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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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쓴 소설 제목은 유난히 사람의 이름이 많다는 것을.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비롯하여 <에이미와 이저벨>, <올리브 키터리지>, <버지스 형제>, <다시 올리브>, 최근에 출간된 <오, 윌리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많지 않은(?) 소설 작품 중에서 이름이 안 들어간 작품을 찾는 게 오히려 빠를 듯하다. 여기에는 소설가로서 작가의 집요함과 꾸준한 인내심이 이와 같은 멋진 작품들을 완성하는 데 한몫을 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한 인물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분석이야말로 소설가가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인물이 갖고 있는 개별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인류 전체가 지닌 보편적인 특성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물리학자가 각각의 현상을 통해 우주 전체를 통괄하는 보편적 원리를 발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한 작품이라도 읽어 본 독자라면 작가가 창조한 한 인물에 대한 세밀하고도 친절한 기술이 인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다는 걸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인물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같은 분량으로 끈기 있게 기술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와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인물의 부정적인 측면을 그렇게 깊이,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도 않으며 설사 그것을 발견하고 관찰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묘사나 서술을 서둘러 그만두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보고 관찰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 도티, 베브, 이저벨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어렸다. 무엇을 참을 수 있는지 혹은 참을 수 없는지 아직 몰랐고, 이 자리에 있는 세 엄마에게 아이처럼 말없이 매달려 있었다."  (p.508)


나는 사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통하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라는 훌륭한 작가를 남들보다 아주 늦게 알게 되었고, 이번에 읽은 <에이미와 이저벨>이 그녀의 여러 작품 중 내가 읽은 두 번째 작품이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은 삶의 고비에서 겪는 개개인의 순간순간을 친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소설을 번역했던 정연희 번역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을 번역하면서 나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 하나는 그런 순간들의 이면을, 그 순간들을 '건너가는' 사람들의 숨은 마음을 친밀하고 세심히 바라보는 일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라봄은 이해를 낳고, 이해는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리고 성장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사랑하게 만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그런 바라봄을 안내하는 데 탁월하다."  (p.543 '옮긴이의 말' 중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설계하고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도, 서로에게 원하거나 기대하는 바도, 상대방을 위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엄마와 딸 사이의 섬세하게 다루면서, 유난히 더웠던 셜리폴스의 여름 한 계절을 다루는 <에이미와 이저벨>. 수줍고 소심한 성격의 에이미 굿로는 올해 열여섯 살의 소녀이다. 점심시간에 몰래 담배를 같이 피우는 스테이시를 제외하면 친한 친구도 없다.  교사가 되길 원하는 엄마 에이절의 생각과는 다르게 에이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시(詩)이다. 지난겨울, 수학교사인 데이블 선생이 사고를 당한 후 학교에는 토머스 로버트슨 선생이 임시교사로 왔다. 시를 좋아하는 로버트슨 선생을 은근히 좋아하게 된 에이미는 방과 후 학교에 남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그저 행복하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버트슨이 자신의 차로 에이미를 집에 바래다주면서 에이미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찾아온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에이미는 이저벨이 일하는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자궁절제 수술을 받은 도티 브라운의 일을 대신하는 것인데 직장 상사인 에이버리 클라크의 제안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어느 날, 에이버리는 차 안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와 소녀를 보게 되는데... 에이버리는 자기가 목격한 것을 이저벨에게 전하고, 이저벨은 이에 충격을 받고 분노한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듯 이날을 기억할 것이다. 이저벨의 은밀하고 깊숙한 기억 속에는 이날이 그녀가 에이미를 '가진' 마지막 날처럼 느껴질 테니까. 그녀의 기억 속에 나뭇잎들은 항상 금빛이고, 고속도로에는 아침 햇살로 샤워하고 가을 날씨로 빳빳해진 금빛 나뭇잎들이 늘어서 있을 것이다."  (p.53)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그해 셜리폴스의 무더웠던 여름은 마치 에이미와 이저벨의 끝나지 않을 듯한 갈등처럼 길기만 했다. 세상을 등지고 셜리폴스로 숨어들었던 이저벨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 또래 친구들과 담을 쌓고 지내는 에이미. 세상에 오직 두 사람뿐인 줄 알았던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외부와의 관계를 넓혀간다. 작가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에이미와 이저벨의 성장 과정을 애정 어린 눈으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이저벨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오래전 타운에 옮겨와 22번 도로에서 가까운 크레인 씨의 낡은 주택을 빌린 뒤 많지 않은 살림살이를 풀고 젖먹이 딸아이(옅은 금발의 곱슬머리에 진지한 표정을 한 아기)와 함께 정착했을 때, 그녀는 회중교회 신자들 사이에 그리고 그녀가 일하게 된 공장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자들 사이에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젊은 이저벨 굿로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편도 부모도 모두 죽었고, 벌이가 더 나을까 해서 강을 따라 셜리폴스까지 내려왔다고 말할 뿐이었다."  (P.23)


