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 문장 - 1년은 사람이 바뀔 수 있는 충분한 시간
조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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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아무리 정교하게 계획하고 절제하며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나아간다고 해도 모든 게 자신이 처음 구상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변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삶의 신비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되는 대로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신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지요. 살다 보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은 그저 운명이려니 생각하면서 툭툭 털어버릴 필요가 있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집 근처의 도서관을 시간이 날 때마다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번질나게 드나들다 보니 도서관에 근무하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을 여럿 알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햇수로 십여 년 이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만난 인연들은 저보다 한참 연배가 높은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은퇴 후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취미 생활을 하면서 소일하는 것이지요. 그분들 중 한 분은 모 은행에서 교육을 담당하셨던 분인데 지금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전에는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을 만날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분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도서관에서 반나절을 보내곤 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꺼내 읽다가 기억해야 할 문구를 볼라치면 반드시 자신의 노트에 기록하여 간직하곤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모은 노트만 수십 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만나기 시작했던 어떤 시점부터는 자신의 노트를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노트에 다시 간추려 꼭 기억해야 할 문구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언젠가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뜻도 내비쳤습니다. 인문학자 조희가 쓴 <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 문장>을 읽으면서 그분 생각이 났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문학, 철학, 경영, 자기계발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책 한 권을 저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독서를 하고 요약하는 일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장이 저에게 인생문장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큰 울림을 주었던 몇 문장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지요."  (p.4 'prologue' 중에서)


SESSION 1 '운명에 맞서 개척하는 인생, 도전의 계절', SESSION 2 '달콤한 환상 꿈같은 사랑, 열정의 계절', SESSION 3 '어떨 때는 배반하는 인생, 인내의 계절', SESSION 4 '흐르는 시간 영원한 사랑, 이성의 계절'의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읽고 발췌한 하나의 문장을 제시하고 그 밑에 저자의 코멘트를 다는 형식으로 제작되어 365개의 문장으로 꾸려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1년 365일을 이 책과 함께 하면서 결심을 굳히고 부록에서는 책에 실린 문장 중 20개를 선정하여 '나의 인생문장집'을 만드는 미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공지영 작가의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에서 발췌한 '일어나 걷는 자는 동사하지 않는다.'는 문장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주저앉고 싶은 순간을 종종 맞이합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으면 추운 날씨와 내리는 눈에 그대로 얼어붙어 죽고 말죠. 반면에 일어나 걷는 자는 땀이 나면서 체온이 올라가고, 그 체온에 눈이 녹아 동사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단 10분이라도 밖으로 나가 걸어보세요. 주저앉고 싶었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질 것입니다."  (p.213)


내가 도서관에서 만나 지금까지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분도 그렇게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그분의 인생 문장집에 대해 그 노트를 물려받을 당사자, 이를테면 그분의 아들은 그것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다고 내게 하소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 역시 결혼하여 슬하에 어린 아들을 두고 있지만 아버지가 했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아 자신의 아들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줄 생각은 없을 듯합니다. 물론 그렇게 될 리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그분의 아들은 아버지의 노트에 대해 그저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의 인생길이 남들보다 수월하고 편한 길이 되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2022년의 마지막 남은 한 주를 보내는 오늘, 새해에는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며칠 지나기도 전에 금세 잊어먹기도 하겠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새해는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맞아야 하겠습니다. 인문학자 조희의 <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 문장>을 읽었던 것도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다가오는 새해는 올해와 다를 것이라는 희망,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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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다녀왔습니다
신경숙 지음 / 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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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소설가라는 책무를 다하기 위함인지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 작품에 비해 산문집은 작품 권수가 현저히 적다. 소설가로 등단한 어떤 작가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치중하는 탓에 소설가인지 에세이스트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에 비하면 신경숙 작가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명확히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불미스러운 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등단한 지 40년 가까운 작가가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 하나 없이 홀로 깨끗한 것도 이상한 일, 작가를 아끼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전히 작가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다. 표절을 옹호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표절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얼굴 똑바로 들고 나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신경숙 작가는 꽤나 양심적인 게 아닌가.


