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유유상종에 대하여


거듭 말하지만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닙니다. 굳이 어려운 열역학 제2법칙을 꺼내들 것도 없이 시간은 우리들로부터 많은 것을 앗아갑니다.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라는 개인의 자의식이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나는 내 경험과 기억의 총체(總體)"라고 말했다면 시간에 대한 대가로 자신을 정립하는 중이라고 퉁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난 과거에 대해 조금의 후회도 갖지 않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 어려운 것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시간을 허비한 것에 비해 스스로가 얻은 대가는 아주 미약하거나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대다수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간은 결코 우호적이거나 친밀한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에 언급한 내용은 내가 존경하는 어느 인간의 철학을 내 일기에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 나의 스승인 천공(千空) 멧돼지의 철학이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밝히는 바이지만 우리 멧돼지는 근본적으로 철학과 같은 이성적인 추론은 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든가, 날리면 멧돼지의 말이라면 무조건 알아서 기라는 둥 현실적인 조언만 할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20년 남짓의 짧은 멧돼지 생애에서 천 개의 구멍(空)을 파는 걸 목표로 열정을 쏟아붓는 스승의 모습에 반하여 다른 멧돼지들이 천공 스승이라 부르며 우러러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언제였던가 천공 스승이 나와 '동운' 멧돼지를 불러 놓고 한마디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천공 스승 왈, "인간의 언어 중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단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귄다는 뜻이라더구나. 너와 동운 멧돼지는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너희 둘이 떠올랐단다. 다른 멧돼지들에게 조금의 양보나 배려도 용납하지 않는 점도 그렇고, 다른 멧돼지들로부터 요만큼의 해라도 입을라치면 이만큼의 크기로 되갚아주는 점도 판박이처럼 닮았지. 게다가 다른 멧돼지의 뒤통수를 치는 것도, 갚아야 할 복수는 마음속에 반드시 기억하는 것도 서로 흡사하지 않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역시 스승은 스승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내가 리더 멧돼지가 된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만 나에 대한 지지율은 좀체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하여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 '똥광' 멧돼지를 중용하기로 했습니다. 기시감 멧돼지의 핵 오염수 방류 및 국내 경제의 부진 및 막대한 세수 결손 등 앞으로 나에 대한 지지율을 약화시킬 악재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와 나의 측근들을 비난하는 멧돼지들은 모두 잡아들여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오늘은 6월 10일,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라는데 이것을 기념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나 또한 그 시절의 리더 멧돼지처럼 거리에 나오는 멧돼지들을 잡아 죽일 생각이니까 말입니다. 내가 비상 도시락으로 키우는 강아지들을 대동하고 '동물 광장'에 나갔다고 전 난리를 치는 멧돼지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욕을 먹을 일인지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런 멧돼지들은 모두 잡아 바다에 처넣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비가 온다는데 가까운 멧돼지들과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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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에 감사해
김혜자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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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이나 경험 탓이겠지만 연예인의 저작을 잘 읽지 않는다. 잘 읽지 않는다기보다 거의 읽지 않는 편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인기를 등에 업은 연예인이 자신의 과거를 왜곡, 윤색하여 홍보용이나 돈벌이용으로 책을 출간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책에 대한 지나친 경외심을 지닌 까닭에 책을 깔보는 듯한 그와 같은 행위가 마음에서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나는 그동안 일부를 전부인 양 오해하는 일반화의 오류 속에서 나 스스로를 묶어두었음을 깨닫는다. 김혜자의 에세이 <생에 감사해>를 읽어가면서 나는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고, 고집스레 지켜왔던 나의 편견과 잘못된 행동에 대해 반성했다.


"어떤 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뒤에서 희생한 다른 이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은 없습니다. 내가 남편에게도 잘했고, 아이들에게도 너무나 좋은 엄마였고, 그리고 연기도 빼어나게 잘했다? 그런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배우로서 살아온 것 말고는 모든 부분에서 부족한 여자였습니다."  (p.221)


평생 동안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매진했던 사람들은 삶에 대한 저마다의 확신과 철학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비단 연예계라고 해서 다를 리 없다. 나는 그것을 간과했었고, 그들의 화려한 삶 뒤에 숨겨진 갖은 구설과 도덕적 결함과 텅 빈 허무를 지레 짐작했었다. 말하자면 나는 모든 연예인의 삶이 껍데기뿐인 공허한 것이라고 내 멋대로 재단했던 것이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처럼 연예인을 뭉뚱그려서 경시하는 데는 전통적인 유교 제도에서 기인한 바가 크겠지만 반상의 계급구조가 사라진 현대에 있어서 그보다는 연예인에 대한 질투와 시기의 감정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삶은 그냥 살아가는 것밖에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픈 오스카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게 아닙니다. 몸이 성한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며칠을 살더라도 얼마만큼 가득 차게 사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삶은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240)


