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전3권 + 다이어리 1종 세트 (다이어리 3종 중 1종 랜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은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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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울적하거나 뭔가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한 느낌일 때는 고전을 읽는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그렇게 하는 편이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클래식 음악을 무작정 듣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기분이 나아지고 삶에 대한 의욕이 솟구치는 것처럼 고전 문학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다른 곳에 마음이 가 있는 상태에서 책을 잡았으니 한동안 집중을 할 수 없는 건 자명할 터, 도입부에서는 언제나 길을 잃고 헤매게 마련이다.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기도 하고, 낯선 인물의 출현에 당혹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어수선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 순간 평화의 시간이 찾아오곤 한다. 세상의 소음이나 잡다한 고민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듯한 느낌. 그렇게 나는 투명 유리관 속으로 깊이 침잠하여 세상과 결별한다.


"순진한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이 소년은 두 사람이 알면서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일로부터 그들이 얼마나 벗어났는지 가리키는 나침반과도 같았다."  (1권-p.420)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사실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인생 자체의 덧없음과 의미를 깨닫게 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달리 불행하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장대한 서사는 작가의 화려한 문체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 그리고 세밀한 묘사와 빠른 전개로 인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깊이 빠져들게 한다. 고민거리가 많지 않았던 학창 시절에는 쉬는 시간 틈틈이,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밤늦도록 읽어 단 이틀 만에 <안나 카레니나>를 완독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톨스토이가 주도하는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키티는 이 모든 것을 말로 알게 된 게 아니었다. 슈탈 부인은 키티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마치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듯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넋을 잃고 키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모든 인간의 괴로움을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사랑과 신앙뿐이며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하찮은 슬픔은 없다고 단 한 번 언급했을 뿐, 그것도 곧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1권-p.504))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의 오빠인 스테판이 가정교사와 바람이 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사실을 스테판의 아내인 돌리가 알게 되자 부부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오빠의 가정을 되돌리고 차갑게 돌아선 돌리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안나가 나서게 되는데, 결국 안나의 간절하고 진정 어린 설득으로 돌리로부터 용서를 받게 되는 스테판. 목적을 달성한 안나는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총각이었던 브론스키는 안나와의 첫 만남에서 한눈에 반하고 마는데 유부녀였던 안나는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한편, 돌리의 여동생인 키티가 브론스키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스테판의 친구인 레빈 역시 키티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결국 키티는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고 낙심한 레빈은 시골로 낙향한다.


"레빈은 자기가 요즈음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한 것이었다. 그는 모든 곳에서 오직 죽음, 혹은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만을 보았다. 죽음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에게는 모든 게 암흑으로 뒤덮여 있는 듯했다. 그러나 바로 그 어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일이 그 어둠 속에서 자기를 이끌어 줄 유일한 끈이라고 느꼈고, 온힘을 다해 그것을 붙잡고 그것에 매달렸다."  (2권-p.252)


꺼져가는 애정의 불꽃이 되살아난 것은 한 무도회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무도회에서 브론스키는 키티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안나에게 끊임없는 애정공세를 펼친다. 안나는 열정적인 브론스키의 애정공세를 몇 번 거절하다가 결국 넘어가고 만다. 위험한 밀회를 지속하던 안나는 남편인 알렉세이와 아들을 등지고 브론스키와의 동거를 시작한다. 안나는 알렉세이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완벽주의자였던 알렉세이는 자신의 이력에 이혼 경력이 남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편, 레빈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키티는 그와 결혼한다. 시간이 흘러 브론스키의 아이를 갖게 된 안나는 자신의 처지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남편과의 이혼도 성사되지 않았고, 아들 알료사를 보고 싶었지만 만날 수도 없었으며, 설상가상 브론스키의 사랑도 점점 식어가는 듯 의심하게 되었다.


"그녀는 물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다가 막상 물속에 들어갈 때와 흡사한 감정에 사로잡혀 성호를 그었다. 그러자 성호를 긋는 익숙한 동작은 그녀의 마음속에 잇던 처녀 시절과 어린 시절으 온갖 기억을 끌어냈다. 그리고 갑자기 온통 그녀를 뒤덮고 있던 암흑이 흩어지더니, 한순간 삶이 온갖 밝은 과거의 기쁨과 함께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다가오고 있는 두 번째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3권-p.478)