"물론 나는 이보다 더 나빠져도 요가를 계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가는 이제 나에게 한끼 식사 같은 것이 되었으니까. 계속 숨을 쉬듯이, 내가 작가이니 계속해서 글을 쓰듯이 요가는 이제 조건 없이 나의 일상이 유지되는 한 계속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  (p.122)


내가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우울한 그늘>을 읽었던 건 딱 10년 전이다. 작가의 소설 작품만 읽어오던 내가 산문집을 읽었을 때의 감회는 새로운 것이었다.(신경숙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소설가라는 책무를 다하기 위함인지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 작품에 비해 산문집은 작품 권수가 현저히 적다. 소설가로 등단한 어떤 작가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치중하는 탓에 소설가인지 에세이스트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에 비하면 신경숙 작가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명확히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불미스러운 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등단한 지 40년 가까운 작가가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 하나 없이 홀로 깨끗한 것도 이상한 일, 작가를 아끼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전히 작가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다. 표절을 옹호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표절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얼굴 똑바로 들고 나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신경숙 작가는 꽤나 양심적인 게 아닌가.


"물론 나는 이보다 더 나빠져도 요가를 계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가는 이제 나에게 한끼 식사 같은 것이 되었으니까. 계속 숨을 쉬듯이, 내가 작가이니 계속해서 글을 쓰듯이 요가는 이제 조건 없이 나의 일상이 유지되는 한 계속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  (p.122)


내가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우울한 그늘>을 읽었던 건 딱 10년 전이다. 작가의 소설 작품만 읽어오던 내가 산문집을 읽었을 때의 감회는 새로운 것이었다.(https://blog.aladin.co.kr/760404134/5263012) 그렇게 나는 강산이 한 번 바뀐 후에 제목도 생소한 작가의 에세이집을 손에 들었던 것이다. 책의 제목인즉 <요가 다녀왔습니다>. 요가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택의 표지에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자가 없었더라면 결코 쳐다보지도 않았을 제목 아닌가.


"나는 체력을 잃고 난 뒤에 자주 심각해지고 좌절에 빠지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물건을 사납게 내려놓고 문을 쾅쾅 닫고 기다림에 인색해졌다. 마구 날뛰는 말 한 마리가 심장 부근에 살고 있다가 어딘가로 내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자책하곤 했는데 요가를 시작하고는 그게 사라졌다."  (p.37)


15년 넘게 요가를 하며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 일상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한 이 산문집은 달라질 것 없는 우리네 일상처럼 지극히 편안하고 단조롭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경숙의 산문집은 <우울한 그늘>이 거의 유일했던 까닭에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의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면서 읽게 되는데 <요가 다녀왔습니다>는 너무나 평이한 문체와 마치 집안에서 입는 일상복의 느낌이어서 독자이자 팬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신경숙 작가도 그렇고 시나브로 나이가 들고 있음이다. 다름을 통하여 남보다 앞서가려 했던 젊은 시절의 마음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다른 작가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평이하고 소탈한 문체를 통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하는 것이다. 작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1인일 뿐이라는 느낌이 글 전체에 배어 있는 것이다.


"소설은 결국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시작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벽돌처럼 쌓으며 나아가야 소설이 완성된다. 앞 문장에 의해서 뒤 문장이 이루어지듯 숨쉬기도 들이쉬기가 있어야 내쉬기로 이루어진다. 복식 호흡을 익혀나가는 일은 숨쉬기가 요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p.141)


아침에 내리던 눈은 낮이 되자 비로 바뀌었다. 우산을 쓰고 하교를 서두르는 아이들이 보이고, 종일 어두웠던 하늘은 다가올 추위를 예고라도 하려는 듯 내내 깊고 우울하다. 요가를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으려는 게 아니라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고 그에 비례하여 늙어가는 자신의 몸에 알맞게 적응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오늘처럼 흐리고 우울한 날엔 나로 하여금 더더욱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뒷산도 이따금 힘에 겨울 때가 있는 걸 보면 나의 몸도 조금씩 기울어가나 보다. 작가처럼 나도 아파트 인근의 요가원을 알아봐야 할까? 그럴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강산이 한 번 바뀐 후에 제목도 생소한 작가의 에세이집을 손에 들었던 것이다. 책의 제목인즉 <요가 다녀왔습니다>. 요가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택의 표지에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자가 없었더라면 결코 쳐다보지도 않았을 제목 아닌가.


