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하는가 - 지금 당신이 가장 뜨겁게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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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원 태풍이 불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기업의 걱정과 불안이 밑바탕에 깔린 결과이지만 갈수록 기업의 이익이 줄어드는 현실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현실적 판단이 초래한 자구책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어려움을 비교적 잘 헤쳐 나왔던 대한민국의 경제에 검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청년 취업률이 급격히 감소하는 현실. 그렇다고 노인 인구의 경제적 자립도가 높아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달리 뾰족한 대안도 없으면서 탈 중국을 외쳤던 어느 망상가의 취중 실언이 대한민국 전체를 위기에 빠트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세계 10위를 넘나드는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로 볼 때 어느 한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창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이는 조직 전체의 수준이 이전 정부에 비해 턱없이 낮아졌으면 몰라도...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젊은 직원들 역시 자신의 자리가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에 떨거나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일하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곰곰 생각하곤 한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해 보이지만 좀 더 거창한 다른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 역시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우장춘 박사의 사위이면서 교세라의 창업자이기도 한 이나모리 가즈오의 저서 <왜 일하는가>를 꺼내 읽은 것도 그런 정황과 맞닿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 건, 어쩌면 손에 잡히지 않는 파랑새를 쫓아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환상을 좇기보다는 눈앞에 놓인 일부터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훨씬 중요하다.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게 되고, 노력을 노력이라 여기지 않으며,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일에 완전히 몰입하면 저절로 추진력도 붙는다. 추진력이 붙으면 성과도 좋게 나타나고, 덩달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도 받게 된다. 주위에서 칭찬해 주면 내가 하는 일이 더 좋아지고 그 일에 더 집중하게 되는 선순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바로 이렇게 우리 인생에 선순환이 시작된다."  (p.90)


'일하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과 경험을 통해 일이 우리 인생에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이 책은 사실 이전에 두어 번 읽었던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면 하시라도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지방대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경험이 책을 읽는 독자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는 이 책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현대인의 일상에 한 줄기 의욕을 불끈 심어준다. 게다가 자신의 일에 진저리를 치던 마음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반발과 원망하는 마음만 키워갈 것인지, 아니면 어려운 요구라도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일지는 오직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도착점도 크게 달라진다. 일도 그렇지만, 인생도 마찬가지다."  (p.190)


65세의 나이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던 저자는 하토야마 총리의 부탁으로 77세의 나이에 파산 직전에 있던 일본항공의 회장에 취임하여 8개월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던 전력이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자신을 성공적인 삶으로 이끌어주었다고 회상한다. 우리나라 말에 '울력'이라는 단어가 있다. 출가수행자들이 절 살림에 보탬이 되고 몸을 쓰면서 망상이나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한 수행의 한 방편으로 쓰였던 집단 노동을 일컫는 말이었다. '여러 사람이 힘을 구름처럼 모은다'는 뜻에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는데 세속에서는 주로 몸으로 하는 일이나 노동을 뜻하지만 불가에서는 중요한 수행의 일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확고한 듯 보인다. 일이란 단순히 생계수단을 넘어 개인의 인격을, 나아가서는 삶 전체를 완성하는 수단이자 방편인 셈이다.


"90년에 걸친 내 삶을 돌이켜볼 때, 앞선 인생 방정식은 삶을 사는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한 진리이자, 더 좋은 인생길을 걷기 위해 항상 생각해야 하는 좌우명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소개하고 강조하고 싶다. 올바른 사고방식과 강한 열의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력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살려서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바란다. 그런 자세로 일하면 당신의 인생에는 풍요로운 열매가 열리고, 곧 놀라운 세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p.266)


맑았던 하늘에 조금씩 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구름 사이로 길게 뻗어 나온 가난한 햇살이 공원의 녹음 위를 훑고 지나간다. 우리의 삶도 이렇듯 맑게 빛나던 인생이 한순간에 어두워질 수 있고,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뻗은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왜 일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당신이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당신의 인생 전체를 결정할지도 모른다. 하늘을 보면 오늘의 날씨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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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꽃길만 걷게 해줄게.