유난히 길고 가물었던 올해 가을도 이제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다음 주면 다사다난했던 2022년도 딱 한 달을 남겨두게 된다. 먼 훗날 언젠가 2022년을 되돌아보면 가장 먼저 우리는 '10.29 참사'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푸르렀던 젊음이 어느 날 뚝 멈춰 서야만 했던 그날의 참사. 대중을 향해, 무능했던 정부를 향해 오열했던 유가족들. 삶은 그토록 쉽게 멈춰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하루하루를 지켜보려 한다. 대학생인 아들은 내년이면 군복을 입고 나타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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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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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할 시기가 되었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명예퇴직을 했거나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안다. 이제 다들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며 남은 삶을 살아갈지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친구는 많지 않은 듯 보인다. 많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함이 지금 내 나이대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인 듯하다. 일에 묻혀 살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과거에는 마음껏 여행을 하고 싶다거나, 골프나 등산 등 누리지 못했던 여가 생활을 원 없이 누려보고 싶다거나, 아무도 없는 산골에 터를 잡고서 유유자적 한가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등 하고 싶은 일도, 바라는 것도 참 많았지만 막상 내 나이가 되고 보니 원하던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눈앞에 펼쳐질 무한대의 시간을 도대체 뭘 하면서 채워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귀농을 했던 몇몇 친구들은 1년도 되지 않아 도시로 복귀를 했고, 허구한 날 골프를 치던 친구도 이제는 그마저도 지겨웠는지 집 밖 출입이 뜸해졌고, 장사를 시작했던 친구들도 수월찮은 돈만 까먹고 폐업 절차에 접어들었으니 어느 것 하나 마음 놓고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과 여가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 채 노후를 설계하겠다는 젊어서의 꿈은 한낱 꿈으로 그칠 공산이 커진 셈이다. 무작정 일만 쫓으면서 살았던 우리는 그 세월 동안 점차 노는 법을 까먹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노는 법을 까맣게 잊은 우리가 정작 노는 시간이 눈앞에 놓이자 허둥지둥 당황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이해하기로 여가란, 결코 물리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 (설사 그것이 결국엔 우리는 물론 타인에게 실질적 도움이 된다고 해도) 순전히 그 즐거움을 위해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단장하고,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을 두루 아우를 때 쓰는 단어다. 여가를 누릴 때에는 가치보다는 기교가 훨씬 중요하다. 현명하게 선택한 여가는 아무리 짧은 삶에도 깊이를 준다."  (p.29 '들어가는 말' 중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학가 로버트 디세이가 쓴 <게으름 예찬>은 게으름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시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법을 배움으로써 한가로이 삶을 즐기는 과정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삶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쁘다는 것은 결국 일에 매몰되어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타인과의 관계와 삶의 의미, 왜 사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도하지 못한다.


