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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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소설을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했던 다양한 모습을 성공적으로 그려낸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주는 쪽의 욕심이 과하면 과할수록 받아들이는 쪽의 거부감 역시 비례하여 증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느 작가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소설 속에서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기를 바랄 수도 있고, 또 다른 어느 작가는 자신이 구상했던 스토리가 소설 속의 여러 인물을 통해 생동감 있게 그려지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무게중심이 쏠리는 순간 소설은 실패로 끝나게 마련이다. 철학이나 가치관에 중점을 두면 스토리는 사변적으로 흐르게 되고 이를 읽는 독자들은 지루함에 몇 번이고 책을 덮었다 펴기를 반복하거나 인내심이 약한 독자라면 결국 완독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반면 스토리의 구성이나 인물의 생동감만을 중시하는 작가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군.' 하는 비판을 여러 번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까탈스러운 독자들의 욕구를 십분 만족시킨다는 건 아무리 노련한 소설가라고 할지라도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김주혜의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은 그런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수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600쪽이 넘는 장대한 서사이다 보니 뒤로 갈수록 재미와 긴박감이 떨어지고, 주제나 결말을 도출하기 위한 작위적인 장면이 더러 표출되기도 하지(물론 이런 평가는 나의 주관적인 사견에 불과하지만)만 1917년에서 1965년에 이르는 장대한 서사를 이끌어감에 있어 이야기의 끊김이나 어색한 장면도 없이 유려하게 마무리한다는 건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수작이라고 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사건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이 작은 바늘 하나가 툭 떨어지듯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연쇄한다. 길 잃은 개 한 마리의 출현만큼이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저 세월 속에 묻혀 흘러가는 여느 일탈로 말이다."  (p.78)


소설의 뼈대가 되는 한반도의 긴 역사가 시작되는 곳은 1917년 눈 내리는 겨울 평안도의 깊은 산속이다. 사냥꾼인 경수는 그곳에서 길을 잃고 쓰러졌는데 일본 장교 야마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건진다.  이후 일본군과 함께 이동하던 경수는 호랑이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구하고 마을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다.


한편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가난한 농부의 맏딸로 태어난 옥희는 은실이 운영하는 기방에 팔려 간다. 1918년 10살이었던 옥희가 은실이 운영하던 평양의 기방에서 기생 견습생으로 시작해 서울에 있는 예단의 기방으로 옮겨간다. 그때 옥희와 함께 갔던 월향과 연화는 은실의 친딸이었다. 재색을 겸비했던 월향은 일본군 장교의 강간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했었고, 명랑한 성격의 연화는 옥희의 다정한 친구로 각별했었다. 기생이 익혀야 하는 다섯 가지 기예 중 시에 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옥희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연화는 나중에 유명 배우와 가수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삶이 꾸준한 전진의 과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는 젊음 특유의 요건이다. 옥희 역시 인생의 한 단계를 지나고 나면 바로 그다음 단계가 오리라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가두 행렬에서 자신이 성년으로 한 발짝 들어서는 확실한 순간을 경험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일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놀라움과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p.153)


옥희가 조선극장 소속 유명 배우로 승승장구하던 시절 옥희의 전속 인력거꾼 역할을 하던 한철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사냥꾼 경수의 아들이자 고아 출신의 깡패로 옥희를 짝사랑하던 정호는 모든 걸 접고 독립운동의 길에 나선다. 소설은 옥희와 더불어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조망한다. 독립운동 이후 국회의원에 오르는 정호와 인력거꾼에서 한국 최초의 자동차 제조 공장 회장이 된 한철, 원치 않았던 임신이지만 아이를 낳고 미국 부영사 커티스의 비서가 된 월향, 레코드를 내고 유명 가수가 되었지만 후원자였던 마사장의 첩이 되었다가 결국 버림을 받고 아편 중독에 빠져 행방불명이 되는 연화,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온갖 특혜를 받고 사는 출판사 대표 성수, 상해와 만주를 오가며 비밀리에 독립군을 결성한 성수의 친구 명보 등 여러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인간 군상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나이를 조금 더 먹고 나니, 인생이란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겠다."  (p.250)

"인생은 곧 바퀴였다. 영민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그 바퀴를 잘 굴려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반면 어리석거나 운이 나쁜 사람은 그 바퀴에 깔려 무참히 짓밟힐 수도 있었다. 그 두 극단 사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그 바퀴를 앞쪽으로 굴러가게 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p.544)


