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저편 무대에는 물수제비를 뜨는 어린 시절의 내가 등장하곤 한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여름 한낮이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종일 물장구를 치던 아이들이 오소소 소름이 돋은 몸으로, 강의 이쪽 모래밭에 나란히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다, 누군가의 느닷없는 제의가 있었고, 아이들은 저마다 강변에 흩어진 조약돌을 고르고 있다. 동글동글 마모된 얄팍한 돌을 찾아 이곳저곳을 훑는 그 짧았던 시간에도 몸의 물기는 금세 사라진다. 따가웠던 햇살.

 

금방이라도 닳아 헤질 듯한 누런 팬티 차림의 한 아이가 자세를 잡는다. 마른 체격에도 굵고 실팍한 등근육이 시선에 들어온다. 몸을 비스듬히 눕혀 수면과 한껏 가까워지도록 자세를 취하는 게 요령이라면 요령이었다. 오후의 잔양(殘陽)은 뜨겁기만 하다. 달궈진 돌을 피해 조심조심 강가로 모이는 아이들. 어서 던지라고 성화다.

 

손을 떠난 돌은 어쩌면 수면 위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물보라를 튀기며 곤두박질 쳤거나, 과한 힘으로 던진 까닭에 단 몇 걸음만에 저쪽 강기슭으로 튀어 올랐거나, 물 위를 사뿐사뿐 밟으며 저쪽 강기슭에 가까워지던 돌멩이가 나른한 곡선을 그리며 종종걸음으로 회귀하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중력을 거스르며 통통 튀어오르던 물수제빗돌의 발걸음을 기억한다. 어쩌면 수면 위로 반짝이던 여름 햇살의 눈부심을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까맣게 탄 어깨 위로 드문드문 마름버짐처럼 허옇게 일어나던 화상 자국들. 건너편 숲에서는 뻐꾸기가 한나절 울었을게다. 저녁 어스름이 지고 산그늘이 깊은 음영으로 강물을 잠식할 때면 저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 "아무개야, 밥 먹어라!"

 

이따금 나는 수면 위를 가볍게 걷던 조약돌의 흔적을 아스라히 좇곤 한다. 사는 게 조약돌처럼 가벼웠던 시절이었다. 수면 위로 튀어오르던 조약돌의 발걸음을 합창을 하듯 입맞추어 하나, 둘, 셋, 넷...세던 친구들. 세월의 저편에서 만나는 그 시절의 추억. 친구들 모두 삶의 무게를 딛고 세월의 강을 가뿐히 건너가길 나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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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있었던 알제리와 우리나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더군요. 그것은 주로 어느 일간지나 방송에서 들었던 전문가의 분석에 자신의 의견을 조금 덧칠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들은 모두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감정을 분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벌개진 얼굴로 침을 튀겨 가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모습은 과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월드컵 대표선수들에게 그닥 기대도 하지 않았고 경기 결과에 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지기를 바란 것은 물론 아니었죠. 다만 어떤 선수가 참가했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경기도 보지 않았으니 이렇다 저렇다 논평할 꺼리가 없었을 뿐입니다.

 

세계 무대에서 우리나라 스포츠의 위상이 지금처럼 높아진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닙니다.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달고 첫 금메달을 딴 것도 1976년의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언제부턴가 우리는 승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듯합니다. 당연히 이길 것이라 예상했던 경기에서 졌을 때의 낭패감이나 모멸감은 곧바로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게 마련이지요. 더구나 알제리전과 같은 졸전을 본 후에는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하게 들었겠지요.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제는 조금 더 현명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축구와 같은 국가 대항전에서의 승리나 올림픽의 금메달 획득이 무에 그리 중요한지 냉정하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승리했을 때의 기쁨은 잠깐입니다. 국민 전체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것도 아니지요. 기껏해야 조금의 위로, 잠시 잠깐의 기쁨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엘리트 스포츠에 그 많은 돈을 쏟아부음으로써 자살률 1위, 고아 수출국 2위, 교통 사고 사망율 OECD 1위 등 온갖 불편한 진실들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고 싶은 사람은 자비로 출전하게 함으로써 지든 이기든 그 사람의 열정을 존중하고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는 게 국민 정서나 국가 경제를 위해 훨씬 더 값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엘리트 교육에 매몰된 대한민국의 정서는 약자와 패자에 대한 비난 일색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반면 승자는 모든 권력과 존경을 독식하게 되었지요.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국민 모두를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자신들은 모두 승자이고 마땅히 존경과 대우를 받아야 하는 사람쯤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약자와 패자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세상, 누구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는 정녕 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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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총리 후보자의 '말'이 연일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이제껏 '말'로 먹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지만 자신의 '말'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여러 사람들의 '말'이 언론에 오르내렸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지만, 그 '말' 한마디로 온 국민들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걸 보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네 속담이 허언이 아닌 듯싶다.