이맘때의 등산로는 하얀 꽃길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짙은 향기를 내뿜으며 오가는 등산객들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했던 아카시아꽃의 흰 꽃잎들도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분분히 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봄의 등산로는 딱 두 번 꽃길이 된다. 봄의 상징처럼 화려하게 피었던 벚꽃이 단 한 번의 봄비에 처연히 지고 마는 4월의 어느 시기와 요즘과 같이 아카시아꽃이 지는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흰 카펫처럼 점점이 흩뿌려진 꽃길을 어슬렁거리며 걸을 때마다 괜스레 미안해지곤 한다. 리더 멧돼지로 취임한 지 만 1년이 지났건만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다수의 서민 멧돼지들로부터 욕만 무수히 듣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를 열렬히 지지하는 늙다리 멧돼지들로부터 "속이 다 후련하다."는 격려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 하겠다. 죄인과 다름없는 내가 이런 꽃길을 걸을 자격이나 있을까마는 언젠가 감옥에 갈 미래라면 지금의 호사를 맘껏 누리는 것도 삶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다. 뉘라서 이런 호사를 구분 없이 베풀어준다는 말인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결혼 전 아내 멧돼지에게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돈과 권력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내 멧돼지의 욕심과 강한 집착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까닭에 나는 이런저런 수컷 멧돼지와 사귀었던 아내 멧돼지의 허물을 못 본 척 덮어둘 수 있었다. 물론 뒷골목 시절 나의 행실도 건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술에 취한 채 시중을 들던 여러 암컷 멧돼지들을 맘껏 유린하곤 했으니 아내 멧돼지나 나나 도긴개긴, 그 밥에 그 나물이긴 하다. 아무튼 아내 멧돼지에게 눈이 멀었던 나는 어떤 순간에도 제발 나를 버리지 마라 달라며 매달렸었다. 나를 버리지 않는 대신 나는 아내 멧돼지로 하여금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결혼 후 아내 멧돼지는 나의 권력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이권에 개입했고, 나는 그때마다 나의 뒷골목 똘마니들을 압박해 수사를 막아주곤 하였다. 그럼에도 리더 멧돼지로 취임한 지금도 아내 멧돼지의 범죄 사실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 날리면 멧돼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내 멧돼지에게 다짐하였다. 내가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옥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며 앞으로도 영원히 꽃길만 걷게 해 주겠노라고.


며칠 전 기시감 멧돼지의 방문이 있었다.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고 싶어 하는 일본의 속셈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리더 멧돼지로서 나의 무능력과 아내 멧돼지의 범죄 전력 등을 무마할 수 없는 나로서는 기시감 멧돼지의 요청을 들어주는 대신 나보다 힘이 센 날리면, 기시감 멧돼지를 확실하게 나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뿌리는 순간 수산업에 종사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멧돼지들이 모두 직업을 잃게 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삼중수소에 오염된 여러 수산물을 먹은 수많은 멧돼지들이 대를 이어 그 피해를 감당하게 될 테고... 그러나 나의 신념은 여전히 확고하다. 나라가 망하고 이 땅에 사는 많은 멧돼지들이 죽거나 병이 들어 고통을 받는다 해도 아내 멧돼지의 앞길이 꽃길이라면 그 무엇을 두려워하랴.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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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생각 아포리즘 - 0에서 1을 만드는 생각의 탄생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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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는 명언집 혹은 금언집이 유행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금력이 부족했던 출판사에서 여러 유명인들의 작품이나 회고록 혹은 전기 등을 종류별로 출판할 엄두는 나지 않았을 테고, 그들이 했던 몇몇 명언들을 한 데 모아서 책으로 엮어 출간한다면 비용이나 위험도 면에서 훨씬 유리한 측면이 있었을 게다. 더구나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했던 당시에 책을 소비하는 학생이나 가정에서도 원하는 책을 맘껏 사들인다는 건 웬만한 형편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터, 한 권의 책을 읽고 마치 수십 권의 책을 읽은 것인 양 자신의 지식을 뽐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로 여기지 않았을까. 책을 공급하는 측과 수요하는 측의 욕구가 정확히 일치했던 까닭에 명언집이나 금언집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던 것이 급격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매체가 등장했음은 물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주변 환경 탓이었던지 비교적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독서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아 마지않던 책은 이제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진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명언집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듯하다. 역시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인지...


