한다. 물론 혼자서 모든 정보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정보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은 증폭되고 오해는 지속된다. 특히 민감한 정치나 종교, 계층 등의 주제에 대해서 더욱 경향이 심화된다. 고백하자면 사실 이 증오 또는 혐오의 칼날은 나 자신도 피해갈 수 없기에 자기혐오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나는 나 자신을 혐오스러워한다. 나 또한 아직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런 어리석은 대중들이 정치를 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 어리석은 정치가 가장 위대한 왕의 통치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정치는, 적어도 인류의 진보를 위한 정치는 가능성에 그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데 현실의 발전과 미래의 가능성, 둘 중 어디를 택하는게 옳겠는가? 혹은 다수의 어리석은 인물들이 모인다고 해봤자 1+1=1 이상이 나오겠는가? 1+1=2라도 나오면 다행이다, 그럴바에야 처음부터 100을 고르는게 낫지, 라고 말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100은 하나의 틀을 넘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더하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1+1은 다르다. 사실 무엇보다도 1+1이 하나의 결과, 1 혹은 2로만 표현된다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각 개인의 합은 단순한 덧셈이 아니다. 1+1은 1+1의 가치를 가지지 2라는 가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다. 1+1=2라면 100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1+1이 1+1이라면 100과는 비교기준 자체가 설정되지 않는다. 이는 틀을 넘는다는 이야기와 같다. 덧붙이자면 각 개인은 각성에 따라서 그들의 능력이 개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1+1은 100+100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언제나 어리석을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의 관점만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관점도 있다, 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기적으로 본다면 정치나 어떤 활동에 있어서 개인들 각자는 그들의 특성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하나의 힘을 발휘하는 그런 모습이 바람직할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과 설명이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쉽게 다중이라고 여겨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현실의 발전과 미래의 가능성 중 무엇을 고르는 게 옳겠는가, 라는 질문에는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현실의 발전에 노력해달라. 나는 미래의 가능성에 걸겠다, 라고. 이는 가능성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다양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수한 사람들이 가진 무수한 가능성들은 각자의 무수한 다양성을 유도한다. 그리고 그 다양성은 사회가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기반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헛된 망상처럼 보이는 수많은 가능성에 몸을 던진 사람들로 하여금 성숙되어 왔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오현제는 필요없다. 그들이 아무리 흥미롭고 위대하더라도. 그리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번민하라. 우리 시대에게는 오현제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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