안타깝게도 안나는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에 몸을 던져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브론스키의 마음이 변했다고 판단한 안나는 그의 변심에 대해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응징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끝날 것처럼 보였던 소설은 레빈과 키티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덤처럼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대선이 끝난 대한민국의 국민들 중 절반은 서로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또 다른 절반은 서로 비슷한 이유로 불행하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가 살았던 그 시절의 러시아는 지금 전쟁이라는 끝없는 절망으로 불행하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레빈과 키티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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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 - 읽고 쓰기에 대한 다정한 귓속말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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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그저 읽기만 하던 사람이 글을 쓰는 차원으로 진전시킨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몇 시간째 붓방아만 찧으며 글짓기 숙제를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들 앞에서 "나도 소싯적에는 글발깨나 날렸다."며 과장된 몸짓으로 허풍을 떠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이겠습니다만, 막상 펜을 들고 형식에 맞춰 문장을 쓰고 기, 승, 전, 결의 구성을 갖춰 글을 완성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창 시절 이후로도 꾸준히 독서를 하고 일기와 같은 짧은 글일망정 간간이 글을 써오던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또 현실을 기억할 때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일은 절대 없어요. 기쁜 일은 크게 확대하고 슬픈 일은 조그맣게 축소하는 등,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게 변형해서 기억합니다. 현실을 이야기로서 자긴 안에 쌓아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이야기의 도움으로 현실과 그럭저럭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작가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구든 나날의 일상생활 속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언어를 통해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자신의 역할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p.28)


오가와 요코의 에세이집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은 '이야기'에 대한 세 번의 강연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강연을 '활자로 남길 예정이 아니었고, 그 자리에서 한 번으로 끝나는 얘기였'지만 최종적으로 출판을 결심하게 된 것은 '이 책을 보신 분들이 이야기의 매력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야기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해서, '책을 읽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하고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밝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작가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쓰기를 권하기보다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부 '이야기의 역할'에서는 개개인의 삶에서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말하면서 독서의 유용성을 논했다면, 3부 '이야기와 나'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자신의 독서 이력을 하나씩 들춰 보고 돌아보면서 어떤 책이 자신의 인생관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들려준다. 그리고 2부 '이야기가 태어나는 현장'에서는 20여 년 전 대학에서 문예과에 입학하여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작가가 이제는 소설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되기까지 그 과정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는, 저 자신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어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소설을 썼습니다. 20년 정도 쓰다 보니 점차 제 자신이 그렇게 물고 늘어질 만큼 대단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일단 저 자신을 떠나, 전에는 상상도 예상도 하지 못했던 넓은 장소에 서서 세계를 관찰하는 자세를 지니자, 살아 있는 인간도 죽은 인간도, 저 자신도 타인도, 동물도 풀도 꽃도 모두, 온갖 것이 고루 평등하게 보였습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매몰되지 않는 자세로 쓰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 불과 1, 2년 전의 일입니다."  (p.103)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잘 알려져 있고, 세계 평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소설가 오가와 요코. 그러나 지금의 위치에 오른 그녀도 책을 좋아하고 소설가를 꿈꾸던 어린 시절이 있었을 터, 자신의 인생관에 영향을 미쳤던 두 권의 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파브르 곤충기》와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입니다. 《파브르 곤충기》를 읽으면서는 드넓고 위대한 세상에서 자신이 작디작은 일부라는 생각을 하였고,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통해서는 자신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이야기라면, 역시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지요. 너, 이 길로 가면 안 되지, 네가 갈 길은 이쪽이잖아, 하면서 읽는 이를 억지로 끌어당기는 이야기는 이야기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읽는 이가 피로해질 뿐이죠. 읽는 이가 이야기의 견고한 윤곽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다가갈 수 있으리만큼 넉넉하고 유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착 지점을 명기하지 않고, 방황하는 독자와 함께 이리저리 헤매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군요."  (p.149)