"사실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등 유명한 실리콘밸리 천재들에 관한 책은 전 세계적으로 수천 종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번역과 각색을 통해 작가에 의해 한 번 정제되었기에 진짜 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생각이 아닌 작가의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순수한 오리지널 창조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훌륭한' 아포리즘이란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였고, 그 답을 구현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이 책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p.5 'Prologue' 중에서)


인문학자이자 지식큐레이터로 잘 알려진 김태현 작가는 이미 <백 년의 기억, 베스트셀러 속 명언 800>, <스크린의 기억, 시네마 명언 1000>, <타인의 속마음, 심리학자들의 명언 700>, <지적교양 지적대화, 걸작 문학작품 속 명언 600>, <세상의 통찰, 철학자들의 명언 500> 등 이와 같은 명언 집을 다수 출간한 적이 있다. 이 책 역시 그와 같은 연장선상의 한 권일 수도 있겠지만 <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생각 아포리즘>은 책을 읽는 일반 독자들이 AI가 핵심이 될 미래에 대해 사유하고 대비하거나 실리콘밸리 천재들의 통찰과 사고방식을 통해 챗 GPT 열풍을 불러일으킨 샘 알트만과 같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0677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구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People at different stages of their lives are doing different things, and they're using Google."  (p.243)


PART 1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거인들의 통찰', PART 2 '실리콘밸리의 미래 설계자들의 통찰', PART 3 '실리콘밸리 혁신가들의 통찰' 등 총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이 책은 애플 창립자인 스티브 잡스를 비롯하여, 빌 게이츠, 래리 페이지, 제프 베이조스, 팀 쿡, 에릭 슈미트, 샘 알트만, 수전 워치츠키, 젠슨 황 등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금세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내로라하는 실리콘밸리 천재들의 명언을 담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명언집들이 그러하듯 우리가 작심하고 외우지 않는 한 어느 한 구절도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필사 혹은 깊은 사유와 같은 시간 할애의 과정이 빠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을 통째로 외울 수는 없다 할지라도 맘에 드는 몇몇 구절을 깊이 생각하고 옮겨 적어보는 것쯤이야 많은 수고가 뒤따르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0943 저는 여러분이 두 가지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본능에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세요.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방향을 빠르게 바꿔야 합니다.

I think it is very important for you to do two things: act on your temporary conviction as if it was a real conviction; and when you realize that you are wrong, correct course very quickly."  (p.329)


사실 어떤 명언집이나 아포리즘도 우리들 삶에 더없이 유익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열정과 창의력, 추구하는 목표를 향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협력 및 지식의 공유, 두려움 없는 도전과 실패에 대한 용인력, 빠른 판단과 실행력 등 실리콘밸리 천재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나 시사점은 같은 분야가 아닐지라도 더없이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평생의 경험에서 얻은 그들의 가르침을 어떠한 노력도 없이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 책 속의 아포리즘을 마음 깊이 수용하고 인생의 가르침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했던 말의 의미를 몇 날 며칠 고민하고 관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제부터 쏟아지던 빗줄기는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삶의 의미를 깨닫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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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근로자의 날을 핑계로 인근의 도서관을 찾았었다. 가볍게 흐린 하늘과 활동하기에 적당한 기온, 주변을 감싸는 연록색 풍경 등으로 인해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차에서 내려 도서관 입구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데 엄마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는 귀여운 아가를 보게 되었다. 혀 짧은 발음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어가며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오는 아이는 이따금 제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며 스스로의 행동이 무척이나 대견하다는 듯 다른 누군가의 동의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이고 우리 oo, 계단도 잘 내려가네." 하면서 아이에게 힘을 실어주곤 하였다. 나는 계단 한켠에 멈춰 서서 멀어져 가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저 아이는 엄마와의 아름다웠던 이 순간을 언제고 기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사건이 결부되지 않는 한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은 너무도 쉽게 잊힐 테니까 말이다. 살면서 기억해야 할 작고 소중한 추억은 오히려 바람처럼 가볍게 잊히는 법이니까.'