"노는 것은 당신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키케로와 세네카는 그것으로 열변을 토했고, 중국부터 유럽의 가장 끄트머리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그 통찰을 이야기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기간 동안 특정의 규칙을 관찰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쓸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노는 것에 그 이상의 목표는 없다. 몇백 년 동안 지배계급이 성직자들과 군대와 함께, 노동은 신성하다고 주장해왔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p.274)


저자는 '일해야 할 의무가 대체 무엇이 "성스럽다"는 말이냐'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고전문학 작품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요시다 겐코의 『쓰레즈레구사』, 시트콤 <핍 쇼>와 다큐멘터리 <스시 장인: 지로의 꿈> 그리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불러온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휴식'이 무엇인지 희미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세계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거의 모든 사람이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신체에 무리 없이 창의적으로 일하고, 휴가는 길어서 매년 수백, 심지어 수천 시간을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마음껏 놀며, 근사하게 비옥한 여가를 마음껏 즐기는 세계 말이다."  (p.282)


멀리 중동의 사막에서는 월드컵 열기가 뜨겁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월드컵 참가국의 국민들은 자국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하며 밤잠을 잊은 채 텔레비전 중계를 시청한다. 또는 그 각본 없는 드라마에 울고 웃고 탄식하며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놀이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 이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렇게 지인들과 웃고 떠들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 찾아오는 나른한 피로감에 까무룩 잠이 드는 것, 내일 아침 만나는 사람들과 어제 있었던 일을 주고받으며 하루의 일과를 무리 없이 해치우는 것. 우리의 삶이 죽음 직전까지 그렇게 활기찬 하루하루로 채워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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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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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것은 한 권의 소설입니다!'라고 큰소리로 선포해야 할지도 모른다. 소설이라는 단어에 굵게 밑줄을 긋거나 소리를 높여 강조할 필요도 있을 테고 말이다. 스토리도 목차도 없는 소설이 그 자체로서 소설의 절대성이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을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것은 '배수아'라는 소설가에 대한 의구심인 동시에 의식의 흐름에 대한 자유분방한 기술 또는 가늠하기 힘든 생각의 방향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면밀한 탐구쯤으로 정의하기로 하자. 일단은.


"정신적 빈곤과 경박함은 곧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M의 생각이었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실제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에 앞서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우리 삶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점유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말한다면,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p.69)


소설의 화자인 '나'는 독일에 체류하던 한때 M을 사랑했고, 그와 헤어진 후 다시 찾은 독일에서 요하임이라는 친구의 집을 방문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한다. 성탄절 전날에 요하임의 어머니 집을 방문하거나 연말에 대학생들이 모이는 파티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상은 소설의 어떤 사건이나 결말을 구성하기 위한 전제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스쳐갈 뿐이다. 다만 그와 같은 일상의 소일거리 속에서 문득문득 M에 대한 기억들이 개입한다. M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조금씩 확장되다가 글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작가는 M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의 줄기로 삼아 음악이나 언어 또는 죽음과 같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풀어놓고야 만다. 결국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다루는 듯하던 이야기는 일상 속으로 용해되고 M과 '나' 혹은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예술적 주제들에 대한 견해나 관점이 글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p.144)


배수아의 소설에 빠져드는 이유는 단 하나, 의식과 의식 저편의 경계에서 소설이 펼쳐지고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냉랭한 현실의 감각을 쉽게 잊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책을 읽는 아주 잠깐의 시간만큼은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어느 작품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우리는 그런 느낌을 공유할 수 있지만 배수아는 이보다 한 발 더 깊이 들여놓아도 괜찮다고 독자들을 유혹한다. 그것은 때로 마약과 같은 중독성을 동반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접했던 독자라면 그녀의 작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결별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케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p.174)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는 달콤하다. 그러나 단맛은 언제나 순간적인 감각일 뿐 영원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소설에서도 언급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음악은 언어가 탐구하지 못한 인간 신체의 다름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의 서툰 연주가 가을의 햇살 속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은 언어로만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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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이 된다는 것 -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
안셀름 그륀 지음, 황미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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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그렸지만 본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입니다. 얼굴에는 자신의 삶의 이력이 그려집니다. 자연스러움은 이처럼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를 모두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지식이 너무나 얕고 보잘것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삶에서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입니다. 온갖 부조리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주저앉히는 좌절과 낙담, 슬픔과 분노... 위로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정작 위로가 필요치 않은 시기에는 위로가 없었던 것처럼 위로가 넘쳐난다는 건 또 한편으로 슬픔과 분노 혹은 좌절과 낙담이 넘쳐난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위로를 가장한 거짓 위로가 세상을 장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 없는 빈 밭에는 밀알의 싹보다는 잡초만 무성한 것처럼 말이지요.