우리는 종종 읽는 이와 쓰는 사람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습관적으로 책을 읽고 리뷰든 일기든 쓰는 일에는 마냥 게으르기만 한 나와 같은 일차원의 독서가에게 오가와 요코의 성실함과 겸손함, 그리고 읽고 쓰기의 즐거움을 담은 책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일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책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다지만 읽고 때로 발견하면 그 또한 즐거운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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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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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지치거나 푸석푸석 메마른 일상이 길게 이어질라치면 하시라도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 스님이 한 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자라는 얘기는 아니다. 속세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네 삶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스님이나 신부님 혹은 수녀님과 같은 성직자들의 시선이 필요할 뿐이다. 물론 우리들 삶에서 시시때때로 부딪히는 시시콜콜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주변의 친구들이나 목사님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더 빠르고 현명한 해결책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종교에 상관없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스님이나 신부님 혹은 목사님의 연락처를 마치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스님을 불쑥 꺼내 든 이유는 풀리지 않는 삶의 의문에 대한 스님의 견해와 최근에 읽은 한 권의 책이 나름의 인연으로 깊이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 사느냐?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또한 과학 전문 기자로 15년 넘게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국NPR에서 일하고 있는 룰루 밀러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녀의 논픽션 데뷔작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과 성장 배경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느냐 아니냐는 현실에서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각자가 고민해야 할 개별적인 것일 뿐 모든 이에게 공통으로 제시할 수 있는 모범 답안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관주의자인 저자 역시 자신의 삶을 통과하기 위해 비슷한 유형의 한 사람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아 그의 생애를 세세하게 점검했던 것처럼.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이 말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사악함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그가 경고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 자기 경력을 바쳐 맞서 싸워왔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자,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가치가 있다고 말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까! 그조차도 절망에 완전히 집어삼켜지지 않으려면 그 거짓말이 진실이기를 믿어야만 했던 것이다."  (p.133)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던 생물학자(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현실적인 절망(예컨대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업적이 파괴된다든가 가까운 사람을 사고나 질병으로 잃는 것과 같은) 속에서 그가 선택했던 역경을 이겨내는 현실적인 방안이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분투했던 저자. 그에 비하면 나는 스님을 통해 너무 쉽게 그 답에 접근했던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함마저 있었다. 스님은 우리 삶의 에너지가 각자가 지닌 '욕심'이라고 했다. 수도자의 답변치고는 너무나 세속적인 것이어서 당시에는 크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p.263~p.264)


속세에 살면서 '욕심'을 버린다거나 '내려놓기'를 실천하는 것과 같은 세속적이지 않은 행동은 지극히 위험하다고도 했다. 속세를 떠난 자신과 같은 수도자는 세속적 욕심을 내려놓고 성불하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게 당연하겠지만 속세에 살면서 세속적 욕심을 버린다는 건 격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에너지를 잃는다는 면에서 위험하다고도 했다. '욕심이 곧 삶의 에너지'라는 말은 수도자로부터 흔히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내게는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인 룰루 밀러 역시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이 크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나도, 저자인 룰루 밀러도 각자가 생각하는 어떤 바람 혹은 '욕심'을 에너지 삼아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룰루 밀러가 탐구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도, 내가 존경하는 스님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사람은 모두 자신의 기준에 따라 미래를 욕심내며 사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Maria Mitchell이 천문학 수업에서 했다는 말 "삶에 별빛을 섞으십시오."는 마라아 포포바가 쓴 <진리의 발견>에서 읽은 구절이다. 자신의 삶에 별빛처럼 환한 아름다움을 섞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속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혼돈이 우리의 시야를 암흑처럼 가리는 이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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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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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리뷰 대회

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더러 있다. 기억 속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같거나 비슷한 것을 도무지 찾을 수 없어 매번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하게 되는 순간순간들. 삶과 죽음이 갈라놓는 상실의 고통이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상실과 애도의 경험은 가파르게 증가하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차츰 고통이 줄어들거나 마음에 굳은살이 박이는 것도 아니어서 상실의 고통은 언제나 처음. 무작정 아픔. 그리고 넋을 놓게 되는 여러 날들.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불어오는 휑한 바람과 휑뎅그렁하게 변한 세상. 이어지는 회한과 자책. 그 모든 게 언제나 처음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되풀이된다.

 

지난해에도 나는 장인어른을 그리고 몇 달 뒤에는 어머니와 작별했다. 그럼에도 나는 두 분 모두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당신 스스로 죽음을 직감했던 장인어른은 삶의 마지막 1주일을 남겨 두고 병원에 입원하셨다. 곁에 있는 여러 가족들을 힘들게 하기 싫다는 게 입원에 대한 당신의 정당성이었다. 어머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약간의 치매 기운이 있으셨던 어머니는 요양병원 생활을 1년쯤 이어오고 있었다. 대면 면회가 금지되는 코로나 시국의 자식들은 이따금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에 건성건성 답을 하거나 병원 관계자로부터 전해 듣는 어머니의 근황은 마치 남의 일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나는 회한과 자책 속에서 두 분을 보내드렸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다. 죽음은 말을 벗어나는데, 죽음이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 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것이 더이상 없음을 전하는 데에만 종종 쓰일 뿐이다."  (p.139)

 