"나는 체력을 잃고 난 뒤에 자주 심각해지고 좌절에 빠지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물건을 사납게 내려놓고 문을 쾅쾅 닫고 기다림에 인색해졌다. 마구 날뛰는 말 한 마리가 심장 부근에 살고 있다가 어딘가로 내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자책하곤 했는데 요가를 시작하고는 그게 사라졌다."  (p.37)


15년 넘게 요가를 하며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 일상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한 이 산문집은 달라질 것 없는 우리네 일상처럼 지극히 편안하고 단조롭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경숙의 산문집은 <우울한 그늘>이 거의 유일했던 까닭에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의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면서 읽게 되는데 <요가 다녀왔습니다>는 너무나 평이한 문체와 마치 집안에서 입는 일상복의 느낌이어서 독자이자 팬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신경숙 작가도 그렇고 시나브로 나이가 들고 있음이다. 다름을 통하여 남보다 앞서가려 했던 젊은 시절의 마음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다른 작가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평이하고 소탈한 문체를 통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하는 것이다. 작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1인일 뿐이라는 느낌이 글 전체에 배어 있는 것이다.


"소설은 결국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시작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벽돌처럼 쌓으며 나아가야 소설이 완성된다. 앞 문장에 의해서 뒤 문장이 이루어지듯 숨쉬기도 들이쉬기가 있어야 내쉬기로 이루어진다. 복식 호흡을 익혀나가는 일은 숨쉬기가 요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p.141)


아침에 내리던 눈은 낮이 되자 비로 바뀌었다. 우산을 쓰고 하교를 서두르는 아이들이 보이고, 종일 어두웠던 하늘은 다가올 추위를 예고라도 하려는 듯 내내 깊고 우울하다. 요가를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으려는 게 아니라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고 그에 비례하여 늙어가는 자신의 몸에 알맞게 적응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오늘처럼 흐리고 우울한 날엔 나로 하여금 더더욱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뒷산도 이따금 힘에 겨울 때가 있는 걸 보면 나의 몸도 조금씩 기울어가나 보다. 작가처럼 나도 아파트 인근의 요가원을 알아봐야 할까? 그럴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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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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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참사 시민 분향소에 다녀왔다. 스산한 날씨였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나이의 청년들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정 사진에 걸린 검은 띠만 제거하면 금방이라도 싱그러운 생명력이 되살아날 것만 같은 얼굴, 얼굴들. 제단에 국화꽃을 놓으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사람들과 그들 틈에 섞여 짧은 조문을 마쳤던 나는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의문만 가슴 한가득 품은 채 분향소를 벗어났다. 참사 후 달포가 지나는 동안 마치 비현실적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고 있는 듯한 유가족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의 이쪽 편에서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 시민들. 도로 건너편에는 '정치 선동꾼 물러나라'거나 '윤석열 잘한다'는 현수막을 걸고 유가족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타인의 슬픔을 마치 자신의 슬픔인 양 함께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들. 저들처럼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보인다. 타인의 아픔을 조롱하고 위로는커녕 막말과 욕설을 퍼붓는 인간 말종의 모습을 우리는 그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분향소에서의 감정이 되살아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황시운의 산문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자정이 넘어서야 다 읽었다. 어쩌면 나도 장애를 가진 누군가의 고통을 그저 머리로만 인식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인식의 저변에는 '나는 절대로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오만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책에는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2011년 '제4회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던 작가가 같은 해 봄 추락 사고를 당하여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갖게 되면서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사고가 일어나던 순간을 전후해서 벌어졌던 일들 중 일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수술 후 일정 기간 동안의 일은 선별적으로 기억하고 잇다. 그러나 허방을 딛던 순간 벼락처럼 덮쳐왔던 공포랄지 불안이랄지, 무언가가 쑥 꺼지는 듯한 상실감이랄지, 아무튼 그 순간의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끔찍한 감각은 그로부터 꽤나 오랫동안 눈만 감으면 나를 휘감았다 깜빡 잠이라도 들라치면 찾아오는 추락의 악몽뿐만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수시로 찾아오는 그 감각 때문에 몸서리쳐야 했다."  (p.193)