"일부 그리스도교 단체들도 상업 광고처럼 그러한 구호를 내걸면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신앙인들로 구성된 자기네 공동체 안에서 위안을 얻게 될 거라고 약속합니다. 그 단체들이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놓고도 늘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큰 도움을 주는 긴밀한 관계, 결속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게 될 거라고 피상적으로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더 심오한 것입니다."  (p.40)


세계적인 영성 심리 상담의 대가인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저서 <위안이 된다는 것>을 구매했던 시점은 '10.29 참사' 직후였습니다. 최근의 일이지요.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게도,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국민들에게도 진정한 위로를 건네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관료들의 생각은 '시간이 가면 금세 잊힐 일인데 뭐 그리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것일 테지요. 적당히 애도하고 밑선에서 몇 명 책임자를 처벌하면 가족을 잃은 유족들도, 일시적으로 분노하는 국민들도 그 위세가 금세 잠잠해지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게 그들의 판단인 듯합니다. 그러나 깊은 슬픔은 가슴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깊은 생채기를 남길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새살이 돋고 그리운 이를 가슴에 묻을 때까지 말입니다.


"울음은 쌓이고 쌓여서 터져 나오는 감정에서 우리의 짐을 덜어 줍니다. 눈물은 고통을 완화시킵니다. 펑펑 울고 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울음은 누군가를 제압하고 그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듯한 고통을 견뎌 내게 하고 그에게 답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울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울면서 자기를 내려놓는 것, 그러면서 고통을 허용하고 그 방향을 돌리거나 사라지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답을 더 이상 알지 못합니다. 말로도, 몸짓으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p.218)


책의 부제인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륀 신부님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어떻게든 지금의 슬픔이나 좌절에서 벗어나 남은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어쭙잖은 말로 생색을 내거나 아는 체를 한다는 건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장 '빗나간 위로', 2장 '결속감에서 얻는 위로', 3장 '아름다움 속에 깃든 위안', 4장 '자연이 주는 위안', 5장 '몸과 영혼에 생기를 북돋아 주는 위안', 6장'내적 원천의 힘', 7장 '기도가 주는 위로'의 목차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위안을 얻습니다. 포옹이나 대화, 독서, 음악, 그림, 자연, 산책, 반려동물, 운동, 낮잠, 걷기, 목욕, 기억, 유머, 고요, 기도 등 신부님이 제시하는 위안의 방법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친밀한 사람이 당신과 대화를 나눈 뒤 위로를 받고 떠나간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도 굳세게 할 겁니다. 위로, 위안은 이 불확실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 모두에게 든든한 토대를 마련해 줍니다. 이 토대 위에서 우리는 자신을 향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마주보며 똑바로 설 수 있습니다."  (p.292 '맺음말' 중에서)


우리는 종종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와 같은 꼰대질을 지금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내뱉곤 합니다. 습관화된 자기 과시와 자기 피알의 시대에 위로마저 형식적으로 흐르는 듯하여 씁쓸하기만 합니다. 결국 우리는 마음과 마음이 다가가는 방법을, 체온과 체온으로 위로하는 방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세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놀다'에는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그러다가/ 노는 것도 싫어지면/ 싫증하고 놀고......”(「놀다」 전문) 싫증하고 놀 수 있는 날은 아마도 머나먼 미래가 될 듯합니다. '10.29 참사'를 잊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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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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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좋은 생각이란 여러 생각의 흐름에서 생각 하나가 어쩌다 내 의식의 갈고리에 얻어걸리는 기막힌 우연의 결과일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달아나려는 생각을 꼭 붙잡고야 말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좋은 생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진배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좋은 생각이 내 의식의 그물에 걸려들 때는 주로 산을 걷거나, 멍하니 넋을 놓고 있거나, 음악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한마디로 자신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말하자면 좋은 생각이란 나조차도 내려놓은 찰나와 같은 순간에 번개가 치듯 전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아무리 새롭고 재미있는 일도 몇 번 반복되는 순간 쉽게 질리고 마는 성마른 내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아침 산행을 이어오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걷기에서 얻을 수 있는 그와 같은 큰 혜택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람은 크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으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색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p.346)


