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400쪽이 넘는 긴 이야기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같은 호흡으로 써 내려간다는 건 웬만한 내공으로는 시도조차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작가도 감정이 있고, 자신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까닭에 기쁨과 슬픔, 격정과 좌절의 파고에 흔들리지 않을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의 파고에 휩쓸려가며 정신없이 써 내려가다 보면 현실에서 작품을 쓰는 '나'는 사라지고 자신이 구축한 소설의 세계 한 귀퉁이에 깊이 자리를 잡은 소설 속의 '무명 씨'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가가 1인칭 소설을 기피하는 이유도 어쩌면 소설의 세계와 나의 현실을 착각하거나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지도 모른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장편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호흡으로 써 내려간 수작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건축이라는 전문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개개인의 삶과 사랑, 자연과의 조화 등을 잔잔하고 평온하게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페이지를 넘겨갈수록 담담하고 밋밋한 매력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만다. 우리가 슴슴한 육수와 담백한 메밀면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평양냉면의 깊은 맛에 시나브로 중독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건축을 전문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지나치게 많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테지만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는 소설이니만큼 이 참에 건축 분야에 대해 어깨너머 지식을 쌓는다 생각하면 불만은 조금 사그라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비는 한 시간 남짓해서 그쳤다. 유리창을 열자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비에 씻긴 초록에서 솟구치는 냄새. 서쪽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밝아지면서 일몰 직전의 광선을 숲에 던진다. 완전히 황혼에 가라앉아가던 나무들의 잎사귀 가장자리가 오렌지색으로 빛난다. 매미는 이제 암놈 부르기를 단념했는지 지짓 하고 짧게 울고는 계수나무에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p.151~p.152)


소설 속에서 '선생님'으로 등장하는 무라이 슌스케는 일본의 건축가 '요시무라 준조'가 모델이었다. 또한 요시무라 준조는 우리나라 건축가 승효상의 스승인 김수근의 스승이기도 하다.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의 소장인 무라이. 그는 수줍고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건축 설계에 있어서만큼은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면을 견지하고 있다. 건축학도로서 무라이 슌스케의 비범함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나'는 별 기대감 없이 무라인 건축설계사무소에 지원하였고, 오랫동안 신규 채용을 하지 않았던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가 '휠체어 타는 식구가 있는 가족을 위한 집 설계' 플랜을 제출한 '나'(사카니시 도오루)를 채용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카니시 군은 그렇게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의 일원이 된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주절주절 말할 때와, 멍하니 혼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릴 때, 여러 가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니까, 방도 거기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는 데 좋다, 고."  (p.271)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는 도쿄의 기타아오야마에 위치해 있지만 매년 여름이면 고지대의 화산 기슭에 있는 아오쿠리 마을의 사무실에서 생활한다. 국립 현대 도서관의 설계 경합을 앞두고 있는 무라이 설계사무소 직원들은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의 여름 별장인 아오쿠리 마을의 사무실에서 도서관의 설계에 매진하는 한편 '선생님'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아오쿠리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설계사무소의 직원은 대부분이 남자였지만 선생님의 조카인 마리코와 직원인 유키코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물론 신입사원인 사카니시 군에 비하면 마리코나 유키코는 둘 다 연상의 여인이었지만 말이다.


설계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무라이 선생은 뇌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고, 경합에서는 패하게 되어 매일 아침 설계실을 채우던 연필 깎는 사각사각하는 소리의 겹침은 옅어져 갔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선생님'의 건축 철학을 간직해 온 '나'는 숲 속 여름 별장으로 운명처럼 다시 들어선다. 별장 안에 그대로 놓여 있는 국립도서관의 하얀 모형을 손으로 만져보면서 무언가 억누를 수 없는 것이 쓰러져가는 여름 별장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한 세대가 저물고 자신도 역시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의 일몰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건축가로서의 걸음을 시작한 이 건물은 그 이전의 긴 증개축 역사를 포함하여 선생님과 그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여기까지 생명을 이어온 것이다. 오랫동안 잠든 채였지만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이 여름 별장은 다시 한 번 자네가 새롭게 만들면 돼. 탁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된 현실에 숨결을 불어넣으면 되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그때의 음성 그대로 내 귀에 되살아난다."  (p.416)