책은 사고 이후 하반신 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되면서 겼었던 여러 일들을 다룬 1부 '어쨌든 다시 봄', 조카들과 엄마 아빠 등 가족의 이야기를 쓴 2부 '그간에 밀린 이야기들', 사고 후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여러 에피소드를 다룬 3부 '움직여라, 발가락', 그럼에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가 실린 4부 '다시 시작할 산책'과 '작가의 말'로 끝을 맺는다. 작가는 어쩌면 이 한 권의 에세이를 완성하기까지 사고 후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죽음보다 더한 낙담과 고통의 순간들을 일상처럼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 명의 독자인 나는 그 고통의 강도를 1/10도 체감하지 못한다.


"다음날이 되어서도 그 남자가 한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제야 모멸감이 밀려왔다. 남자는 전날 밤의 일을 기억해냈을까. 만약 기억해냈다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했을까. 아니면 별일 아니었다고 생각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까. 나를 이토록 두려움과 모멸감에 빠트려놓고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병신이라니. 병신 같은 년이라니. 재수가 없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그런 끔직한 욕지거리를 한 남자는 물론 그 순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나에게까지 화가 치밀었다."  (p.276)


우리 사회의 약자들은 언제나 시간의 변방에서 살아간다. 현실에서 살아 있지만 그들은 살아 있다는 티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그들에게 되돌아가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조롱이나 욕설일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인 동시에 최고 권력층으로부터 학습된 무언의 명령일지도 모른다. 단식을 하는 참사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하거나 동지섣달의 한파 속에서 자식을 잃고 울먹이는 유가족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인들을 양산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겨울 한파보다 더 시리게 다가온다.


"친구의 말은 정말이지 큰 위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항상 나와 함께 턱을 넘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도 그들도 턱을 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안 되는 것일까."  (p.84)


타인에 대한 공감의 폭이 가면 갈수록 줄어드는 이유를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낮은 독서량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한 개인이 직접체험을 통하여 취득할 수 있는 공감의 폭은 무척이나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독서 혹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한 간접체험이 없다면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체험은 한낱 상상 속의 세상이자 그곳에 사는 외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계인과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뿐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는 경계심 가득한 적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반사회적 인격장애인만 양산하는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입니다.'라는 문구가 정언명령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회, 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그렇게 되는 날 황시운의 산문집 제목은 <당신들이 모두 아는 이야기>로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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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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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기만 하던 삶의 시간들이 썰물처럼 쓸려 가버렸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결국 오고야 마는 법이지요. 인생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말입니다. 켄트 하루프의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의 리뷰를 쓰기에 앞서 몇 년 전 내가 겪었던 경험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어쩌면 나의 경험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조금쯤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부인의 암 발병 소식에 모든 걸 정리한 후 단양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단행한 지인 한 분이 있었습니다. 정년 퇴임을 한 후 부부만의 호젓한 생활을 이어오던 지인 A 씨에게 있어 부인의 암 발병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던 듯합니다. 서둘러 살던 집을 내놓고, 가재도구를 정리하여 단양의 외딴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가버렸으니 말입니다. 지인 A 씨로부터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아왔던 나로서는 어떻게든 찾아뵙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내가 지인 A 씨를 만나기 위해 단양으로 향했던 것은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밤잠을 설치게 하던 늦은 여름이었습니다. A 씨가 이사한 집은 마을로부터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산중의 외딴집이었습니다. 단출한 가구와 필수 가재도구뿐인 집안에 복잡하게 놓인 병원 장비는 방문객의 마음을 몹시 심란하게 했습니다. 병원으로부터 암 4기 판정을 받았던 A 씨의 부인은 침대에 누워 나를 맞았고,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안부를 묻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뜨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남편분을 위해서라도 기운을 내시라는 인사와 함께 사람은 따뜻한 체온만으로도 위로를 느낄 때가 있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밤에 우리 영혼은> 역시 그런 소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남녀 두 노인이 서로의 체온으로 삶의 고독과 인생의 덧없음을 위로하고, 젊은 시절의 격정적인 사랑이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의 이어짐만으로도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갈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갖게 되는 듯한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아주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요. 좀 신기해요. 여기 깃든 우정이 좋아요. 함께하는 시간이 좋고요. 밤의 어둠 속에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잠이 깼을 때 당신이 내 옆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듣는 것."  (p.102)