우리에게 <고백>을 쓴 추리소설 작가로 잘 알려진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휴식이나 쉼의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책이다. 가벼운 배낭을 메고 동네 뒷산의 평탄한 길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가볍게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책인 것이다. 결말에 대한 아무런 힌트도 없이 추정할 수 있는 어떤 작은 단서조차 꽁꽁 숨겨야만 하는 추리소설 작가가 이처럼 책을 이해하기 위한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작가의 의도를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중 소설을 쓴다는 건 작가의 능력을 가늠케 하는 기분 좋은 반전이다.


“산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다만, 누가 다치기보다는 치유되는 이야기요.”
_미나토 가나에 (출간기념 인터뷰에서)


책은 '묘코 산', '히우치 산', '야리가타케', '리시리 산', '시로우마다케', '긴토키 산', '통가리로', 가라페스에 가자' 등 8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직장 동료이지만 다소 어색했던 두 사람(리쓰코와 유미)이 산을 오르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의 묘코 산, 우연히 참가한 단체 미팅에서 만난 커플(간자키와 미쓰코)이 등산 데이트에 나서는 내용을 다룬 히우치 산, 야리가타케 정상 도전에 번번이 실패한 '나'는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결심으로 세 번째 정상 도전에 나섰지만 우연히 만난 중년 커플로 인해 방해를 받는다는 내용의 야리가타케, 서른다섯의 독신 번역가이자 아버지의 양파 농사를 돕고 있는 미야카와 유미가 의사 남편을 둔 언니의 제안으로 동반 등산에 나선다는 내용의 리시리 산, 리시리 산에 올랐던 유미가 이번에는 언니와 그녀의 딸인 나나카까지 동행하여 등산에 나서는 시로우마다케, 남자 친구인 다이스케와 산에 오르는 마이코의 이야기가 담긴 긴토키 산, 웹사이트 '여자들의 등산일기'에 모자를 만들어 팔고 있는 유즈키가 뉴질랜드 트래킹 투어에 참가한다는 내용의 통가리로, 언니와 함께 리시리 산과 이어서 시로우마다케에 오른 후 본격적인 등산 계획을 세울 겸 등산 친구를 사귀기 위해 등산 페스티벌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가라페스에 가자' 등 시종일관 소설은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그들만의 고민과 인생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의 산문집 <걷기 예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괴로움의 씨앗이 아니라 자기 변신, 자기 버림의 요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길과 몸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여기서 인간과 길은 행복하고도 까다로운 혼례를 올리며 하나가 된다."  우리는 어쩌면 그날이 그날 같았던 지난날의 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즐겁고도 가벼운 그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의 인생에 비슷한 장면이 몇 번이나 등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이 놀고 싶으면 끼워달라고 하면 그만이고, 다른 그룹 아이들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면 참가하면 되는데,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 나는 외려 누가 귀 기울여 듣느냐는 듯 관계없는 책을 펼치는 그런 아이였다."  (p.363)


반짝 추웠던 날씨가 풀리자 미세먼지가 극성이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지난밤 개기월식을 보면서 대학 기숙사에 있는 아들과 전화 통화를 했었다. 아들도 역시 도서관 옥상에서 개기월식을 구경하고 있다고 했다. 붉게 변하던 달이 점차 흐려지더니 마침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생도 저 달과 다르지 않겠지?' 생각했었다. 친구들과 함께 개기월식을 보고 있었다는 아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기에는 아들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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