옥희는 결국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랑했던, 학비 등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철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사랑을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음을 맞는 정호는 마지막 면회를 온 옥희와 재회하며 마음에 묻어 두었던 말을 꺼낸다. 사랑했던 인연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결국 혼자가 된 옥희. 그녀는 제주에 내려가 제주 해녀가 되는 길을 택한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p.603)


2022년도 벌써 12월! 삶의 굴곡을 따지자면 한 해 동안 낱낱이 보는 것이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살펴보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게 없겠지만, 하루하루가 늘 좋기만 했던 사람도, 그렇다고 일 년 365일이 모두 불행하기만 했던 사람도 찾을 수 없지 않을까. 남들보다 좀 더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더러는 기쁜 일이 있게 마련이고, 아무리 행운을 타고난 사람도 가끔은 슬프거나 불행한 일이 찾아오게 마련, 소설에서 말했던 것처럼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삶은 견딜 만한 것이 아닐까. 다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이 우리들 각자에게 얼마나 풍성한 의미로 남느냐 하는 문제는 개별적인 것으로 남을 테다. 낙천적이라는 건 어쩌면 사랑 하나에 목숨을 건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전부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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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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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팠던 사람들은 인생을 미래완료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p.15)'는 문장에 힘을 얻었던 나는 그 문장으로 인해 정세랑의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소아 뇌전증을 앓았다는 작가. 그래서 여행을 즐기지 않았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여행을 피하며 살아왔다는 작가가 잘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게 된 사연부터 말하기 시작하는 이 에세이는 400쪽에 가까운 분량도 분량이지만 무려 9년에 걸쳐 한 권의 여행 에세이를 완성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금쯤 겁을 집어먹게 만들었다. 그러나 2012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해 독일의 아헨, 일본 오사카, 타이완 타이베이, 영국 런던까지 5곳을 여행하며 작가가 바라본 지구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책의 제목처럼 꽤나 흥미로웠던 게 사실이다.


"멀리, 뉴욕에서 반갑게 만난 우리는 같이 가고 싶은 곳은 같이 가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따로 다녔다. 신나게 메트로폴리탄과 자연사 박물관을 함께 갔고, S가 양키스 스타디움을 가는 날엔 내가 첼시의 갤러리를 가는 식이었다. 느슨한 동행이 있어 한층 즐거웠다. 우정은 차갑고 기분 좋은 아이스 와인의 느낌으로 지속되고 있다."  (p.66)


우리가 아는 여행기라 함은 사실 지명이나 유래, 유명 음식점이나 관광지, 유물이나 박물관 등을 저자의 안내에 따라 이끌리고, 좀 따분하다 싶은 역사적 지식이나 설명을 하염없이 읽게 되고, 여행지에서의 에피소드나 사진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기도 하며, 여행객의 나른한 감상을 애틋한 감정을 섞어 읽게 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책은 마치 여행기를 빙자한 정세랑 본인의 자기소개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자기소개서라고 하기에는 그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길었지만 말이다.


"여자들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세계 곳곳의 여자들의 삶에 대해. 여자 이름으로 된 소설들을 많이 쓴 것은 그래서인 것 같다. 하루는 처음으로 부르카를 입은 여자를 보기도 했다. 여자는 혼자 걷고 있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평범한 랄프 로렌 셔츠와 나이키 운동화 차림이었다. 색색의 평상복 사이에서 혼자 눈만 남기고 검은 천으로 휘감은 모습은 둔중하게 다가왔다. 어디까지가 당사자의 선택이고 어디서부터가 집단적 압력의 결과일지, 존중에서 비롯된 문화상대주의가 폭력에 대한 방관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는 지점을 어떻게 짚어낼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p. 227)


긴 시차를 두고 쓰인 글이어서일까 작가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다. 과거와 미래, 동서 문명, 인간과 환경을 아우르며 이 시대에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의미와 생각들을 경쾌한 문체로 담고 있다. 여행을 기피하는 이런저런 이유들을 늘어놓던 작가가 결국 여행이 주는 장점과 이에 대한 본인의 애정을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책의 첫머리에서 쏟아냈던 여행 기피의 이유들이 괜히 머쓱해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글에서 보이는 작가의 밝고 순수한 색채가 결국 독자의 마음을 사르르 녹게 만들고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결국 해가 질 무렵, E씨와 역 앞에서 헤어지게 되었고 아쉬운 마음에 주소를 주고받았다. E씨와의 여섯 시간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얻은 빛을 오랫동안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보답을 바라지 않는 친절을 곱씹을수록 나도 E씨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p.284)


