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딱 이맘때쯤 세상을 등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의 나이는 쉰두 살이었습니다. 문득 오늘 그 분 생각이 났습니다. 고3 수험생인 딸과 대학 2학년인 아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여서 세상 부러울 게 없다며 입에 미소를 달고 사셨던 자상한 가장이자 남편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러나 어느 토요일 오후, 공원을 산책하던 그 분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그렇게 사랑하던 가족들에게 '잘 있으라'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쩌면 과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인은 비록 심장마비였지만 말입니다.
이따금 보는 TV에서 자식들 웃는 얼굴을 보면 모든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 말하는 어느 가장의 지친 얼굴을 볼 때가 있습니다. 흔히 자식들의 재롱이나 아내의 애교가 '피로 회복제'라고 말하더군요. 물론 직장에서 퇴근하여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갖는 사람에게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일터로 향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피로 회복제가 아니라 과로 촉진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역치(閾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생물체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를 나타내는 값을 뜻하는 말이죠. 이를테면 우리에게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신경계로 그 정보를 이송하여 반응을 이끌어내게 하는 최소한의 자극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 회로는 육체와 정신이 소통하는 통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피로가 쌓이는 상황인데 아이의 웃음을 보며 육체의 피로를 잊거나 무시한다는 것은 어쩌면 육체와 정신의 소통을 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육체에는 육체에 필요한 원칙이 있고, 정신에는 정신에 필요한 원칙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피로를 호소하는 육체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의 원칙을 무시하는 매우 잘못된 행동입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듯이 육체가 건강하지 못하면 주변 사람에게 짐만 될 뿐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그분처럼 앓지 않고 죽는 것도 가족을 위하는 길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나의 생각은 다릅니다. 적어도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자신은 편할지 모르지만 남은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상처가 됩니다. 유산만 많으면 문제 없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유산과 상관없는 그들의 인생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유산을 남겨줬다 한들 지키지 못한다면 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른 나이에 부모 중 한 명을 잃는다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 있을까요? 그것은 분명 아이들에 대한 크나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쓰다 보니 매우 우울한 얘기가 되어버렸군요. '피로 회복제'인지 '과로 촉진제'인지 잘 판단할 일입니다. 그게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