사실 나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를 그닥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능이나 스포츠에 열광하지도 않는다.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에 정신을 놓고 빠져들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텔레비전과는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는 내가 '김.혜.자'라는 이름 석 자를 똑똑히 기억하는 까닭은 지난 60년간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연기가 단연 돋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배역을 맡으면 '그 사람'이 되어야만 했고, 그렇게 되기 위해 수십, 수백 번 몸부림치며 연기했다는 그녀의 고백처럼 어떤 배역이든 혼신의 힘을 다했던 그녀의 연기에 매료되지 않을 이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 까닭 없이 우울하고 절망하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알았습니다. 책을 통해서도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씩은 부조리 연극의 배우들입니다. 단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절망감과 우울증 속에서도 스스로 힘을 내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인간입니다."  (p.56)


자살을 꿈꾸며 수면제를 사 모으던 한 소녀가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웃고 울리는 국민 배우가 되고 인기 스타의 자리를 유지한 채 수십 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누구나 매 순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기적을 창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러나 정작 기적을 만드는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을 일구는 일련의 과정임을 깨닫는다면 현실의 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배우 김혜자는 여러 가상의 삶을 현실로 살아보면서 그 모든 게 기적임을 본인 스스로의 삶 속에서도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끝나는 날까지 단정하게 살리라' 책상 위에 있는 달력에 써놓고 생활한다는 그녀는 우리의 이미지 속에서는 언제나 훌륭한 배우이자 연기자로만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은 한 가정의 주부이자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지 않았으면 미처 알지 못했을 내밀한 이야기부터 배우로 살아오면서 그녀가 맡았던 여러 배역과 감독들 그리고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 등 배우 김혜자의 삶 전반에 대해 들려주는 이 책은 내가 생각하던 어느 연예인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배우라는 직업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었던 장인(匠人) 김혜자의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갖게 해준 그 사람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김혜자의 고백이 가슴 뭉클하게 느껴지는 이 책은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으로 읽힐지도 모른다. 인생의 황혼녘에 선 대배우 김혜자의 삶이 편안하고 길게 이어질 수 있기를 한 사람의 팬으로서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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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으로 아침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의 부지런함을 마치 전쟁터의 무용담처럼 떠벌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말입니다. 어제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각에 자주 마주치는 할머니 한 분과 처음 보는 아주머니 한 분의 대화를 옮겨 보면 이러했습니다. "형님, 일찍 나오셨네요. 언제 올라오셨어요?" 하면서 아주머니가 반갑게 묻자 "나? 나는 벌써 산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필라테스도 20분 하고 이제 막 내려가려는 중이야." 하면서 자신의 부지런함을 한껏 뽐내는 듯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 부지런도 하셔라. 몇 시에 나오셨는데요?" 하면서 치켜세우자 "5시가 채 되기 전에 집에서 나왔을 거야." 하면서 별것 아니라는 듯 낮은 목소리로 답을 하고는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언제나 상냥하고 새초롬한 태도로 일관했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이 꽤나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등산로에서 자주 마주치는 욕쟁이 할머니 역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듯하여 안타깝기만 합니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지팡이 없이 씩씩하게 걷곤 하셨는데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작은 언덕길에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곤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양념처럼 가볍게 섞던 욕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내게, "여자가 이쪽으로 오면 저쪽으로 도망가고, 저쪽으로 오면 이쪽으로 도망가. 여기에 이상한 여자가 하나 있어." 하면서 말듯 모를 듯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나는,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하면서 가볍게 헤어졌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집회 대응 방식을 보면서 내가 등산로에서 만났던 이런저런 사람들을 떠올렸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날이 그날 같은, 그닥 달라질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은 이따금 미친(?) 짓거리를 하게 마련입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평범해 보이는 여성 정유정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던 80년대의 집회 현장처럼 매일매일이 스펙터클한 일상이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해야만 했던 경찰 공무원이라면 평화적인 시위가 무척이나 간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이 사라진 평화적인 시위가 오랜 시간 이어지다 보니 고위급 경찰 공무원들의 일상 또한 그날이 그날인 듯 지겹기만 했겠지요. 하여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망루에 있던 노조원을 향해 진압봉을 휘둘러 진압하게 했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조금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을 테고, 이것 또한 자신의 진급 기회를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믿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무방비 상태의 집회 참가자들에게 캡사이신을 마구잡이로 뿌려 고통을 당하게 하는 모습도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행태가 이어지면 집회 참가자들 역시 자구책으로 다른 방법을 강구할 테고 우리는 오래전에 잊었던 80년대의 풍경을 일상처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골에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이 십분 이해가 될 듯합니다. 대화 상대가 없어 말할 기회가 없었던 그들은 어쩌다 만난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던지 종일이라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처럼 말을 쏟아냅니다. 듣는 사람이 말을 끊고 돌아서는 게 미안할 정도로 말입니다. 현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은 그날이 그날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 무척이나 지겨웠는지도 모릅니다. 피를 흘리고 고통을 받는 모습이 그 시절의 낭만처럼 그리웠을 테지요.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때로는 혀를 자극하는 양념처럼 일상을 자극하는 강한 충동이 즉각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 사람도 더러 있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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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지른 모유
시쿠 부아르키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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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의무가 지배하는 일상의 촘촘한 시간 너머로 휴식처럼 드문드문 비가 내렸다. 뭘 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나 목표도 없이 빗줄기는 그저 흘러내리다 기척도 없이 멈춰 서곤 했다. 결코 작위적이거나 어색하지 않은 부작위의 현장. 우리의 삶도 이처럼 자연스러울 수 잇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흘러갈 수만 있다면 우리 곁에서 불행한 사람이 더는 눈에 띄지 않을 텐데... 우선 나부터 시간을 감싸는 저 빗줄기로부터 작은 위안을 얻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누군가에게 기쁨의 인사를 나누었을 텐데...