소설의 구성과 스토리는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켄트 하루프가 자신의 작품에서 공간적 배경으로 즐겨 사용하는 콜로라도 주의 '홀트'에 70대의 독신 남녀인 루이스와 애디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배우자와 사별한 후 혼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애디가 루이스의 집을 찾아가 본인의 속마음을 전합니다. 자신의 집에서 섹스 없이 함께 잠을 자지 않겠냐는 게 그녀의 제안이었습니다. 오해받기 십상인 제안이었지만 루이스는 애디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남남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왔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습니다. 해가 지면 루이스는 애디의 집으로 가 '침대에 친구처럼 나란히 누워' 자신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들려줍니다. 애디의 어린 딸의 죽음, 루이스가 근무했던 학교의 여선생과의 불륜으로 가정이 파탄날 뻔했던 사건 등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우리 둘 다 인생이 제대로, 뜻대로 살아지지 않은 거네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순간은, 그냥 좋네요. 이렇게 좋을 자격이 내게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그가 말했다."  (p.109)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고 결국 덴버에 사는 애디의 아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가정불화를 겪던 애디의 아들 진은 자신의 아들이자 애디의 손자인 여섯 살 된 제이미를 애디에게 맡깁니다. 두 사람은 제이미를 함께 돌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진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 두 사람은 결국 관계를 정리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요, 아직은 아니죠. 애디가 말했다. 나는 이 물리적 세계가 좋아요. 당신과 함께하는 이 물리적 삶이요. 대기와 전원, 뒤뜰과 뒷골목의 자갈들, 잔디, 신선한 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당신과 함께 누워 있는 것도요."  (p.141)


이전의 관계를 정리한 후 어느 날 혼자 외출에 나섰던 애디가 길에서 넘어져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아들 진은 자신의 어머니를 덴버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킵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잇던 루이스는 동네 사람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덴버의 병원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여 애디가 입원한 병원을 알아냅니다. 갑자기 병문안을 온 루이스와 이에 당황한 애디는...


"오늘 밤에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는 칠흑이었다. 당신, 거기 지금 추워요?"  (p.194)


결혼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배우자와 한날한시에 죽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가능성은 기적에 가까우리만치 어렵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최후에는 결국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우리들 각자에게 지워진 셈이지요. 홀로 남아 살아야 할 날들이 길고 짧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깊은 상실감과 고독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건 곁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체온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칠흑과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딛고 조금이나마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호사는 곁에 있는 누군가의 체온과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시선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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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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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어렸을 적 나의 꿈은 서점 주인이었다. 좋아하는 책도 원 없이 읽을 수 있고, 더불어 책을 팔아 생계도 유지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서점을 둘러싼 그때의 환경과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고, 서점 주인을 꿈꾸는 일은 마치 경제적 행위에서 자유로운 어느 갑부의 소소한 일탈이나 가벼운 취미생활쯤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서점 운영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택가의 작은 동네 서점을 열고 싶어 하는 이들의 소식을 인터넷이나 주류 언론을 통하여 더러 접하게 되는 걸 보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꿈을 먹고 사는 이들이 건재하다는 걸 재차 확인하게 된다.