 

20세기초 판소리가 변하여 만들어진 '창극'이라는 무대극이 있었다.  지금은 그 명맥마저 끊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 사실이지만 한일합병 이후 나라를 잃고 실의에 빠진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했던 것이 '창극'이 아닐까 싶다.  1인다역의 마당극 형태인 판소리가 다인다역의 무대극 형태로 전환된 창극은 창과 더불어 위트 있는 대사로 국민들을 울리고 웃겼던 듯하다.

 

그러나 총리 후보자의 '말'은 창극의 대사와는 달리 국민들에게 위로나 감동을 주기는커녕 분노와 탄식만 더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의 말은 코미디 수준을 넘어 저질 개그로도 보아주기 어려운 수준이다.  다음과 같은 말에 국민 중 누가 동의할 수 있겠나.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아까 말했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너희들은 이조 5백년 허송세월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남북분단을 만들게 주셨어. 저는 지금 와서 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우리 체질로 봤을 때 한국한테 온전한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받아와가지고 경제 개발할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 우리보다 일본이 점점 사그라지잖아요, 그럼 일본의 지정학이 아주 축복의 지정학으로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제주도 4·3 폭동사태라는 게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서(제주도) 반란을 일으켰어요."

“조선 민족의 상징은 아까 말씀드렸지만 게으른 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거 이게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

 

“우리나라는 예전과는 다르게 선진국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굳이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일 정도로 나약하지 않은 국가가 됐다"

 

"일본에 대해 더 이상 우리 입으로 과거문제를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해방된 지 6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과거에 매달려 있는 우리가 부끄럽다"

 

"아이들이 공짜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이 식량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선 북한 주민과 내용면에선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그가 한 '말' 중 어떤 대목에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그가 혹시 일본 국적을 갖고 있지나 않은지 의심스럽다.  그가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하다가는 '창극'에 쓰이는 '말'이 아니라 '참극'에 쓰이는 '말'이 되지나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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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4-06-13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말종들을 만든 것은, 이승만입니다.

친일파 일소를 위한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박살내서,

친일파를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출세하게 해준 장본인인데,

지금 국립묘지(현충원)에 있죠. 독재자 박정희와 함께...

꼼쥐 2014-06-19 17:23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친일을 했던 사람들의 후손이 떵떵거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 이 땅의 현실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화도 나구요.
 

가까운 공원이나 산에서 꾸준히 몇 년 동안 아침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지나치며 눈인사를 주고받는, 또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 줄잡아 대여섯 명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게 영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다. 간밤에 꾸었던 시시껄렁한 꿈의 기억들을 얼굴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바른 채,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게다가 개기름인지 땀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추레한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지을 때의 표정이란...