숲을 통과하여 불어오는 바람처럼 소설은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진행된다. 작가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가볍게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가면서 닫혔던 커튼 사이로 한 뼘 진리의 햇살을 전해주고 있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름다웠던 건축물도 언젠가 그 쓰임을 다하고 스러지는 것처럼. 그러나 푸르렀던 여름날의 추억은 각인된 채로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쓰지 않아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은영 소설의 장점은 작가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이 한 뼘 넓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이 일천하여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삶의 모습도 무척이나 제한적일 것이라며 지레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고 정해진 틀 안에 자신의 생각을 가두곤 했었는데,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세상 어떤 사람의 삶이든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폭넓은 가슴의 소유자로 변해가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험은 독서를 통해 작가가 펼쳐 보이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겪어볼 수 있기 때문이지만, 적어도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을 쓰는 작가의 태도입니다. 소설이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만으로 독자를 변화시키고,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삶을 진심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현실감의 차원에서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게 느끼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소설을 현실 속 누군가의 실제 삶으로 인식하느냐 혹은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소설을 읽는 독자의 감동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소설을 쓰는 작가의 태도는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작가의 상상력과 동일한 힘을 발휘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리는 늘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쳤고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자신의 분노로부터, 불안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도망쳤고 최대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 대신 미리는 일에 몰두했다. 동료들은 그녀가 일중독자에 가깝다고 말했는데 그건 일견 사실이었다. 일이 좋기도 했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면 공허함을 느꼈고 불안해졌으니까."  (p.213 '무급휴가' 중에서)


<애쓰지 않아도>는 고등학교 시절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던 유나를 선망한 나머지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던 나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엄마를 비롯한 자신의 비밀을 유나에게 고백하기에 이르는데 그 비밀은 곧 학교 친구들에게 퍼져나갔고,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 나는 유나를 멀리하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 데면데면한 관계가 된 유나에 대해 반추하면서 모든 게 미숙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다는 내용의 표제작 '애쓰지 않아도'를 비롯하여 '데비 책', '꿈결', '숲의 끝' 등 13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단편집입니다.


"우리에겐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지도.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이렇게 눈치 없는 저도 알아요. 제가 덜 미숙했더라면, 조금이라도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더라면, 같은 가정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죠.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면,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가 서로를 기억한다면, 그때는 슬픔보다도 그리움이 더 큰 감정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겠지요."  (p.164 '손편지' 중에서)


'학대받은 아이가 자라서 학대하는 어른이 된다'는 식의 지하철 공익광고를 보고 상처받는 사람을 다룬 '손 편지'와 '우리가 그네를 타며 나눴던 말'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작가는 우리 사회의 아동과 약자,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폭력에 대해 고발하고 점점 교묘하게 은폐되는 혐오와 차별에 대한 폭력성에 분개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단지 우월한 쪽에 서 있다는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약자를 괴롭히면서도 그것이 마치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이라도 되는 양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영원히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유나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게 어떤 모습이든 늘 과하고 넘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이제 애쓰지 않아도 별다른 감정 없이 기억할 수 있다. 아마 영원히 그 애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알고 싶다. 유나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 애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P.32 '애쓰지 않아도' 중에서)


마지막에 실린 단편 '무급휴가'에는 그림을 전공한 두 여성이 등장합니다. 친구 사이인 미리와 현주. 비행기 승무원으로 근무하던 미리는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는 현주와 재회하게 됩니다. 마음 넓고 푸근한 현주를 보면서 미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합니다.


"미리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을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 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P.220 '무급휴가' 중에서)


비가 그친 하늘은 쏟아지는 햇살로 가득합니다. 먹장구름에 막혔던 하늘이 답답했었다는 듯 그야말로 마음껏 쏟아지는 햇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것들뿐인데, 나란히 앉아서 그네를 탈 수 있는 시간,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빛으로 마음껏 빛날 수 있는 시간, 서로에게 커다란 귀가 되어줄 수 있는 시간 말이야.'(p.127 '우리가 그네를 타며 나눴던 말' 중에서)라고 썼던 작가의 대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커다란 귀가 되어주는 시간을 필요한 만큼 내어 줄 수 있는 가슴 넓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하는 시간. 오늘은 금요일. 그리고 이어지는 연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부가 고기를 낚듯 작가는 단어와 문장을 낚는다. 그것은 경험을 낚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가 건져 올린 단어와 문장들은 삶의 경험을 채색하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혹은 가까운 이가 들려주는 가벼운 농담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쓰고 다듬을 이야기의 경험을 추리거나 선별하고, 선택된 경험에 맞는 단어와 문장을 고르는 게 작가의 일인 셈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선택한 몇몇 단어와 문장들로 자신의 삶 전체를 표현할 수도 있겠다는 꿈을 꾼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초라하지도 그렇다고 엄청 대단하지도 않다는 걸 알 만한 나이가 되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닫힐 때, 우리는 홀로 앉아 무언가를 써야 합니다.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혹은 나 아닌 것에 대하여, 너 아닌 것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이 아닌 것에 대하여."  (p.64)