황보름의 소설 <어서오세요 휴남동서점입니다>를 읽는 동안 내 어렸을 적 꿈에 대한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휴남동 서점을 개업한 주인공 영주의 자본주의 논리에서 벗어난 비현실적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나 역시 꿈과 현실의 이분법적 논리에 충분히 젖어든 까닭이다. 낭만을 잃고 빠르게 변화하는 경제 논리에 너무도 쉽게 순응해 온 탓인지도 모른다. 낭만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주도권을 다른 누군가에게 아주 손쉽게 넘겨버리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하는 자위가 선택권을 잃은 내 삶에 대한 완전한 보상으로 작용할지 나는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휴남동 서점의 생활이 안정되려면, 그래,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영주는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말을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로 바로 치환하기가 싫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대신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휴남동 서점이 안정되려면 무엇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라고."  (p.185)


다니던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늘 일에 치여 살던 영주. 어느 날 갑자기 그녀에게 찾아온 번아웃 증후군과 남편의 무관심으로 영주는 결국 이혼을 하고 그 길로 서점 자리를 찾아 나섰다. 낡은 집을 수리하고 서점을 개업한 후에도 영주는 언제나 자리에 앉아 책만 읽거나 우울한 표정으로 자주 울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반도 채워져 있지 않았던 책장도 채우고, 자기 대신 커피를 내릴 바리스타도 채용한다. 책도 늘고, 독서 모임도 생기고, 글쓰기 강의도 시작되면서 휴남동 서점은 명실공히 서점의 면모를 갖춰간다.


"영주는 지금 마음껏 창인을 생각하고 있다.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 꾹꾹 눌러두었던 생각과 감정을 꺼내놓고 있다. 과거의 이미지와 기억들이 가슴을 쿡쿡 찔러 오지만 이제는 버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껏 눌러두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기에 여전히 그녀 안에 그 모든 것이 고여 있는지도 몰랐다. 앞으로는 흘려보내야 할 것이다. 다시 얼마간 울어야 한대도 그래야 할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흘려보내고 또 흘려보내다 이젠 과거를 떠올려도 눈물이 나지 않게 될 무렵이 되면, 영주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의 현재를 기쁘게 움켜쥘 것이다. 더없이 소중하게 움켜쥘 것이다."  (p.301)


서점 대표인 영주기 힘을 내면서 그녀 주변에 하나둘 모여드는 사람들. 대학 졸업 후 끝없는 구직 실패에 지칠 대로 지친 민준이 영주를 대신하여 2년 계약의 바리스타 알바를 시작하였고, 남편 때문에 화날 일이 많았던 로스팅 업체 대표 지미, 사는 게 아무 재미가 없다는 고등학생 민철과 그런 아들이 걱정되면서도 늘 응원 격려를 아끼지 않는 희주, 서점 구석에 조용히 앉아 뜨개질과 명상을 하는 정서, 좋아하던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삶을 그만둔 후 공허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국어 문장 공부에 매달렸던 작가 승우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휴남동 서점을 이끌어가는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매출에 신경쓰지 않고 쉬면서 딱 2년만 해보겠다고 계획했던 영주도 결국 처음 생각을 접고 다시 휴남동 서점의 미래를 구상하는데...


"영주가 해외 독립책방을 둘러보며 깨달은 점은 모든 책방이 그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개성은 책방을 운영하는 주인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개성을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건 용기였다. 주인의 용기가 손님에게 가닿기 위해 필요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영기와 진심."  (p.358)


누구나 그렇겠지만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다 보면 '과연 성공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한 번쯤 빠져들게 된다. 이것은 마치 생각의 늪과 같아서 한 번 빠져들면 들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악순환을 경험하게 된다. 생각의 늪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숫제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최선의 방책이겠지만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순간 딱 멈추고, 생각하자 싶으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인간은 늘 갈등하고, 엉뚱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하긴, 자신이 계획한 대로, 예상 가능한 모습으로 삶이 흘러간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밋밋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나의 삶도 그리고 다른 모든 이의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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