 

아무튼 나에게도 좋든 싫든 눈인사를 하며 지나치는 사람이 몇몇 있다.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인사만 주고받다가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이름은 물론 그 사람의 과거 경력 두어 가지 정도는 듣게 마련인데 웃기는 건 그 정보를 전달한 주체가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마 바람이나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내가 아침마다 산을 오르면서 알게 된 사람 중에는 욕쟁이 할머니 A씨와 슈나우저 할머니 B씨, 순둥이 아저씨 C씨와 성악가 할아버지 D씨, 그리고 육체파 젊은이 E씨가 있다. 물론 그 별명은 모두 내가 지은 것이다. 본인들은 그렇게 불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나에게 가장 강력한 인상을 심어 준 사람은 당연 욕쟁이 할머니 A씨이다. 과거에 젊었을 때는 발레를 전공하여 발레 학원도 운영했었다는데 여든두 살의 나이에 이른 요즘은 산을 오르는 것조차 힘겨워 한다. 그런데 유난히 에너지가 넘치는 순간이 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산 중턱에 위치한 밤 농장 주인과 시비가 붙을 때이다. 

 

아, 요즘은 정말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철이다. 농장 주인 아저씨는 50대 중반이나 60대 초반쯤의 나이로 보여지는데 소문에 의하면 홀애비라고 한다. 등산로와 인접한 곳에 밤 농장이 있으니 자연 등산객들과는 사이가 좋을 리 없다. 등산로에 떨어진 밤송이를 줍는 것까지야 누가 뭐랄 수 없겠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어디 그런가. 줍다 보면 욕심에 철조망 안쪽까지 기웃대게 마련이고 이 모습에 격분한 주인 아저씨는 매년 가을이면 등산객들과 사흘이 멀다 하고 시비가 붙었다.

 

그나마 밤이 열리지 않는 다른 계절에는 농장 주인 아저씨도 등산객들과 인사도 하고 가벼운 얘기도 나누는 편인데 어쩐 일인지 오늘 아침에는 욕쟁이 할머니 A씨와 느닷없는 시비가 붙었던 것이다. 이유인 즉슨 욕쟁이 할머니 A씨가 허락도 없이 밤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왕꼬들빼기 새순을 뜯으러 들어갔던 모양인데 평소에 억화심정이 있었는지 주인 아저씨는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격하게 화를 냈다.

 

지나던 여러 사람이 만류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시비는 말싸움만으로 그럭저럭 끝이 났지만 그 불똥이 나한테까지 미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모여든 여러 사람 중에 그래도 내가 만만했던지 욕쟁이 할머니 A씨는 나를 붙들고 주인 아저씨에 대한 험담을 한나절 늘어놓는 게 아닌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할머니에게 붙들려 농장 주인 아저씨의 험담만 구구절절 듣다가 산을 내려왔다.

 

그나저나 욕쟁이 할머니 A씨에 따르면 농장 주인 아저씨가 아침 일찍 나오는 이유는 여자를 꼬시기 위함이라는데 사실인지 모르겠다. 삼자대면을 하여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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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행연습을 하듯 이른 더위가 극성이었던 5월.  세월호의 아픔과 끈적거리는 슬픔을 안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듯 슬픔과 더위가 용융된 대기의 불쾌함에 책을 읽는 일마저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밝아졌으면 좋겠다.  어룽어룽한 그 느낌이 사라지고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투명해졌으면 좋겠다.  6월에는 그런 책을 만났으면 좋겠다.

 

 

얼마 전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소설의 일반적이고도 정형화된 구성에서 벗어나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이었다.  지적인 문체도 간과할 수 없는 매력이지만 말이다.  그때의 좋은 느낌으로 이 책을 고른다.  설레고 기대된다.

 

 

 

 

 

 

 

 

 

 

 

국내에 번역된 후지와라 신야의 책은 거의 다 읽었었다.  <인도 방랑>을 비롯하여 <동양기행>, 인생의 낮잠>, <황천의 개> 등 그의 저작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작품 내면을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이었다.  그는 사진작가이자 여행가이기 이전에 올바르게 사유하는 참인간이었다.  나는 그 점이 좋다.

 

 

 

 

 

 

 

 

정혜윤 PD의 글에서는 성격만큼이나 꼼꼼함이 배어나온다.  하나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그녀의 세심함이 때로는 답답할 때도 있지만 작가의 작품을 여러 권 읽어 그 권수가 더해질수록 답답함은 미더움으로 변한다.  그리고 작가의 해박한 지식에 탄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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