다정함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이 책은 정세랑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사실 같은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쏟아낸다는 건 꽤나 쑥스러운 일이지만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국에서 마치 독백을 하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광경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여행하며 마주했던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았던 순간들'을 빌미로 자신의 안쪽에 축적된 것들을 속 시원하게 풀어낸다.


'제주도를 사랑하면 제주도에 너무 자주 가서는 안 되듯이' 하와이를 사랑하게 된 작가는 '하와이로 은퇴하겠다는 농담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유'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면서 가는 곳마다 '자유'를 언급하는 어느 정치인처럼 어쩌면 우리는 "내가 내 돈 쓴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라는 뻔뻔한 태도로 우리가 사는 지구 곳곳을 여행하며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이곳을 제 것인 양 훼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세랑 작가처럼 마음 따뜻하고 무척이나 지구를 사랑하는 여행객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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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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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쓴 소설 제목은 유난히 사람의 이름이 많다는 것을.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비롯하여 <에이미와 이저벨>, <올리브 키터리지>, <버지스 형제>, <다시 올리브>, 최근에 출간된 <오, 윌리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많지 않은(?) 소설 작품 중에서 이름이 안 들어간 작품을 찾는 게 오히려 빠를 듯하다. 여기에는 소설가로서 작가의 집요함과 꾸준한 인내심이 이와 같은 멋진 작품들을 완성하는 데 한몫을 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한 인물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분석이야말로 소설가가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인물이 갖고 있는 개별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인류 전체가 지닌 보편적인 특성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물리학자가 각각의 현상을 통해 우주 전체를 통괄하는 보편적 원리를 발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한 작품이라도 읽어 본 독자라면 작가가 창조한 한 인물에 대한 세밀하고도 친절한 기술이 인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다는 걸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인물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같은 분량으로 끈기 있게 기술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와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인물의 부정적인 측면을 그렇게 깊이,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도 않으며 설사 그것을 발견하고 관찰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묘사나 서술을 서둘러 그만두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보고 관찰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 도티, 베브, 이저벨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어렸다. 무엇을 참을 수 있는지 혹은 참을 수 없는지 아직 몰랐고, 이 자리에 있는 세 엄마에게 아이처럼 말없이 매달려 있었다."  (p.508)