작가 황경신의 글을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작가가 쓰는 문장의 리듬을 좋아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리듬과 작가가 살아온 삶의 리듬이 어느 정도 공명을 일으키고, 같은 파장으로 진동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도 아닌 산문에 무슨 리듬이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프로 작가의 글은 대부분 오르내림과 길고 짧음의 일정한 호흡이 존재하고, 그 호흡이 나와 맞지 않거나 나의 호흡이 작가의 호흡을 따라가지 못할 때 억지로 책을 읽는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겨울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조용조용 날려 보내고 있었다. 네가 살아 있다면, 너는 또 한 번의 봄과 재회할 것이다. 인연과 마음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 남쪽과 북쪽은 재회할 것이다. 너는 눈을 감고 천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해 여름의 소원을 다시 한 번 빌었다. 지금은 속절없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듭 되풀이되고 차곡차곡 모아져야 할, 지난하고 지극한 소원이었다."  (p.180)


황경신 작가의 신간 <달 위의 낱말들>은 '여는 글'에 이어 1. '단어의 중력', 2. '사물의 노력'의 총 2부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내리다, 찾다와 같은 동사 11개와 선택, 미래, 연민, 컴퓨터 등 27개의 명사를 건져내어, 자신이 선택한 단어와 관련된 각각의 경험과 느낌을 적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 듯한, 작가와 독자라는 이질적인 경험의 장에서 존재하는 두 부류에 있어 작가의 도구인 낱말을 매개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독자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지 않을까 싶다.


"어느 적막하고 쓸쓸한 밤, 당신이 그리워 올려다본 하늘에 희고 둥근 달이 영차 하고 떠올랐다. 달은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달의 표면에 달을 닮은 하얀 꽃들이 뾰족 솟아 있었다. 썩은 열매의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달로 날아가, 꼬물꼬물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고 꼬잎을 여는 중이었다. 터지고 쫓고 오르는 것들, 버티고 닿고 지키는 것들이 거기 있었다. 뭔가 다른 것이 되어, 말랑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예쁜 것이 되어."  (p.5 '여는 글' 중에서)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작가의 글이 전에 비해 무겁고 깊어졌다는 것이다. 문장의 리듬을 중시하는 작가였기에 의미와 깊이보다는 팔랑팔랑 가볍더라도 입에 착착 붙는 리듬만 살아 있다면 그저 좋아했을 듯한데, 이제는 문장의 깊이와 의미 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늘은 내내 어둡고 간간이 비가 내린다. 설령 대단치 않은 것들도 그 너스레가 너무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게 되는 책이 있고, 가볍고 평범한 것들로부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깊은 의미를 던져 주는 까닭에 날이 새는 줄도 모른 채 빠져들게 되는 책이 있다. 황경신 작가의 글도 달이 차는 것처럼 봉긋 살이 오르는 듯하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고 오늘은 달을 보기는 어렵겠다. 작가가 보았던 희고 둥근 달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쩌다 보니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대부분을 읽었다. 일부러 작정하고 전작 읽기에 나섰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우연찮게 그리 되었을 뿐인데, 그와 같은 우연도 하나의 경험 축에 드는지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 전반에 익숙하게 되었음은 물론 작가가 다루는 평범하지 않은 연인들(어쩌면 소수자에 가까운)의 삶과 사랑에도 특별한 거부감이나 저항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익숙함이란 언제나 반복에서 비롯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최근에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집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에는 표제작을 포함하여 총 9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1989년에서 2003년 사이에 쓴 작품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은 2008년 출간되었던 것을 리커버판으로 새롭게 찍어낸 것이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위해 기꺼이 엘비스 프레슬리가 되어주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러브 미 텐더'를 비롯하여 에쿠니 가오리의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선잠'등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우리 이웃의 이야기에서부터 작가만의 상상력이 지어낸 듯한 독특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들이 단편소설을 읽는 묘미를 더해준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인간.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은 미치도록 선량을 동경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불량에 이끌리고 그리하여 결국, 선량과 불량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평생 선량을 동경하고 불량에 이끌리면서 살아간다."  (p.61 '선잠' 중에서)


나는 단편집의 리뷰를 쓰는 일에 몹시 서툴지만 책에 실린 단편소설 '선잠'을 위주로 에쿠니 가오리의 세계를 펼쳐보기로 한다. 대학생인 히나코는 아내가 있는 연인 고스케 씨와 6개월 동안 동거했다. 시인인 고스케 씨는 팔리지도 않는 시집을 두 권이나 냈다고 한다. 아내가 친정에 가 있는 사이 히나코는 고스케 씨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순애보적인 사랑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스케 씨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고, 히나코는 이별 파티를 준비한다. 히나코는 알지도 못하던 신문배달원 토오루를 파티에 초대했고, 토오루는 여자 친구 대신 동생인 후유히코와 함께 왔다.