직접 목격하지 않은 죽음은 언제나 비현실적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생전에 쓰던 유품 하나하나가 영원히 주인을 잃고 곧 버려질 운명에 처했다는 걸 인정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런 데서 비롯된다. 사라졌던 주인이 내일이라도 당장 자신이 쓰던 물건을 찾아 집안 곳곳을 헤집고 다닐 것만 같은 것이다. 현대인의 죽음은 늘 이런 식이다. 삶과 죽음이 집과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지 않기에 죽음을 맞는 사람도, 살아서 고인을 추모하는 가족도 죽음은 늘 엉겁결에 일어나는 일이며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나 현실의 틈새를 비집고 겨우 제 자리를 찾아가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죽음을 배운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 단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모세처럼 돌아서 미래를 본다는 조건하에서 가능하다. 미래는 우리 앞이 아니라 우리 뒤에, 우리가 막 오른 산의 흙 위에 새겨진 우리 발자국에 있다. 그 흔적 속에서, 우리를 뒤따를 사람들과 우리 뒤에 살아남을 사람들이 우리가 아직 거기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읽을 것이다."  (p.221~p.222)

 

델핀 오르빌뢰르가 쓴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프랑스의 세 번째 여자 랍비로서 작가가 대면했던 여러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랍비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녀인 그녀는  랍비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녀인 그녀는 이 책에서 원리주의에 희생당한 「샤를리 에브도」의 정신과 의사 엘자 카야, 그와 생전에 ‘죽음’과 ‘공포’를 주제로 서신을 교환했던 의사 마르크, 아우슈비츠에서 함께 살아남아 생의 마지막까지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시몬 베유와 마르셀린 로리당, 자식에게조차 자신의 삶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 끝내 침묵 속에 눈을 감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사라, 늘 같이 놀던 동생 이사악이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어린 형, 병마에 시달리며 예전과 같은 ‘나’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친구 아리안과 그 끝을 예감하면서도 친구 곁을 지킨 오르빌뢰르 본인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유대교는 성직자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랍비가 수행하는 모든 일은 원칙적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실행될 수 있고 발화될 수 있다. 랍비는 공동체로부터 학식을 인정받고 그들의 지도자로 선택된 사람일 뿐이지 절대, 그나 그녀는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자가 아니다."  (p.116~p.117)

 

물리학에서 일컫는 '열역학 제2법칙' 다른 말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하면 우리 몸의 세포 배열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헝클어지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말씀.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죽음이 불쑥 우리 집 문턱을 넘었을 때의 고통과 비애는 물리학 법칙만으로 말끔하게 설명할 있는 어떤 대상이 될 수 없다. 죽음이 있음으로 해서 각자의 삶은 유일하고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와 같은 명제만으로 유족의 슬픔을 모두 위로할 수도 없다. 죽음 앞에선 이따금 악의 없이 뱉은 말이 커다란 상처가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도 끝내 발화하지 못한 채 뒤돌아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쭙잖은 말이 상처로 남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죽음은 삶의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조용하고 편안한 의식이 아니다. 이름도 모르는 의료인의 체계적이고 냉담한 손길에 의해 인도되는 하나의 절차일 뿐이다. 더구나 팬데믹과 같은 대규모 상실의 시대에 각각의 죽음은 개별적인 슬픔으로 위로되지 않는다. 큰 슬픔으로부터 쪼개진 하나의 파편화된 슬픔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체온이 변하지 않는 한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슬픔 역시 차갑게 식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을 읽었던 우리도 역시 예전보다 죽음에 좀 더 익숙해진 것도 아니고,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더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넬 자신이 생긴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숱한 질문에 명징한 해답을 제시할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추게 된 것도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누군가가 살며 사랑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같이 슬퍼하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예전보다 덜 외롭다고 느낀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진다. 책이란 모름지기 그런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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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희망을 찾는 법
캐서린 메이 지음, 이유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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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라는 다분히 시적인 이 책의 제목에 걸맞게 책의 내용 역시 담백하면서도 유려하게 펼쳐진다. 자신의 인생에 펼쳐진 겨울과도 같은 불행 앞에서 작가는 그저 담담하게, 호들갑스럽거나 유난스럽지 않게 수용하고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인생의 겨울'에 들어섰음을 직시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듯한 '인생의 겨울'을 자신의 삶 속으로 오롯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겨울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작가는 ‘윈터링(wintering)’, 즉 ‘겨울나기’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겨울을 견디며 달갑지 않은 인생의 교훈을 깨닫는 것. 작가는 자신이 겪었던 인생의 겨울을 아주 담담한 필체로 쓰고 있다.