우리가 삶의 매 순간순간을 뒤뚱거리는 아이의 느린 발걸음과 그럼에도 넘어지지 않고 앞을 향해 바르게 걸어가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집중력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그다지 불안하거나 불행하지 않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은 아주 짧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건성건성, 온 힘을 다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게 아닐까. 건방을 떨면서 말이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한낮에는 제법 더위를 느낄 만큼 기온이 크게 오르지만 밤에는 소매깃으로 찬바람이 스며든다.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출장을 나갔다가 생각지도 않은 차멀미를 했다. 며칠 앓았다고 이렇게나 체력이 떨어진 걸 보면 나도 이제 건강을 자신할 나이는 서서히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읽어야 할 책이 몇 권 쌓였는데 영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 걱정이다. 모든 게 다 때가 있는 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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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 당신과 문장 사이를 여행할 때
최갑수 지음 / 보다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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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며칠을 앓았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하면서 다녔는데 마스크를 벗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감기 몸살이 찾아왔다. 볼이 빨갛게 열이 오르고 두통과 약간의 어지럼증을 동반한 채로 병원에 들렀을 때, 나와 비슷한 증상의 환자들이 병원 대기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현실이 조금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순번을 기다려 진료를 받고 처방전을 손에 든 채 병원을 나섰을 때는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 후였다. 몸이 아파서 며칠 병가를 내야겠다는 사실을 회사에 알린 후 정적이 내려앉은 숙소로 돌아와 굳게 닫힌 문을 열자 밀렸던 피로감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간신히 약만 챙겨 먹은 나는 저녁도 거른 채 침대에 쓰러져 며칠을 앓았던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때로는 변덕스럽고 요란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한 번씩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욕보다는 이렇게 구질구질한 경험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해야만 내 삶이 완결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끼니를 챙겨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졸음을 몰아낸 몸이 허기를 느낄 때마다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냉장고 속 남은 과일을 건져 먹었다. 그렇게 며칠을 앓았던 나는 겨우 추스른 몸으로 출근을 했고, 여진처럼 이어지는 후유증에 쉽게 잠식당하곤 했다. 갈수록 떨어지는 의욕과 몸살 후유증으로 인해 독서는커녕 텔레비전을 보는 것조차 멀리한 채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기면증 환자처럼 말이다. 열흘 이상의 시간 동안 나는 여행작가 최갑수의 에세이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를 겨우 읽었을 뿐이다.


"죽음을 몇 달 앞둔 여든한 살의 테라스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 같은 건 들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돌아가봐야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는 걸, 최선을 다해봐야 그다지 바뀌는 것이 없다는 걸 그때쯤이면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고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것이다. 즐거움과 사랑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인데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놓치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p.85~p.86)


내가 아팠던 순간에도 지구의 시간은 꾸준히 흘러 화려했던 벚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르게 핀 이팝나무 가로수의 몽실몽실한 꽃망울이 도로변을 환하게 빛낸다. 내가 아침마다 오르는 등산로에도 아카시아꽃의 진한 향기가 산 전체를 들썩이게 하고, 손바닥만큼 펼쳐진 상수리나무의 나뭇잎마다 바람에 날린 송홧가루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다. 이만큼의 시간을 살아냈구나, 하는 뿌듯함보다 손을 놓은 채 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허전함으로 다가온다. 손가락 사이로 휑한 바람이 분다.


"세월이 간다. 하루에 하루씩 꼬박꼬박 가고 있다. 후지와라 신야 영감을 읽다 눈에 띄는 한 구절. "이 세상 살아 있는 생물들은 모두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한 적이 있었던가. 일에도 사랑에도 여행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시월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191)


여행작가라는 직업이 무색하게도 한동안 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는 작가는 일상의 곳곳에서 여행을 떠올렸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고 했다. 자신이 밑줄을 그었던 여러 문장들 중에서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문장들을 뽑아내어 작가의 시선과 글을 더해 사진과 함께 완성한 이 책은 침대 머리맡에 두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읽었던 구절을 곰곰 되새기며 멀리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에도 귀 기울이게 되는, 자주 안 쓰던 마음 관절을 움직이게 하는 그런 책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인생은 고달프고 지루한 것이에요. 간간히 슬프고 고통스럽구요. 더 간간히 즐겁고 기쁘고 감동스럽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인생을 우리가 꾸역꾸역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인간이란 쉽게 잊어버리는 동물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라고 생각합니다만)."  (p.348)


어제 가볍게 비가 지나간 오늘의 하늘은 무척이나 투명하다. 연속되는 지구의 시간은 이렇듯 변화무쌍하고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는 변화의 순간들을 매번 놓치곤 한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탱하기 위해서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보다 웬만한 변화쯤이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내는 게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둔갑력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재능을 한껏 키우고 활짝 꽃 피우게 하는 가장 큰 힘'이라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처럼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민함보다는 둔감함일지도 모르지만 신록이 짙어지는 이맘때쯤에는 하나하나의 변화가 새롭기만 하다. 무기력하던 나의 몸이 겨울을 지나 봄처럼 가볍게 깨어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에도 어쩌면 그런 순간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봄처럼 가볍게 깨어나는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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