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태풍이 떠난 자리


8월이 시작되던 지난 10여 일은 무척이나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2년 차 리더 멧돼지인 나는 휴가철을 맞아 편하고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들떠 8월이 되기 전부터 나는 마냥 설렜던 것입니다. 그러나 휴가가 시작된 8월 2일부터 나는 밤잠을 설치고 갖은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세계 각국의 어린 멧돼지들이 모여 서로 간의 친목과 우의를 다지는 모임이 우리나라에서 열렸고, 리더 멧돼지인 나 역시 참석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바 있지만 모임은 생각처럼 쉽게 풀려나가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웠던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준비가 부족했던 까닭에 모임에 참가했던 어린 멧돼지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던 것입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으로 나는 휴가지에서 이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만 보았습니다.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황에 이를 지켜보던 여러 나라의 멧돼지들이 모임에서 속속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멧돼지들이 먼저 모임에서 떠났고, 다른 나라의 멧돼지들 역시 불안과 걱정 속에서 이를 주시했습니다. 나는 최악의 지도자,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리더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럼에도 모임을 주관했던 여성 멧돼지는 '우리나라가 위기 대응 역량을 보여줬다'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나는 태풍 카눈이 우리나라를 관통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휴가지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아내 멧돼지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술이나 퍼먹고 싶었지만 말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언론이 나와 내 똘마니들의 무능한 대처에 대해 무차별적인 비난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사실과 다른 거짓 보도는 아니었지만 리더 멧돼지인 나 역시 똘마니들의 무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나도 게으르고 무능하지만 똘마니들조차 무능하기 짝이 없으니 도대체 나는 누구를 믿고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할지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나는 유명한 소리꾼들을 불러 세계 각국의 어린 멧돼지들을 위로하도록 했습니다. 개중에는 더러 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나오지 않겠다고 버티는 소리꾼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았습니다. 언젠가 나는 뒷골목 똘마니들을 시켜 그들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라고 명령할 작정입니다. 어린 멧돼지들의 모임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약간의 피해는 있었지만 태풍 카눈도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이제 나는 할 일을 다 했으니 술이나 마셔야겠습니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다시 시작된 무더위와 나에 대한 비난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상대가 누구든 사과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말입니다. 그것이 내게는 최후의 보루이자 마지막 자존심인 셈입니다. 기시감 멧돼지의 오염수 방류 결정은 무척이나 잘못된 판단이지만 나는 그를 위해 충성을 다할 생각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날리면 멧돼지를 필두로 기시감 멧돼지와 내가 한자리에서 만날 예정이지만, 그때까지 나는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나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생각입니다. 그것만이 나의 무능을 덮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