"그러나 겨울은 죽음이 가장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현대의 안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잡아챌 듯한 추위가 엄습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그 기나긴 밤의 침묵 속에서, 그리고 그 밤이 가져오는 깊은 어둠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이들이 여전히 실재함을 느낀다. 겨울은 유령들의 계절이다. 그들의 창백한 형태는 밝은 햇살 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겨울에는 다시 선명해진다."  (p.76)


계절의 변화는 이러저러한 작은 징후들, 이를테면 기온이나 습도의 변화, 바람의 세기나 방향의 변화, 낙엽이 지거나 새순이 돋는 것과 같은 자연의 변화 등으로 인해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미리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지만 인생의 겨울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까닭에 순간 놀라고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작가 역시 남편의 맹장염 수술 이후 자신에게 찾아온 원인불명의 건강문제로 인한 실직, 아이의 등교 거부 등 평온했던 일상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이 인생에 있어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직감한 작가는 9월 인디언 서머 시즌부터 이듬해 3월까지 겨울을 나는 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회고록 형식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윈터링의 진실이 놓여 있다. 겨울에는 지혜를 얻게 되며, 겨울이 끝나고 나면 누군가에게 그 지혜를 전해줄 책임이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우리보다 먼저 윈터링을 겪은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도 우리의 책임이다.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 선물 교환과도 같다. 어쩌면 세대에 걸쳐 이어져온, 평생을 지녀온 타성을 깨는 일이 필요하다. 남들의 불행을 지켜부면서 나라면 절대 취하지 않았을 어떤 방식으로 그들이 스스로 화를 초래했으리라 넘겨짚는 습성은 박정한 태도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롭다."  (p.169)


작가는 핀란드인 친구를 만나 겨울을 나는 북유럽인들의 지혜를 듣고 핀란드에 방문하기도 하고, 동화책과 소설 속 배경에 등장하는 겨울의 의미를 자문하기도 하며, 찬물 수영으로 조울증을 극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겨울 바다에 뛰어들어 보기도 하며, 동면을 하는 겨울잠쥐(dormouse)로부터 잠의 의미를 깨우치기도 한다. 겨울의 혹한 속에서 잎을 떨군 채 생명력을 잃은 듯 보이는 나무도 실은 내년 봄을 위한 잎눈을 품고 있음을 새롭게 깨우치기도 한다. 슬기롭게 겨울을 나는 동식물들이 겨울을 거부하거나 겨울에 저항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인생의 겨울을 슬기롭게 벗어나는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겨울나기를 더 잘하려면 우리는 시간에 대한 개념부터 수정해야 한다. 우리는 삶이 직선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시간은 순환적이다. 물론 우리가 점차 늙어간다는 점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살아나가는 동안 우리는 건강한 때와 아플 때, 낙관론과 회의론, 자유와 구속의 국면들을 거쳐간다. 모든 것이 쉬워 보일 때가 있다가도, 모든 것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가 언젠가는 과거가 되고, 우리의 미래가 언젠가는 현재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p.306)


우리는 때론 생명력이 넘쳐나는 봄과 여름이 끝없이 이어졌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우리의 인생에서 '불변의 전성기를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시련이 있게 마련이고 혹독한 '인생의 겨울'을 단 한 번은 견뎌내야 한다. 그렇게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나면 휴식과도 같았던 긴 공백을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고, 전에는 없었던 분별력과 혜안을 선물처럼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의 겨울'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에게 더 혹독한 겨울을 제공하는 경향이 있다고 작가는 지적한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사회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인생의 겨울'을 겪는 일이 온전히 그 사람의 불찰이나 부주의 탓인 양 공격하며 그 사람으로부터 등을 돌리려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오직 앞을 향한 쉼 없는 전진과 치열한 경쟁에서의 승리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에게도 때로는 후퇴가 필요하고 빛이 있는 만큼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따뜻한 여름이 가치 있는 만큼 추운 겨울도 그 쓸모가 있는 법이라고 말한다. 그런 자연스러운 원리를 외면한 탓에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괴물처럼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하게 생각한다고. 사람·동화·자연·여행 등을 통해 자신의 작가의 겨울나기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지금 '인생의 겨울'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를 그리고 언제가 닥쳐올지도 모르는 '인생의 겨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용기와 신념을 귀한 선물처럼 건넨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언젠가 자신이 겪었던 인생의 겨울을 작가처럼 아주 담담하게, 이전보다 더 성숙한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들려줄 날이 오지 않을까.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누구에게나 예전에 겪어보지 못한 인생의 겨울이었지만. 그것이 크든 혹은 작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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