나는 사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통하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라는 훌륭한 작가를 남들보다 아주 늦게 알게 되었고, 이번에 읽은 <에이미와 이저벨>이 그녀의 여러 작품 중 내가 읽은 두 번째 작품이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은 삶의 고비에서 겪는 개개인의 순간순간을 친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소설을 번역했던 정연희 번역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을 번역하면서 나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 하나는 그런 순간들의 이면을, 그 순간들을 '건너가는' 사람들의 숨은 마음을 친밀하고 세심히 바라보는 일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라봄은 이해를 낳고, 이해는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리고 성장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사랑하게 만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그런 바라봄을 안내하는 데 탁월하다."  (p.543 '옮긴이의 말' 중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설계하고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도, 서로에게 원하거나 기대하는 바도, 상대방을 위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엄마와 딸 사이의 섬세하게 다루면서, 유난히 더웠던 셜리폴스의 여름 한 계절을 다루는 <에이미와 이저벨>. 수줍고 소심한 성격의 에이미 굿로는 올해 열여섯 살의 소녀이다. 점심시간에 몰래 담배를 같이 피우는 스테이시를 제외하면 친한 친구도 없다.  교사가 되길 원하는 엄마 에이절의 생각과는 다르게 에이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시(詩)이다. 지난겨울, 수학교사인 데이블 선생이 사고를 당한 후 학교에는 토머스 로버트슨 선생이 임시교사로 왔다. 시를 좋아하는 로버트슨 선생을 은근히 좋아하게 된 에이미는 방과 후 학교에 남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그저 행복하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버트슨이 자신의 차로 에이미를 집에 바래다주면서 에이미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찾아온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에이미는 이저벨이 일하는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자궁절제 수술을 받은 도티 브라운의 일을 대신하는 것인데 직장 상사인 에이버리 클라크의 제안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어느 날, 에이버리는 차 안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와 소녀를 보게 되는데... 에이버리는 자기가 목격한 것을 이저벨에게 전하고, 이저벨은 이에 충격을 받고 분노한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듯 이날을 기억할 것이다. 이저벨의 은밀하고 깊숙한 기억 속에는 이날이 그녀가 에이미를 '가진' 마지막 날처럼 느껴질 테니까. 그녀의 기억 속에 나뭇잎들은 항상 금빛이고, 고속도로에는 아침 햇살로 샤워하고 가을 날씨로 빳빳해진 금빛 나뭇잎들이 늘어서 있을 것이다."  (p.53)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그해 셜리폴스의 무더웠던 여름은 마치 에이미와 이저벨의 끝나지 않을 듯한 갈등처럼 길기만 했다. 세상을 등지고 셜리폴스로 숨어들었던 이저벨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 또래 친구들과 담을 쌓고 지내는 에이미. 세상에 오직 두 사람뿐인 줄 알았던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외부와의 관계를 넓혀간다. 작가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에이미와 이저벨의 성장 과정을 애정 어린 눈으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이저벨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오래전 타운에 옮겨와 22번 도로에서 가까운 크레인 씨의 낡은 주택을 빌린 뒤 많지 않은 살림살이를 풀고 젖먹이 딸아이(옅은 금발의 곱슬머리에 진지한 표정을 한 아기)와 함께 정착했을 때, 그녀는 회중교회 신자들 사이에 그리고 그녀가 일하게 된 공장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자들 사이에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젊은 이저벨 굿로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편도 부모도 모두 죽었고, 벌이가 더 나을까 해서 강을 따라 셜리폴스까지 내려왔다고 말할 뿐이었다."  (P.23)


유난히 길고 가물었던 올해 가을도 이제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다음 주면 다사다난했던 2022년도 딱 한 달을 남겨두게 된다. 먼 훗날 언젠가 2022년을 되돌아보면 가장 먼저 우리는 '10.29 참사'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푸르렀던 젊음이 어느 날 뚝 멈춰 서야만 했던 그날의 참사. 대중을 향해, 무능했던 정부를 향해 오열했던 유가족들. 삶은 그토록 쉽게 멈춰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하루하루를 지켜보려 한다. 대학생인 아들은 내년이면 군복을 입고 나타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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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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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할 시기가 되었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명예퇴직을 했거나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안다. 이제 다들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며 남은 삶을 살아갈지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친구는 많지 않은 듯 보인다. 많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함이 지금 내 나이대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인 듯하다. 일에 묻혀 살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과거에는 마음껏 여행을 하고 싶다거나, 골프나 등산 등 누리지 못했던 여가 생활을 원 없이 누려보고 싶다거나, 아무도 없는 산골에 터를 잡고서 유유자적 한가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등 하고 싶은 일도, 바라는 것도 참 많았지만 막상 내 나이가 되고 보니 원하던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눈앞에 펼쳐질 무한대의 시간을 도대체 뭘 하면서 채워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귀농을 했던 몇몇 친구들은 1년도 되지 않아 도시로 복귀를 했고, 허구한 날 골프를 치던 친구도 이제는 그마저도 지겨웠는지 집 밖 출입이 뜸해졌고, 장사를 시작했던 친구들도 수월찮은 돈만 까먹고 폐업 절차에 접어들었으니 어느 것 하나 마음 놓고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과 여가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 채 노후를 설계하겠다는 젊어서의 꿈은 한낱 꿈으로 그칠 공산이 커진 셈이다. 무작정 일만 쫓으면서 살았던 우리는 그 세월 동안 점차 노는 법을 까먹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노는 법을 까맣게 잊은 우리가 정작 노는 시간이 눈앞에 놓이자 허둥지둥 당황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이해하기로 여가란, 결코 물리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 (설사 그것이 결국엔 우리는 물론 타인에게 실질적 도움이 된다고 해도) 순전히 그 즐거움을 위해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단장하고,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을 두루 아우를 때 쓰는 단어다. 여가를 누릴 때에는 가치보다는 기교가 훨씬 중요하다. 현명하게 선택한 여가는 아무리 짧은 삶에도 깊이를 준다."  (p.29 '들어가는 말' 중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학가 로버트 디세이가 쓴 <게으름 예찬>은 게으름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시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법을 배움으로써 한가로이 삶을 즐기는 과정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삶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쁘다는 것은 결국 일에 매몰되어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타인과의 관계와 삶의 의미, 왜 사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도하지 못한다.


