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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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400쪽이 넘는 긴 이야기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같은 호흡으로 써 내려간다는 건 웬만한 내공으로는 시도조차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작가도 감정이 있고, 자신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까닭에 기쁨과 슬픔, 격정과 좌절의 파고에 흔들리지 않을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의 파고에 휩쓸려가며 정신없이 써 내려가다 보면 현실에서 작품을 쓰는 '나'는 사라지고 자신이 구축한 소설의 세계 한 귀퉁이에 깊이 자리를 잡은 소설 속의 '무명 씨'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가가 1인칭 소설을 기피하는 이유도 어쩌면 소설의 세계와 나의 현실을 착각하거나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지도 모른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장편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호흡으로 써 내려간 수작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건축이라는 전문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개개인의 삶과 사랑, 자연과의 조화 등을 잔잔하고 평온하게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페이지를 넘겨갈수록 담담하고 밋밋한 매력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만다. 우리가 슴슴한 육수와 담백한 메밀면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평양냉면의 깊은 맛에 시나브로 중독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건축을 전문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지나치게 많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테지만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는 소설이니만큼 이 참에 건축 분야에 대해 어깨너머 지식을 쌓는다 생각하면 불만은 조금 사그라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비는 한 시간 남짓해서 그쳤다. 유리창을 열자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비에 씻긴 초록에서 솟구치는 냄새. 서쪽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밝아지면서 일몰 직전의 광선을 숲에 던진다. 완전히 황혼에 가라앉아가던 나무들의 잎사귀 가장자리가 오렌지색으로 빛난다. 매미는 이제 암놈 부르기를 단념했는지 지짓 하고 짧게 울고는 계수나무에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p.151~p.152)


소설 속에서 '선생님'으로 등장하는 무라이 슌스케는 일본의 건축가 '요시무라 준조'가 모델이었다. 또한 요시무라 준조는 우리나라 건축가 승효상의 스승인 김수근의 스승이기도 하다.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의 소장인 무라이. 그는 수줍고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건축 설계에 있어서만큼은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면을 견지하고 있다. 건축학도로서 무라이 슌스케의 비범함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나'는 별 기대감 없이 무라인 건축설계사무소에 지원하였고, 오랫동안 신규 채용을 하지 않았던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가 '휠체어 타는 식구가 있는 가족을 위한 집 설계' 플랜을 제출한 '나'(사카니시 도오루)를 채용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카니시 군은 그렇게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의 일원이 된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주절주절 말할 때와, 멍하니 혼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릴 때, 여러 가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니까, 방도 거기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는 데 좋다, 고."  (p.271)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는 도쿄의 기타아오야마에 위치해 있지만 매년 여름이면 고지대의 화산 기슭에 있는 아오쿠리 마을의 사무실에서 생활한다. 국립 현대 도서관의 설계 경합을 앞두고 있는 무라이 설계사무소 직원들은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의 여름 별장인 아오쿠리 마을의 사무실에서 도서관의 설계에 매진하는 한편 '선생님'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아오쿠리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설계사무소의 직원은 대부분이 남자였지만 선생님의 조카인 마리코와 직원인 유키코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물론 신입사원인 사카니시 군에 비하면 마리코나 유키코는 둘 다 연상의 여인이었지만 말이다.


설계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무라이 선생은 뇌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고, 경합에서는 패하게 되어 매일 아침 설계실을 채우던 연필 깎는 사각사각하는 소리의 겹침은 옅어져 갔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선생님'의 건축 철학을 간직해 온 '나'는 숲 속 여름 별장으로 운명처럼 다시 들어선다. 별장 안에 그대로 놓여 있는 국립도서관의 하얀 모형을 손으로 만져보면서 무언가 억누를 수 없는 것이 쓰러져가는 여름 별장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한 세대가 저물고 자신도 역시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의 일몰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건축가로서의 걸음을 시작한 이 건물은 그 이전의 긴 증개축 역사를 포함하여 선생님과 그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여기까지 생명을 이어온 것이다. 오랫동안 잠든 채였지만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이 여름 별장은 다시 한 번 자네가 새롭게 만들면 돼. 탁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된 현실에 숨결을 불어넣으면 되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그때의 음성 그대로 내 귀에 되살아난다."  (p.416)


숲을 통과하여 불어오는 바람처럼 소설은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진행된다. 작가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가볍게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가면서 닫혔던 커튼 사이로 한 뼘 진리의 햇살을 전해주고 있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름다웠던 건축물도 언젠가 그 쓰임을 다하고 스러지는 것처럼. 그러나 푸르렀던 여름날의 추억은 각인된 채로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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