"나는 가 버린 여름을 떠올렸다. 토오루가 있고, 후유히코가 있고, 선잠처럼 혼돈스러웠던 여름. 자동차 운전면허를 딴 여름. 애정을 매장해 준 여름. 해 질 녘 바람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해 질 녘이라는 애매한 시간이 나는 좋다. 주부가 장 보러 가는 시간,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노는 시간, 장밋빛과 회색빛과 연푸른 빛이 한데 섞인 듯한 공기."  (p.98 '선잠' 중에서)


고스케 씨와 헤어진 후 히나코는 고등학교 3학년인 토오루와 사귀게 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스케 씨를 향해 있다. 고스케 씨의 꿈을 꾸고 고스케 씨의 반려묘가 되어 곁에 있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사랑의 열병을 호되게 앓고 난 후 히나코는 용기를 내어 고스케 씨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완전한 이별을 결심한다.


"나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람이 일순 내 속을 휩쓸고 가 버린 듯한 , 온몸이 텅 비어 버린 듯한 휑뎅그렁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 7월의 달밤 아래 확연히 드러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마치 내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여 사락사락 거품이 이는 논 한복판에 떨어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p.45 '선잠' 중에서)


우리는 어쩌면 일시적으로 소유했었지만 영원히 가질 수는 없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자신의 사랑을 통해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선잠'의 주인공인 히나코가 유부남인 고스케 씨를 자신의 연인으로 소유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영원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집착이란 다만 습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히나코의 여름처럼 우리도 역시 그런 여름을 통과하고 있을 테지만 히나코의 '선잠'처럼 혼돈스럽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에서 오는 쓸쓸함은 어쩌면 관계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진 허허로움에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은 팽팽한 압력이 된다.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수분의 압력이 되는 것처럼 커다란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 열기의 압력이 된다. 그러므로 감당할 수 없이 큰 기쁨이나 슬픔, 분노나 그리움 등은 오롯이 감정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차라리 질병에 가깝다. 밖으로 분출되거나 스스로 용해되지 않은 감정은 자신의 몸 곳곳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정에 가장 솔직한 이는 시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몸에 오롯이 받아 한 줄 시를 통해 분출한다. 한 시인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한 줄 '시(詩)'로 읊지 못한다면 이 서러운 세상을 어찌 건널 수 있으랴. 나는 이따금 시에서 분출하는 시인의 슬픔을, 분노를, 차마 담지 못한 그리움을, 웃음기마저 지워버린 기쁨을 시인을 대신하여 갈무리한다. 이렇게 나누는 감정의 품앗이가 없었다면 뉜들 세상살이가 그저 쉽기만 할까.


감기


당신이 들여다보는 흑백 사진 속에 내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마주 보았다


당신의 사진 속은 늘 추웠다

기침나무들이 강을 따라 콜록거리며 서 있었다


눈을 뜨면 언제나 설산 오르는 길이었다


간신히 모퉁이를 돌아서도 희디흰 눈발

날카로운 절벽 아래로 툭 떨어지는 가없는 벼랑이었다


얼어붙은 하늘처럼 크게 뜬 당신의 눈을 내다보는 저녁


동네에 열병을 옮기는 귀신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굴뚝마다 연기들이 우왕좌왕 몸을 떨었다


당신은 내 몸에 없는 거야 내가 다 내쫓았거든


내 가슴에 눈사태가 나서 한 시간 이상 떨었다


기침나무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 뭉치를 떨구자

벌어진 계곡에서 날 선 얼음들이 튕겨져 나왔다


맨얼굴로 바람을 맞으며, 입술을 떨며

나는 얼어붙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당신이 들여다보는 여기에서 나가고 싶었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 <당신의 첫>을 읽었다. 시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폐부를 찌르는 시인의 감정이 때로는 나의 심장을 겨누기도 하고, 노을을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은 줄곧 빈 허공을 맴돌기도 하였다. 김 시인에게 '시란 불행을 더 불행답게, 슬픔을 더 슬픔답게, 파괴를 더 파괴답게 하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이따금 등장하는 젊은 여자와 늙은(혹은 나이 든) 여자가 사는 이곳은, 발가벗고, 때리고, 엉키고, 뒹굴던 메아리나라.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풍경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질겁했습니다'라고 했던 당신의 고백.


시를 읽는다는 건 허공에 걸린 자신의 조각상을 향해 칼을 겨누는 일이다. 차갑게 식은 그 몸뚱어리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칠 리는 없지만 한나절 그렇게 난자하다 보면 어느새 내 눈물이 붉은 피로 변해 흐르고, 내 이웃이 흘린 눈물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삶의 시간들이 뜨거운 숨결의 연속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구 한 자 한 자를 되짚으며 깨닫게 된다.


태풍 송다가 비껴가는 일요일 오후. 옷이 비에 젖어 후줄근할지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뽀송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손에 잡았던 김혜순 시인의 시집. 장마철인데 나는 마치 황폐한 사막에 다다른 듯 모래바람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