"노는 것은 당신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키케로와 세네카는 그것으로 열변을 토했고, 중국부터 유럽의 가장 끄트머리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그 통찰을 이야기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기간 동안 특정의 규칙을 관찰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쓸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노는 것에 그 이상의 목표는 없다. 몇백 년 동안 지배계급이 성직자들과 군대와 함께, 노동은 신성하다고 주장해왔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p.274)


저자는 '일해야 할 의무가 대체 무엇이 "성스럽다"는 말이냐'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고전문학 작품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요시다 겐코의 『쓰레즈레구사』, 시트콤 <핍 쇼>와 다큐멘터리 <스시 장인: 지로의 꿈> 그리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불러온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휴식'이 무엇인지 희미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세계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거의 모든 사람이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신체에 무리 없이 창의적으로 일하고, 휴가는 길어서 매년 수백, 심지어 수천 시간을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마음껏 놀며, 근사하게 비옥한 여가를 마음껏 즐기는 세계 말이다."  (p.282)


멀리 중동의 사막에서는 월드컵 열기가 뜨겁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월드컵 참가국의 국민들은 자국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하며 밤잠을 잊은 채 텔레비전 중계를 시청한다. 또는 그 각본 없는 드라마에 울고 웃고 탄식하며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놀이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 이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렇게 지인들과 웃고 떠들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 찾아오는 나른한 피로감에 까무룩 잠이 드는 것, 내일 아침 만나는 사람들과 어제 있었던 일을 주고받으며 하루의 일과를 무리 없이 해치우는 것. 우리의 삶이 죽음 직전까지 그렇게 활기찬 하루하루로 채워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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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배수아의 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것은 한 권의 소설입니다!'라고 큰소리로 선포해야 할지도 모른다. 소설이라는 단어에 굵게 밑줄을 긋거나 소리를 높여 강조할 필요도 있을 테고 말이다. 스토리도 목차도 없는 소설이 그 자체로서 소설의 절대성이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을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것은 '배수아'라는 소설가에 대한 의구심인 동시에 의식의 흐름에 대한 자유분방한 기술 또는 가늠하기 힘든 생각의 방향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면밀한 탐구쯤으로 정의하기로 하자. 일단은.


"정신적 빈곤과 경박함은 곧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M의 생각이었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실제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에 앞서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우리 삶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점유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말한다면,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p.69)


소설의 화자인 '나'는 독일에 체류하던 한때 M을 사랑했고, 그와 헤어진 후 다시 찾은 독일에서 요하임이라는 친구의 집을 방문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한다. 성탄절 전날에 요하임의 어머니 집을 방문하거나 연말에 대학생들이 모이는 파티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상은 소설의 어떤 사건이나 결말을 구성하기 위한 전제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스쳐갈 뿐이다. 다만 그와 같은 일상의 소일거리 속에서 문득문득 M에 대한 기억들이 개입한다. M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조금씩 확장되다가 글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작가는 M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의 줄기로 삼아 음악이나 언어 또는 죽음과 같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풀어놓고야 만다. 결국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다루는 듯하던 이야기는 일상 속으로 용해되고 M과 '나' 혹은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예술적 주제들에 대한 견해나 관점이 글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p.144)


배수아의 소설에 빠져드는 이유는 단 하나, 의식과 의식 저편의 경계에서 소설이 펼쳐지고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냉랭한 현실의 감각을 쉽게 잊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책을 읽는 아주 잠깐의 시간만큼은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어느 작품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우리는 그런 느낌을 공유할 수 있지만 배수아는 이보다 한 발 더 깊이 들여놓아도 괜찮다고 독자들을 유혹한다. 그것은 때로 마약과 같은 중독성을 동반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접했던 독자라면 그녀의 작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결별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케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p.174)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는 달콤하다. 그러나 단맛은 언제나 순간적인 감각일 뿐 영원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소설에서도 언급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음악은 언어가 탐구하지 못한 인간 신체의 다름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의 서툰 연주가 가을의 햇살 속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은 언어로만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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