시쿠 부아르키의 소설 <엎지른 모유>를 읽는 동안 오가는 삶의 풍경들을 생각했다.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100세 노인 에우라리우의 독백으로 꾸려진 이 소설은 독자들의 시선을 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이끌어 간다. 물론 소설에서 주인공은 몸은 물론 그의 기억마저 온전하지 못해 횡설수설하거나 때로는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거나 부정하기도 하지만, 소멸되어 가는 개인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스러지지 않는 것은 가슴에 아로새겨진 숭고한 사랑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내가 얼마나 네가 오는 것을 좋아하는지 안다면, 너는 매일같이 달려올 것이다. 너는 아직까지 나를 인정해 주는 유일한 여자이다. 네가 없다면, 나는 굶어 죽을 것이다. 네가 없다면, 나는 마치 부랑자처럼 매장당할 것이다. 나의 과거도 꺼져갈 것이다. 아무도 나라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p.125)


빗소리가 굵어졌다 가늘어지는 반복을 거듭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기도 하고, 잠에서 깬 나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아파트 정원수의 묵묵함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중심 서사는 첫사랑이었던 아내 마틸지의 실종이다. 에우라리우의 생애는 마틸지와 함께 했던 삶과 마틸지가 없는 이후의 삶으로 나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는 상대방에 대한 질투와 불신, 분노와 절망, 의심과 회의 등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하나 둘 들러붙는다.


"만일 이 근처에 신부님이 있으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도록 나에게 좀 안내해 줘라. 나는 아내를 알게 된 날부터 평생을 죄악 속에서 살았으니까. 미사에 다니던 그 시절, 어떻게 성당에서까지 생각으로 죄를 지었는지 너에게 언제 이야기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세례를 받았으니까, 병자 성사를 받을 권리도 있다. 비록 교리 문답서에서는 육신의 부활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는 영원한 삶을 믿고 싶다. 마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꽤나 말쑥했던 청년이, 십대의 마틸지에 비해 이렇게나 노쇠한 상태로 영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p.178~p.179)


에우라리우의 길고도 지독한 사랑 이야기는 브라질의 어두웠던 식민지 역사를 동반한다. 유력 정치인 가문의 아들이었던 에우라리우에 비해 백인 농장주와 그의 성적 노리개였던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났던 마틸지, 그녀는 이른바 뮬라토였다. 브라질의 근대사에서 뮬라토들이 대를 거듭해 빈민으로 전락하는 과정과 이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투쟁사,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 등이 에우라리우 개인의 지독한 사랑담과 더불어 장대하게 펼쳐지는 이 소설은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인 듯 친근하게 읽힌다.


"시내에 마틸지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떠도는 게 확실했다. 나를 버리고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식료품 가게와 카페 그리고 이발소에서 사람들이 등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이 아내의 혹시 모를 숨겨진 애인들을 추측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면, 마치 속고 산 남편에 대한 배려의 차원이라는 듯이 깊은 침묵이 맴돌았다."  (p.207)


딸과 남편만 남겨두고 사라진 아내 마틸지와 떠날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마틸지의 숨겨진 비밀. 그렇게 시작된 죽음의 비밀을 마침내 알고 가슴을 치게 되는 한 남자의 아련한 사랑과 회한이 먹먹하게 전해 온다. 의무가 지배하는 일상의 촘촘한 시간 너머로 휴식처럼 드문드문 비가 내리고 나는 이따금 고양이처럼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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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보면 흐드러지게 핀 넝쿨장미의 붉은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바야흐로 5월. 며칠 전부터 시작된 초여름의 이른 더위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성하(盛夏)의 불구덩이를 더욱 두렵게 하고, 우리 역사에 기록된 5월의 아픈 기억들은 장미꽃보다 붉다.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는 5.18 민주화 운동,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4주기를 맞는 5월 23일. 그러나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고, 그들을 대표하는 정당의 대통령은 5.18 희생자를 애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해야 할 자리에서 "저는 광주와 호남의 혁신 정신이 인공지능(AI)과 첨단 과학 기술의 고도화를 이뤄내고, 이러한 성취를 미래세대에 계승시킬 수 있도록 대통령으로서 제대로 뒷받침하겠습니다."라든가 "우리는 모두 오월의 정신으로 위협과 도전에 직면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실천하며 창의와 혁신의 정신으로 산업의 고도화와 경제의 번영을 이뤄내야 합니다."와 같은 별 시답잖은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게 과연 5월 영령들 앞에서 할 소리인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후쿠시마 오염수 시찰단이 오늘 출국했다. 오염수의 안전성을 검증하기보다는 일본의 설명을 듣고 견학을 하는 차원의 방문이기 때문에 일본 측 주장을 이웃 당사국의 입장에서 정당화하는 역할이 주가 되는 모양새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를 적극 부인하고 있다. 물론 대통령이 결정한 일을 아랫사람들이 반대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결국 일본이 정한 일정에 따라 후쿠시마 오염수는 아무런 제재도 없이 바다에 방류될 테고 가장 근접한 이웃국가인 우리나라가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임은 너무도 자명해 보인다. 어제 지인들과 가까운 근교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바람도 적당히 불어 그늘에 있으면 잠이 솔솔 쏟아지는 날씨였다. 고기도 넉넉히 굽고 준비해 온 과일도 넘쳐나서 종래에는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야 했지만 모처럼 자연 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마냥 좋았다. 그 자리에서도 대화의 주제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였다. 사람들은 다들 방류가 시작되는 순간 해산물 섭취는 끝이라며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이가 들 만큼 든 사람들, 이를테면 대통령의 주요 지지층은 세상을 살 만큼 살았고, 자식을 낳아야 하는 부담도 없으니 방사능에 오염된 해산물을 먹는다고 해도 크게 해가 될 것도 없지만, 앞길이 구만리인 젊고 어린 사람들은 도대체 어찌 살아야 할지... 모였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식 걱정, 손주 걱정에 숙연한 마음이었다.


정부의 세수 결손이 심각한 수준이다. 1분기 국세 수입은 87조 1000억 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24조 원이나 줄었다. 그럼에도 추경에는 선을 긋고 있는 정부의 기조로 볼 때 올해의 경제 성장 전망치를 달성하는 것 역시 힘에 겨운 게 아닌가 싶다. 다른 나라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줄줄이 높여 잡고 있지만 국내외의 연구 기관 모두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낮춰 잡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마이너스 성장도 어렵지 않을 기세다. 하루가 다르게 물가는 오르고,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무역적자액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세수 결손을 바라보는 정부는 망연자실 손을 놓고 있고... 도대체 국민들은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5월도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직면하지 않은 경제 위기가 먹구름처럼 다가오고 있다. 아픈 기억의 5월보다 더 심하게 아플지도 모르는 암울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전에 좋아하는 해산물이나 맘껏 먹어야겠다.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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